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의 숲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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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분하고 잔잔하다고 느껴지던 카페의 배경음악이 우울하고 암울하게 느껴지는 저녁이었다.
창가의 좌석에 앉아 창 밖을 내다보던 그녀가 다시 고개를 돌려 나를 보고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윤호씨 내일부터 다시 출근해요.” 그녀가 손에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예..... 다행이네요.” 그런 그녀를 초점 없이 멍하니 보고 있었다.
“아버님이 어제 회사로 전화를 하셨어요.” 그녀가 다시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출근해서 물려받을 회사일도 좀 배우고 하라고 재촉하시는데 윤호씨는 여전히 황소 고집이라고.....”
그녀는 오른손 검지 손가락 끝으로 왼손에 끼어있는 결혼반지를 슬며시 문질렀다.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는지, 혹시라도 나에게 보여주려는 의도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그녀는 잠깐 동안의 침묵동안 손가락으로 반지를 만졌다.
“윤호에게 헤어지자고 말씀하셨다고....” 침묵이 어색하고 불편해서 딴이 어떤 말을 찾으려고 했지만 할 말이 없었다.
이미 그녀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고, 나 스스로 윤호의 ‘그’였다고 고백하려고 만난 자리지만 벌써 만난지 20분이 넘도록 나의 입은 얼어 붙은 양, 고백의 근처까지 가지도 못하고 있었다.
“네.” 그녀가 대답했다.
“아직 윤호씨 부모님에게는 말씀 못드렸어요.” 그녀가 말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제 부모님은 이미 아시지만, 윤호씨 부모님은 사실........” 그녀가 말을 잇지 못하고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윤호씨 부모님이 보통 부모님은 아니시잖아요. 아시죠?” 그녀가 물었다.
“그냥. 언뜻 듣기는 했습니다. 어머님은 한번 뵌 적이 있긴 하지만....”
“윤호씨 어머님을 뵌 적 있었어요?” 그녀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네. 윤호 생일에 한 번.....”
“어떠셨어요?” 내가 말을 잇기를 기다렸지만, 그저 입을 다물어 버린 나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그녀가 호기심에 찬 표정으로 물었다.
“그냥 몇 마디 나눈 것 밖에 없어서... 뵐 때에는 좋으신 분 같다고...” 말을 멈추고 고개를 숙여 내 앞에 놓인 커피를 내려다 보았다.
“저도 처음에는 그냥 자상하신분으로만 알았었어요.”
그녀의 말에 고개를 슬며시 들어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성격이 좀 불같으신 면이 있지요?” 나의 표정을 살피면서 그녀가 겸연쩍게 웃었다.
“소문으로 그렇다고 들은 적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녀에게 슬며시 맞장구를 쳤다.
“결혼식 끝난 직후에 윤호씨하고 시댁에 들렀다가 나오는데, 집 앞에 누가 차를 세워놓았더라구요. 그 차 때문에 우리 차를 빼기가 힘든 거예요. 그때 어머님이 그러시더라구요. ‘어떤 미친놈이 남의 집 앞에 차 세워놓았어’ 라고요. 그러시면서 ‘잡히면 다리몽둥이를 분질러서 다시는 못 걷게 하겠다’ 고...” 말을 마치고 그녀가 나를 보고는 픽 하고 다시 웃었다.
“윤호씨는 그 말 듣고 그냥 고개를 으쓱 하더라구요. 익숙하다는 듯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녀의 말에 그냥 고개를 슬며시 끄덕거리기만 했다.
"민환씨와 이런 대화를 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는데....“ 그녀가 나를 한번 보더니 시선을 그녀의 커피로 옮겼다.
그녀의 말의 의미를 깨닫고는 나도 모르게 잠시 풀렸던 긴장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윤호씨에게서 내가 알고 있었다는 말씀 들으셨다고.....”
“네..” 그녀의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아서 그저 시선을 앞의 커피에 고정시키고 눈만 끔뻑거리고 있었다. 이런 내 처지가 멍청한 금붕어 같다는 뚱단지 같은 생각이 들었다.
“윤호씨를 만나기 시작한 처음부터....” 그녀가 잠시 동안의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무의식적으로 민환씨에게서 라이벌 의식을 느끼기 시작했어요.”
“..........”
“무슨, 특별한 이상한 것을 눈치챘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는데도, 꼭 두 사람 사이에 내가 끼어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요.”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냥 그렇게 그녀의 말을 멍한 상태로 듣고 있었다.
“민환씨가 윤호씨 집에서 나간 후에 연락을 전혀 하시지 않은 것도 이상하게 생각이 들었어요. 일반적으로는 그렇게 친한 친구들은 그 후에도 자주 서로 불러내서 보고 해서 여자친구를 짜증나게 한다고 알고 있었거든요.”
