어비스워커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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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고된 1차 분량의 물품의 품질검사를 끝냈다는 연락을 클리오네의 한 대리에게서 받았다.
 


그리고 2차의 세부내역에 대해서 논의하기 위해 오후 3시에 클리오네 측에서 한 사람이 사무실로 방문할 예정이라고 했다.

사실 나는 혹시 주형이 형이 오는 것은 아닌가 하고 내심 기대를 했었다.

머리로는 그는 나와의 인연이 아니라고 되뇌고 있으면서도 자꾸 마음이 설레기 시작하면서 기다려지는 것은 어쩔수 없었다.

 
 

그의 사무실에서 변경된 계약서를 확약받느라 그를 보게 된 그 이후로, 그를 만날 기회는 좀처럼 생기지 않았다.
 

일과 관련되어서 가끔은 그를 만나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했지만 그마저도 중간 담당자인 한 대리와 업무협조를 하게 되면서 나의 그런 예상은 틀어져 버렸다.

거래처의 평사원이 과장과 어떤 일로 직접 만난다는 것은 터무니 없는 일인 듯 싶었다.

 

뻔히 잘 알고 있는 내용을 잘 모르겠다고 핑계를 대면서 전화를 해 볼까 하는 얄팍한 생각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지만 ‘그렇게 노력하고도 그런것도 아직....’ 이라는 나에 대한 실망감을 그에게 주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에 그런 식으로 연락을 할 수도 없었다.

 

생산업체에서 일을 보고 부지런히 사무실로 늦지 않게 돌아왔지만, 이미 그녀는 창가에 있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나를 보고 그녀는 밝은 얼굴로 환하게 웃으면서 일어섰다.

그런 그녀의 영향 때문인지 사무실의 분위기가 평상시와 상당히 달라 보였다.
마치 그녀의 그런 에너지가 사무실의 구석구석까지 닿아 밝아지고 가벼워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를 보는 김과장의 표정도 어정쩡한 태도로 웃음을 짓고 있었고,  사무실에 남아있던 영업 3팀의 직원들 조차도 나를 보는 표정이 달라보였다. 

나와 시선이 마주친 정지영씨는 붉게 상기된 얼굴로 나를 보고 웃어보였다.


외근하느라 비어있는 윤대리의 자리를 흘끗 보고 나는 한 대리와 함께 5층에 있는 상품관리과의 회의실로 향했다.

 
 

그녀와 자리에 마주앉아 서류철을 편 후에야 그녀에게 커피라도 대접해야 한다는 것이 떠올랐다.

“저 커피라도.....”

자리에서 일어나는 나를 보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카라멜 마끼아또로요.”

멍해진 나의 표정을 보고 그녀가 웃었다.

“농담이예요. 커피 필요없어요.”

 

그때 회의실 문에서 낮은 노크소리가 들리더니 상품관리과 남자 직원이 커피 두잔을 가지고 들어왔다.

“저희 과장님이 쏘시는 거예요.”

그가 테이블 위에 커피를 내려놓았다.

“덕분에 저희들도 모두 맛있는 커피한잔씩 하고 있습니다.”

빙긋 웃어보이고는 그는 밖으로 나갔다.

 

“내가 커피 마실 복은 좀 있나봐요,. 사양을 해도 이렇게 가져다가 주시니...” 커피잔을 들고 그녀가 웃었다.

 

 

“제가 두 번째 계약서를 검토하다가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어서요.”

다시 사무적인 표정으로 그녀가 나를 보고 서류가 담긴 폴더를 열었다.

“여기 이 부분의 조건은 왜 첫 번째 계약서와 두 번째 것이 다르죠?” 그녀가 서류의 한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그건.....” 그녀가 모를 리가 없었다. 내가 알고 있는지를 확인 하는 것 뿐이었다.

입사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실질적인 업무에 관련하여 내가 여러면에서 여전히 부족한 신입사원인 것을 뻔히 알고 있었다.

“환율 때문에 그 부류의 아이템들은 그 가격으로 정해 놓은 기간이 3개월.....정확히 90일마다 변동이 있을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상황을 보면 꾸준히 적정선을 유지하고 있긴 하지만 국내나 혹은 국제적인 큰 사건이 갑자기 터지게 되면 급변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계약의 만료일이 7월 5일인데 두 번째는, 12월 초순으로 잡혀 있으니 두 번째 계약이 아직 초고이긴 하지만 변동 사항이 될수 있으므로 그렇게 표기해 놓았습니다.”

“아....” 그녀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여기 이 부분하고 이곳은....” 그녀가 들고 있던 펜으로 두 군데를 가리켰다.

“아주 큰 차이는 아니지만 왜 이렇게 다른 건가요?”

“그것은...” 그녀의 표정을 살피면서 내가 조용하게 입을 열었다.

“롯트번호 K-411은 일관운송 환적화물이라서 그렇습니다.”

