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의 숲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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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벗은 가로수 가지 끝에 몇 남지 않은 말라버린 이파리를 떼어내려고 온 힘을 다 하고 있는 차가운 바람의 살의가 느껴지는 11월 말의 오후였다.

 

 

그래도 유리창을 통해서 들어오는 햇살은 점심식사를 마치고 들어온 나의 몸을 나른하게 만들었다.

 

자리에 앉아 메신저를 접속하고 사무실에 들어오면서 뽑아 온 커피를 홀짝거리고 있었다.

 

이대리님.” 아웃바운드의 정현숙씨가 슬며시 내 책상 앞으로 다가왔다.

 

우리 암스테르담의 어느 호텔 쓰고 있어요?”

 

로얄암스테르담 호텔일텐데. 패키지로 나가는건가?” 커피를 기울여 마지막 한 모금을 마시고 컵을 내려놓았다.

 

네 여섯 커플이구요 대부분 50대 부부인데요. 꽤나 까다로와서요. 호텔 선택하는 것도 그렇고 우리측에서 따라가서 에스코트할 사람도 마땅치가 않네요 지원자도 없구요.”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얼마전에 서향린씨가 잘했던 것 같던데? 고객들한테 평도 좋고.”

 

벌써 연락해봤는데 싫다고 거절하네요. 고객 리스트 보여줬었는데 이번 아웃바운드 고객 중에 조한식씨라고 굉장히 다혈질적이고 까칠한 사람이 있어요. 막말도 아무 때나 해 댄다고 자긴 감당 못한다고......” 그렇게 난색을 표하면서 그녀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입가에 슬며시 미소를 띠면서 입을 열었다.

 

이번엔 이대리님이 한번 뛰어주시면 안돼요?” 말을 마치고 그녀는 내 눈치를 살폈다.

 

내가?”

 

, 이대리님은 올해 초에 태국에 아웃바운드 에스코트 하시고는 안 나가셨잖아요. 이참에 유럽의 바람도 좀 쐬시는 게....” 그녀는 말을 멈추고 다시 한번 슬며시 웃어보였다.

 

어쩔 수 없으면 뭐.... 한번 갈 만한 사람 찾아보고 없으면 어쩌겠어.”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그녀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외국에서 통제불능인 고객들을 상대하는 것은 정말 끔찍한 일이었다.

 

올해 초, 태국에서도 예정에 없던 관광을 해 달라고 막무가내이던 남자 고객들이 두셋 있었다. 태국까지 왔다가 화끈한 밤도 보내지 않고 돌아간다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그들은 나를 몰아세웠다.

 

에이, 여기까지 왔는데 이것도 오랜만에 사는 재미를 줘야할 것 아니겠어?” 알맞게 취한 그들은 마치 당연한 서비스를 내가 거절하는 것처럼 호텔의 로비에서 자신의 사타구니를 슬며시 움켜쥐면서 은근한 목소리로 나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다 마셔 버린 종이 커피잔을 손아귀에 쥐고 한번 일그러뜨린 후에 책상 옆의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바로 그때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소현씨였다.

 

얼마동안 잠잠하다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집안의 또 어떤 것과 그녀가 씨름 하고 있었는지 슬그머니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저 소현이예요.” 그녀의 밝고 명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이번엔 또 어떤...... 세탁기가 작동이 잘 안되나요?” 슬며시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 그게 아니구요.” 말을 멈추고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일 있을 때마다 전화드렸죠? 죄송해요. 윤호씨에게 물어봐서 해야하는 건데. 사실 그런건 이상하게 민환씨가 물어보기가 더 편하더라구요.”

 

괜찮습니다.”

 

세탁기 아주 잘 돌아가요.” 그녀가 다시 한번 웃었다


근데 혹시 윤호씨에게서 연락 못받으셨어요?”

 

? 무슨....” 뜻밖의 그녀의 질문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 그럴 줄 알았어.” 다시한번 그녀의 희미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친구들에게는 모두 다 돌렸다고 그러던데, 혹시나 해서 제가 전화 드린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가 좀 더 높아지고 더 밝아졌다.

 

저희 결혼하거든요. 1215일에요.” 그녀가 날짜를 또박또박 책을 읽듯이 발음했다.

 

?” 갑작스럽게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듯, 둔탁하면서 차가운 느낌이 등줄기로 내려와서 퍼졌다.

