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린 아저씨 그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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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오후, 골목길 슈퍼 앞 의자에 홀로 앉아있는 한 소년. 올 해, 고등학생이 되었지만 또래에 비해 유난히 더 앳된 얼굴이 남아있는 이 아이의 이름은 이현동. 뽀얀 피부에 오동통한 현동은 두 눈이 맑고 초롱초롱하다. 동네의 어른들은 그런 현동에게 늘 토실토실 귀엽게 생겼다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지만, 사실 학교에서는 내성적인 성격에 괴롭힘을 당하기도 한다.
몇몇 못된 아이들은 현동의 행동거지가 남자답지 못하다며 게이가 아니냐 놀리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말을 들을수록 현동은 점점 더 내성적인 아이가 되어간다. 어릴 적부터 어머니 없이 아버지와 단 둘이 자라온 현동. 어머니는 현동이 4살 되기 전 돌아가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무뚝뚝한 성격에 매일 밤 퇴근 후 술을 먹고 들어온다. 현동은 매일 방치가 된 채 자랐고, 그나마 집에 매일같이 찾아오던 고모의 보살핌 속에 그래도 밥 잘먹고 살도 오동통하게 찌며 지금까지 자라왔다. 허나 부모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고, 제대로 된 가정 교육 또한 받지 못해서일까. 아직도 또래들 사이에 소외감을 느끼며 자신의 의사와 감정을 표현하는데 많이 서툴어 어린 아이같은 구석이 많다.
그런 현동이 누군가를 기다리라도 하는 걸까. 퇴근 시간은 지났지만, 분명 또 술을 먹고 들어오느라 밤 늦게나 돌아올 아버지를 기다릴리는 없고. 현동은 슈퍼 앞에서 공깃돌 다섯개를 손에 꼭 쥐고는 혼자 적적함을 견뎌내며 은근슬쩍 정류장에서 골목길이 꺾이는 곳을 힐끔 힐끔 쳐다보고 있다.
‘야 이현동. 여기서 뭐하냐? 이 자식 또 공기하고 있네.’
‘야 기집애냐. 공기는 여자애들이나 하는 건데’
‘뭐가’
그 때, 길을 지나가다가 현동을 발견하고는 이 때다 싶어 현동을 놀리러 다가오는 아이들. 현동은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입술을 빼쭉 내밀고는 아이들을 노려보며 대답한다.
툭- 툭-
‘모걔~ 목소리도 여자 같아가지고. 너 진짜 여자냐?’
‘얼굴도 뽀얘서 너는 그래도 남자들한테 인기 많겠다. 기집애니까'
현동은 그저 노려보기만 할 뿐, 제대로 된 반박도 하지 못한다. 그런 현동의 머리를 툭툭 쳐가며 조롱하는 아이들. 그렇게 그저 고개만 푹 숙이 인상을 쓰는 현동을 보다가는 재밌는 게 떠올랐다는 듯 실실대는 한 아이.
‘오랜만에 이현동 가슴 좀 만져볼까? 고딩돼서 더 커졌을텐데 이야~ 아주 말캉말캉 여자꺼같다’
‘너 여자꺼 만져봤냐? 현동아 나도 좀 만져보자’
‘하지마’
‘뭘 하지마. 얘 젖이 울 누나 보다 큰 거 같은데’
주물럭- 주물럭-
‘아아. 하지마... 아아으..’
‘어이 녀석들!!!!!’
아이들의 괴롭힘에 거의 울먹이며 저항을 하는 현동. 그렇게 뚱뚱한 몸도 아닌데 오동통하게 잡히는 젖을 꼬집으니 아파서 몸도 베베 꼬인다.
그 때, 저만치서 들려오는 굵은 어른의 목소리. 아이들은 놀라서 급히 손을 떼고는 뒷걸음질을 친다.
