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 프린스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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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
오전 근무를 마치고 지하식당에서 정훈은 점심을 먹고 있었다.
주말동안 맑았던 날씨가 다시 변덕을 부려 아침부터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통풍이 잘 되지 않아 답답한 기운에 습도는 높은 회사의 지하에 있는 식당은 눅진눅진한 기운에 불쾌감을 주었다.
넘어가지 않는 밥을 억지로 입 안으로 집어 넣고 있을 때에 사무실 직원들이 점심식사를 하러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영업부 윤소연씨와 같이 건너편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던 연희누나가 정훈을 발견하고는 얼굴에 반가운 미소를 지으면서 슬며시 다가왔다.
“점심 다 먹었어?” 정훈의 옆에 앉은 현장 직원들에게 웃으면서 인사를 하고는 정훈을 보면서 그녀가 물었다.
“네, 이제 그냥 휴게실에 가서 잠깐 눈이나 붙이려구요.” 수저를 내려놓으면서 그가 그녀를 올려다보고는 씨익 웃었다.
“근데, 너 휴대폰 꺼놨어?”
“아! 배터리가 다 되어서요. 충전해야 하는데....”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면서 정훈이 자리에서 일어나 식판을 들었다.
“가져와. 사무실에서 내가 충전해 놓을테니까 퇴근하면서 들러.”
“네. 근데 휴대폰이 꺼진 줄은 누나가 어떻게....”
“오전에 현준씨 전화 왔었어. 너 휴대폰 꺼져 있다고.... 퇴근하면서 꼭 전화 달래. 꼭 해야 한다고 했어.” 그녀는 ‘꼭’ 자에 힘을 주어서 반복해서 말하고는 한번 웃어 보이고 자신의 테이블로 돌아갔다.
사실, 그는 의도적으로 그의 휴대폰을 꺼 놓은 것이었다.
이제는 완전히 현준을 잊겠다고 결심한 그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흔들리는 자신을 붙잡기 위해서 한 행동이었다.
현준과의 모든 접촉의 수단이 되는 휴대폰을 꺼 놓는다면 더 이상 자신이 그에게 목을 메고 있을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는 현준을 그의 머릿속에서 몰아 내기 위해서 오전 내내 그렇게 단순한 작업에 집중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퇴근 후, 그녀에게 맡겨 놓았던 휴대폰을 찾아 들고 회사를 나오는 순간부터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가면서도 그는 계속 망설이고 있었다. 현준이 그와 꼭 통화를 해야 할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무슨 이유로 연희누나에게까지 전화를 해서 꼭 연락을 하라고 그가 말 한 것인지 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집에 도착해서 담에 기대어 있는 자전거의 안장에 걸터 앉아 한참을 그는 망설였다.
하지만 아무래도 현준에게서 그 이유를 듣고 싶었다.
그는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여 꺼져 있던 휴대폰의 전원 스위치를 눌렀다.
잠시후에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신호가 연속해서 울렸다.
5통의 문자가 모두 현준에게서 온 것이었다. 음성메세지도 하나 있었다. 그는 슬며시 사서함 번호를 눌렀다.
“현준이 형이야....” 여전히 다정한 현준의 목소리가 그의 귓속에서 울렸다.
이제는 그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고 자신에게 타이르면서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진정시키려고 정훈은 손을 가슴에 올려 슬며시 문질렀다.
“오늘 퇴근 후에 좀 봤으면 하는데 꼭 연락해. 내가 집으로 찾아갈게.”
집으로 오겠다는 마지막 말에 화들짝 놀란 정훈은 망설일 여유도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퇴근했지? 이제야 통화가 되네?” 현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그런데 무슨일로....”
“특별한 일 없으면 집에 지금 들렀으면 하는데?”
“지금요? 여기를요?” 정훈의 목소리가 커졌다.
“어, 왜? 안돼?”
“저 지금 약속 있어서 나가봐야 해요. 그리고 또 오늘 과외라서 시간 여유가 없을 것 같은데요.”
“아! 그렇군..... 그럼 어쩐다...”
“왜 그러시는데요?” 낮은 목소리로 냉정하게 정훈이 물었다.
“그럼 내일은?”
“.........”
