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안의 그림자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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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훈한 밤 공기가 역앞의 광장을 채우고 있었다.
광장 맞은 편 대로를 가로질러 무리지어 횡단하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구경하다가 내가 서 있는 계단 아래에 줄지어 서 있는 빈 택시들의 숫자를 다 세어 갈 무렵에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언제왔냐?" 진수가 물었다.
"한 십오분 됐나?" 핸드폰을 열어 시간을 확인하는 나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쿡 찌르면서 그가 다시 물었다.
"아니 임마, 싱가폴에서 언제 왔냐구."
"아, 한 2주 정도 된거 같은데,"
"근데 왜 이제서야 전화를 해?" 내팔을 잡아 끌면서 그가 말했다.
"바빴어. 갔다 오니 밀린 회사일도 쌓여있고 싱가폴에서 근무한 보고서도 잔뜩 써야했고..."
"바쁘긴, 개뿔. 관심부족이지. 오자마자 형님한테 보고를 먼저했어야지 시키가 빠져가지고." 내 어깨를 툭치면서 그가 말했다.
"근데 니 애인은 어딨어? 같이 안왔어?"
"아, 어디좀 들렀다가 오느라고, 좀 있다가 올거야. 그리고 말야, '니 애인'이 뭐냐? 성환이다 성환이."
"그래, 미안. 성환씨지." 겸연쩍게 웃으면서 그를 따라 코너를 돌았다.
"근데 여기 와보는 것도 참 오랜만이다."
역 근처의 지하에 있는 바의 계단을 내려가면서 앞으로 먼저 내려가는 그에게 말했다.
조금 빈약하게 말라보이는 40대의 남자가 우리를 맞았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홀은 텅 비어있었다. 무대와 여덟개의 테이블, 그리고 등받이없는 바 전용의자가 늘어서 있는 카운터 하며 변한것이 없었다.
"근데 여기는 전혀 안변했네?"
"어, 주인 아저씨도 그대로야. 근데 애인하고 헤어졌는지? 저번에 올때에는 둘이서 사이 좋아보이더만 안보이네."
진수가 그 40대의 주인남자로부터 나에게로 시선을 돌리면서 말을 이었다.
"이 바닥이 워낙 소문이 빨리 돌아서 말야."
"근데, 안본 사이에 너 좀 찐것 같다. 성환씨가 잘 먹여주냐?" 씨익 웃으면서 말을 바꿨다.
"어, 나한테 무지 잘해. 더 봐야 알겠지만." 진수도 얼굴에 웃음을 띄우더니 나를 보면서 물었다.
"근데, 그럼 너 싱가폴에서 얼마동안 있던거지?"
"1월 중순에 갔다가 4월 20일에 돌아왔으니 한 3개월 정도 있었던 거 같다."
"그래, 오래있었네. 재미 좋았어?" 그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나에게 물었다.
"재미 좋기는... 걔네들은 어려서부터 영어를 배워서 아예 원어민 이더라. 그 속에서 버티느라 죽는 줄 알았다. 의사소통때문에 하루종일 신경써서 저녁때 퇴근해서 숙소에 돌아오면 두통으로 매일밤 고생했어. 잠도 제대로 못자고..."
지금도 두통으로 고생하는 양 얼굴을 찡그리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그 덕에 영어 좀 늘었겠네?" 그가 내 어깨 너머로 누군가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면서 말을 이었다.
"언제 또 외국으로 나가?"
"아냐. 이제 당분간 그럴일 없어. 그 건도 갑자기 일이 생겨서 담당자가 못가게 되니까 만만한게 나라고 회사에서 그냥 보내버린거지. 급하게 일때문에 보내야하는데, 총각에 몸하나 달랑 있으니 간단하잖아."
"그렇구나." 그가 내말에 대답을 하고는 순간 얼굴이 밝아지며 함박 웃음을 띄고는 입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 돌아보니 얼굴에 환한 웃음을 짓고 있는 성환이와 대학생으로 보이는 두명의 남자가 우리 테이블을 향해서 걸어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성환이 손을 내밀었다.
"예, 그러게요. 어떻게 전에보다 더 어려 보이시는거 같아요?" 웃으면서 그의 손을 잡았다.
그는 돌아서서 뻘줌하게 그 뒤에 서 있던 두명의 젊은 남자를 나에게 소개했다.
"이쪽이 민우씨 만나보려고 오매불망 하고 있던 수환이구요. 저쪽에 싸가지 없게 생긴 놈이 은혁이예요."
"아, 형! 첨보는 사람앞에서 매너 없게!" 은혁이가 일그러진 얼굴로 성환이를 바라본 다음에 나에게 고개를 끄떡하고 인사했다.
"수환이는 말야. 니 사진 한번 보고는 너한테 연락 올때까지 언제 너 소개시켜줄꺼냐고 툭하면 물어봤었어. 저 놈도 너 맘에 들어하는 눈치고." 진수가 은혁이를 턱으로 가리키면서 속삭였다.
수환이는 조용하고 다소곳했다. 얼굴에 웃음을 잃지 않으면서도 예절바르고 내 눈치를 보는듯했다.
자꾸 내 옆에서 나와 그를 엮어보겠다고 눈치를 주는 진수의 노골적인 태도에 오히려 당황해진 나는 불편함을 모면하기 위해서 수환이에게 나가서 노래를 불러보라고 시키고는 맥주를 마셨다.
노래부르기 좋아하는 진수, 성환커플도 신청곡 번호를 쪽지에 적고는 수환이의 뒤를 따라 무대로 나갔다.
이제야 살 것 같다는 생각에 한숨을 돌리는 내 옆으로 은혁이가 다가와 앉았다.