‘아 이씨’
‘녀석들. 또 친구 괴롭히고 있냐? 저번에도 그러드만. 일로 와’
‘아잇 도망가자’
저만치 꺾인 골목길에서 당당한 풍채를 드러내며 저벅저벅 걸어오는 한 아저씨. 어두운 회색 정장을 빼입은 채 빵빵한 배를 내밀고 걸어오는 모습에 꽤나 묵직한 위압감이 느껴진다. 저번에도 같은 상황에서 혼이 난 적이 있는 듯 아저씨를 보자마자 바로 도망을 가버리는 아이들. 현동은 아직도 아이들의 손길에 울상이 된 얼굴이 붉어져서는 힘겹게 고개를 들어 아저씨를 바라본다.
‘너네 한 번만 더 그러면. 아저씨한테 후두려 맞는다!’
그렇게 현동을 위기(?)에서 구해주는 아저씨. 현동은 고개를 들어 다가온 아저씨를 바라본다. 공깃돌을 쥐고 있던 현동의 통통한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가고, 앉은 자세로 두 발가락에도 힘이 들아가서 발꿈치를 들어올리는 현동. 아저씨의 이름은 박성구. 키는 170 중반쯤에 떡 벌어진 어깨며 정장에 가득 채워진 두툼한 살집이 이 동네서 알아주는 풍채다.
그런 아저씨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는 현동. 현동이 당황하면서도 은근 수줍은 듯 땅을 바라보고 있자, 그런 현동의 옆으로 다가와 무심하게 한 마디를 건네는 성구.
‘꿀꿀이 또 여기 혼자서 뭐하냐. 집에 들어가지. 아부지 또 안 들어오셨냐’
‘아직 안오셨으면 열한시나 돼야 오실 거에요.’
‘꿀꿀이 저녁은 그럼 누가 챙겨주냐’
‘집에 라면도 있고. 김치도 있어요.’
‘꿀꿀이 이제 라면도 혼자 끓여먹냐. 많이 컸네 이 자식’
완전 갓난애기 어릴 때 부터 같은 동네에서 오고가며 아는 사이였다고 현동을 꿀꿀이라고 부르는 성구. 현동이 꼭 아기 돼지처럼 귀여우니 나름대로 애칭을 지어준 것 같다. 그리고 끝까지도 성구 아저씨의 두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현동. 꼭 좋아하는 남자 친구를 앞에 둔 어린 여자아이처럼 무릎을 모으고는 어쩔 줄을 몰라한다.
작은 동네 마을에 보통 주변 공사장에 나가거나 현장일을 하는 다른 어른들과 대비되게 거의 유일하게 성구 아저씨는 항상 정장을 빼입고 출퇴근을 한다. 어린 현동의 눈에는 그런 성구 아저씨가 너무나도 멋있다. 애초에 정장 입은 어른의 모습을 성구 아저씨로 처음 보기도 했다.
노가다 일에 시달려서, 그리고 술에 쩔어서 몸이 삐쩍 마른 아버지와는 반대로 후덕한 성구 아저씨의 몸집. 진한 눈썹과 그 누구도 함부로 시비 걸 것 같지 않은 강한 인상인 성구 아저씨기에 더욱 눈을 맞추지 못하는 현동이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늘 혼자인 현동의 하루 중 유일한 즐거움. 퇴근하는 성구 아저씨를 기다리며 괜히 말 한 마디라도 이렇게 섞어보는 거다. 물론 아저씨가 먼저 말을 걸어주지 않으면 감히 현동이 먼저 말을 꺼내진 못한다.
현동은 아저씨에게 지금 느껴지는 이 감정이 정확히 무슨 감정인지 알 수는 없지만 너무나 가슴이 뛴다. 이 터질 듯한 심장 박동 소리가 새어나가 아저씨에게 들리기라도 할까봐 더욱 아저씨를 바라볼 수가 없다.
‘아저씨가 오늘 밥 해줄까’
‘아니에요. 아버지 오면 같이 먹을게요.’
‘아버지 열한시에나 온다매. 꿀꿀이 배고프잖냐’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르냐. 알겠다.’
성구는 현동이 자신을 좋아하는 줄도 모르고 그저 현동이 어릴 적부터 유약하고 여린 아이인 줄만 알고 있겠지. 엄마도 없고, 친구들 앞에서 당당히 나서지도 못하는 현동에게 은근한 동정심을 느끼라도 하는 걸까.
