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 프린스 (마지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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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
주말동안 가족과 보내기 위해서 정훈은 오랜만에 부산에 내려와 있었다.
하지만 일요일 오전부터 그는 무엇인가에 쫒기는 사람처럼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거실의 벽에 걸린 큼지막한 시계는 마치 정훈의 머릿속에 박혀 있는 듯, 아침에 눈을 뜬 시간부터 ‘재깍재깍‘ 소리를 내면서 멈추질 않았다.
기차표를 미리 구해서 지갑속에 넣고 있으면서도, 그리고 여전히 시간이 넉넉함에 여유로움을 즐길 수도 있는 상황에서도, 그는 무의식적으로 휴대폰의 시계를 확인해보곤 했다.
식사동안 입안으로 들어가는 밥알은 모래알 같았으며, 여동생이 맛있게 만들었다고 차려놓은 반찬도 그의 입안에서는 어떠한 맛도 내지 못했다.
그저 그의 마음은 시흥시로 향해 출발하기 위해 부산역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정을 모르는 아빠와 동생들은 오랜만에 부산에 내려온 정훈과 조금이라도 더 오래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그를 붙잡았다.
초조한 마음에 점심을 먹으러 온 식당에서도 테이블 밑으로 휴대폰을 열어 시간을 확인하는 정훈의 행동을 알아챈 것은 여동생 지연이였다.
잠시 화장실을 갔다가 손을 씻고 나오던 정훈은 화장실 문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지연이와 마주쳤다.
“오빠 혹시 누구 만나기로 한 약속이라도 있어?”
은근한 미소를 띠고 그를 올려다보면서 묻는 지연이의 뜻밖의 질문에 정훈은 당황한 표정으로 슬며시 고개를 돌려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아까부터 시간 확인 하는거 다 봤어.”
“그런 거 아냐, 그냥....” 하지만 정훈은 순간 딱히 생각나는 변명거리가 생각이 나지 않아서 그냥 머뭇거렸다.
그렇게 난처한 표정으로 서있는 그의 손을 지연이 붙잡고 끌었다.
“먹던 밥만 빨리 먹고 가.”
부산역까지 가는 길에 지연이는 아빠와 성훈이를 먼저 집으로 보내고 슬며시 정훈을 따라왔다.
무슨 할 말이 있어서 따라온 듯 싶었으나, 버스안에서도, 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그녀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조용하게 그의 곁에 있던 그녀가 마침내 그가 탈 기차가 게이트에 들어와 대기하자 정훈이 차에 오르기 전, 그의 팔을 슬며시 잡아서 끌었다.
“오빠.” 슬며시 주위를 한번 돌아보고 난 후, 지연이 다시 고개를 돌려 정훈을 바라보았다.
“사실은......”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녀가 잠시 머뭇거렸다.
“왜? 혹시 집에 무슨 일 있어?” 정훈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게 아니고.... 나 오빠한테 잘못한 일이 있어.” 그녀가 그를 한번 올려다보고 다시 머리를 숙이고 자신의 운동화 끝을 바라보았다.
“뭔데?”
“그게....”
“괜찮아.” 정훈이 그녀의 어깨를 슬며시 잡았다.
“뭐든지 다 용서해줄게. 그냥 얘기 해.”
“오빠 군대 갔을 때...”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느 날, 오빠 방을 청소하다가....” 그녀가 고개를 숙이고는 바닥에 마치 무슨 글씨라도 쓰듯이 운동화 앞부분을 이리저리 콘크리트 바닥에 문질렀다.
“오빠 일기를.....” 그녀는 말을 마치지 못하고 정훈의 품안에 슬며시 안기면서 팔로 그의 허리를 안았다.
가슴속 저 아래 어딘가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막혀왔다. 가슴의 통증 때문에 숨을 쉬기가 어려워졌다.
