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비스워커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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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안하고 뭐하냐?”
윤대리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절전모드로 변해버린 모니터를 나는 멍한 상태로 바라보고 있었다.
굳은 표정으로 올려다보는 나를 보고 윤대리가 히죽거렸다.
“그렇게 멍청하니 이용이나 당하지....”
그가 다시 한번 나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리고 사무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무슨말인지 궁금하기라도 하련만 고통의 나락에 떨어져 있는 나는 그의 그런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마도 나의 뇌가 꺼져버린 컴퓨터 마냥 더 이상 어떠한 작동도 멈추어 버린 듯 했다.
윤대리가 나가버린 후 닫혀진 사무실 문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다시 시선을 나와 비슷한 증상을 보이고 있는 모니터로 향했다.
그렇게 한참을 넋을 놓고 앉아 있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창문가로 걸음을 옮겼다.
오후의 햇살이 창문을 통해서 들어와 나의 눈을 부시게 했다.
이제 여름의 끝자락도 벗어났다는 것을, 가을이 오고 있다는 것을, 창밖의 나무에 매달려있는 노란색으로 변하고 있는 나뭇잎들이 알려주고 있었다.
이렇게 마음속에서 끓어넘치는 내 자신을 향한 분노와 힘들게 얻었다는 사랑을 잃은 고통도 시간이 지나면 저렇게 변해 갈 것이다.
그리고 앙상한 가지만 남기고 서 있는 헐벗은 나무처럼 그렇게 무감각하게 살아갈 것이다.
그렇게 이미 모든일이 끝나 버렸다.
지금 나의 몸을 내리쬐고 있는 저 해가 지면 어두운 밤이 오겠지.
그리고 가을빛이 사라지고 나면 추운 겨울이 올 것이다.
그래도 어떻게든 견뎌내겠지.
또 다른 아침이 올 때까지 어두운 밤을 견뎌내는 것처럼, 차가운 겨울의 눈 속에서 죽은 듯 숨죽이고 있던 나무처럼, 버티다 보면 다시 따뜻한 봄기운이 찾아오겠지.
내가 그와 헤어진 이유가 뭐였을까?
우영이와의 우정을 지키기 위해서 선택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내가 그를 포기함으로서 우영이로부터 그를 지켜낸것이었을까?
우영이와 나 사이에 우정이란 것이 존재하기는 했던 것일까? 나를 노려보던 녀석의 차가운 눈빛이 눈앞에 떠 올랐다.
녀석과 내가 같이 보낸 그 수년간의 시간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내가 이렇게 그에게서 떨어져나감으로서 그는 이제 우영이의 손아귀에서 안전하게 벗어난 것일까?
아니면 다른 녀석들이 말한 것처럼 우영이와 더욱 더 끈끈해진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의 연인으로 그의 미래의 성공을 꿈꿀수 있게 된 것일까?
책상위에 놓여져 있던 휴대폰이 울렸다.
발을 옮겨서 액정창에 떠 있는 이름을 확인하고 깊은 숨을 한번 내 쉰다음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오늘 퇴근하고 시간 좀 되냐?” 울린 휴대폰 속의 주인공인 우영이가 물었다.
“별다른 일은 없다.” 공허만이 가득찬 가슴속에서 아픔이 밀려 올라와 낮은 한숨을 쉬었다.
“그럼, 명동쪽에 일이 있어서 가는 김에 같이 술이나 한잔 하자.”
“그래.”
둘이서 네병 째의 소주병의 뚜껑을 딴 후 우영이가 나의 잔을 채웠다.
냉정한 표정의 그 녀석도, 좀비처럼 멍하게 앉아있던 나도 서로 말이 없었다.
이제 그 녀석의 얼굴표정도 술에 상당히 취해 눈빛이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왠일인지 술을 마실수록 점점 더 정신이 말짱해지고 있었다.
화장실을 다녀 오려고 몸을 일으켰을 때에도 만취한 나의 몸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렸지만 정신만은 또렷했다.
그리고 나는 그가 오늘 나를 만난 이유를 말하기를 가만히 기다렸다.
아니,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듣는 것이 두려웠다.