허나 성구도 그리 적극적으로 섬세하게 현동을 챙기는 것 같지는 않다. 아저씨의 호의에 오히려 너무나 부끄러워 거절을 하는 현동에 바로 알겠다고 무심히 가던 길을 마저 가기 시작한다.
‘..ㅎ..아..’
그리고 그제서야 저만치 걸어가는 성구 아저씨의 뒷 모습을 고개 들어 바라보는 현동. 정장을 입은 저 듬직하고 넓은 등판. 저 풍채 좋은 아저씨에게 안긴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상상만 해도 온 몸이 따뜻해지고 괜시리 눈물이 왈칵 날 것 같다. 아저씨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대도 생전 처음 누군가의 큰 사랑이 온몸에 느껴질 것만 같은 품.
또, 아저씨의 저 굵직한 허벅지와 펑퍼짐한 엉덩이. 현동은 숨이 벅차오르는 듯한 이상한 기분에 결국 금방 고개를 돌리고, 그제서야 두시간 남짓 앉아 있었던 슈퍼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다.
‘어 잠깐 꿀꿀이’
집에 들어가도 혼자 할 것도 없고, 오늘 아저씨를 보려했던 목표도 달성했으니 더 이상 할 일이 없어 동네나 한 바퀴 돌고 있던 현동. 끼리끼리 노는 또래 친구들도 보이지만 현동은 괜히 또 괴롭힘을 당할까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헌데 아직 집에 들어가지 않았던 건지 그런 현동을 부르는 성구의 목소리. 현동은 놀라서를 뒤를 돌아 여전한 정장 차림의 성구 아저씨를 바라본다. 아저씨의 정장, 그 중에서도 넥타이가 항상 멋있다. 오늘은 파란색이네.
‘이거 선물’
그리고 흰 비닐봉투 하나를 건네는 성구. 현동은 얼떨떨한 마음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한채 고개를 꾸벅 숙이며 봉투를 받는다. 이어지는 성구의 목소리.
‘심심하면 집에서 그림이나 그리라고. 너 어릴 때 그림 엄청 잘그렸었어.’
‘감사합니다..’
‘감사하긴 임마. 아저씨랑 하루 이틀 본 사이냐.’
아무래도 성구가 현동을 굉장히 안쓰럽게 생각하는 것 같다. 같은 동네에 오래 살았으니 워낙 어릴 때부터 현동을 봐온 성구.
현동도 성구를 처음부터 마음에 둔 것 아니었다. 그저 자연스럽게, 자신이 남들과는 다른 취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현동을 더욱 소심한 아이로 만들었던 사춘기를 지나며. 그러면서 성구 아저씨가 예전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성구는 어디서 구한 건지 모를 그림 노트며 색연필 따위를 건넸다. 그런 성구의 선물을 받으며 더욱 가슴이 터질 듯 뛰어오는 현동. 별거 아닌 노트일 뿐인데, 심지어 봉투를 열어보니 노트가 반짝반짝 빛을 내뿜는 것도 같다. 아저씨가 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선물.
성구를 향한 사랑이 커져가는 현동. 노트가 자꾸 번쩍이자 이제는 헛것이 다 보이나 싶다. 어쨌든 이 노트의 의미가 너무나 남다르다.
또 그렇게 현동의 마음이 커지는 줄도 모르고, 성구는 선물을 건네고 다시 무심하게 뒤를 돌아 집으로 들어가고만 있었다.
‘크흐으..대여 난 기다 뤼이일꺼에요. 느애 눈무우울의 편지 하늘에 드하아으면!’
비틀 비틀 술에 취한 채로 골목길을 걸어오는 한 남자. 현동의 아버지, 철수다. 술을 거나하게 잡순 듯이 노래까지 동네방네 다 들릴 듯 흥얼대고 있는 철수. 누군가가 창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고, 늦은 밤에 무슨 지.랄이냐고 소리를 지르지만, 철수는 그저 헤벌쭉 웃으며 비틀대기만 한다.
그렇게 텅 빈 늦은 밤의 골목길을 걸어오며 집 앞에 도착한 철수. 흙먼지가 잔뜩 묻은 작업복에 얼굴도 꾀죄죄한 모습. 두 눈이 풀린 채로 잠겨 있는 대문을 덜컹 덜컹대기 시작한다.