“엄마가 먼저 보셨어.” 천천히 자신의 팔을 풀면서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한테 이게 무슨 말이냐고, 오빠가 뭐라고 쓴 거냐고 오빠 일기 내밀면서 물어 보셨어.” 그녀가 정훈이 입고 있는 양복의 소매 끝을 슬쩍 잡아당겼다.
“엄마가 잘못한 일이 많아서 그런거라고 그러면서....” 그녀가 고개를 들어 정훈을 올려다보았다. “엄마 간 다음에도 오빠 꼭 부탁한다고 그러셨어.”
달리는 기차안에서 창에 머리를 대고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정훈은 자신이 휘갈겨 쓴 글이 그가 군대에 있는 동안에 그의 가족에게 남겼을 커다란 충격과 파장을 상상해 보았다.
마음에 그런 상처를 끌어안고도 엄마는 그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그를 대하는 지연이의 태도에도 전혀 변화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책꽂이 끝에 꽂혀있던 일기장을 그의 엄마가 보셨을 것이라는 것을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엄마는...... 오빠가 외로울까봐. 그걸 제일 걱정하셨어. 세상에서 혼자라고 생각할까봐.” 마침내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손가락 끝으로 문질러 낸 후 지연이는 그를 올려다 보았다.
“그래도 오빠는 현명하니까 오빠 인생 잘 살거라고 입 다물고 모르는 척 하자고 엄마가 그랬는데..” 그녀가 말을 멈추고 마른 기침을 했다.
“그게 엄마 말을 잘 생각해보니까, 엄마가 직접 말을 하기 힘드니까, 나에게 대신 전해달라는 의미 같았거든..”
그녀가 손을 내밀어 정훈의 손을 잡았다.
“오빠가 불행해 할까봐. 엄마 많이 걱정하셨어. 엄마가 죽은 다음에도 어디에서 어떤 모습이더라도, 오빠가 행복하면 엄마도 행복한 거라고....” 그녀가 잠시 말을 멈추고 두 손으로 눈을 문질렀다.
“오빠 이런 모습 보셨으면 엄마 무척 기뻐하셨을텐데... 오빠 너무 멋있어.” 중얼거리듯 말을 마치고는 그녀는 눈물이 번진 얼굴로 그를 올려다 보았다.
눈에 눈물이 맺힌 채, 희미한 웃음을 짓던 지연의 얼굴이 버스의 창문에 스티커 사진처럼 배어있었다. 그녀의 모습에서 언뜻 그의 엄마의 모습을 느끼면서 그는 문득 손을 들어 창문을 슬며시 만져보았다.
시흥시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6시가 넘어 있었다.
그는 그를 위해서 지연이가 만들었다는 반찬거리와 간단한 짐을 집에 내려놓고 자전거를 타고 집을 나섰다.
일요일이라서 공단 안쪽은 한산했다.
이제 어두워지는 거리를 달려 정훈은 순식간에 주원가든 앞에 도착했다.
한번 들어가 볼까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지금 그 안에는 현준과 이진수과장이 있을 것이 틀림 없었다.
그렇게 당연한 사실인데도 어쩌면 오늘이 그가 마지막으로 현준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혹시라도 그가 오지 않았다면, 혹시 그들이 시간이나 장소를 다른 곳으로 변경했다면, 하는 생각에 정훈은 몇 번이나 현관문 앞에서 망설였다.
현준의 연락처를 모르는 상황에서 이 과장에게 현준에 관해서나 그의 전화번호를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몇 번을 서성이다가 언뜻 문을 열고 들어가는 서너명의 일행에게 한발자국 옆으로 서서 길을 비켜주면서 순간 문틈으로 정훈은 그를 향해 앉아있는 이과장의 얼굴과 현준의 뒤통수를 확인할 수 있었다.
갑자기 심장이 폭발할 듯 뛰기 시작했다.
무슨 나쁜 일이라도 꾸미다가 타인의 시선에 들킨 듯, 그렇게 빨갛게 된 얼굴로 그는 부리나케 계단을 뛰어내려와 담 뒤로 몸을 감추었다.
