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의 숲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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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밤, 시간에 맞추어 약속장소에 나왔는데 그는 이미 먼저 와서 한잔 하고 있었다.
“이것만 윤호한테 건네주면 되는거지?”
노란 서류봉투를 나에게서 건네 받고 서현이 물었다.
“네 그것만 건네주시면 되요.” 그를 보고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술 사드리려고 했는데 벌써 많이 드신거 같네요?” 그의 붉은 빛이 번져있는 얼굴을 보면서 내가 물었다.
“아, 아는 사람들을 먼저 만났는데, 한잔 하자고들 해서.” 그가 허허 하고 웃었다.
“걔 하고 너 진짜 행복해 보이더라. 종현이 하고...” 그가 계속 입가에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 이었다.
“예.” 그런 그를 보고 행복하다는 표정을 일부러 과장하여 지어보였다.
그가 자신의 앞에 놓여 있던 소주잔을 비우고 다시한번 그 서류봉투에 눈길을 주었다.
소주병을 들고 그의 잔을 채웠다.
“윤호는 몸이 안 좋아서 병원에 있다.” 그가 말을 멈추고 나를 보았다.
“아..네...” 그가 소주잔을 들고 나에게 내밀었다. 나도 내 잔을 들고 그의 잔에 슬며시 부딪쳤다.
‘어디서 누구한테 들었냐?“ 놀라지 않는 나의 표정을 보고 그가 물었다.
“그게........”
“왜?” 말을 잇지 못하는 나를 보면서 그가 다시 물었다.
“소현씨 한테.......” 말을 삼키고 소주잔을 비운 후 역시 자신의 잔을 비우고 내려놓는 그의 잔에 소주병을 들어서 채웠다. 그가 병을 건네 받은 후 내 잔을 채웠다.
“그래....” 그가 고개를 끄덕끄덕거렸다.
“그럼 대충 무슨 일 있었는지 들었겠네.”
나는 아무 말 없이 내 앞에 있는 술잔을 바라보았다.
“곧 청주로 내려간다고?”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면서 그가 물었다.
“네, 그러려구요. 종현이하고 같이 있고 싶어서요.”
“그래.... 좋겠다.” 그의 말투가 꼭 축하하는 듯한 의미가 아닌 빈정대는 투로 느껴져서 고개를 들어 그의 표정을 살폈다.
그가 다시 자신의 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둘이서 행복하고?” 그가 눈을 들어 나를 보았다.
술이 많이 취했는지 나를 바라보는 그의 동공은 풀려 보였다. 빈 소주잔을 쥐고 있는 손도 떨려보이는 듯 싶었다. 하지만 그는 그 빈잔을 다시 나에게 내밀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무의식적으로 소주병을 들어 그의 잔을 채웠다.
“너! 내가 뭣 좀 물어봐도 되냐?” 갑자기 그가 나에게 물었다.
“........” 아무 말도 못하고 그런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너랑 윤호 몇 년 사귀었냐?”
“형, 취하신것 같아요.”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슬며시 그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게. 몇 년 사귀었냐구.”
“이년반....정도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같이 산건 몇 년인데?” 그가 다시 물었다.
“일년 좀 넘게.......” 말을 끝내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가 다시 소주잔을 들어 한입에 들이켰다.
“너 윤호 좋아했냐?” 그가 붉게 충혈된 눈으로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면서 물었다.
“너 윤호 사랑했어? 그랬어?” 그렇게 묻는 그의 목소리가 더 커졌다. 주변의 다른 테이블에서 술을 마시던 사람들 몇몇이 그의 목소리에 우리를 돌아보았다.
“네..... 그때에는....” 그가 술이 취하기 전에 진작 건네 주고 갈 것을 공연히 고맙다는 인사치레 하느라 이렇게 붙잡혀 있었던 것이 후회되었다. 그가 이렇게 술에 취하면 진상이 된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나의 실수였다.
“너 윤호 잘 안다고 생각하니?” 그가 다시 물었다.
“네... 어느 정도는...” 말하지 않고 시간을 끄느니, 얼른 그가 묻는 것을 대답해주고 술자리를 끝내는 편이 낫겠다는 계산이 나왔다. 그래서 고분고분 대답하기 시작했다.
“니가 걔를 얼마나 아는데?‘ 다시 그가 물었다.
“........”
“나는 말이야....” 그가 소주가 가득 들어있는 잔을 손에 들고 흔드는 바람에 그와 나 사이에 있던 안주 위와 테이블 위로 소주가 튀었다.
“걔네 아버지, 엄마..... 그 사람들 밑에서 일하는게 더럽고 치사해서..... 몇 번을 그만두려고 했었어. 내가 배운게 없어서, 당장 먹고 살아야 하니, 그런 꼴 보면서 버텼지만!” 그가 말을 멈추고 소주잔을 들어 다 쏟아져서 거의 남아있지 않던 술을 입안으로 털어부었다.
“그런데, 말야! 윤호는 달랐어!”
그가 손을 들고 손바닥으로 그의 입술을 닦았다.
“나 아직까지 살아오면서. 그렇게 바르고 괜찮은 애 못봤다! 나 가끔 저런 부모사이에서 어떻게 저런 아들이 태어났을까 하고 믿어지지 않을 때가 많았어.” 말을 멈추고 그는 나에게 빈 소주잔을 내밀었다. 무표정하게 나는 소주병을 들어 그의 잔을 채웠다.
