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남자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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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사귀는 아가씨는 없고?”
한손으로 사과를 잡고 다른 손으로는 열심히 깎여 나가는 부분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누나가 물었다.
온 가족이 저녁을 먹고 거실에 앉아서 티비를 보고 있다.
오랜만에 나의 오전 근무가 끝나는 시간에 맞춰 누나와 매형이 조카를 데리고 집으로 놀러왔다. 겉으로는 그냥 평범한 친정나들이인 듯이 보이지만, ‘지민이가 요새 힘들어 하더라’ 라는 부모님의 말에 위로도 할 겸, 겸사겸사 그렇게 찾아온 것 인듯 했다.
“있는 게 불알 두쪽 밖에 없는데 내 주제에 누굴 만나.” 포크로 작은 사과 한쪽을 찍으면서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거면 됐지 뭐.” 누나가 겸연쩍은 웃음을 지으면서 나와 매형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피식’ 하고 웃어버리고는 티비로 눈을 돌렸다.
드라마에 나오는 남자주인공은 없는 것 없이 다 소유하고 있었다.
좋은 집에 살면서, 일은 거의 하지 않고, 사무실에서 거의 사적인 전화나 받고, 화장실 가듯 옥상에 올라가 커피를 마시며, 머리위에 떠 있는 태양만큼 구체적이며 밝은 미래를 기대하고, 자신만을 바라보는 예쁜 애인을 두고도 눈이 돌아가 다른 여자와 뜨거운 밤을 보내고, 스포츠카에 고급 옷만 입고 놀러 다니면서도 회사에서 능력 있는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중고생일 때만 해도 그런 것은 환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냥 드라마일 뿐이라고. 저런 일이 벌어 질수 없고 저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의 대리만족을 위해서 그렇게 설정한 허구일 뿐이라고...
하지만, 현실속에서 저렇게 사는 사람들이 꽤 많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산다는 것에 화가 나기 시작했다. 부모를 잘 만나는 것이 인생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지, 인간은 어디에서 어떻게 태어나는지에 이미 그의 인생의 미래가 결정이 된다는 사실에 허탈해지기 시작했다.
누구는 태어나보니 영국 왕실의 세자였고, 또 다른 누구는 태어나니 칼슘보충을 위해서 채석장에 나오는 돌을 먹는 케냐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버린다.
도대체 그런 터무니 없는 차이가 어떻게 태어나면서 부터 존재한다는 말인가? 그렇게 시작부터 천지차이로 달라지는 삶을 결정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뭐하니?”
내 방에서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을 돌아다니고 있을 때, 누나가 노크를 슬며시 하고는 내 방에 들어왔다.
대답 없이 나는 그런 그녀를 돌아보았다.
“회사 생활하기 힘들지?” 누나가 그런 나를 보고 다시 물었다.
“다, 그렇지 뭐.” 심드렁하게 말하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모니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회사 생활이라기 보다는 해 놓은게 없다보니 미래가 좀 걱정되네.” 남 얘기를 하듯이 그렇게 감정이 들어있지 않은 투로 말했다. 하지만 말을 끝내고 나니 한숨이 나왔다.
“누나가 도와줄까?”
“뭐를?” 누나의 뚱딴지 같은 말에 다시 고개를 돌려 누나를 바라보았다.
“뭐든지... 뭐든지 말해.” 그렇게 말하고는 얼굴을 환하게 하고 누나는 피식 웃었다.
“너 기억나니?”
“뭐가?”
“초등학교 다닐 때, 내가 5학년이고 네가 1학년일때 너 괴롭히는 애들 내가 찾아가서 막 혼내줬잖아.”
“..........”
그랬었다. 남들보다 체구가 작았던 내가 초등학교 1학년에 들어갔을때 몸집이 큰 남학생 두세명이 나를 괴롭히고 학용품을 빼앗곤 했다.
그것을 알게 된 누나는 내 손을 잡고 그 아이들이 놀고 있는 놀이터로 가서 초등학교 여학생답지 않은 카리스마로 그 아이들을 주눅이 들게 하고는 나에게 사과하게 만들었다. 여전히 지금까지 그때에 누나의 앙칼진 목소리가 귓속에서 들리는 듯 했다. ‘한번만 더 내동생 괴롭히면 죽도록 패줄거야!’