대답 대신 다시 묻는 현준에 당황한 정훈은 순간 어떤 핑계도 갑자기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낯선 시흥시에서 그가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게다가 이틀을 연속 외출을 할 리도 없다는 것을 현준도 뻔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를 피하고 싶었던 만큼 그에게 자신이 뻔한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도 보여주기 싫었다.
“내일은 괜찮은 모양이네? 그럼 내일 다른 약속 잡지 말고 퇴근하면 집에 있을래? 내가 아마 먼저 도착할 것 같은데...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멍하니 핸드폰을 귀에 대고 있는 정훈에게 그렇게 자신이 할 말을 한 다음 그는 “내일 보자” 라는 말을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무슨 일로 그러는지 궁금증이 커지는 만큼 정훈은 냉정해지려고 노력했다.
방 한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서 자신이 어떻게 행동을 해야 현명한 것인지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무슨 일로 그가 보자고 하는 것이든,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나버린 일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시작도 하기 전 그에게는 모든 것이 리셋이 되어버린 상황처럼 보였다.
마음 한 켠에, 혹시나 하는 생각에 교통사고나 어디 아픈 것은 아닌지 걱정을 하고 있던 자신에게 그렇게 멀쩡한 목소리로 아무렇지도 않게 통화를 하는 현준의 목소리가 다시 그의 귀에 들리는 듯 했다.
잠시라도 연락을 하지 않던 그의 걱정을 했던 자신이 멍청했던 바보로 생각되었다.
이제는 그런 정훈에게 베풀었던 현준의 모든 행동이 미리 계산된 것처럼 생각되기 시작했다.
그가 보인 것은 진정한 관심이 아니었다.
보잘 것 없는 상황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그를 가지고 장난을 친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마치 아무것도 없는 바닥의 삶을 살아가던 그에게 자신의 존재는 얼마나 큰 것인지 알라는 듯한 의도인 것처럼 느껴졌다.
너와 같은 하찮은 존재는 내가 베푸는 한 조각의 관심, 한번의 물질적인 원조를 얼마나 감사하게 받아야 하는지, 자신의 존재와 비교하여 얼마나 부족하고 낮은 존재인지 알라는 듯한 의미로 여겨졌다.
이제라도 그런 그의 숨겨진 진정한 실체를 깨달은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하는 생각이 그에게 들기 시작했다. 적어도 그의 그 속물적인 게임속에 자신은 아직 한 발도 담그지 않는 듯 보였다.
역시 세상에서 진정으로 믿을 사람은 자신 밖에 없었다.
또한, 자신의 주변에 결계를 치고 사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것은 살아가면서 때로는 귀중한 방편이었다. 특히 자신처럼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상황에서는 말이다.
그렇게 자신을 가지고 노는 듯한 현준에게 정훈은 절대로 마음을 열지 않을 것이다. 그럼으로 그는 절대로 정훈에게 상처를 줄 수 없을 것이다.
화요일 오후, 퇴근 후, 정훈의 집 앞에서 그를 기다리다가 골목을 돌아서 나타나는 그를 보더니 현준이 환한 웃음을 지었다.
그의 얼굴이 환한 만큼 정훈은 냉정한 표정을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렇게 현준의 실체를 혼자서 머릿속으로 파악을 해보며 결코 그의 마수에 걸리지 않겠다고 결심했지만, 눈 앞에 그의 웃는 모습이 보이자 그런 그의 결심이 5월의 햇볕 아래의 눈처럼 순식간에 녹아버렸다. 그리고 그런 다정한 모습의 현준이 자신이 생각한 그런 존재일 리가 없다는 생각이 떠오르면서 그런 생각을 붙잡고 싶다는 욕망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현준의 시선을 피해서 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대문 앞에 놓여 있는 박스 두 개를 발견했다.
“이건 뭐예요?”
“아, 별건 아니고....” 여전히 미소를 띈 얼굴로 현준이 입을 열었다.
“내가 쓰던 컴퓨터인데, 너한테 필요할 것 같아서...... 내가 이번에 새 걸로 하나 샀거든.....” 말을 멈추고 현준이 주위를 한번 돌아보고 다시 정훈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나 밖에 세워놓을거야?
“곧 인터넷 설치하러 사람이 올 거야.” 박스에서 컴퓨터를 꺼내 모든 세팅을 마친 후에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면서 컴퓨터의 파워를 눌러서 켜고 현준은 다시 정훈을 해맑은 얼굴로 바라보았다.