그래도 현준이 저 안에 있는 것은 확인 할 수 있었다는 안도감과 흥분에 주변의 사람들이 그의 괴상한 행동을 쳐다보면서 지나 가는 것을 그는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 후 간신히 흥분이 가라앉자, 그는 주변을 한번 둘러보고는 그는 주원가든 정문의 바로 옆 골목 입구에 있는 전봇대 기둥에 자전거를 세우고 그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날이 점점 어두워질수록 가로등과 광고판의 불빛은 더욱 밝아졌다.
나방과 하루살이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어 원을 그리면서 가로등 불빛 속에서 춤을 추는 동안 정훈은 가든의 정문으로 들어가고 나오는 사람들의 모습을 확인하고 있었다.
(현준)
배가 부르고 술기운이 올라서 피곤함이 조금씩 몰려오기 시작할 무렵부터 진수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누군데?”
“집사람이야. 언제 들어오냐구.”
“아, 아직 신혼인데 내가 너무 오래 붙잡고 있는 거 아냐?”
“시끼 웃기는 소리 다 하고 자빠졌네.” 진수가 현준을 보고 씨익 웃었다“
“너 오늘 서울 올라가면 이제 안 내려올 거라면서!”
“가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좀 많아서 바빠. 게다가 추석까지 끼어 있어서 정신이 없다.”
“추석에도 어머니 안 뵈려고?” 진수가 현준을 빤히 바라보았다.
“뭘. 올 것도 없어. 친척들 다 왔다 갔다 할 텐데, 내가 있으면 다 불편해지지. 그냥 바쁘다는 핑계로 서울에서 지내야 한다니까, 서운한 기색도 없이 그러라고 그러시더라.” 현준이 쓴 미소를 한번 지었다.
다시 진수의 핸드폰에 문자가 왔다는 신호가 울렸다.
“야. 가자, 가자!” 현준이 진수를 한번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괜찮아. 한잔씩 더 하면서 좀 더 있다가 가자.” 진수가 손을 저으면서 앉으라고 신호를 했다.
“아냐. 벌써 아홉시도 넘었는데, 지금 나가야지, 나도 서울 가는 버스도 타지.” 말을 마치고 현준이 허리를 굽혀 계산서에 손을 뻗었다.
“내가 낼게! 타국 나가서 2년이나 고생할 녀석, 친구가 한번 크게 사야하는데 좀 빈약해서 미안하다.” 현준의 손에서 계산서를 가로채면서 진수가 웃었다.
진수가 계산을 마치는 동안 먼저 신발을 찾아 신고는 현준은 문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래도 9월 중순에 접어들었다고 아침, 저녁에는 좀 선선한 듯도 싶었다.
“가자! 버스 정거장까지 태워줄게.” 진수가 현준의 어깨를 툭 쳤다.
“미친 놈! 음주 운전하게?” 앞장서는 진수의 등에 대고 현준이 짐짓 큰 소리를 쳤다.
“아냐! 와이프가 차가지고 오고 있대.”
진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차 한 대가 슬며시 코너를 돌아서 그들 앞에 멈추었다.
“안녕하세요?”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숙여서 운전석에 앉아있는 진수의 아내를 보고 현준이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네, 안녕하세요? 곧 영국으로 가신다면서요?” 그녀가 밝게 웃었다.
“네, 어쩌다 보니....”
“타, 태워다 줄게.” 진수가 자동차 조수석의 문을 열고 차 안으로 오르면서 말했다.
“아냐. 나 걷고 싶다. 좀 취하기도 했고, 밤 공기도 좋고...”
다시 한번 몸을 숙여 그녀에게 웃음으로 인사 한 후 그는 열려진 창문으로 손을 집어 넣어 자신을 올려다보는 진수의 어깨를 툭 쳤다.
“가라. 다시 전화 할게.”
“그래라. 그럼. 꼭 전화 하고. 조심해서 들어가라.”