덜컹- 덜컹-
‘으에잇. 뭐야.’
원래 같으면 열려 있어야 할 문인데, 가끔씩 현동이 잠들기 무섭다고 문을 잠그곤 한다. 물론 철수도 열쇠를 가지고 다니긴 하지만, 술만 먹으면 번거롭다고 문이 잠겨있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철수. 철수는 순간 감은 두 눈으로 고개를 들어 심호흡을 하더니 이내 괴성을 내지르기 시작한다.
‘이현동!!!!!!!!!’
‘어우 시끄럽다’
몹시나 화난 목소리로 아들의 이름을 부르는 철수.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서 열면 될 것을 굳이 이 밤중에 소리를 지른다. 근데, 그 때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집 앞에 나와 담배를 태우고 있던 성구다.
‘므어?’
‘이 밤 중에 드럽게 시끄럽다’
그런 성구에게 잔뜩 인상을 쓰며 비틀비틀 걸어가기 시작하는 철수. 철수의 옆옆 집에 사는 성구는 잠옷에 메리야스만을 입고 담배를 피고 있다. 굵직한 팔뚝과 역시나 푸짐한 살집. 성구는 철수가 조금은 위협적으로 다가오는데도 눈 한번 깜빡 안하고 그저 담배만 피고 있다.
‘느어 내가 말 걸지 말랬지.’
‘혼잣말 한 건디.’
‘어쭈. 니 잘났다. 이 씨.발럼아.’
툭! 탁-
술에 취해 정신이 없는 철수. 성구와 그리 사이가 좋아보이지는 않는다. 홧김에 성구에게 손을 들어 올리는 철수. 성구는 담배를 입에 불고 그런 철수의 손을 가볍게 쳐내고는 그저 태연하게 한 발자국 옆으로 선다.
타다다닥-
그 때, 철수네 대문 뒤로 들려오는 현동이 잠에서 깨 급히 뛰어나오는 발자국 소리. 화난 아버지의 괴성에 무서워서 바로 문을 열러 나오는 듯 한다.
덜컥-
‘ㅇ..아버지 오셨어요’
‘으어. 야 누구야. 어우 내 아들. 너 아부지가 문 잠그지 말랬지. 잠그지 말라고 했지.’
술에 취해 아들도 제대로 못 알아보는 철수를 조금은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고 다시 시선을 돌리는 성구. 현동은 문을 열자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성구 아저씨와 저만치에 나란히 서 있는 아버지를 보고 몹시 놀란다. 본능적으로 자다 깬 후줄근한 모습을 보이기 싫은지 대문 뒤로 살짝 얼굴을 숨기는 현동. 성구가 자연스레 그런 현동을 바라보자, 현동은 급히 시선까지 피한다.
‘하루종일 꿀꿀이 혼자 있는데, 위험하지. 문을 잠그고 있어야지.’
‘꾸ㄹ. 므어?’
‘혼잣말 하는 건데 왜 자꾸 말을 걸어’
‘꿀꿀이라 했냐? 내 아들내미한테’
‘그럼 니한테 했겄냐. 쯧’
툭- 치익-
그렇게 상대하기도 싫다고 표정을 굳히고는 담배를 바닥에 던져 발로 짓밟는 성구. 성구는 그대로 집으로 들어가버린다. 철수는 술에 제대로 취했는지 혼자 갸우뚱 고개를 꺾고는 두 눈을 감고 있다가는 그제서야 비틀비틀 집으로 돌아가고, 아버지를 부축하러 급히 달려나오는 현동. 현동은 아버지에게서 나는 고약한 술 냄새에 얼굴은 잔뜩 찡그리고는 아버지를 부축하기 시작한다.
드르르렁- 푸우우-
철수의 코 고는 소리가 울려퍼지는 작은 집 안. 부엌에 거실, 그리고 방 하나 딸린 작은 집. 아버지 철수는 삐쩍 마른 배를 내놓고는 나자빠져 잠에 들어있고, 작은 전등이 하나 켜진 방 안에 현동이 깨어있는 듯하다.
