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비스워커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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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영받지 못하는 자리에서 버티고 있다는 것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힘든 일이었다.
태연하게 예전의 평상시처럼 행동하려고 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맡은 일을 끝내겠다고 다짐을 했다. 하지만 그런 큰 일이 발생한 후, 그 전의 사무실의 분위기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침에 출근해서 자리에 앉는 순간부터 내 뒤통수에 험악하고 싸늘한 윤대리의 눈빛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단지 그것일 뿐, 윤대리는 나를 어떤 말로 자극을 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약점을 내가 쥐고 있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으므로 우리는 서로를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무시하기 시작했다.
계약서상의 1차 분할 제품이 프루스트에 입고가 완료되는 날 이었다.
이미 클리오네의 박주형과장과 나와의 소문을 그도 어떻게든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내가 처음 그를 만났을 때 느꼈던 바로 그런 첫 인상과 똑같이 과묵하고 차분한 표정으로 나를 맞았다.
확인이 끝난 후,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그가 그렇게 슬며시 입을 열었다.
“업종이 다르다 보니 직접 거래를 해 본 것은 아니지만 클리오네 박과장 성품을 예전부터 들어와서 대충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어요.”
여전히 차분한 얼굴로 그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터무니 없는 것이긴 하지만 내부고발자가 꽤나 힘이 있는 모양이예요. 박과장이 코너에 몰린 것을 보니...”
이미 알고 있는 일이지만 타인의 입에서 그렇게 나오는 말에 다시한번 가슴이 내려앉았다.
“여튼, 뭐 우리는 계약한 대로 차질없이 일만 추진하면 되는 것이니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됩니다.”
“예...” 얼떨결에 고개를 숙여 그런 그에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조용히 그의 사무실을 나왔다.
프루스트 본사의 정문을 나서면서 한 숨을 내쉬었다.
차가운 겨울 바람이 불어와 나의 넥타이를 등 뒤로 날려보냈다. 싸늘한 한기가 온 몸에 돌았다.
걸음을 옮기면서 나 때문에 곤경에 처하게 된 형은 지금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내가 너무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그가 어떤 상황인지 몰라 전화마저 할 수 없다는 것이 더욱 답답했다.
오후 내내 망설이다가 퇴근후에 집으로 돌아가던 발을 멈췄다.
이렇게 시간만 보내는 것은 절대 올바른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마침내 단단히 마음을 먹고 나는 발을 돌렸다.
그의 집앞에 있는 작은 화단에서 그의 집을 올려다보면서 다시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가 나를 반기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최소한 그가 어떤 상황에 있는지, 혹시 어떻게든 내가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은 없는지 알아야 했다.
그리고 그것이 최소한의 내가 행해야 하는 인간의 도리였다.
문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초인종을 누르는 동시에 거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유치원생이나 기껏해야 초등학교 1학년 정도의 아이가 머리를 내밀고 나를 올려다 보았다.
“누구세요?”
“혹시 여기 박주형이라고....”
“아... 전에 여기서 살던 그 분.....” 꼬마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온, 아이의 엄마로 보이는 젊은 여성이 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얼마전에 이사갔어요. 일주일 전에 우리가 이 집으로 이사왔구요.”
아이의 손을 잡고 싱그러운 미소를 띠면서 그녀가 나에게서 아이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예...”
그런 그녀에게서 어정쩡하게 몸을 돌렸다.
나의 소심함 때문에 우물쭈물하면서 시간만 낭비하는 바람에 이렇게 그를 만날 수 있는 기회조차 날려버리고 말았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
내 자신을 향한 분노가 속에서 끓어올랐다.
그리고 그런 모자란 나를 마치 빨리 돌아가 버리라는 듯, 멍하게 계단을 내려가는 나의 뒤에서 세찬 바람이 불어와 나의 등을 떠밀었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더욱 강한 겨울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처음엔 희끗희끗하게 첫눈이 내리는 듯 했지만 곧 사라지고 그저 태풍같은 강풍만 몰아치기 시작했다.
침대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밖에서는 강풍에 무엇인가 쓰러진 듯 우당탕거리며, 혹은 깨어진 듯 쨍그랑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무엇인가 바람에 날려 벽에 부딪친 듯 둔탁한 소리도, 마치 담이 무너지는 듯한 ‘쿵’하는 소리 까지 들려왔다.
마치 밖에서 불고 있는 그런 요란한 돌풍은 나의 내면의 상태를 비추는 듯 했다.
진작에 그를 찾아갔어야 했다.
그리고 나로 인해 벌어진 일에 대하여 그가 짊어져야 할 책임의 몫을 나누겠다고 말했어야 했다.
그는 지금 내가 그에게 등을 돌렸을 것이라고 믿고 있을것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베풀어주었건만...’ 이라면서 나에대한 자신의 헛된 믿음을 탓하며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바로 지금 저 밖과 같은 그런 폭풍속에 그를 밀어 넣고 문을 닫고 내 자신만 안전한 채 그에게 등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어두운 천장을 올려다보면서 한숨이 끊임없이 입 밖으로 터져나왔다.
그리고 마침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나는 무거운 몸을 힘들게 일으켜서 무릎을 세우고는 무릎사이에 얼굴을 끼우고 양팔로 다리를 감싸 안았다.
나로 인하여 그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는 내 자신이 너무 비겁하고 역겨웠다.
그리고 그렇게 한없이 무기력하게 꼼짝 못하고 밤을 새웠다.
그렇게 아침이 되었다.
그래도 출근은 하겠다고 집을 나섰다.
대문 밖은 마치 전쟁을 치른 것처럼 처참했다.
