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비스워커 (마지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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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이라고 해 봐야 보잘 것 없는 것들은 모두 미리 버려 버렸다.
휑해진 원룸에서는 혼잣말을 할때에도 마치 동굴안에 있는 것마냥 목소리가 울렸다.
토요일 아침, 덩그러니 방안에 남겨진 자질구레한 것들을 캐리어에 담고 터덜거리면서 서울역에 도착했을 때에는 아홉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로비의 한 구석에 서서 옆에 캐리어를 세워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예전에 마치 모든 것을 쟁취할 것 같이 의기양양하게 올라오던 길을 일년만에 직업과 우정, 그리고 어렵게 얻었던 사랑마저 모두 잃은 후에 이제 이렇게 돌아가는 중이었다.
처음부터 오지 말았어야 할 서울이었다.
그랬더라면 최소한 나로 인해서 상처받은 사람은 생기지 않았을 터였다.
그렇게 다시 전쟁에서 패한 패잔병과 같이 쳐진 어깨로 마치 포로수용소로 끌려가는 것 마냥 고개를 숙이고 나의 운동화의 끝만 멍하니 내려다 보았다.
결국 이렇게 끝나는 일이었다.
먼 발치에서라도 주형이형을 한번도 보지 못하고 이렇게 떠나게 된 것이 못내 아쉬웠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겪고 있는, 작은 인연으로 만나 사랑하고 헤어지고 또 서로에게서 잊혀져 가는, 삶에서의 단순한 과정일 뿐인것이라고 되뇌었다.
나도 그렇게 그중에 한 명인 것이다.
지난 밤, 휴대폰의 액정창에 떠 있는 그의 이름을 빤히 내려다 보면서도 끝끝내 통화 버튼을 누를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내가 그려왔던 사람이 형이 아니었다’는 ‘이제 그만하고 싶다’고 짜증섞인 말투로 헤어지자고 그에게 말했을 때 나를 바라보던 그의 아픈 표정이 뇌리에 새겨진 듯 남아 있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렇게 그에게 상처를 주었다.
그래도 그를 위해 부족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한 듯했다. 하지만 정말 그랬을까? 그의 마음속에 남겨놓은 상처는 어떻게 치유가 될 수가 있을까?
무의식적으로 입 밖으로 한숨이 밀려나왔다.
“이승우씨?”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환한 웃음을 지으면서 한수진대리가 나에게 다가왔다.
“어디 가시나봐요?”
“예, 군산 집에....”
“아, 저도 지금 군산으로 내려가는 길인데....”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혹시 몇시차예요?”
“열한시 반입니다.”
“아, 저는 열시 삼십오분 차인데.... 같은 차였더라면 좋았을텐데요.”
그녀가 아쉽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네요.” 그렇게 말을 하고는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한쪽에 있는 카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서 좀 앉아있다 갈까요?”
머뭇거리는 나의 팔을 잡고 그녀가 슬며시 끌어당겼다.
지갑을 들고 일어서려는 나를 보고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고 한번 흘겨보았다.
“저, 이래뵈도 ’대리‘ 거든요?”
그런 그녀를 보고 피식 웃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그런 나를 한번 보고 웃어보인 다음 주문하는 사람들의 줄의 끝에 가서 섰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나를 한번 흘끗 보고나서 휴대폰을 집어들고 누군가와 통화를 하기 시작했다.
“저 이래뵈도 ’대리‘ 거든요?” 그녀가 한 말을 그대로 낮게 중얼거렸다.
얼마나 내 자신이 해보고 싶었던 말이었던가.
가까운 누군가에게 차나 식사를 대접하면서 어깨를 펴고 나를 나타내는 말로 그렇게 말을 꼭 해보고 싶었다.
그렇게 나도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살아가고 있다고, 그리고 그 위를 향해서 한걸음씩 올라가려고 노력하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하지만 이제 내게는 그렇게 말할 기회가, 그런 삶을 살 기회가 없어져 버렸다.