나는 여전이 꼼짝 하지 못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그래서 혹시 내가 무슨 잘못한 일을 하거나 말 실수를 한 적이 있나 하고 생각도 했었어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내 옆에서 누워자는 것도 불편해 한다는 느낌을 주던 그가, 하루는 술이 취해 들어왔어요. 침대에 정신없이 쓰러져 잠들어 있는 그의 양말을 벗기는데 그가 잠꼬대를 했어요. ‘환이야’ 하고요." 그녀가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슬며시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목소리가 저렇게 달콤할 수도 있구나 하고 문득 생각했었어요. 처음에는 ‘하니야’ 라는 말로 잘못 들어서 순간 그게 예전에 사귀던 여자 이름인가 했었어요. 그래서 혼자서 그 이름을 골똘하게 생각해 보는데 갑자기 민환씨가 떠오르더라구요.”
“죄송합니다.” 갑자기 다물고 있던 입에서 이런 사과의 말이 튀어나왔다.
“네?” 그녀가 나의 말에 웃음을 지었다. “아니예요. 민환씨나 누구를 비난하려고 이런 말씀 드리는게....” 그녀가 말을 멈추고 커피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그냥, 대화할 상대가 필요했어요. 그리고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분은 민환씨 밖에 없고요.”
“.........”
“그때부터 ‘아닐거야’ 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의 행동이 의심스러워 ‘혹시, 설마’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거기서 멈췄어야 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한번 그런 생각이 드니 점점 더 의심은 커지고 확인해 보고 싶어지고...”
“.........”
“결혼 전에 윤호 어머님이 저녁이나 같이 하자고 부르셔서 윤호씨와 같이 간 적이 있었어요.”
“..........”
“제가 식사 도중에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민환씨 얘기를 한 적이 있었어요. 민환씨 덕분에 거실 전기 나간 것 교환했다고....” 그녀가 말을 멈추고 낮게 한 숨을 쉬었다.
“그냥 나온 말이었는데, 윤호씨 어머님 안색이 한순간 바뀌시더라구요. 그러시더니 윤호씨에게 ‘너 아직도 그 ** 만나고 다녀?!’ 하고 버럭 화를 내시더라고요. 순간 그렇게 말씀하시는 어머님에 얼마나 놀랐는지....”
“...........”
“그리고 아차 싶으셨던지, 표정 다시 밝게 바꾸시고 저를 돌아보시면서 인자하게 말씀 하시더라구요. ‘민환이 착해보일지 모르지만 가까워서 좋을 사람 아니다’라고 ‘연락하지 마라’ 고요.”
나도 모르게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민환씨 혹시 들으셨는지 모르지만, 저희 신혼여행 끝나고 돌아오자마자 윤호씨하고 어머님 하고 크게 한바탕 말다툼이 있었대요. 어머님이 화를 내시면서 이번에는 틀림없이 민환씨 회사 찾아가서 망신시키고 사표 쓰게 만드시겠다고...." 그녀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등골이 오싹해지며 시야는 몽롱해졌다.
”결혼하기 전에도 어머님이 그렇게 협박하셔서 윤호씨가 민환씨와 헤어진거라는걸 알게 되었어요“
”........“
"어머니 성격 아는 윤호씨가 회사에다가 급한 일이 있다고 며칠 휴가내고 민환씨 회사 앞에서 혹시 어머니가 들이닥치실까봐 민환씨 퇴근때까지 지켜봤다는데 모르셨죠?”
순간, 퇴근 후 회사 앞에서 윤호를 본 것 같다고 종현이 한 말이 떠올랐다. 손바닥에서 땀이 배어나왔다.
“어머니의 민환씨에 대한 그런 과민 반응도 너무 이상하고, 그래서 친한 친구하고 얘기 해보고 친구 남동생에게 부탁을 했었어요. 그러면 정말 안되는 건데, 그때는 제가 이성을 잃어서....” 그녀의 목소리가 낮고 우울해졌다.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석고상처럼 꼼짝 않고 있었다. 모든 것이 불편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도 불편했고, 앉아있는 카페의 의자도 불편했다. 그러다 보니 숨쉬는 것도 불편해졌다. 가능하면 모든 것을 멈추고 싶었다.
“처음엔 민환씨 원망 아주 많이 했었어요.” 그녀가 말을 멈추고 다시 커피잔을 들었다.
그녀의 말에 나는 눈을 감았다. 어떻게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는 내가 피해자라는 생각 이외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어요. 민환씨에게 전화를 해서 원망의 말을 해주고 싶었어요. 그때 내가 얼마나 가슴이 아픈지...... 나는 민환씨의 존재만으로 이렇게 고통을 받는 데 민환씨는 아무것도 모르고 이미 모든 것을 잊고 아무일 없는 듯 살고 있겠지 하고 생각하니 내 자신이 너무 비참했어요.”