“내가 그냥 형 노릇 좀 해 보고 싶어서....” 마주친 정훈의 얼굴에 배어난 굳어있는 표정에 현준이 당황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매월 나가는 이용료는 딱 일 년만 내 통장에서 빠져 나가도록 했는데....” 그는 여전히 냉정해 보이는 정훈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어떻게 형은!” 정훈이 입을 열었다.
“모든게 자기 마음대로 예요?” 냉랭한 그의 목소리에 현준의 표정이 굳어졌다.
당황한 것이 역력한 표정으로 현준이 정훈을 바라보았다.
“제가 없이 산다고 저에게는 아무런 말도 없이 이렇게 이런 것을 가지고 오시면 제가 기뻐해야 하는 거예요? 그런 거예요?” 차가운 표정으로 정훈이 현준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형! 내가 그렇게 우스워요?”
일그러진 얼굴 표정에 이빨까지 악문 정훈을 보면서 현준은 눈이 똥그래져서 그를 바라보았다.
“야! 너 정말.....” 드디어 현준의 입에서 큰 소리가 튀어나왔다.
“도대체 형은 제가 뭘로 보이는 거예요?”
굳어진 얼굴의 현준이 막 입을 열려는 순간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통화가 끝난 지, 채 1분도 되지 않아 인터넷 설치 기사는 정훈의 집을 찾아왔다. 골목 어귀에 다 와서 집을 못 찾은 듯 했다.
인터넷 기사 두 명이서 작업을 하는 동안 정훈은 내내 방 한쪽 구석에 서서 얼굴을 외면한 채 벽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그리고 마치 현준이 자신이 집 주인인 양 설치 기사와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는 것을 멍하니 듣고 있었다.
“정훈아.”
기사들이 돌아 간 후 여전히 벽을 바라보고 서 있는 그를 현준이 불렀다.
“내가 너 오해하게 했으면 정말 미안하고.....” 정훈의 뒷통수를 바라보면서 현준이 사정하듯 중얼거렸다.
“기분 풀고... 형 마음도 이해해주고... 저녁 먹으러 가자. 형이 잘못한 게 있으면 미안해.”
얼굴에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현준을 돌아보면서 정훈이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정훈의 말에 현준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말을 멈추고 정훈은 입술을 깨물었다.
“나, 형하고...... 잘 못 지낼 것 같아요.” 그가 한번 현준과 눈을 마주치고는 고개를 숙였다.
“연락하지 마세요. 앞으로 서로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정훈의 말에 한동안 현준이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나, 형 불편하고 싫어요...” 다시 고개를 들어 그가 현준을 바라보고는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앞으로 우리 서로 연락하지 말아요.” 굳은 표정과 단호한 정훈의 말투에 충격을 받은 듯 현준은 한참동안 멍하게 아무 말 없이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현준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래.....” 말을 꺼내놓고는 그는 말을 잇지 못하고 억지로 침을 삼켰다.
“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할게.”
말은 그렇게 하고서는 그의 시선은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 정훈의 뒷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한참을 침묵 속에서 그 둘은 돌기둥처럼 그렇게 서 있었다.
마침내 힘들게 몸을 문 쪽으로 돌리다가 다시 현준이 정훈을 바라보았다.
“가기전에...... 너한테 한가지 부탁이 있다.” 현준의 먹먹한 눈빛이 그의 말에 고개를 돌리고 그를 마주한 정훈의 시야에 들어왔다.
“잊지 말고 꼭 들어줘. 약속해.” 현준의 말에 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달 20일에 비욘드라는 회사에서 너에게 연락이 올 거야. 내가 전에 말한 적 있지?”
잠시 가만히 있던 정훈이 다시 현준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회사에서 쓰는 업무용 소프트웨어가 저기 다 깔려있어.” 현준이 고개를 돌려 손으로 땅바닥에 놓여있는 컴퓨터를 가리켰다.
"얼마만큼만 보면 금방 익숙해 질꺼야. 그리고 그 동안 컴퓨터 좀 많이 만져보고....“
말을 멈추고 다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정훈을 멍하게 바라보던 현준의 입술이 떨렸다.
“나..... 그럼 간다.” 현준이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정훈은 아무 반응 없이 뻣뻣하게 서 있었다.
그가 손을 뻗어 정훈의 팔목을 슬며시 잡았다. 그렇게 그 둘은 잠시 동안 서 있었다.