삐뚤빼뚤 깎인 몽땅 연필을 꼭 쥐고서는 아저씨가 선물해준 노트에 무언가를 그리고 있는 현동. 퉁퉁한 몸매에 각이 잡힌 정장. 포인트인 넥타이는 현동이 좋아하는 초록색 색연필로 빗금을 그어 색칠한다. 짧게 넘긴 머리에 또렷한 두 눈. 뭉툭한 콧대에 살짝 올라간 듯한 얇은 입꼬리. 늦은 밤 그림을 그리는 현동의 입가에서 미소가 지어진다. 그대로 그림을 완성하고 색연필을 내려놓는 현동. 어찌나 열심히 지우고 그리고를 반복했으면 현동의 새끼 손가락에는 연필심에 때가 묻어나있다.
그렇게 그림 속 정장을 차려입은 풍채 좋은 남자를 가만히 웃으며 바라보고 있는 현동. 그러다가 점점 내려가는 입꼬리. 현동이 침을 꿀꺽 삼킨다. 그리고 점점 현동의 손이 어둠 속 책상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한다.
다음 날, 아버지가 일을 나가고 하루종일 그림만 그린 현동. 현동의 그림 실력이 예사롭지 않다. 눈에 보이는 것들은 다 그리며 하루를 보낸 현동. 아저씨의 모습을 더 그리고 싶은데, 작정하고 아저씨를 자세히 본 적이 없어서 더욱 디테일한 묘사를 하기가 힘들다. 거실에서 엎드려 홀로 그림을 그리면서 자꾸 시계만 바라보는 현동. 성구 아저씨의 퇴근 시간이 가까워져온다. 오늘 성구 아저씨를 제대로 관찰하고 다시 그려보고 싶다.
덜컥-
그 때, 밖에서 들려오는 대문 소리. 거의 한 달에 한번쯤은 이렇게 아버지 철수가 술을 먹지 않고 일찍 귀가하는 날이 있는데, 그 날이 오늘인가보다. 예상치 못한 아버지의 귀가에 깜짝 놀라며 거실에서 벌떡 일어나는 현동. 현동은 확실히 아버지를 경계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틈만 나면 처음 보는 아줌마들을 집으로 데려와 발가벗고 몸을 섞곤 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현동에게 나가놀으라고 동전 몇개를 쥐어주곤 했지만,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현동은 몇번이고 아버지가 거친 호흡과 함께 아줌마들과 몸을 섞는 장면을 목격하곤 했다.
덜커덩-
‘밥은’
그렇게 대문을 열고 들어와 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철수. 철수는 술에 취하지 않은 모습이 오히려 어색하다. 어젯밤과는 달리 몹시나 무뚝뚝하고 건조한 목소리를 뱉는 철수. 현동은 엎드려서 그림을 그리던 노트며 색연필을 주섬주섬 챙기며 대답한다.
‘라면 먹었어요’
‘너. 그거 뭐냐?’
휙-
그 때, 현동의 손에 들린 노트를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리는 철수. 철수는 성큼성큼 다가와 현동의 손에 쥐어진 노트를 뺏는다. 벌써 몇장이나 그림을 그려놓은 현동. 색연필로 채색을 했을 뿐인데 그림 실력이 대단하다.
‘그..림이요’
‘버려.’
아버지가 내 그림을 칭찬해줄 수도 있지 않을까, 살짝은 소심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현동. 허나 아버지 철수는 너무나도 단호하게 노트를 다시 건네며 버리라고 말을 잇는다. 놀란 현동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도 못하고.
‘..뭐해 갖다버리라고 새.끼야.’
‘네..?’
툭-
‘다 버리라고 이 새.끼야아!!!’
그 때, 갑자기 눈이 돌아버리는 철수. 현동은 깜짝 놀라서 뒷걸음질을 치고, 철수는 현동이 들고 있던 색연필을 뺏어 반으로 부셔버릴듯 힘을 주기도 하고, 심을 뽑아 그대로 바닥에 내던져버린다. 그저 놀라서 당황한 현동은 입을 벌린 채 놀란 눈을 뜨고 있다.
‘니 ㄱ..그림 그리라고 누가 그랬냐.’