그녀는 가만히 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최초 입항지 세관장에게 하우스 비엘을 신고하면서 저희에게 연락이 오면 재입력을 해 놓겠지만 그렇지 않은 이 부분은 이미 국내의 다른 거래업체에서 물량을 확보해 놓았습니다.”

“그 거래업체가?” 그녀가 물었다.

“라블랑쉬 라고 지난주에 확보된 물량의 품질을 확인하고 담당자와 계약서로 컨펌해 놓았습니다.”

“품질은 누가 확인을....”

“제가 품질관리사와 함께 가서 했습니다.”

“근데 첨부서류 중에서 이 써티는 뭔가요?”

“이스라엘에 그 선박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보증서입니다.”

“왜요?”

“거래처가 중동에 있어서요.”

 

“그럼....”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것 모두를 프로그램화 할 경우 시간이 꽤 걸릴텐데요.”

“이미 정보시스템실에서 테스트를 몇 번 거쳐서 에러를 확인해 놓았습니다. 발생할 수 있는 경우를 집어넣고 확인을 해 보았는데...”

내 앞에 놓여있는 파일을 열고 리스트를 꺼내어 그녀에게 건넸다.

“오늘 아침에 정보시스템실에서 ‘에러없음’ 이라는 컨펌이 내려왔습니다.  쓰시면서 문제는 없을 겁니다. 화면의 배치나 글자 크기는 원하시는 대로 변경해 놓겠습니다. 프로그램은 회사 내부 결재가 나는 대로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그녀가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회의실을 들어오기 전보다 훨씬 표정이 부드러워지며 만족스러운 웃음이 얼굴에 번졌다.

“내가 과장님에게 여기하고는 절대 거래 안하겠다고 보고를 드렸었어요. 처음에 저 만났을 때 기억하시죠?”

“예.”

“처음엔 과장님도 그러라고 하셨어요. 다른데로 오더를 넣도록 하자고요.”

“......”

“그러시더니 갑자기 마음이 바뀌셔서 다시 한번만 해보시자는 거예요.”

“......”

“대쪽같은 과장님이 왜 절대로 가능해 보이지 않는 이번 일을 이렇게 하실까 하고 의아해 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했는데....”

그녀가 말을 멈추고 커피잔을 들고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어느 날 출근하시고 저를 부르시더니  가능할 것 같다고 얼굴에 자신감을 보이시더라구요. 그냥 윤대리를 빼고 해보자구요.”

“.......”

“과장님 말씀을 듣고 도대체 그 말씀을 어떻게 소화해야 하나 하면서 걱정이 많았어요.  윤대리를 제외하면 여기 김과장님하고 이승우씬데,  김과장님은 우리와의 거래 내역을 자세히는 알지 못하셨고 이 승우씨는 아직 실무경험이 없는 신입사원인데......  물론  최종적인 책임이야 과장님이 지시겠지만, 저도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수는 없을 테니까요.”

나는 고개를 슬며시 끄덕거리고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담당자명이 이 승우씨 이름으로 입고된 1차 물품을 받았다는 상품관리과 연락을 받고 직접 내려가서 확인을 하고 난 후에야  왜 과장님이 그러셨는지 깨닫게 되었어요.”

“.......”

“역시 사람보는 눈은 과장님을 따라갈 수 없어요.  그때에서야 이 승우씨를 다시 보게 되었네요.”

그렇게 말하고 그녀가 환하게 웃어보였다.

“감사합니다.”

그녀의 말에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아녜요. 내가 고마워요.”

편해진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는 나를 보고 그녀가 밝은 표정으로 웃었다.

 

 

“미팅은 잘 됐어?”

회의실에서 나오는 나를 보고 오과장이 물었다.

“예. 아주 잘됐습니다. 커피 감사합니다.”

기쁨에 겨워 허리를 굽히고 인사를 하는 나를 보고는 오과장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크게 한 건 멋지게 해 봐.”

 

 

 

위에서 내려오고 있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서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린 후,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그 안에 타고 있던 윤대리와 눈이 마주쳤다.

 

나를 보고 슬며시 비웃음을 짓던 그가 내 옆에 있던 한 대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일은 잘 돼요?” 4층에서 내리면서 그가 한 대리에게 히죽거리면서 말을 건넸다.

“예. 우리 회사 인사과에 이승우씨 스카웃 좀 해달라는 제안서를 올릴까 하고 생각중입니다.”

그렇게 말을 하고는 한 대리는 엘리베이터의 닫힘 버튼을 눌렀다.

일그러진 윤대리의 표정을 가운데에 두고 양쪽에서 문이 밀고 들어와 그의 얼굴을 마침내 가려 버렸다.

 

 

“이승우씨.”

그녀가 자신의 차에 올라 출발하기 전에 창문을 내리고 나를 내다보았다.

“예?”

“이승우씨 술 좀 하나요?”

“......”

“시간 되면 오늘 퇴근하고 한 잔 어때요?”

“아........”

“무슨 다른 약속 있으면 다음에 하고요.”