 

윤호씨는 내년 봄에 하자는데, 윤호씨 집에서나 저희 집에서나 올해를 넘기지 않기를 바라고 있구요. 또 저도 올해 서른인데 내년이면 한 살 더 나이를 먹잖아요. 그래서 올해 넘기지 말자고 윤호씨 설득했어요.”

 

, .” 머릿속이 하얘지고 멍해져서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이 빠졌다. 책상위에 팔꿈치를 괴고는 무거워진 고개를 숙였다.

 

또 그날이 길일이라네요.”

 

...., 축하드립니다.” 얼떨결에 떨리는 목소리로 축하인사가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민환씨가 여행사에 근무하니까 신혼여행은 민환씨에게 부탁하자고 몇 번이나 말을 했었는데 친구네 여행사를 쓰면 할인해달라고 요구하기도 불편하고 서비스도 만족스럽지 못하면 나중에 컴플레인 걸기도 그렇다고 그냥 윤호씨가 아는 다른데 쓰겠다고 그러더라구요. 그러니 그것 때문에 기분 상하지 마세요.” 그녀가 미안한 말투로 슬며시 사과했다.

 

아닙니다. 이해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는걸요.”

 

, 그럼 제가 결혼식 전에 꼭 청첩장 전달해드리도록 할게요. 윤호씨 친구분들 중에서 제가 그래도 제일 마음에 들고 편한 분이 민환씨인데, 꼭 와주세요.”

 

, . 그래야죠. 알겠습니다. 그럼 전 일 때문에....”

 

몽롱한 상태에서 전화를 끊고 휴대폰을 책상위에 힘없이 내려놓았다.

 

 

 

나를 밀어내고 그의 연인이라는 자리를 얻게 된 그녀와 이제는 통화를 하게 될 때, 여느 지인들과의 통화와 다르다고 할 만한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내 자신을 돌아보면서 나도 그를 잊은 줄 생각했었다. 아니 최소한 거의 극복해 가고 있는 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내가 빠진 그 빈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보면서도 그녀의 존재는 그저 허상의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에, 나에게 그다지 큰 상처나 충격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항상 내 마음속의 아픔은 바로 로부터 기인한 것이었다. 그의 말 한마디, 그의 태도, 그의 행동, 그의 결정이 나를 지옥으로 몰아 넣었었다.

 

하지만 그는 이제 과거의 존재로 남았을 뿐이라고 생각했었다. 이제 그로부터 홀가분해진 나는, 현재의 나로 만족스럽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내 마음속에 그가 떠난 후에 비어있던 자리를 채우기 위해서 이제 나도 다른 사람과의 만남을 시작하지 않았는가.

 

그와 그녀의 그런 모호한 관계, ‘허상의 연인이라는 손에 잡히지 않는 구체적이지 않은 관계는 나에게는 그렇게 큰 위력은 없는 것이다라고 내 자신을 세뇌시키고 있었다. ‘진정한 연인이라는 관계도 그와 나의 사이처럼 언제든지 끊어질 수 있는 것을 의미하니 말이다.

 

아마 속으로 내 자신도 그와 그녀의 관계도 앞으로 진행되는 도중에 아무때라도 어떤 계기로든 끊어질 것이라고 미리 예상이라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니 그것을 기다리고 갈망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겉으로 내세우기에 필요한 허울만 제공해 줄 그녀와 그의 그런 관계는 언제고 빠른 시일 안에 끝이 나고 말 것이라고 내 마음 저 깊은 곳 어디 에서인지 손꼽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 끝을 보게 되는 날, ‘그것 봐라. 너와 그녀의 알맹이 없는 껍질만 그럴듯한 열매는 외부에서 가하는 아주 작은 힘에 의해서도 그렇게 쉽게 깨져 버리는 것이 아니냐고 그들의 실패한 관계를 조소하고 비웃어줄 그날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가능하다면 틀림없이 내가 있어야할 자리, 나만의 자리라고 내가 믿고 있던 그의 곁으로 다가가 다시 그곳을 차지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공식적이라는 것과 합법적이라는 것은 내가 상상하지도 못한 너무나도 큰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을 나는 간과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사회 안에서 존재해야하는 인간으로서 사회 구성원들이 모두 인정해주고 지지해주는 그 공식합법이라는 것을 모두 차지한 그녀 앞에서 나는 한 낮 지렁이 한 마리에도 견줄 바 못되는 보잘 것 없는 존재일 뿐이었다.