“이번엔 힘들어.” 말을 마치고 내가 ‘큭’하고 웃었다.
“왜?” 누나가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번엔 인생이란 녀석이거든.”
“그놈도 별거아냐.” 내 말에 그녀가 아무 문제 없다는 듯이 당당한 투로 말했다.
“그놈이 너 괴롭힐때마다 말해. 내가 정신 바짝 차리게 혼꾸멍을 내줄테니까.” 주먹을 불끈 쥐어보이고는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웃어보이고 내 방을 나갔다.
그래, 인생이란 놈이 표정을 바꾸어 험악한 얼굴을 하고 나를 노려볼때에는 내 곁에 누가 있다는 것이 큰 힘이 된다. 최소한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그 든든한 생각이 나에게 포기하지 말고 다시 한번 도전하게 해주는 자극과 의지가 되어 준다.
그러고 보니, 방금 그녀가 나에게 한 비슷한 말을 내가 아저씨에게 한 적이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아저씨 가족이예요. 그러니 나에게 의지하면 돼요.’ 그렇게 그에게 내가 말했었다.
“벌칙이니 빨리 한번에 주욱 드셔야 합니다.” 술자리에서 나서기를 좋아하는 듯 보이는 그 남자는 내 옆에 앉은 친구인 현수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그의 말에 따라 줄지어 앉은 다른 사람들이 ‘완샷, 완샷’ 하고 합창을 하며 부추겼다.
그들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이미 술이 많이 취해서 발그레해진 친구는 그의 앞에 놓여있는 소맥 한잔을 들고는 단숨에 들이켰다.
그런 그를 보고 주변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박수를 치면서 환호를 보냈다.
추석연휴가 지나고 이제 완전히 가을빛이 완연해진 때였다.
아저씨와 금요일 밤부터 같이 보낼 생각으로 무슨 엠티를 가는 기분으로 속옷부터 간식까지 챙겨 넣고는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전화가 울렸다. 아저씨였다.
“아저씨. 저 지금 출발할게요.”
“지민아.” 그의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무슨 일 있어요?” 갑자기 내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불안하게 느껴졌다.
“이번주는 보기 힘들 것 같다. 미안해.”
“왜요?”
“집에 갔다와야 할 것 같애. 일이 좀 있어서.” 그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
“다음 주말에 봐야겠다. 뭐 주중에 같이 저녁을 먹어도 되고.”
그에게 무슨일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나는 그냥 아무 말 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그가 이유를 말해주길 바랬다. 하지만 가끔씩 그는 그의 가족 이야기를 할 때면 나의 질문을 불편해 했다.
절대로 평범하지 않은 그의 가족의 이야기를 남에게, 특히 나처럼 어린 녀석에게 털어놓는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성격상 아직까지 살아오면서 그 누구에게도 그의 그런 마음속에 응어리져진 고통을 밖으로 표출한 적이 없을 터였다.
복학하면서 우연히 선택과목으로 배우게 된 심리학개론 수업에서 교수는 그런 말을 했었다.
사람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내면에 고여있는 고통의 침전물을 밖으로 방출해야한다고 했다. 그런 고통은 시간이 지난다고 절대로 그냥 사라지지 않는다고 했다.
오히려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굳어져서 자신의 영혼을 갉아먹게 된다고, 그럼으로서 우울증이 시작되고 그것을 이기지 못하면 자살까지 이르게 된다고 말이다.
언뜻언뜻 보이는 과거의 그의 고통은 절대로 그냥 놔둬서는 안될 듯 싶었다.
나만이라도 그에게 진정한 가족이 되고 싶었다.
그가 유년시절에, 사춘기에 겪은 모든 그런 고통들을 나에게나마 쏟아내길 바랬다.
그래서 그의 그런 고통스러운 과거를 털어내고 진정으로 사랑받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부족하고 얕은 생각이었지만, 그런 것을 내가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묻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서 가슴 속 저 아래에 밀어 넣고는 가방을 열고 다시 속옷과 다른 내용물을 꺼내기 시작했다.