쓰레기를 담아서 묶인채로 담에 기대어져 있던 비닐이 찢겨져 나가 길바닥은 쓰레기 천지였고, 그 전부터 불안하게 보였던 옆집의 담이 무너져서 부서진 빨간 벽돌들이 굴러다녔다.
어디서 날아온 것인지 찢어진 낡은 플라스틱통이 땅에 박혀있었고, 옷가지와 신문지가 전봇대의 줄에 매달려있었다.
큰 도로로 나오니 상황은 더욱 심하게 보였다.
뿌리까지 뽑힌 가로수가 도로에 쓰려져 있었고 사거리의 신호등은 빛을 잃은 채 덩그러니 매달려 있었다. 도로위에 쓰레기더미가 위험천만하게 쏟아져 있는 것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고 지나가는 차량들이 그것들을 피해 엉금엉금 기고 있었다.
미화원과 동사무서에서 나온 사람들이 그런 쓰레기들을 치우고 있었지만 역부족처럼 보였다.
언제 올지 모르는 버스를 기다리는 것 보다 지하철이 나을 듯해서 발길을 돌렸다.
그러면서도 지하철은 정상적으로 운행이 되는지 확인해보려고 휴대폰을 손에 들고 뉴스를 찾았다.
17년만에 가장 위력적인 겨울 태풍이 찾아와 그렇게 쑥대밭을 만들어 놓고 지나갔다고 했다.
버스운행의 차질로 지하철로 모여든 출근길의 인파로 인해서 지하철의 운행마저 원활하지 못하다고 기자는 그렇게 호들갑을 떨었다.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는 나의 손에 쥐어있던 휴대폰이 울렸다.
“안녕하세요. 이승우씨.”
한 대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안녕하세요.”
“통화 괜찮으시죠?” 밝은 목소리로 그녀가 물었다.
“예, 괜찮습니다.”
“태풍 피해는 없으시고요?”
“예.. 전.. 뭐... 한 대리님도 괜찮으시지요?”
그렇게 걸려 온 그녀의 전화가 너무나도 반가웠다.
전화로 그녀에게 형에 관해서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나를 그녀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었다.
“이승우씨에게 고맙다고 인사하려고 전화했어요.”
“예?” 그녀의 말에 의아하기도 하고 놀라서 걸음을 멈추고 그녀에게 물었다.
“내부적으로 사규를 어긴것에 대해서 문제를 삼고 있긴 하지만 이승우씨 회사쪽에서 소송이 들어오는 것이 가장 큰 일이었거든요. 우리 회사쪽 법무팀에서 마치 이때다 싶었던 것처럼 우리 과장님 물고 늘어지고 소송 들어오면 그것에 대한 모든 책임을 과장님에게 묻겠다고 했는데 갑자기 그쪽에서 내부 조사결과 정상적인 절차였다고 연락이 왔어요.”
“........”
“과장님은 아무말씀 안하시지만 우리 업무부에서 명예훼손을 하려는 악의를 가지고 고의로 사실이 아닌 내용을 조작해서 퍼뜨린 것이라고 그 내부고발자를 고발조치 하기로 결정했어요. 우리 부서도 자체적으로 조사를 시작했구요.”
“예...” 그녀의 말에 얼어붙은 듯 그렇게 꼼짝 못하고 휴대폰을 귀에 붙인채로 서 있었다. 머릿속으로 한순간 우영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런데, 그쪽 회사에서 소송하지 않고 정상적인 일이었다고 결론 내린 것이.....이승우씨가 박과장님 위해서 이승우씨네 회사 조사에서 증언해준 것 맞지요?”
“아닙니다. 전 사실만.....” 그에게 의지만 하다가 그를 궁지로 몰아넣은 내 자신을 돌아보면서 그렇게 말하는 그녀 앞에서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한가지만 더 말씀드릴게요.” 그녀가 말을 이었다.
“예..”
“박과장님이 이미 본인이 벌인 일이었다고, 사적인 이익을 취하려는 목적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이었다고 진술했어요. 신입사원인 이승우씨에게 서류를 넘겨달라고 요구한 것도 자신이었고 생산업체를 지정해 준 것도 자신이었다고요. 자세한 내용을 알지 못하던 이승우씨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거라고.....”
역시 그런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도 그는 나의 입장을 걱정하고 있었다.
뜨거운 불덩어리하나가 가슴에서 툭 하고 튀어올라 목에 걸렸다.
“그래서 그런데....”
그녀가 말끝을 흐리고 나의 눈치를 보는 듯 했다.
“뭔데요?” 꽉 막힌 목을 뚫고 억지로 그녀에게 힘을 주어 물었다.
“한가지만 이승우씨에게 부탁을 드려도 될까 해서요. 어렵겠지만 이것만 해주시면 우리쪽에서도 수월하게 일을 풀어나갈 수 있을까 해서 아침 일찍 전화드린거예요.”
“예, 알겠습니다.”
이미 나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그래서 이제 두려울 것이 없었다.
거의 한 해 동안을 절벽에 매달려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사람처럼 살았다.
그리고 이제 프루스트와의 거래를 마지막으로 나는 어짜피 그 아래로 떨어질 운명이었다.
그를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리고 아직 내 안에 그를 위해서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가 남아있다면 그에게 전부를 내 주고 싶었다.
그리고 모든 일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간 후,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버틸때까지 버텨온 내 자신을 스스로 다독이면서, 한때 누구보다 나를 사랑해 주었던 그를 추억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 듯 싶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커다란 함선을 움직이게 하는 엔진처럼 쿵쾅거리면서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한손으로는 그런 가슴을 움켜쥐고 또 다른 손으로는 휴대폰을 귀에 붙인 채 나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오기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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