 

우리 셋 중에서 가장 큰 희생자는 그녀일 것이라는 생각에서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쥐고 가여운 듯 안됐다는 시선으로 쯧쯧혀를 차면서 나를 내려다보는 그녀의 시선이 느껴졌다.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회사의 건물 밖으로 나왔다.

 

정해진 가격으로 몇몇 나라를 가장 효율적으로 돌아볼 수 있는 상품을 뽑아 달라는 고객을 만나러 나가는 길이었다.

 

차가운 바람이 맞은편에서 불어와 나의 와이셔츠를 꿰뚫고 가슴을 공격했다. 넥타이는 내 목 뒤쪽에서 국기처럼 펄럭이고 양복 윗저고리는 등 뒤에서 춤을 추었다. 나의 현실은 이럴진대 아니 한겨울의 혹한 속이라는 것을 잊고 마치 삼월의 봄소식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었다.

 

내가 측은하게 여기고 있던 그녀가 오히려 모든 것을 갖고 있었다. 나는 이제 아무런 힘도 없게 되는 것이었다. 아니 그와 나의 관계속에서 나는 처음부터 아무런 힘도 없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이제는, 어쩌다가 그를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조차 불륜이 되는 것일까?

 

 

 

런던에서 어디가 제일 좋은 줄 알아?” 그가 어느 날 저녁 동네 공원을 산책하다가 물었었다.

 

글쎄, 나야 뭐 영국에 가 본 적이 없으니 알 수가 없지.”

 

좋은 곳이야 많이 있지만,” 그가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세인트 피터스 파크가 제일 좋더라.”

 

나도 그를 따라 발을 멈추고 그를 마주보았다. “거기 뭐가 있는데?”

 

, 뭐 별게 있는 것은 아냐. 그냥 작은 공원일 뿐이고, 그 가운데 작은 연못이 있어. 내가 거기 갔을 땐 그 연못에는 하얀 오리 몇 마리가 있었고. 사람들이 먹을 것을 줘서 그런지 사람들을 무서워하지 않더라고. 6월 초의 따사로운 날씨 속에서 그 앞에 있는 벤치에 앉아 있었던 적이 있었는데 마음이 너무나 평화로워서 천국이 이런 곳이려니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가 나를 보고는 싱긋 웃었다.

 

너랑 만나면서 꼭 너를 거기로 데려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나한테는 천국에서 너와 있다면 더 바랄게 뭐가 있겠냐?” 그가 손가락을 들어 슬쩍 내 코를 누르면서 웃었다.

 

 

그 모든 것은 허황된 꿈일 뿐이었다. 모든 것이 한낮 이루어질 수 없는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가 그렇게 말한 모든 것들이 그저 진정한 의도가 부여되지 않은 이였다. 그저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작업멘트이었다는 것을 아마 그때에도 나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그가 하는 말에 그가 아닌 내가 진정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어떠한 허황된 가능성도 꿈 꿔볼수 없다는 것은 정말로 잔인한 일이었다.

 

그녀가 승리자였고 나는 패배자였다. 나는 마침내 그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이미 나의 존재는 그들에게는 무의미하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 두 사람을 두고 나 혼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는 자체도 역겨울 정도로 우스웠다.

 

 

지하철 역에 도착해서 하찮은 나의 존재를 잘게 씹고 있는 동안 휴대폰의 진동이 느껴졌다.

 

김종현, 그였다.

 

바쁘지 않아? 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전화를 하네?” 그의 목소리를 듣자 준비하지도 않고 생각지도 않았던 말들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 왠일이야? 만나면 항상 개 닭보듯 하면서.... 오늘은 목소리도 다정한 걸?” 그가 슬며시 웃음 지으면서 은근히 속삭이는 투로 말했다.

 

소 닭보듯이겠지. 마음에는 있는데 내가 표현을 잘 못해서..... 혹시 오늘 시간 있어? 나 오늘 같이 있고 싶은데. , 괜찮다면 좋은데서 밤새 같이 있어도 되고.”

 

정말?” 내 말에 그가 놀랍다는 듯 믿어지지 않는 듯이 물었다.

 

그러는 사이에 승강장으로 지하철이 들어왔다.

 

 

그가 어떤 말을 나에게 속삭였지만 나는 주위의 소음으로 인해서 무슨 말인지 알아 듣지 못했다


그저 무의미하게 웃는 나의 얼굴 표정 이면에 차가운 절망만이 내 마음속에서 넘쳐 나와서 눈과 귀 밖으로 흘러나와 나의 시야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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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환이 거의 고문을 당하네요 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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