멀어지는 차의 뒷모습에 한번 눈길을 주고는 현준은 슬며시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그가 주원가든의 돌담길을 지나 환한 가로등 앞을 지나는 순간, 옆의 좁은 골목에서 누군가가 그에게 불쑥 다가왔다.
“어! 너....” 말을 잇지 못하고 그는 어두움 속에서 나타난 정훈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정훈은 아무 말 없이 그런 현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여전히 놀란 표정의 현준에게 정훈이 슬며시 손을 내밀었다.
“잘 지냈지?” 현준이 얼떨결에 손을 내밀어 정훈의 손을 잡았다.
“그럭저럭요. 형도 잘 지내셨죠?” 그는 여전히 현준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 보았다.
갑작스런 그의 그런 모습에 무안해 하던 현준이 얼굴에 그제서야 반가운 웃음이 번졌다.
“여기는 어떻게 왔어?”
그가 슬며시 정훈의 손을 놓으려고 했지만, 여전히 정훈은 그의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당황한 듯한 현준의 얼굴에서 눈을 돌려 그는 전봇대에 기대어 서 있는 자전거를 가리켰다.
“서울 가는 버스 타실거죠? 거기까지 태워드릴게요.”
“그래 고맙다.”
그제서야 정훈이 슬며시 현준의 손을 놓고는 몸을 돌려 자전거를 잡아당겨 방향을 돌렸다.
“근데 어떻게 여긴 알고 왔냐?” 걸음을 옮기면서 현준이 고개를 돌려 가로등에 비치는 정훈의 옆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과장님 통화하는 거 들었어요.” 정훈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형 전화번호 바뀌었던데요.”
“전화 했었어?” 정훈의 말에 놀라서 현준이 그를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자신을 밀어내는 줄만 알았던 정훈이 전화를 했었다는 말에 가슴 밑바닥에서 따스한 온기가 올라와서 목안에 번졌다.
“왜?” 그가 넌지시 물었다.
“보고 싶어서요.” 중얼거리듯 말을 마치고 정훈이 고개를 돌려서 현준을 바라보았다.
아련한 눈빛에 할말이 가득한 표정으로 다시한번 희미한 미소를 띠어보이고는 그는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이제 제법 어른 티 난다.” 정훈의 뜻밖의 대답에 잠시 할 말을 잃고 있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양복도 잘 어울리고...”
그의 말에 겸연쩍은 표정으로 정훈이 씨익 웃었다.
“형이 사 주신거잖아요.”
놀란 눈으로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현준을 보면서 정훈이 다시 한번 피식 하고 웃어 보였다.
“그런 눈치 없을까봐서요? 당연한 것을....” 미소를 지으며 앞을 바라보면서 걷는 그런 정훈의 옆 모습을 현준이 흘끗 바라보았다.
“연희누나 너무 검소해요. 쇼핑한다는 말 한번도 못들어봤을 정도로..” 그가 현준을 흘끗 보고는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동생 옷 하나 사주는 것도 남자 옷 사이즈는 어떻게 되는지도 몰라서 저한테 물어본 적도 있었어요.” 말을 멈추고 자신을 쳐다보는 정훈의 시선에 현준은 슬며시 무안해졌다.
“그런 누나가 어떻게 남자 양복을 이렇게 딱 맞는 사이즈로 사 줄 수가 있었겠어요.”
현준이 손을 들어 슬며시 정훈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게 전부가 아니잖아요. 형이 저한테 해준 게....” 정훈이 말을 멈추고 그를 한번 보더니, 한쪽 발을 들어 자전거에 올랐다.
“타세요. 여기서 부터는 내리막길이니 타고 가요.”
정훈의 말에 현준이 그제서야 자전거를 내려다 보았다.
“방석이 깔려있네?”
자전거 뒤쪽의 짐을 올려놓는 바닥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슬며시 정훈의 허리를 붙잡았다.