“걔랑 내가 뭐 많이 얼굴 보고 얘기 해 본건 아니지만. 그래도 인간 됨됨이는 알지!” 그가 말을 멈추고 소주가 가득 찬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휴지를 들어 자신의 입술을 닦았다.
“걔가.... 걔가!” 그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잠시 말을 멈췄다.
“너를 어떻게.... 얼마나 생각했는지 아냐?” 그가 내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나는 반쯤 비어있는 소주병으로 시선을 돌렸다.
“걔가! 윤호가... 어떻게 그 여자애하고 결혼하게 된 건지는 알고 있냐고!” 그의 강렬한 눈빛이 여전이 느껴졌다. 그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하려고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니 이미 모두 지난 이야기 꺼내고 싶지 않고 다시 듣고 싶지도 않았다.
술이 취해서 나의 앞에서 주정을 부리고 있는 서현이의 입을 손바닥으로 틀어막아 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윤호로 인해서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그의 배신이 얼마나 나의 가슴에 큰 상처를 주었는지, 그리고 그 상처가 아직도 나의 마음 깊은 곳에 남아서 수시로 불쑥불쑥 튀어나와 나를 또 얼마나 아프게 하는지 말해주고 싶었다.
“다....다 내 잘못이긴 하지. 그래 내 잘못이야. 그래 내가 미안해!” 갑자기 그가 테이블에 팔꿈치를 괴고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정말 취한 듯 싶었다. 아마 서현이 그 자신도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지 모를 것이 틀림 없었다.
“실수였어. 그래 내가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야. 진짜 실수였어.” 그가 손으로 자신의 눈을 비볐다.
“사모가! 윤호 엄마가 뒤에서 내가 통화하는걸 듣고 있을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 그냥 점심먹고 휴게실에 아무도 없길레 담배 한 대 빨면서 지나가듯이 한 말이었을 뿐이었어.” 그가 더 강하게 자신의 눈을 비볐다. 그리고는 다시 소주잔에 손을 뻗었다.
“이런 저런 얘기하다가 슬며시 우리 사장 아들도 지 애인하고 동거하고 있다고.... 여자하나 구해서 부모한테 소개는 시켜주는데 결혼할 건 아니라고....” 그가 소주잔을 움켜쥐고는 고개를 숙였다.
‘쿵!“ 하는 소리가 내 가슴 저 아래쪽에서 울렸다. 가슴이 저리고 뻑뻑해졌다. 머리가 멍해지고 몽롱해지기 시작했다.
“농담이라고... 말을 안하려고 했지만.... 윤호 엄마가 어떤 사람인지... 넌 몰라.....” 그가 들고 있던 소주잔을 놓치면서 그의 바지에 모두 튀었다. ‘쨍’하는 소리와 함께 소주잔이 바닥에 떨어졌다.
술집의 알바가 와서 모두 청소를 하고 새 소주잔을 건네줄 때까지 서현과 나는 몸이 굳은 듯 꼼짝 하지 않았다.
“걔네 엄마가 윤호를 불렀어. 집으로.....”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런말 저런말로 윤호를 협박을 했다. 넌 몰랐지?" 그가 일그러진 표정으로 힘들게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호적에서 파내겠다고 했어.” 그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나 윤호 그런 모습 처음 봤다.” 그가 다시 손을 뻗어 소주병을 들어서 흔들거리는 손으로 소주잔에 술을 따랐다.
“다 필요없다고 그랬어. 어머니 마음대로 다 하시라고. 재산도 필요 없다고. 원하면 주신거 다 가져가시라고. 원하면 부모 눈앞에서도 사라져주겠다고....” 그가 간신히 소주잔을 들어 입술에 대고는 다시 힘들게 내려놓았다.
“그런데, 사모가 그러더라. 너! 민환이! 인생 종치게 해주겠다고!” 그가 다시 소주잔을 움켜쥐었다.
“회사에 찾아가서 망신주고 평생 따라다니면서 말려죽이겠다고 했어! 그러니까, 그 말 듣더니 지 엄마 앞에서 무릎꿇더라! 그렇게 당당하게 맞서던 놈이 니 이름 하나에 그렇게 쓰러지더라구!” 그가 나를 일그러진 표정으로 노려보았다.
“난 얼마나 대단한 놈을 만났길레 저 정도 되는 애가 저렇게 까지 할 까 싶었다!” 이제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느껴졌다.
“너. 뭐? 새 애인 만나 행복해? 그놈하고 더 행복해지려고 그놈 따라 어디로 간다구? 지난 해 11월에 만났어?” 그가 내 얼굴을 향해 악을 썼다.
“니가 직접 윤호 만나서 이거 건네 줘. 이 천하에 나쁜 새끼야.” 그가 테이블 한 구석에 놓여있던 서류를 집어서 나를 향해 내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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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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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참해지는 건
진심을 바로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번 화와 같은 이야기 패턴은 작가님 특유의 비틀기가 아닌가 싶다.
뻔하면서도 뻔하게 다가오지 않는 이유는
그만큼 작품의 밀도가 단단하기 때문은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