가방속에서 팬티가 내 손에 들려서 나오면서 내 입 밖으로는 아쉬움에 한숨이 빠져나왔다.
그때 다시 전화가 울렸다. 친구 녀석인 현수였다.
그리고 갑자기 주말동안 할 일이 갑자기 없어진 나는 그 녀석을 따라 토요일 밤에 있는 술자리에 참석하게 되었다.
모임에 나온 사람들 중에서 뜻밖에 그럭저럭 괜찮다고 생각되던 한두명이 나에게 관심을 보였다. 물론 그들은 나 이외에도 다른 한두명에게도 똑같은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전혀 무관심의 늪에 빠져서 있던 과거에 비해서 깜짝 놀랄만한 일이었다.
“너가 느긋해 보여서 그래.” 그런 나에게 현수는 그렇게 말했다.
“내가 어떻게?” 그런 그에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너 예전에는 이런데 나오면 굉장히 조급하고 까칠하고 그랬거든.”
“내가?”
“어. 뭐 나도 그렇고 여기 나온 다른 애들도 나온 목적이 대충 비슷하긴 하겠지만, 너는 너무 티가 났거든. 다른 사람들에겐 관심 없고 오늘 하룻밤 보낼 대상 물색하느라고 다른 대화에는 인색하고 뻣뻣하고... 그러니 사람들이 너에게 접근을 제대로 못하지.”
“내가 그랬어?”
“몰랐냐?” 그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픽 하고 웃었다.
“근데 지금은 내가 달라 보이냐?”
“훨씬 다르지.” 그가 술에 취하긴 했지만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오늘은 아주 느긋하고 편해 보인다야. 그래서 다른 사람들 얘기 다 들어주고 입가에 미소도 띠고 슬며시 눈웃음도 치고...” 말을 멈추고 그가 큭 하고 다시 웃었다.
“그렇게 여유롭게 앉아 있으니, 니 외적인 매력도 발산되고 남이 보기에 한번 접근해서 대화해 보아도 좋을 넉넉한 마음을 가진 것처럼 보이잖아.”
그의 말에 피식하고 나도 웃어보였다. 아마 아저씨 때문일 것이었다. 그가 내 마음속에 있으니 더 이상 다른 누구를 찾아서 오늘 밤을 보내겠다는 생각이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어쨌든 원할때는 달라붙질 않더니, 반대의 상황이 되니 내 옆에 슬며시 찾아와 앉아서 나에게 관심을 보이는 뽀샤시한 젊은 녀석이 생기는 이 모순적인 상황이 발생할 줄이야.
“제 술도 한잔 받으세요.” 그렇게 말하면서 나에게 관심을 보이던 녀석중 한 놈이 내 옆에 다가와 앉았다.
“계속 눈여겨 봤는데, 딱 제 스타일이시라서요.” 내 잔에 소주를 따르며 그렇게 말하고는 그는 씨익 웃었다.
“혹시 애인 있어요?” 그가 소주잔을 들어 내 잔에 슬며시 부딪히면서 물었다.
“아. 예.. 그게..” 아저씨 얼굴이 떠올랐다. 하지만 곧, 나에게 이유도 말해주지 않고 그가 나와의 주말 약속을 취소했다는 것도 떠올랐다. ‘나보다 나이 좀 많다고 제멋대로 라니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 많은게 무슨 벼슬도 아닌데...‘
“아직 없어요.” 나를 빤히 바라보면서 대답을 기다리던 그의 얼굴이 환하게 변했다.
“아. 다행이다.” 그가 나를 보고는 얼굴을 붉히면서 말했다.
화장실에 다녀오니 2차를 간다는 리더격의 남자의 말에 모두 자리를 옮길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나도 벗어놓은 가디건을 주섬주섬 입고 가방을 손에 집어 들었다. 그도 내 곁에 바짝 붙어서 나갈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그런 그를 돌아보았다.
술이 알맞게 취해 나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기대감이 묻어 나왔다.
“잘해봐.” 현수가 내 옆을 지나며 그와 나를 둘러보고는 내 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은근하게 속삭였다.