“아뇨. 다른 약속이 있는 것은 아닌데.....”

“왜요?” 다음 말을 꺼내지 못하는 나를 보고 그녀가 물었다.

“혹시 내가 여자라서요?”

“둘이서 마시면 사람들 눈에.....”나의 말에 그녀가 피식하고 웃었다.

“왜요. 한참 젊은 남자가 유부녀와 바람났다 소문날까봐서요?”

“......”

“회사 일도 애기 좀 하고요. 같이 윗 분들 좀 안주 삼아서 잘근잘근 씹어도 보고요.”

그녀가 말을 멈추고 피식 웃었다.

“너무 기분이 좋아서 그래요. 예상 밖에 로또 맞은 기분이 들어서요.”

“.....”

“제가 크게 쏠게요. 내가 술이 좀 쎄니, 나보다 먼저 쓰러질 생각 말고 단단히 맘 먹고 나와요.”

다시한번 그녀가 호탕하게 웃어보이고는 핸들을 잡고 나의 앞으로 사라져갔다.

 

 

 

 

 

술에 취해서 걷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형의 집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 와 있었다.

 

“도대체 지금 내가 왜 여기에....”

멍 해진 표정으로 헛웃음을 지으며 그 계단을 올려다 보면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몸을 돌리고 돌아가려는 나의 의지와는 반대로 나의 다리는 나의 말을 듣지 않고 슬그머니 힘이 들어가면서 그 계단을 하나씩 하나씩 밟고 오르기 시작했다.

 

이 곳을 예전에 취한 나를 형이 힘들게 들쳐 업고 올랐을 것이다.

‘그랬던 기억이라도 날 것이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등에 업힌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그의 등의 냄새를 맡으면서 그의 목을 팔로 휘감고 나의 허벅지에 그의 손바닥을 느낀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그렇게 망상에 잠겨, 아쉬운 감정을 느끼면서 밤공기 사이로 은은하게 번지는 꽃내음을 맡아 보았다.

 

계단을 올라 그의 집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가슴속에서 두근거리며 고동이 치기 시작했다.
 

어두운 그의 방의 창문은 그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슬며시 걸음을 옮겨 문에 있는 초인종을 들여다 보았다.

그와 나의 거리는 이제 나도 모르게 올리고 있는 내 손가락의 끝과 초인종 사이의 거리이다.

5센치, 3센치. 그리고....

손가락 끝에 플라스틱의 느낌이 왔다.

하지만 난 힘을 주지 못하고 다시 손가락 끝을 떼었다.

 

그의 책상에서 본 흐릿한 글씨가  눈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다시 내 눈과 그 글씨 사이에 우영이의 표정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친구로 날 만날 생각은 하지 마.’ 내 앞을 스쳐 지나간 그의 표정은 오싹할 정도로 차갑고 또한 쓸쓸했다.

‘그런 친구와 삶을 공유하고 싶니?’ 주형이 형의 목소리가 귓전에 울렸다.

“형.”

술에 취한 낮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친구라는 게. 동전 넣고 버튼 누르면 나오는 거야?”

“삭막한 서울에서 내가 어떻게 형이 말하는 친구를 찾아 내?”

신선한 밤 바람이 내 이마를 스쳐 지나갔다.

“우영이 마저 등을 돌리면 나는 누구와 소주를 마시지?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누구와 살아가는 얘기를 하고 웃음을 나누며 시간을 보내지?“

 

“그래도....”

꽉 막힌 가슴을 뚫고 한숨이 빠져 나왔다.

“그래도, 형 목소리가 듣고 싶다.”

“가끔씩 일 핑계라도 대면서 형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

늦은 밤과 나를 취하게 만든 술이 만나서 나를 더 감정적으로 만들어 버렸다.

손을 들어 눈에 고인 눈물을 문질렀다.

"그런데...“

“형이 보고 싶을 땐 어떻게 하지?”

“난 어떻게 할까?”

“형이 너무 보고 싶은데 어쩌지?”

종로에 있는 타인들을 주책 맞게 만든 술이, 오늘 밤은 나에게 달라 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그의 창문을 멍하니 바라보던 시선을 나는 천천히 거두고 이제 몸을 돌려 세웠다.

 

“형!”

나의 시야에 나를 빤히 바라보고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들어왔다.

“형. 언제부터....”대답없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나에게 한 발 다가와 슬며시 나를 품에 안았다.

“형, 혹시... 내가 하는 말을....”

“......”

“설마 내 말을....”

“무슨 말?”

그가 나의 귀에 대고 물었다. 나의 말을 듣지는 못한 듯 했다.

“나 없으면 안되겠다는 말?”

한줌의 바람이 불어와 내 귓가에 퍼지는 그의 목소리를 흩뜨렸다.

 

 

그리고 그의 숨소리를 듣고 그의 가슴에 뛰는 심장을 느끼면서 나는 그에게 그렇게 기대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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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훈훈해지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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