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안의 그림자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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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저녁부터 벌어진 고스톱 판은 점점 더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좁지 않은, 오히려 꽤 넓은 거실에 둥그렇게 두 패로 나뉘어 모여앉은 부모님과 외가쪽 친척분들은 그렇게 화투판 위에 부서진 담뱃재와 여기 저기 쌓아놓은 백원짜리와 오백원짜리 동전들, 그리고 꼬아 모은 다리 앞쪽으로 끌어담아 놓은 지폐들이 탐스러운 꽃들마냥 피어나 있었고, 그 위로 뿌연 담배연기가 삐끔히 열어놓은 베란다의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찬바람의 리듬에 맞춰 흔들리고 있었다.


먼 남쪽에 살고 있는 친가쪽의 친척들 보다 수도권에 옹기종기 모여서 살고 있는 외가쪽 친척들이 오히려 아버지에게도 더 편한듯 보였다.  


그 먼길을 얼굴 한번 보러왔다고 찾아오는 친가쪽의 친척들이 끝끝내는 아쉬운 소리를 하기 위한 걸음을 한 것이라는 것을, 오랫만의 통화후에도 '혹시 여윳돈 있으면 좀...' 이라는 궁색한 말을 늘어놓는 친가쪽에 비해서 모두 넉넉한 살림에 방문할때마다 무엇인가 선물이랍시고 들고 오는 외가쪽의 식구들이 아버지에게도 훨씬 더 마음 편한 관계였을거라는 것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 외가쪽 친척들 사이로 나는 쉴새없이 들락거렸고 그럼에도 끊임없이 여기저기에서 다른 색깔 다른 톤의 목소리들이 내 이름을 불러댔다.


"민우야, 소주좀 더 사와라." "민우야 담배가 떨어졌다" "민우야 여기 재떨이좀 비워와라" "민우야 여기 애들 좀 다른 방으로 데리고 가서 좀 놀아줘라."....

 


아이들을 모두 손님방에 다 몰아넣고 여분의 티비를 그 안에 옮겨놓았다.

 

"너네들 여기 있어, 과자 사올테니까."


같이 따라오겠다는 사촌여동생을 마지막으로 그 방안에 밀어 넣고, 맨발에 슬리퍼를 끌면서 수퍼까지 뛰었다. 

찬 바람에 콧등이 찡해왔고 귀가 아렸다. 하지만 오늘 같이 올해의 마지막날  그녀석 없이 혼자 이렇게 잔심부름이나 하면서 보낸다는 것이 못내 아쉽고 화가났다.

친구들과 약속이 있다고, 청춘이 다 지나가기 전에 놀아봐야 한다고 말하는 나에게 아버지는 올해가 이렇게 가족들이 같이 보내는 마지막일지도 모른다고 나를 설득했다. 

"봄 되면 엄마하고 나하고 시골내려 갈건데, 그럼 너 온다고 해봤자 구정때나 와서 얼굴들이밀고 휙 가버릴거 아니냐.  올해가 친척들하고 모두 같이 보내는 마지막 신정일지 모르니까 친구들한테 얘기 좀 하고 나하고 좀 같이 있자꾸나." 

 

항상, "응, 아니, 왜? 어째서? 그런데?"  이런 단순한 한마디만 하실 줄 아셨던 아버지가 아침 식사중에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모른척 나가버릴수는 없었다. 


아마 엄마에게는 커밍아웃을 했지만, 아버지를 여전히 속이고 있는 죄의식 때문에 그렇게 붙잡혀 있게 된지도 몰랐다.

 


여전히 그는 전화통화하면서 웃었다.


"그럴 줄 알았어."   " 나?  난 뭐 그냥 집에 있어야지.  애인이란 놈이 집에서 못나온다는데 어쩔거야. 송곳으로 허벅지나 찌르면서 오늘밤 보내야지. 알았어. 눈치보면서 이따가 전화나 해줘. 목소리 듣고 싶어."


그의 목소리를 떠올리면서 혼자 빙긋이 웃으면서 슈퍼에서 이것저것 종류별로 과자를 집어서 계산을 한 후에, 집으로 오는 길에 호주머니를 더듬었다. 제길, 핸드폰이 없다. 아까 청바지 속에 집어넣고는 잊고 있었나 보다. 이런 모자란놈. 정말 멍청하다.

 


문을 열자마자 담배연기와 퀴퀴한 냄새가 진동했다. 옹기종기 모여 앉아있는 친척들을 피해서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둘째 이모가 뒤에서 불렀다.


"얘, 민우야!"


"네?" 멈춰서서 이모를 돌아보았다.


"너 어쩔거야? 여자친구 없어? 언제까지 남의 애들 뒤치닥거리만 할꺼야."


"우리 애들이 남의 애들야?"  첫째이모가 웃으면서 한마디 거들었다.