완전히 타인의 몫이 되어버린, 절대로 나의 것이 될 수 없는 그런 말 한마디가 나의 가슴을 조여왔다.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뭘 그렇게 생각해요?”
그녀가 내 앞에 자바칩 프라푸치노를 내려놓았다.
“고맙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나를 생글거리면서 바라보고는 그녀가 자신의 커피잔을 들고 입으로 가져갔다.
“저....”
말을 꺼내는 나를 그녀가 빤히 바라보았다.
“우영이를 종로에서 만났다고 제가 말을 해버려서....”
“아..” 내가 말을 꺼낸 의미를 알아챘다는 표정을 그녀가 지어보였다.
“그것 기밀자료예요. 이승우씨.”
"......"
“혹시 이승우씨가 한 말 때문에 그 사원이 어떤 곤란한 일을 겪지는 않을까 생각하시는 거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요.”
“다행이군요.”
“그때 자리에 참석했던 법무팀 팀원이 이번 일에 그쪽 책임자였거든요.”
“......”
“이승우씨 증언 덕분에 그쪽에서도 철저하게 조사하는 것으로 합의할 수 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며칠 전에 그 일도 종결이 되었구요.”
“어떻게... 되었나요?”
그녀의 눈치를 보면서 슬며시 물었다.
“승우씨 그거 알아요?”
나의 질문에 갑자기 그녀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우영사원이 팀장도 포기한 프로젝트를 맡아서 해보겠다고 하고는 감당을 못하고 박과장님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거예요”
“.......”
“왜 그가 박과장님에게 손을 내민지 승우씨도 아마 짐작하실거라 생각해요.” 그녀가 나를 보고 옅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
“여튼, 이우영사원이 신입사원이어서 박과장님이 어떻게 도와주려고 시작하다보니 나중엔 그 일을 아예 떠맡아서 하게 되었던 거예요. 실질적으로는 박과장님이 한 일을 이우영사원이 자신이 한 것처럼 생색을 낸 거죠.”
“........”
“그렇게 조금 도와주려고 시작했던 것이 점점 더 박과장님도 감당이 안될 정도로 커져 버려서, 원래 그렇게 하면 회사규정에 어긋나는 것을 아시면서도 업무부에 배정된 쿼터까지도 끌어다가 이우영사원이 하던 프로젝트를 메꿔 주었던 거예요.”
그녀의 그 말에, 그제서야 예전 우영이의 생일 날 케잌을 사오겠다면서 슬며시 빠져나온 나를 뒤따라 온 주형이형이 한 말이 떠올랐다.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그가 그렇게 말했었다. ’그런 녀석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으면서도 미궁에 발을 들여놓은 나의 탓이 컸다‘ 고..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그런 자신의 경솔함을 자책하고 있었다.
이제야 그때 그의 그말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박과장님의 힘으로 성공을 한 그 이우영사원이 우수사원으로 선정도 되고 사보에도 나오고 회사에서 인정 받게 되면서 기고만장하게 된 거예요.”
“.......”