‘성구 아저씨가 사줘서..’
‘아아아악!!!!!!!’
갑자기 괴성을 지르고 방방 뛰기 시작하는 철수. 현동은 가끔 아버지가 만취했을 때 보곤 하는 아버지의 모습이지만서도 이 상황이 너무 당황스러워 눈물까지 나려고 한다. 대체 왜 아버지는 내가 그림 그리는 것을 이토록 싫어하는 걸까.
‘흐어.. 허억.. 니.. 한번만 더 그림 그리면 아버지한테 죽는 줄 알어라 하아..’
‘싫어요’
‘므어?’
‘저 그림 그리는 거 좋단 말이에요’
퍽!!!!! 쿵-
생전 처음으로 철수의 말에 대드는 현동. 이 색연필이 다 누가 준 선물인데 이렇게 함부로 부셔버리다니. 현동도 감정이 심히 격해졌다. 결국 현동에게 손찌검을 하는 철수. 현동은 그대로 중심을 잃고 방 바닥에 엎어진다.
‘허어억.. 허억...’
그리고 왜 이렇게 흥분한 건지 숨까지 헐떡이고 있는 철수. 현동은 그저 방 바닥에 얼굴을 묻고 일어나질 못하고 있다. 현동을 무겁게 억누르는 너무나 큰 설움. 외로움과 쓸쓸함 속에서 자라온 현동에게 성구 아저씨의 선물조차 허락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서글프다.
‘니 그리고.. 허억.. 박성구 그 새.끼랑 말도 섞지 마라. 하아아.. 안그러면 아버지한테 허억.. 진짜 죽는거야..'
‘......’
드르륵- 쾅!!!
성구의 선물을 부시다 못해 이제는 성구와 말까지 섞지 말라고 말하는 철수. 현동은 눈시울이 새빨갛게 붉어져서는 엎어져서 울음을 힘겹게 참아내고 있다. 아버지가 지금 왜 이렇게 반응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울기까지 해버리면 아버지가 정말 이성을 잃을지 모른다. 늘 현동이 눈물을 보일 때마다 지금처럼 눈이 뒤집히곤 했던 아버지니까.
그렇게 철수는 방문을 거세게 닫고 들어가버리고, 그대로 거실에 부셔져버린 색연필들 사이에 엎어져 있는 현동. 현동은 애써 소리가 새어나오는 울음을 참아내며 흐느끼기 시작한다.
‘크으윽. 끄윽. 끄흐읍..’
더 이상은 안되겠다. 어린 나이지만 가슴 깊은 곳부터 쌓여온 설움이 너무나 커서 한번 울음이 터지면 참을 수가 없다. 결국 아버지를 피해서 집 밖으로 뛰쳐나가는 현동.
덜커덕-
‘프후욱, 끄흐으으윽. 끄흐흑 흐흡.’
우는 것 조차 소리내어 울지 못하는 현동. 현동은 얼른 대문 밖으로 뛰어나가 서러운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어.’
그 때, 귀에 들려오는 익숙하고도 잔인하게 반가운 목소리. 성구가 퇴근을 하는 듯 골목길을 걸어 들어오다가 대문을 박차고 뛰어나오는 현동을 바라보고 놀란다. 벌써 얼굴이 눈물에 다 젖어서는 눈시울이 시뻘개진 현동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짓는 성구. 현동도 그런 성구와 얼떨결에 두 눈을 맞춰버린다. 그리고, 동시에 몹시나 놀라서 터져나오는 울음조차 멈춰버리는 현동.
‘왜 그러냐 꿀ㄲ..아니 현동아’
현동에게 자연스레 다가오는 성구. 오늘도 역시나 여느때처럼 곧바로 폭 안기고만 싶은 풍채에 너무나도 잘어울리는 정장 차림. 하지만 현동은 성구의 넥타이에 시선이 고정되고야 만다.
초록색 빗금이 그어진 무늬의 넥타이. 어젯 밤 현동이 성구를 상상하며 그린 그 넥타이와 똑같은 넥타이가 매어져있다. 현동의 두 눈이 불안하게 흔들린다. 성구는 그저 그런 현동이 걱정되는 듯 염려되는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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