“그냥 앉으면 엉덩이 아플 것 같아서요.” 말을 마치고 정훈이 천천히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저 꽉 잡아요. 기분 내키면 가끔 곡예운전해요.” 고개를 슬며시 뒤로 돌려 현준을 흘끗 보고는 정훈이 외쳤다.
그의 말에 현준은 정훈의 허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가로수와 인도 옆의 작은 공원에서 시간을 잊은듯한 매미 우는 소리가 밤공기를 채우고 있었다.
그렇게 도시의 불빛으로 인해서 밤과 낮의 경계선을 잃어버리고 짝을 찾아 울어대는 매미소리를 들으면서 현준은 슬며시 정훈의 등에 자신의 입술을 대 보았다.
자전거에 속도가 붙으면서 현준은 정훈의 허리를 두른 손에 바짝 힘들 주고는 고개를 숙여 뺨을 그의 등에 슬며시 대었다.
정훈의 체취가 풍겨 나왔다.
그렇게 온몸으로 정훈을 끌어안고 현준은 눈을 감았다.
그가 그렇게 원하던 꿈이 모두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적대감과 악의만 가득 찬 듯 보였던 세상 속에서, 그가 단 한번 만이라도 품에 안아볼 수 있다면 하고 바라던 정훈의 등을 끌어안고 그렇게 그는 꿈속을 달리고 있었다.
그에게 저주만을 안겨주던, 그래서 무자비하게 보였던 신의 눈에도 그의 불행만이 가득한 삶은 그 자신의 눈으로 보기에도 불편했을 듯 싶었을 것이라고 현준은 생각했다.
그래서 그 운명의 신이 잠깐 동안 고개를 돌리고 모르는 척 슬며시 던져 준, 그에게 주어진 작은 행복을, 마치 힘들게 구한 알사탕 하나를 꼭 붙잡고 있는 아이처럼 그는 정훈을 그렇게 끌어안았다.
더 이상을 원한다면 사치라고 그는 생각했다. 시기하는 마음으로 가득한 운명의 신이 언제 다시 그에게 험악한 얼굴을 들이밀지 모르는 일이었다.
지금 이 순간으로 충분히 행복하다고 그는 속으로 되뇌었다.
길을 잃고 긴 겨울을 도시 한복판에 서 있는 동상의 처마 밑에서 힘들게 떨면서 보냈던 제비가 마침내 찾아온 봄을 느낀 것 처럼, 오랫동안 눈과 찬바람만 가득하던 정원에 마침내 봄의 기운이 찾아온 것을 느낀 거인처럼, 그는 그렇게 자신의 인생에 찾아온 따스한 봄기운을 끌어안고 있었다.
짧은 현준의 꿈은 가로등과 네온사인으로 가득한 도시의 한 가운데서 끝이 났다.
자전거를 도로가의 벽에 기대어 세운 후에 자신을 돌아보는 정훈의 얼굴을 그가 미소를 지으면서 바라보았다.
“너 덕분에 편하게 왔다. 택시 안 잡히면 어쩌나 했었거든.” 아쉬운 마음에 현준이 희미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저 이번 겨울에는 정말 따뜻하게 보낼거예요.” 정훈이 언뜻 딴소리를 하면서 그를 보고 배시시 웃었다.
“그래.” 그의 말에 미소를 머금고 현준이 손을 들어 슬며시 그의 뺨을 스치듯 만져 보았다.
다시 흐린 눈빛으로 그를 멍하니 바라보던 정훈이 한걸음 슬며시 다가와서 현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가 말을 잇기 전 얼굴에 쓸쓸한 미소를 띠었다.
“이제 연애도 하려고요.”
“그래... 그래야지.” 그런 그를 보면서 현준이 고개를 슬며시 끄덕였다.
“형....” 슬며시 현준을 부르고는 정훈이 말을 잇지 못하고 그에게서 고개를 언뜻 돌렸다.
“많이....보고 싶을거예요.”