혹시라도 나와 헤어진 후, 녀석이 그와 어떻게 잘 해 보게 되었다는 그 말이 녀석의 입에서 나온다면 나는 그것을 또 어떻게 버텨낼 수 있을까.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이 좌절감과 분노가 바로 얼마전에 녀석이 나에게 느꼈던 그런 감정이었을까?
녀석이 느끼는 나의 시선과 표정이 예전에 내가 그로부터 느꼈던 바로 그런 모습일까?
“야!”
갑작스러운 녀석의 말에 고개를 들어 녀석을 빤히 바라보았다.
“내가 모를 줄 알았냐?” 밑도 끝도 없이 녀석이 냉정한 표정으로 나를 보면서 물었다.
“뭐를?”
“니가 전에부터 그 형하고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는 거 말야.”
“........”
역시 녀석은 어떻게든 알고 있었다. 내가 형과 사귀고 있었다는 것을....
숨이 막혀왔다.
그런 나를 주시하고 있는 그의 얼굴에는 비웃음이 번졌다.
“나,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
“그 형이 너 처음 만났을 때부터 너를 신경쓰는 거 뻔히 보이는데 내가 바보냐?”
“......”
“예전에, 형 만나면서 너 한테 연락 안한 적 있었지? 형에게는 ‘너 몸이 안 좋다’고 말하고...”
“.......”
“그때 형이 일이 있어서 나오기 힘들거라고 하는 걸, 너도 나올거라고 슬쩍 말했더니 형이 만사 제쳐놓고 나왔던거야.”
“.......”
“약속장소에 와서 너를 찾는 그 형에게 너가 몸이 안좋아서 못나온다고 했다고 말했을 때, 그 형 얼굴의 표정을 보고 백퍼센트 확신했다.”
“그때부터 형을 불러내려면 너 이용했다. 너 나오면 형도 나오니까. 내 눈치 보면서 형하고 거리 두려고 하는 널 보면서 얼마나 우스웠는지 아냐?”
그의 비웃음에는 잔인함이 숨겨져 있었다.
그렇게 나를 빤히 보던 그 녀석이 술잔을 들어 한번에 들이키고는 내려놓았다.
“그래도 다....”
나도 내 술잔을 들고 한입에 털어넣고 잔을 내려놓았다.
“지난 일이야. 나는 너가 형하고 만나서...”
“야!” 나의 말을 가로막으며 녀석이 나를 보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 이우영이야!” 그가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한번 쳤다.
“누가 누굴 만나?”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하고 녀석이 나를 비웃듯이 바라보았다.
“주제파악도 못하고.... 내가 잘 해주니까 이 자식이 날 지랑 동급인줄 아나보네.”
“늬 앞일이나 걱정해.” 녀석이 나를 노려보았다.
우영의 말에 당황한 표정으로 녀석을 빤히 바라보았다.
녀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디 주형이형이 너를 어디까지 커버 쳐 줄수 있는지 한번 보자.”
“.......”
가방을 어깨에 메고 몸을 돌린 녀석이 다시 고개를 돌려 나를 노려보았다.
“이건 확실하게 해 두자. 주형이형의 미래를 망친건 너야. 너만 끼어들지 않았어도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을테고 아무 문제 없었어.”
차가운 눈빛으로 녀석은 잠시 나를 빤히 노려보았다..
그리고 몸을 돌리고 뒤를 돌아보지 않고 그 녀석은 술집의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우영이를 만난 후 며칠이 지났지만 절친이라고 생각했던 그 녀석의 돌변한 모습에 여전히 후유증이 남아서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폭우속에서 비를 흠뻑 맞으면서 계단 위를 바라보던 녀석의 뒷 모습에, 그런 친구의 진실한 모습에.... 녀석의 삶이 주형이형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런 녀석의 진심과 형의 현실에 마치 내가 방해물이 된 듯한 느낌을 지울수가 없었다.
그것이 바로 내가 형에게 결별을 선언한 이유였다.
내가 믿고 있던 우정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아니 녀석과 나의 사이에 처음부터 우정이란 것이 존재하기는 했던 것일까?