나는 무의식적으로 땀이 배어 있는 두 손바닥을 펴서 허벅지에 슬며시 문질렀다.
“어느 날 친구가 제게 말을 했어요. ‘이미 모두 지난 일이고 누구든지 과거에 사랑했던 사람이 있고 또 다 잊고 새로 시작하고, 그런 일을 반복하는데, 전에 너의 남편이 사랑했던 사람이 남자였다고 그 상대를 그렇게 미워할 필요가 있겠냐’ 고요. ‘그 상대가 여자가 아닌 남자라서 네가 쉽게 네 상처를 그에게 뒤집어 씌우고 있는 것은 아니냐’ 고요. ‘문제는 민환씨가 아니고 니 남편’ 이라고 말하더라구요. 자꾸 과거에 얽매여서 내 자신 괴롭히지 말고 이제 게이인 남편하고 내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나 생각 하라고요.
다시 한번 나는 바싹 마른 입속에서 건조해진 침덩어리를 삼켰다.
“그런데도..... 그렇게 원망하면서도 또 의지할 사람은 민환씨 밖에 없더라구요.” 그녀가 말을 멈추었다. 이마에 그녀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런데 민환씨는....”
그녀의 말에 그녀의 시선을 피하던 내가 힘들게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자기 애인 빼앗고도 그걸로도 모자라서 시시콜콜 집안일 물어보는 나에게 친절하게 모두 다 대답해주시고...”
“..........”
“저번에도 민환씨 만났을 때, 민환씨에게 그 말을 하려고 했는데... 차마 입에서 떨어지질 않아서...” 그녀가 말을 멈추었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녀가 조용히 휴대폰을 귀에 대고 속삭였다.
“윤호씨 부모님 오늘 뵙기로 했거든요. 윤호씨 퇴근하면서 같이 가기로 했는데 지금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나중에 다시 뵈요 민환씨...”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아직도 멍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나를 내려다 보았다.
나는 그저 고개를 들고 그녀를 쳐다보고는 고개를 숙였다.
“여보세요” 어둠속에서 종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입은 벌렸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잠시 어두움 속에서 가만히 있었다.
방의 벽에 기대고 나오지 않는 목소리에 힘을 주려고 했다.
“민환아....... 잘 지내고 있지?”
“.........”
“전화 줘서 고마워. 내가 얼마나 네 전화 기다렸다구.”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속에 반가움과 아픔이 섞여 있었다.
“미안해... 일찍 전화를 했어야 했는데...” 목에 힘을 주어 간신히 그에게 말을 건넸다.
“알아.” 그가 여전히 다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가 그냥 먼저 전화 하지 그랬어.” 그런 그의 목소리에 울컥해서 말했다.
“너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 알고 있어서.... 너에게 시간을 주려고... 네 팔 잡아서 나에게 강제로 끌지 말고..”
“..........”
“그런다고 끌려 올 것도 아니고...”
“윤호 만났어.” 잠시 침묵이 흐른 후 내가 조용히 말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나... 너한테 너무 미안해.” 말을 멈추고 머리를 벽에 대었다. 몸을 슬며시 숙이자 머리카락이 벽에 비벼지는 소리가 났다.
“윤호에 대한 감정이 아직 완전히 정리가 되지 않아서.....” 말을 멈추고 깊게 한 숨을 쉬었다.
“너한테 너무 못할 짓 하는 것 같아서....” 손을 들어 눈을 비볐다.
“진작 너에게 다 말을 했어야 하는데.....” 목이 컥 하고 막혀서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냐.” 그렇게 말하는 나의 말을 그가 잘랐다.
“나. 그거 다 알고 너 만나기 시작한거야.”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조용했다.
“너가 어떤 결정을 하던지 난 그냥 네 그 결정 따라야지 뭐.” 마치 아무일 아니라닌 듯 그가 유쾌한 말투로 말했다.
통화를 마치고 침대에 누웠다.
내가 가장 싫어하던... 술자리에서 친한 사람들과 모여서 안주로 씹어대면서 내가 그렇게 증오하고 비웃던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렇게 친구들과 모여서 그런 사람들의 행동을 비난하면서 훈수를 두었건만, 막상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할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이제 이틀 후면 보름동안 유럽으로 떠나게 되어 있었다.
이렇게 결정하지 못하고 헤메고 있는 나를 위해서 운명이 나에게 시간을 벌어주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현실도피를 하려는 나의 의도와 맞아들어 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다시 돌아올 때에는 나의 눈에 뿌옇게 번져있는 이 모든 상념과 방황을 걷어내고 시야를 밝게하고 확실한 방향을 찾아가자고 생각하면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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