"그럼 지 애야? 저 녀석 몇살이지? 서른넘었지?'


"넘기만? 오늘밤 지나면 서른둘이다."  엄마가 둔탁한 목소리로 퉁명스럽게 내뱉으셨다.


"아니예요. 모 때되고 인연있으면 생기겠죠 뭐."  얼굴을 돌리고 방문을 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애들에게 과자들은 넘겼지만, 그 안에서 있는다는 것도 그렇고 밖의 친척들과 한자리에 있다는 것도 바닷물속에 던져진  민물고기마냥 숨막힐 것이 뻔했다.  하지만 지금 현재의 선택권은 나에게 없는 듯 싶었다.  문을 열고 거실로 나갔다.


여전히 내 얘기를 하고 있었던 듯 싶다.   내가 등장하자 마자 둘째 이모가 입을 여셨다.


"너 계속 여자친구 못구하고 그러면 내가 소개시켜줄께. 내가 이래뵈도 참한 아가씨 몇은 알고 있어."


작긴 하지만 그래도 여행사에서 부장이라는 직함을 달고 있는 이모는 평소에도 참하고 일 잘하는 여직원들이 몇 있다고 들이대시곤 하셨다.

“인물은 뭐 평범하지만 뭐 생긴게 밥 먹여줘? 밉상만 아니면 되지.” 라는 이모의 말 뒤에 “아무렴. 그냥 저 성질 드러운 녀석하고 같이 살아주기만 하면 난 괜찮아.” 라는 엄마의 말이 들려왔다.


할 말이 없어 쭈뼛거리는 내가 보기 안쓰러웠는지 형이 나를 거들었다.


“뭘요. 그 나이에 회사일 하다보면 정신 없고 시간 금방 가죠. 자기가 알아서 잘 할거예요. 지눈에 들어야지 어쩌겠어요.”

 

형이 조카를 무릎위에 앉히고 입에 뭍은 과자가루를 화장지로 닦아내며 말했다.


“회사 일은 무슨!” 형의 말을 퉁명스럽게 받으면서 엄마는 고개를 돌리시고 형의 무릎에 있는 조카 현이를 들어 안으셨다.


“담배연기 자욱한데 애를 여기다가 두면 어떻게 해!”


“놔두세요 어머니, 제가 안을게요.” 형수가 엄마를 향하면서 일어섰다.


“됐어. 놔둬라.” 엄마는 손을 한번 내 저으시고 현이를 안고 주방쪽을 향하셨다.


“할머니하고 맛있는 배 먹자. 맛난배가 있어요.”


 

책상 앞에 앉아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형이 문을 열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뭐하냐?”


“어! 아무것도... 그냥..”  멋쩍은 듯이 책상위에 놓여있는 책 중에서 하나를 집어들면서 고개를 돌렸다.


“엄마, 네가 이해해라. 원래 성격이 남 생각 안하시고 하시고 싶은 말 다하시면서 사셔야 직성이 풀리시는거 하루 이틀 겪은것도 아니잖아. 그래도 너 그렇다는거 아시면서도 저렇게 버티시면서 계신거 고맙게 생각해라. 어쩌겠냐.”


내 어깨에 손을 얹고는 가운데 손가락으로 툭툭 치면서 형이 말을 이었다.


“혹시 사귀는 사람 있어도 당분간은 절대 엄마한테 말하지 말고 눈치채지 않게 해드려.”


그 말을 끝내고 형은 돌아서서 문가로 향했다.


‘엄마 벌써 아셔.“ 눈은 멍한 상태로 펼쳐진 책에 고정한 채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알아. 말씀하시더라. 헤어졌다고 해. 그리고 부모님 이사가실때까지만 나 죽었습니다 하고 살아주면 안되겠냐? 진짜 헤어지라는게 아니라. 좀 숨겨달라는거야. 정말 미안하다. 이런 말 해서....”


그리고는 내가 무슨 대답도 하기 전에 방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문 밖에서는 큰 이모부와 둘째 이모의 그 큰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들려왔다.

 

“형부! 저 고도리라니까요!”


“아냐! 이번판 나가리야 나가리! 패가 하나 없잖아!”

 


틀어 놓은 라디오에서 드디어 카운트 다운을 시작했다.

“10, 9, 8, 7 ..”


밖에서는 여전히 새해가 온다는 것에 관심 없다는 듯, 이모의 억울하다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그 뒤로 다른 친척들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4, 3, 2, 1.”


‘펑’ 하는 축포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환호 소리가 라디오의 스피커를 통해서 쏟아져 나왔고, 이때를 위해서 준비해 놓은 아바의 Happy New Year 를 틀어 놓은 다음에 목청을 가다듬고 핸드폰을 들었다.


“스물 아홉 된거 축하해.”