마침내 정훈이 다른 손을 들어 현준의 손을 슬며시 떼어냈다.
숙이고 있는 정훈의 눈에 현준의 발이 슬며시 돌아서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는 곧 정훈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한참을 더 그렇게 서 있던 정훈은 벽에 등을 대고 쪼그리고 앉아서 이제 어두워지는 방안에서 희미한 빛을 내고 있는 모니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현준)
월요일 오후, 자신의 방에 있는 책상 앞에 앉아서 현준은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쟤는 어쩌면 저렇게 커서도 쪼다같이.....” 완전히 닫혀지지 않은 문틈 사이로 어머니와 큰 누나의 대화가 들려왔다.
“내가 동네 부끄러워서 정말! 소문나면 어떻게 얼굴 들고 나다니냐고!...”
“뭐하러 다 늙어서 무슨 아들덕을 보겠다고 저런 걸 낳아서 엄마도 참!”
“저러다 설마 죽는 다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 갑자기 낮아진 어머니의 목소리가 슬며시 들려왔다.
“아휴! 엄마는 걱정도 팔자지! 죽는 건 아무나 죽는 줄 아나?” 어머니의 목소리가 낮아진 만큼, 그만큼 더 커진 큰누나의 목소리가 집안을 울렸다.
“드런 새끼, 회사에서도 짤리고 이제 뭐 해 처먹어서 살꺼야?”
“지가 알아서 막노동이라도 하겠지. 엄마 절대 저 새끼 한푼도 내주지마.”
“미쳤냐? 내가 돈이 어디 있다구! 있는 건 이 집 하나구만...”
그렇게 어머니의 전화에 누나가 찾아와 한바탕 그렇게 헤집어 놓고 집안이 조용해 진 후, 현준은 들고 있던 휴대폰을 슬그머니 켜 보았다.
며칠만에 다시 켜 놓은 휴대폰에는 수많은 문자가 남겨져 있었다. 그는 일일이 보지 않고 그냥 전체를 삭제해 버렸다. 그가 휴대폰을 켜 놓은지 어떻게 알았는지 잠시 후 또 다시 전화기가 울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번호를 바꿔야 할 것 같았다.
걸려오는 전화를 무시하고 잠시 기다리다가 현준은 정훈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에 대한 그리움에 더 일찍 연락하고 싶었던 그였지만 회사에서 아웃팅을 당한 후 정신 없는 시간을 보내다 보니 마음의 안정을 찾을만한 정신적인 여유가 없었다.
한밤중에도 장난 전화가 와서 욕을 해대고 끊어버리는 일도 자주 있었고 평상시에는 친하지도 않았던 사람들이 소문의 진위를 알기 위해서 그에게 전화를 해 댔다.
마침내 그는 지난주 금요일에 아예 전화기를 꺼서 책상 속에 넣어 놓고는 증발을 해 버렸다. 그리고는 훨훨 털어버리고 맨몸으로 정해진 목적지 없이 떠나 버렸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를 곰곰이 생각해 가면서 지난 주말동안을 인적이 없는 버려진 시골길을 바람이 되어 흘러 다녔다.
그런 그에게 정훈의 모습이 떨어지지 않고 마치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마치 그에게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정훈만은 그의 곁에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긴 듯 그는 마음이 편해졌었다.
그렇게 정훈에 대한 그리움이 그의 등을 떠밀었다.
그렇게 짧았던 방황을 접고 그는 서둘러 집으로 차를 몰았다.
월요일, 밤 늦은 시간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침대에 누워있던 그는 번호도 확인 하지 않은 채 배터리를 뽑아 버렸다.
잠시 후 노크도 없이 어머니가 들어오셨다.
“전화받아!”
“누군데요?” 몸을 일으키면서 현준이 물었다.
“내가 어떻게 알아!” 퉁명스럽게 말을 남기고 어머니는 안방으로 들어가서 소리내어 문을 ‘쾅’ 하고 닫아버렸다.
흥분하지 않고 냉정하고 차분한 김이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 대리, 박차고 뛰쳐나간 기분은 이해하고 남는데, 당장 묶여있는 일은 돌아가게 해 줘야지, 그냥 연락을 그렇게 끊어버리면 남아있는 나는 어떻게 해? 좀 무책임하잖아.”