이제 시선을 돌려 다시 현준을 마주하는 정훈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지더니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현준의 손을 슬며시 놓고 고개를 돌리던 정훈이 갑자기 돌아서서 현준을 슬며시 끌어안았다.
그의 가슴에서 뛰는 정훈의 심장 고동소리가 느껴지고 귓불 아래쪽 뺨 언저리에서 정훈의 입술이 느껴졌다.
“보고 싶었어요.”
정훈이 낮은 목소리로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형이.. 너무..... 그리웠어요.”
정훈의 말에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들어와 가슴속에서 파도가 일었다. 끓어 넘치는 감정은 그의 눈가의 샘을 자극해서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맺히는 것을 느끼면서 현준은 슬며시 손을 들어 정훈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들의 옆을 지나던 한 커플의 시선이 느껴졌다.
슬며시 팔을 풀고 현준의 얼굴을 마주하고는 정훈이 희미한 미소를 띠고 다시 입을 열었다.
“애인 군대 간 셈 칠거예요.” 말을 마치고 그는 멋쩍은 듯 웃어보였다.
“........”
“2년 금방가요. 눈 한번만 감았다 뜨면 돼요.” 말을 마치고 놀란 표정의 현준을 빤히 바라보고는 정훈이 조용히 낮은 한숨을 쉬었다.
정훈의 말이 현실적이지 않아서 순간 이해하지 못하고 현준은 잠시 멍한 표정으로 그렇게 서 있었다.
그런 현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정훈이 다시 그에게 밀착해 왔다. 그리고 순간 자신의 입술위에 부드러운 정훈의 입술이 느껴졌다. 긴장으로 현준은 숨이 막혀왔다.
정훈의 입에서 흘러나온 고백과 그의 첫 키스의 감동에 현준은 그렇게 오랫동안 자신을 사슬마냥 속박하고 있던 어두움이 힘을 잃고 스러져 가는 것을 느꼈다.
이 세상에서 존재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자신이었다. 그의 영혼은 그렇게 이 세상에서 받은 상처로 뒤덮여 있었다.
그는 그렇게 그의 어깨를 누르던 무거운 고통과 슬픔이 슬며시 빠져나가는 것을 천천히 느끼고 있었다.
마음 한쪽 구석에서 가려져 있던 삶의 의미가 마치 안개가 걷히고 배가 부두에 나타나듯, 그렇게 그의 마음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정훈으로 인해서 자신의 고통의 허물이 벗겨지고 또 다른 세상을 볼 수 있는 수평선이 그의 눈 앞에 나타난 듯 보였다.
그리고 그가 상상하지 못했던 마음속에 평화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삶에서의 불안은 그것의 자리를 찾지 못하고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하지만 다시 그의 마음 한 켠에 슬며시 정훈을 향한 갈망이 스멀거리면서 번지기 시작했다.
정훈과의 미래를 잠시 동안 그는 상상해 보았다.
그러나 현준과 달리 정훈은 이제 스물 넷이였다.
스물넷의 한창때인 나이에 그를 사랑이란 이름으로 붙잡아 놓을 수는 없다는 것을 현준은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또 하나의 구속이며 감옥일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가 이제 정훈을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를 자유롭게 놓아주는 것이었다.
몇 년이 지나면 사랑이라는 이름의 가족이 슬며시 굴레가 되어 정훈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그는 정훈이 지금처럼 자유로울 때 그가 그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도록 해 주고 싶었다.
이미 정훈은 현준에게 이 세상 다른 어느 누구도 줄 수 없는 것을 충분히 베풀어 준 것이었다.
더 욕심을 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그는 슬며시 정훈의 어깨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정훈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현준이 힘들게 입을 열었다.
“나는.... 나는 말야....”
말을 잇지 못하는 현준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정훈이 입을 열었다.
“구두는 저 270 신어요. 영국에서 올 때 사다주세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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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오시는 모든 분들
현준님, 정훈님처럼 이루시기를 기원합니다.
작가님!
감사합니다.
팬클럽 결성해야 할 듯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