픽 하고 그가 웃었다.


‘그러는 그대는 서른 둘 된 거 아니야? 정말 재주도 좋아. 어디서 30대가 20대 영계를 어떻게 꼬셔서는..“ 킥킥 거리면서 그가 웃었다.

“보고싶다” 목소리를 낮추어 대뜸 그에게 말했다.


사실, 딴이 그런 생각이 든 것은 아니었는데, 말을 뱉어버리고 나니 정말로 보고 싶은 감정이 솟아올라 눈에 눈물이 스며나왔다.

“그러게. 나두. 이런날 같이 있어야 하는데 그치?”


“2일날 친척분들 다 돌아가시니까 그날 밤이나 3일날...”


말을 마치기 전에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이 병뚜껑좀 열어봐라. 누가 이렇게...”


한손에 기름 병을 드시고 또 한손으로 방문 손잡이를 잡으시고는 나를 보시던 엄마의 표정이 일순간 바뀌었다.


부리나케 전화를 끊고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 말씀 없이 문을 닫고 다가오셔서 병을 책상위에 툭 하고 내려놓으셨다.


“그 놈이지?”


“아니. 다른 놈이야. 내가 얼굴이 좀 반반하다보니 나 좋다는 놈들이 꽤 많아. 내가 엄마 닮아서 한 인물 하잖아.” 무표정하게 책꽂이에 꽂혀 있는 책들을 훑어보면서 반항하듯 말했다.


“에이그. 이 자식아. 이 웬수야. 그냥 나를 말려 죽여라.” 목소리는 낮추시고 내 등짝을 손바닥으로 서너번 치시고는 병을 다시 손에 드시고는 고개를 돌리셨다.


“엄마. 집 안에 사람이 바글바글한테 그거 열어달라고 내방 들온거야?” 화가나서 한쪽 눈에 눈물이 흘렀다. 내 자신에 대한 화인지, 엄마에 대한 원망인지. 세상에 대한 울분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저 그 상황에 내가 있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었다.


문을 열고 나가시기전 어머니는 한마디 더 하시는 것을 잊지 않으셨다.


“이 드러운 새끼야. 내가 널 낳았다는게 한심하다.”

 

 

 

그가 뜨거운 커피 두 잔을 테이크아웃점에서 사가지고 자동차 조수석 문을 열고 들어와 앉았다.


“그래서 친척들은 모두 즐겁게 노시다가 가신거야?”


“어”


“근데 표정이 왜 그래?”


“너 며칠동안 못봐서. 중병 걸릴뻔 했는데, 너 이제 봐서 다행이다.”


“아이고... 이렇게 회사에서 딸랑거리면 금방 부장, 사장 다 되겠네.”


웃으면서 그가 나에게 커피를 내 밀었다.


“난 내일이나 만나게 될 줄 알았는데. 오늘 가신거 아냐? 나이 서른둘에도 집안에서는 막내라 이런저런 뒤처리 하느라고 고생 좀 했을텐데.”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커피홀더에 꽂아 놓고는 어두운 도로를 달렸다.

 

“근데 우리 지금 어디가는거야?” 그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면서 물었다.


“아무데나.” 짐짓 쓸쓸한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하면서 그를 흘끗 보았다.


“아무데나라....” 그런데가 있던가? 지도책을 한번 뒤져봐야 할 것 같은데?“


왼손은 핸들을 움켜쥐고 오른손으로 그의 손을 쥐었다.

 

“왜? 혹시 집에서 무슨 일 있었어?”


“아니. 아무 일도.... 근데 너 내가 가면 아무데나 다 나 따라갈수 있을거지? 너 항상 내곁이면 어디든지 같이 있기만 하면 되는거지?”


갑작스러운 내 말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면서도 그는 짐짓 고개를 끄덕였다.


시 외곽쪽으로 나왔는데, 그 많던 모텔들은 다 어디갔는지 시야에 보이지 않았다.


생소하고 어두운 밤길만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지나가는 차량도 거의 눈에 띄지 않았고 정차해 놓은 대형 트럭들만 한 줄로 늘어서 있었다. 내 눈에 트럭과 트럭 사이의 어둡고 좁은 공간이 들어왔다. 힘겹게 그 사이에 주차를 했다.


“여기가 어딘데?” 그가 물었다.


“나 너 위로가 필요해.” 그의 볼을 만지면서 그의 눈속을 들여다보면서 속삭였다. 희미한 불빛이 그의 눈 속에서 반짝였다.


말없이 그는 안전벨트를 풀더니, 한 손으로 내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 내 바지의 지퍼를 찾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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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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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아픈 마음 이해가 갑니다.
그래도 주인공 민우님이 잘 견뎌내는 듯
작가님의 작품에는 항상
아픔과 갈등 속에서도 사랑과 존중이 함께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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