‘그래, 오랜만에 이렇게 즐기는 것도 나쁜 것은 아닌거야. 꼭 같이 자는 것도 아닌데 바람피는 것도 아니고...’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한쪽으로는 작은 죄책감이 내 마음 한쪽에 달라붙기 시작했다.
‘그와 내가 애인이야? 아니잖아. 사귀기로 했어? 그런 말 한 것도 아니잖아. 그럼 아무것도 아니네. 그런데 왜 내가 죄책감 갖고 미안해야해?’ 2차로 가는 도중에 그와 나란히 어깨를 부딪치면서 걸으면서도 끊임없이 이런 생각이 내 머리를 괴롭혔다.
“아...” 그가 파전의 한 조각을 젓가락으로 들고 나를 지긋이 바라보면서 내 입 앞으로 내밀었다. 피식 하고 웃으면서도 나는 입을 벌리고 파전을 받았다.
그가 흡족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웃었다. 나도 그런 그를 보고 미소를 지으면서 입은 열심히 오물거렸다.
그래, 지금은 이렇게 재미있게 보내면 되는거야. 일부러 어렵게 터무니없는 과거로 힘들어하는 아저씨를 나같이 어린 녀석이 돌봐주겠다는등 가족이 되어주겠다는둥 할 필요도 없는거야. 난 아직 어리고 이렇게 편안한 녀석들과 즐길 시간이 필요한 거야.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아저씨였다.
잠시 시끄러운 술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어쩐일이예요?”
“그냥 일찍 집에서 돌아오게 되어서 혹시 괜찮으면 지금 오라고.....” 그의 어색한 목소리가 귀안에서 퍼졌다.
“뭐 벌써 열한시가 넘었으니, 너무 늦다 싶으면 그냥 쉬고.....”
“아니예요!” 예상치도 못한 대답이 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저 친구 만나느라고 지금 서울에 있는데, 지금 출발하면 금방 가요.” 입 밖으로는 그런 말을 내 뱉으면서도 내 머릿속에는 도대체 지금 내가 터무니없이 그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친구들 만나는 것일텐데. 서울이니 멀기도 하고...”
“아니예요!” 다시 한번 큰 소리로 그의 말을 잘랐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헤어지고 지하철 타러 가는 길이예요. 막차는 타고 가야죠. 기다리세요. 저 금방가요.“ 서둘러서 그가 다른 말을 꺼내기 전에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술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당황해하는 그의 얼굴에 대고 ‘집에 일이 있어서 지금 가야한다’ 고 말하고는 멀리 안쪽에 자리 잡고 앉은 현수에게는 손을 한번 흔들어 보이고는 등을 돌렸다.
“저기요! 회비는 내고 가셔야죠.” 등 뒤에서 모임의 회계를 맏는다는 녀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씨*발!”
미친듯이 달렸으나 지하철의 계단을 뛰어내려가는 순간 마지막 인천행 지하철의 문이 닫혀버렸다.
그때까지 먹은 술하고 안주값을 그날 따라 꼼꼼히 계산하고 인원수대로 나누어서 나에게 낼 금액을 말해주는 그 녀석 덕분에 막차를 놓쳐 버린 것이었다.
“그 개애색끼!”
정말 오랜만에 전력 질주를 한 나는 터질 것 같은 심장을 쥐고 숨을 가쁘게 쉬면서 그렇게 입 밖으로 욕을 뱉었다.
“아. 씨*발. 술 마시는 놈들은 하나같이 도움이 안돼요, 도움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다음 구로행이 오기를 기다렸다. 영등포역에서 내려서 부평으로 가는 버스를 타는 수밖에 없었다.
“저 이제 버스 탔어요.”
버스에 올라 맨 뒷좌석의 구석에 앉아서 그에게 전화를 했다.
“버스는 왜?” 그가 물었다.
“전철 막차를 놓쳤어요.” 말을 마치고 픽 하고 웃었다.
“고생하네. 친구들하고 그냥 더 놀아도 되는데 괜히 내가 전화했나보다.”
“무슨요!” 그런 말을 하는 그에게 화를 냈다.
“내가 얼마나 아저씨 전화 기다렸는데요. 오셨으면 당연히 전화하셔야죠. 애인이잖아요.”
“.........”