이번 일로 조사하다 보니 해외 영업 3부에서는 직원들이 그를 피하고 왕따를 시키고 있었더라구요. 아버지 배경에 직접 대놓고 뭐라고 말은 하지 못하고 쉬쉬하고 있었지만, 남의 도움으로 성공하고도 자기 잘난체에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그를 좋아할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겠죠.“
”어떤면에서는 그 녀석..... 외로웠겠네요.“
나의 말에 그녀가 씁쓸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래도 다 자업자득이죠.“
”........“
”그래도 그것으로 끝냈으면 별 문제 없이 끝났을텐데, 그 다음에 또 다시 자신이 감당못할 프로젝트를 떠맡은 것이 문제였어요.“
”........“
”주위에 도와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지. 게다가 박과장님도 이번에는 절대로 못해주겠다고 확실하게 거절을 하셨는데.....“
”........“
”표면상으로는 자신이 한번 어려운 일을 해 낸거고 주위에서 보는 눈도 많고 아버님의 기대감도 컸겠죠. 그렇게 두 번째 프로젝트도 보란 듯 멋지게 해내고 싶었을 테고... 혼자서는 어떻게 해낼 도리가 없었고....“
그녀가 나를 흘끗 보고는 낮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부랴부랴 대만으로 건너가서 거기 거래업체에게 계약 만료일 연장 요청하고 다시 돌아와서 과장님에게 부탁하는데, 대쪽같은 과장님 이번에는 절대로 못 도와주겠다고 하니 제딴에는 자존심 버리고 삼고초려한다고 쏟아지는 비까지 흠뻑 맞아가면서 집 밖에 있는 도로에서 버티면서 과장님 나오셔서 자신의 부탁을 들어줄때까지 기다리겠다고 고집피우고....“
그런 그녀의 말에 나의 머릿속에 비를 흠뻑 맞으며 형이 사는 집의 계단 아래의 길에 서서 하염없이 형의 집 쪽을 올려다보고 있던 우영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런 그 녀석의 모습을 보고 사랑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렇게 모든 것을 가진 그 녀석이, 형을 향해 그렇게 큰 사랑을 보여주고 있는 녀석이 나보다 형 곁에 있어야 한다고... 형 곁에 있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닌 그 녀석이라고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렸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나의 착각이었다니....
”그런데도 과장님의 마음이 바뀌지 않으니까 마지막엔 이승우씨까지 걸고 넘어갔던 것 같아요.“
”네?“
”과장님께서 끝까지 도움요청을 거절하면 이승우씨를 회사에서 붙어있지 못하게 하겠다고....“
”.......“
그녀가 커피잔을 들고 한모금 마신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어느 날 결재 때문에 과장님 사무실에 들어갔다가.....“ 말을 잇지 못하고 그녀가 슬며시 나의 눈치를 보았다.
”책상의 유리판 아래에 ’고맙습니다‘ 라고 쓰여져 있는 작은 쪽지를 보게 되었거든요.“
그녀의 말에 슬며시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그 아래에 과장님이 ’사랑한다‘ 라고 써 넣으셨더라구요.“
”.........“
”처음엔 그 상대가 누구일까 하고 혼자서 스무고개를 시작했는데 언뜻 생각해보니 과장님 주위에 여자라고는 아무도 없다는 것이 떠올랐어요.“
”........“
”그러다가 이승우씨가 저와의 미팅에서 쓰는 글씨체를 보면서 혹시나 하고....“
”예...“ 그렇게 말하는 그녀를 보고 얼굴이 빨개져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승우씨가 클리오네에 와서 조사에 응해 주었을 때 이우영사원을 종로에서 만났다고 하는 말을 듣고 전 놀라지 않았어요.“
”........“
”오히려 조마조마한 마음에 망설이는 이승우씨가 빨리 마음을 결정하고 말해주기를 속으로 얼마나 바라고 기다렸는지....“
그렇게 말하고 그녀가 얼굴을 붉혔다.
”제가 좀 이기적이였죠? 죄송해요. 과장님을 어떻게든 도와드리고 싶었거든요. 제가 회사 다니면서 만난 직장상사 중에서 박과장님이 제일 훌륭하셨거든요. 그래서 잃고 싶지 않았어요.“
”이제 내려가면 언제 다시 올라오나요?“
생각에 잠겨 조용히 커피를 마시고 있던 그녀가 다시 나를 보고 물었다.
”아마 계속 군산에 있을 듯 합니다.“
나의 말에 깜짝 놀라는 표정으로 그제서야 그녀가 내 옆에 놓여있는 캐리어를 내려다 보았다.
”그럼 회사는.....“
”예, 며칠전에 퇴사를....“
그녀가 나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윤대리 때문에 처음에 많이 힘드셨을 텐데.... 힘든시기 다 지나고 이제는 혼자서기도 하실 수 있을텐데...“
그녀의 말에 그녀를 보고 한번 씩 웃어보였다.
”아, 이제 이승우씨하고 정도 다 들어버렸는데...“ 그녀가 속상하다는 듯 투덜거렸다.