알아서 하시라고 말해버리고 끊어버리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또한 그의 계획에 한 역할을 해 줄 사람이 김이사 밖에 없다는 것을 현준은 알고 있었다.
그는 서울의 헤드헌팅회사에 이력서를 제출할 계획이었다.
가장 큰 문제가 바로 레퍼런스쪽 이었다. 이직을 할 때 그가 지원하는 회사에서 연락을 했을 때 그래도 그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대답을 해 줄 사람은 김이사 밖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수요일 오후에 회사 근처의 카페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어쨌든, 회사에 남아있는 자신의 물건들도 챙겨서 가지고 나와야 했다. 그의 자취가 남아있는 어떤 것도 그곳에 결코 남겨 놓고 싶지가 않았다.
다시 한번 그들과 맞닥뜨려야 한다는 사실에 그런 생각만으로도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다.
화요일 저녁, 그렇게 자신을 차갑게 밀어내는 정훈과 헤어진 후, 그는 아파트 입구에 있는 술집에서 혼자서 밤 늦도록 술을 마셨다.
자신의 주변의 모든 것이 다 잊어야 할 과거의 것들이 되어버렸다.
그는 이제 모든 것을 완전히 털어버리고 새롭게 시작하기로 마음 먹었다.
밤이 되면서 불빛을 찾아 날아드는 하루살이 마냥 또 협박, 장난 전화가 하나 둘씩 걸려오기 시작했다.
그는 휴대폰에서 배터리를 떼어 낸 다음 땅바닥에 떨구고 발로 밟기 시작했다.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그의 기괴한 행동에 모두 시선을 집중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치 최근의 모든 사건들이 그 휴대폰에서 비롯된 것인 양, 보복이라도 하듯 그렇게 그것을 그의 구둣발로 계속해서 마구 짓이겼다.
담배를 입에 물고 느릿느릿 집으로 향하면서 그는 정훈을 떠올렸다. 매몰차게 말하던 그의 모습이 떠올라서 그는 한 여름의 더위 속에서도 한기가 느껴졌다.
자신의 어떤 행동이나 말에 그가 또 그렇게 상처를 받은 것인지 영문을 알지 못하는 것이 더욱 가슴이 아팠다. 자전거에 이어 컴퓨터가 그의 자존심을 무너뜨렸음이 틀림 없다고 현준은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별로 없었다. 자신의 현재의 삶에 불만족하고, 다른 꿈을 꾸고 있는 정훈에게 그의 삶을 바꿔 줄 수 있는 방법은 그것 뿐이라고 그는 믿고 있었다.
벌써 7월 말이었다. 그는 정훈이 가능한 한 달라진 환경속에서 계속해서 발전 할 수 있는 동기부여도 받고 공부 할 수 있는 시간도 벌어서 자신의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계단을 찾기를 바라고 있었다.
마치 정훈이 좀 더 윤택한 삶을 살고 또 다시 그가 그렇게 원하는 학업을 계속 할 수 있는 길을 찾아가는 것이 자신의 미래를 개척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 인 듯 느껴졌다.
그는 정훈을 향한 자신의 감정을 깨끗이 정리하고 이제는 형이 동생을 생각하는 형제애만 남아 있는 것이라고 자신에게 타일렀다. 하지만 여전히 그가 그렇게 술이 취해서 집으로 들어오는 날이면 정훈을 품안에 한번만이라도 끌어안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버릴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 모든 것이 끝이 나 버렸다.
그는 무거운 몸으로 아무도 그를 원하지 않는 듯한 세상속으로 연결된 희미한 길을 따라 발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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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좋아하는 사람과의 만남에서 당연히 겪어야할 일이지만
마음에 두었던 상대가 조금이라도 삐끗해지는것 같으면 [아.. 나한테서 마음이 떠났구나.] ..
... 라는 마음을 먼저 먹고서는 지레 [나도 그래..] [나도 그렇게까진 마음에 없었어..] 라는 생각같은거 말에요.
그래놓고서는 또다시 연락을 기다리고..
또 혹시 모를 만남에 대해서 다시 설레이고. ㅎ
무한 반복인가봅니다. ㅎ
그래도 평상시의 가벼운 밀당이 아닌
작가님만의 무거운 스토리가 긴장하게 만드네요.
꼭 연락바람.. 이라는 현준이의 단어처럼
꼭!~ 둘만의 좋은관계가 만들어졌으면 합니다 ㅎ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