“우리 애인사이 아니예요?” 그렇게 물으면서도 내 자신이 터무니 없게 느껴졌다. 아까는 내 자신에게 뭐라고 그랬지?
“애인.... 사이지..” 그가 대답했다.
“그렇죠?” 그의 대답에 나의 마음은 평온해지면서 가슴은 강하게 뛰기 시작했다. 순간 술집에 남겨진 녀석이 떠올랐다. 그에게 미안하긴 하지만 역시 그와 나의 아저씨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나의 아저씨였다. 누구와 비교할 수 없는 ‘내 남자’ 였다. 그리고 이제 나는 그런 '내 애인‘의 품으로 달려가고 있는 중인 것이었다.
쌀쌀한 밤 기온을 느끼면서 가디건을 여미었었는데, 갑자기 온몸이 따뜻해졌다. 그의 존재는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그와 함께라면 시베리아의 추위 속에서도 벌목을 하면서 살아갈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둘이서 보드카를 마시면서 서로를 끌어안고 추위를 녹이면서...
“그런데, 어떻게 오늘 왔어요? 주말에 계속 집에 계실거라더니....”
“아, 그냥.....” 그가 말을 얼버무렸다.
“그냥 가족들하고 싸우기만 하고 일찍 왔다.” 그가 말을 끝내고 허탈한 목소리로 웃었다.
“왜요? 무슨 일 있었어요.”
“아니, 무슨 일은...... 그냥 항상 그래.”
“네?” 그의 대답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항상 그렇다는게.....”
“아무것도 아니야.” 그가 싱겁게 대답했다. 그리고는 큭 하고 웃었다.
“그런게 어딨어요. 우리 애인사이 아니예요? 아저씨는 내가 어떤 힘든일이 있었다면 궁금하지 않아요? 제가 대답해 줘야하는거잖아요.”
한참을 그는 나의 말에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마침내 무거운 그의 입을 열었다.
그가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인천으로 올라오게 되면서 그의 누나 둘과 같이 자취생활을 하게 되었다.
가난한 시절, 작은 방 하나에서 그는 그보다 열 살이 많은 큰 누나와 다섯 살이 많은 둘째누나, 그렇게 셋이 살게 되었다.
그의 큰 누나는 아버지의 성격을 꼭 빼다 박았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아버지의 폭력의 대상은 어머니였고 그런 일에 그가 간접적인 폭력의 피해자가 된 것이라면, 이제는 그가 그런 그의 누나의 직접적인 폭력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아침에 일어나는 그 순간부터 지옥의 날은 시작되는 것이었고 그런 그의 심장은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매일 아침 그의 누나의 입에서 나오는 첫마디는 ‘병*신같은새끼’, ‘쪼다새끼, ’꼴보기 싫어‘ 였다.
아침 밥상을 놓고 그가 아침을 먹고 있으면 그의 누나의 첫마디는, “빨리 처먹어!” 였다.
억지로 입 안으로 밥을 쑤*셔넣는 그를 보면서 그의 누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병*신새끼, 꼴보기 싫어.”
그렇게 생활을 하면서, 그런 분위기에서 무엇인가가 들어가면 소화를 시켜야 하는 위가 제대로 자기의 일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아침밥을 먹으면서 반사적으로 구역질도 자주 했고 그런 그를 보면서 그의 누나의 입에서 나오는 말도 더욱 험악해졌다.
아침식사동안 그의 누나 둘은 각각 회사 출근을 준비하고 등교 준비중이었고 세수를 하거나 화장실등을 사용하느라 방을 비우는 틈이 있었다.
그는 밥공기를 들고 창문으로 향했다. 창문 밖은 이웃집의 버려진 뒤뜰이었다. 키가 크게 자란 풀들이 가득했다.
그는 손을 들어 밥을 창문밖으로 버렸다. 그의 뒤집혀진 위는 도저히 입안으로 들어오는 내용물을 소화시킬수 없었다. 그리고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어느 날 창문 밖으로 밥을 버리고 있는 장면을 둘째누나에게 걸리고 말았다.