”그래도 길이 있을거예요.“ 그녀가 다시 해맑은 표정으로 의기소침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를 보면서 나는 씁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여튼 이제 우리 친구할까요?“
갑작스런 뚱딴지 같은 그녀의 제안에 얼굴을 들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네?“
”저도 가족하고 떨어져서 서울에 혼자 올라와 회사만 다니고 있는데..... 어쩌다가 소주한잔 하면서 편하게 세상 돌아가는 대화도 나누고 의지할 친구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오랫동안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
”서울이 그런데잖아요. 진짜 친구를 구하기가 너무 힘든... 그런 곳....“
”..........“
”이제 서로 일 때문에 만날 사이도 아니니 서로 베프하죠, 뭐. 어때요?“ 장난끼 어린 표정으로 그녀가 웃었다.
”..........’
“왜요? 여자라서 안돼나요?” 대답없는 나를 빤히 바라보면서 그녀가 물었다.
“아무래도 저는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
머뭇거리다가 계속 나를 보고 있는 그녀를 보고 다시 입을 열었다.
“서울에는 더 이상 제가 있을 자리가 없어요.”
그렇게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나를 바라보면서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기회가 금방 찾아 올거예요.”
“.........”
그렇게 위로해 주는 그녀를 보면서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쓸쓸한 웃음이 나왔다.
“그냥...” 그녀가 그런 나를 바라보고 웃었다.
“이승우씨에게 그 기회가 지금 오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잖아요.”
“.......”
“손해 볼 것 없으니 좀 더 기다려봐요.”
그렇게 말을 하고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기차 시간이 다 돼서 전 먼저 일어나야 겠네요.”
그리고 따라 일어나는 나를 보고 그녀가 급하게 입을 열었다.
“여기서 그냥 편하게 기다리세요. 그것이 군산으로 가는 기차이든, 또 다른 기회이든....” 그녀가 나를 보고 슬며시 윙크를 했다.
“밖에 나가면 어짜피 앉아있을 자리도 없는데.... 짐도 있잖아요.”
“........”
그녀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엉거주춤 그녀의 손을 잡았다.
“곧 다시 봐요. 이승우씨”
나를 보고 한번 웃어 보이고 그녀는 자신의 가방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다시한번 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카페의 문을 통해 밖으로 사라졌다.
다시 혼자가 되었다.
이제 혼자가 되는 삶에 익숙해져야 한다.
조용한 고향마을에서 팔을 걷어 붙이고 그곳에서의 삶을 다시 시작할 것이다
부모님도 처음에는 낙담하시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받아 들여 주실 것이다.
그래도 지난 일년동안 치열하게 살았다.
서울에 올라오던 일년전의 모습과는 눈에 보이지 않게 그동안 나도 성장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도 좌절감으로 시간만 낭비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하기에는 나의 젊음이 너무 값지고 빛나지 않는가.
끝에 다다랐다는 것은 또 다른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했다.
내가 모르는 또 다른 시작을 꿈꾸면서 가슴 설레며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그녀의 말대로 나에게 희망이 찾아 올 것이라고 자위하면서 남아있던 커피를 마시고 컵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승우야.”
주변에서 웅성거리면서 떠들고 다니는 사람들과 시끄러운 대화 속에서도 누군가가 나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내 귀에 들려왔다.
익숙한 그 목소리에 깜짝 놀라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 주위를 돌아보았다.
카페의 입구에 서서 그가 얼굴 가득 웃음을 띠고 그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형!”
나도 모르게 큰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여긴 어떻게....”
그는 아무 말 없이 여전히 환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나를 바라보고 손을 뻗었다.
그런 그를 보면서 천천히 나의 얼굴에서도 웃음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녀가 ‘기회가 오고 있는 중이다’ 라고 나에게 한 말이 떠올랐다.
어쩌면 이제 눈치보지 않아도 될, 정말로 기분좋은 친구를 구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마도 틀림없이 그녀가 나에게 보내 주었을 그를 이제는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다는 욕심이 들기 시작했다.
터질듯한 기쁨으로 폭발할 듯이 다시 뛰기 시작하는 나의 심장을 느끼면서 그를 향해 부지런히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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