모든 것이 다른, 공통점이란 전혀 없던, 그 녀석과 내가 그저 적당하게 거리감을 무마시켜줄 술의 힘을 빌어서 또한 적당하게 성적인 농담을 해가면서 마치 친구인 척 그렇게 지내왔던 것일까?
녀석의 인생에서는 나는 그저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던 것일까?
그렇게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을 부정하면서 그렇게 나의 절친과 사랑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나는 그 모든 것이 나의 멍청함에서 비롯 되었다는 것에 견딜 수 없이 괴로웠다.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나의 머릿속은 이미 어지러운 아수라장이 되어있었다.
아침이 되어 눈을 뜨는 순간부터 빨리 하루가 지나고 밤이 되길 바라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그런 상태로 아침이 오지 않기를 바라기 시작했다.
거래가 완료되고 클리오네사에서 미팅을 갖게 된 날은 본격적으로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던 11월 초였다.
날씨도 쌀쌀했고 지하철에서 내려 길을 걷고 있는 나의 앞쪽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마파람도 반기지 않는 듯 나를 뒤로 밀어냈다.
형식적인 미팅이 끝난 후, 한대리로부터 서류를 건네 받기 위해서 회의실의 창가에 앉아 창 밖에서 찬 바람에 휘날리고 있는 낙엽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무에서 생겨나서 그렇게 힘차게 매달려 있었는데도, 마지막엔 떨어져 버릴 수밖에 없는 것은 인간의 모든 관계도 마찬가지인 듯 싶었다.
나도 몰래 낮은 한숨이 쉬어졌다.
웃으면서 다시 회의실로 들어온 한대리는 내 앞에 서류봉투와 함께 처음보는 명함 하나를 내밀었다.
의아해 하는 나를 바라보면서 그녀가 씽끗 웃었다.
“그 팀장님 하고 연락해 보세요. 이미 연락이 갈 거라고 말은 해 놓았어요.”
“.....”
“그 프루스트라는 회사도 꽤 견실한 기업이예요. 같이 일할 수 있는 믿을만한 거래업체를 소개해 달라시는데 갑자기 이승우씨가 생각이 나서요.”
그렇게 말하고는 그녀가 자신의 폴더에서 프루스트라는 업체명이 찍혀있는 리스트를 뽑아내어 나에게 내밀었다.
“아무한테나 이런 대어급 거래 안 넘겨요.”
그녀가 다시한번 웃어보였다.
“근데, 왜 저희에게....”
“왜요? 자신없어요?” 그녀가 얼굴에 웃음을 띠고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닙니다. 그냥, 클리오네에서 일을 진행하지 않고...”
“저희랑 취급하는 라인이 좀 많이 달라서요. 그렇지 않아도 연말이 다가와서 지금 일도 감당 못하는데, 우리가 직접 할 수 있는 일도 아닌 일을 가지고 뭉개면 안되죠.”
클리오네의 일이 종료되면서, 나는 다시 어떤 일을 할 수있을까 하고 속으로 걱정을 하고 있던 터였다.
다시 윤대리의 지시대로 그가 원하는 방식으로 어떤일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 불편해서 가슴이 답답해 있던 차였다.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에게 고개를 굽혀 인사를 했다.
마치 이 새로운 일이 내가 윤대리에게서 독립적으로 조금 더 버틸 수 있는 기간을 연장시키는 산소호흡기를 달게 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우선은 김과장에게 보고를 해야 하는 일이고, 김과장이 나에게 그 일을 맡아서 해 보도록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에게 보고를 받고 난 후, 거래 제안서를 훑어보던 김과장이 윤대리를 먼저 불렀다.
“야, 이거 네가 한번 추진해 볼래?”
그의 말에 윤대리가 몸을 돌려 과장을 한번 돌아보았다.
“아, 과장님 그 자식이 가져온 일을 왜 제가 합니까?” 똥 *은 얼굴로 불쾌하다는 표정을 짓고는 나를 무시하고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버렸다.
“음...”
그는 다시한번 제안서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럼....”
역시 그가 보기에도 그냥 버리기에는 아까운 거래였다.
“이승우씨가 이것도 좀 맡아서 해봐.”
그에게서 서류를 받고 나서 마치 미끄러운 절벽에서 칡뿌리라도 손에 잡은 듯한 기분으로 내 자리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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