“너!” 그렇게 크게 말하긴 했지만, 그녀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그를 한번 노려보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중학교 2학년으로 올라가 5월경, 학교에서 철봉 놀이를 하던 그는 잘못 점프를 하면서 착지를 하면서 제일 먼저 손바닥을 짚었다. 그 당시에는 충격으로 인한 통증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의 팔목은 멈추지 않고 통증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그는 누나들에게 그런 일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주말에 인천에 살고 있던 이모댁에 가던 토요일, 같이 이모댁을 방문했던 외삼촌이 그를 데리고 배다리의 헌책방이 모여있는 거리의 그 뒤편에 있던 허름한 작은 병원으로 그를 데리고 갔다. 그리고 송월동의 집에서 그는 매일 20분을 걸어서 물리치료를 받으러 병원에 다녔다.
그리고, 더 이상 손에서 통증도 느껴지지 않고 기브스를 벗겨내기 며칠 남지 않던 어느 날, 그는 그렇게 멀리 걸어서 병원에 가는 것이 귀찮게 느껴졌다. 그리고 슬며시 하루를 병원에 가지 않았다.
일요일 아침, 그가 하루 병원에 가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큰 누나는 그를 집에서 내쫒아 버렸다.
갈 곳이 없는 그는 동인천 역 안의 낡은 의자에 하루 종일 앉아 있었다. 그렇게 멍하게 앉아 있던 그에게 한 할머니가 다가왔다. 그렇게 안쓰럽게 그를 바라보던 그녀는 그에게 빵과 우유를 사서 건네 주었다. 배가 너무 고팠던 그는 허겁지겁 먹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나중에 그의 집에 잠시 놀러왔던 막내이모를 통해서 그는 자신이 집을 쫒겨났었다는 것을 이모들도 알고 있었다는 것을 듣게 되었다.
일요일 저녁 그의 누나는 이모네 집에 놀러가서 다른 이모들하고 주말드라마를 같이 보았다고 했다. ‘건우는 왜 같이 오지 않았냐?’ 라는 질문에 누나는 병원가는 것을 빼먹어서 집에서 내쫒았다고 대답했다. ‘집에 안들어오면 어쩌냐’는 막내이모의 질문에 누나는 그렇게 대답했다고 했다. “그 병*신같은 새끼가 퍽이나 안들오겠네. 지가 배고프면 알아서 기어들오겠지!‘
그의 누나는 자주 방바닥에 신문지를 깔아놓고 그 위에 머리를 풀어 헤쳐놓고 누웠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비듬털어!” 그는 그런 그녀의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빗을 들고 그녀의 머릿속에 있는 비듬을 털기 시작했다.
“제대로 똑바로 털어. 나중에 일어나서 제대로 안털었으면 아주 죽는 줄 알아!”
그녀는 그의 집안에서 유일하게 그의 아버지의 눈치를 보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인천에 올라와서 같은 방에 있을 때에도 그녀는 그렇게 방바닥 한가운데에 신문지를 깔고 그에게 비듬을 털게 시켰다.
그런 모습을 보던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말했다.
“건우야.”
“네?”
“너 나가 뒈져라!”
그런 그의 어린시절은 도대체 상상할 수 없는 그런 모습이었다.
정말 그것이 내가 평범하게 생각하는 ’가정‘ 이나 ’가족‘ 이었던가?
겨우 열대여섯살이던 그는 그런 가족 속에서 어떻게 생존해왔던 것일까?
어느 순간 전화가 끊겼다. 하루종일 친구들과 떠드느라고 휴대폰의 배터리를 모두 다 써버렸던 것이다.
보조 배터리도 가지고 있지 않던 나는 허망한 생각이 들었다.
마음은 더 급해졌고,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나는 다시 전속력으로 아저씨의 원룸을 향해서 달렸다.
그리고 문을 열어주는 아저씨를 보고는 슬며시 그를 끌어 안았다.
그런 힘든 말을 해놓고도 짐짓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저씨를 품에 안고는 나는 두근거리는 심장과 가쁜 숨이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편안해진 후, 나는 아저씨의 여전히 상처받지 않아 보이는 태연한 척 미소까지 띠는 얼굴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아저씨. 이제 내가 아저씨 가족이예요. 아저씨는 그냥 나에게 의지하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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