"너랑 수환이랑 친구냐?" 대답대신 그는 고개를 한번 끄떡하더니 팝콘을 한움쿰 집어서 입안에 넣었다.
"넌 노래 하는거 안좋아해?" 이번에도 그는 대답 대신 나를 흘끗 본 다음에 맥주잔을 들어서 비웠다.
"넌 왜 안나가냐?" 녀석까지 보내고 편하게 앉아있으려고 끝끝내 말을 시켜보았다.
"묻지도 않고 반말 까시네요?" 손으로는 팝콘을 연신 들어서 입안에 넣으면서, 눈으로는 나를 무시하면서 기분나쁘다는 투로 말했다.
"존댓말 해줘?"
"벌써 반말로 고속도로 뚫으셨잖아요."
맹랑한 생각이 들었다. '이놈봐라'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오랜만에 장난기가 발동했다.
"형이 그 사람이예요?"
"누구?" 나를 보고 묻는 은혁이의 말이 순간 이해가 되지 않아 되물었다.
"지난 겨울부터 수환이 소개 시켜 준다는데도 계속 튕긴다는 사람이 형이냐구요."
"아." 그제서야 이해가 갔다.
"튕긴게 아니고 내가 어디 좀 갔다오느라고 바빠서..."
"정우성이나 원빈 정도 되는 줄 알았더니.. 쯧쯧!" 내말을 중간에 끊고는 그가 안됐다는 듯 혀를 찼다.
"그렇게 비싸게 구시길레 인물이 뭐 그정도는 받쳐주는 분인가 했었어요." 의아해 하는 나를 보면서 그가 말했다.
"난 은혁이라길레 슈퍼주니어의 멤버인줄 알았지." 웃으면서 내가 대꾸했다.
"남의 외모 말할 처지가 아닌거 같은데?"
"형처럼 폭삭 늙지는 않았어요." 그가 지지 않고 대꾸했다.
"너 몇살인데?"
"스물 넷요. 형은요?"
"서른 다섯." 내 대답을 듣더니 기가 막히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가 입을 크게 벌렸다.
"열한살차이.... 도둑이 따로없네!"
"요새 애들은 다 키가 크던데 너는 어쩌다 자라다 말았니?" 그의 반응에 공연히 심술이 나서 깐죽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성질을 긁어보고 싶어졌다.
"형도 남 걱정할 처지가 아니거든요?" 그가 날 똑바로 쳐다보며 응수했다.
"너 보다는 커."
"도토리 키재기죠."
"내 나이 세대는 꽤 괜찮은 키야. 넌 친구들 중에서 땅꼬마지?"
내 말을 무시하며 그는 내가 따라놓은 맥주잔을 가져다가 홀짝거렸다.
"야! 그거 내 잔이야."
"잔은 안먹어요. 맥주만 마시고 돌려드릴께요."
앞의 무대에서는 수환이는 느려터진 사랑 노래에 온갖 감정을 넣어가며 온몸으로 부르고 있었고 진수와 성환이는 서로 부둥켜 안고 마치 세상에 그들 둘만 있는 듯한 분위기에 젖어있었다.
"애인은 있냐?" 내가 은혁이를 돌아보며 다시 물었다.
"왜요. 제가 형 맘에 들어요?"
"아니, 지금 없으면 앞으로도 구하기 힘들거 같아서."
"걱정도 팔자시네요. 이래 뵈도 저 좋다는 사람 많아요."
내가 뭐라고 대꾸하려는 순간 주머니속의 핸드폰의 진동이 느껴졌다.
"여보세요?"
"너 어디야?" 다짜고짜 어머니의 목소리가 귀안을 가득 채웠다.
"왜? 이 밤중에 무슨일 있어?" 일어서서 문 밖으로 나가면서 대답했다.
"너 찾아서 왔는데, 집에 너도 없고 열쇠도 없으니 아버지하고 밖에서 지금 서있잖아. 너 당장와!"
진수에게 상황설명후에 급하게 계단을 뛰어올라 밖으로 나오는데 바로 뒤에서 나를 따라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은혁이의 얼굴이 보였다.
"번호알려주세요."
당황해 하는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나의 손에 그의 핸드폰을 쥐어주었다.
"형 번호 찍어주세요."
여전히 멍한 채로 서있는 나를 보면서 그가 말을 이었다.
"나 형하고 사귀어볼래요. 형하고 연애하고 싶어요."
낙관하고 있던 신규계약건이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나 팀 전체에 비상이 걸렸다.
아직도 여전히 싱가폴에서 근무하는 동안의 업무를 종료하지 못한 상태라서 나는 그 신규 프로젝트의 업무파악조차 할 시간이 없어서 내용조차 모르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해되지도 않는 서류를 들고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중에 핸드폰이 울렸다.
막 무엇인가가 머리에 떠오르려는 순간이었기 때문에 전화를 받으면서 짜증이 몰려왔다.
"여보세요?"
"......"
"아 누구야. 바쁜데! 여보세요!" 미간을 찌푸리면서 검토하고 있던 서류로부터 눈을 떼지 않고 있는 나의 귀에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누구?" 귀찮다는 듯, 추궁하는 듯, 그렇게 목소리의 주인에게 물었다.
"나 준호야. 이준호."
숨이 막혀오고 정신이 몽롱해졌다.
분명 그의 목소리였다.
그렇게 갈망했지만 또 그만큼 나에게 상처를 준, 유일한 사랑을 증오로 바꾸는 법을 가르쳐준 그 목소리와 이름이었다.
"............."
" 잘 지내지?"
"잘 지내." 아무리 냉정하려해도 내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혹시, 이번주 토요일 낮에 시간 괜찮으면 한번 볼수 있을까?"
갑자기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은 그냥 백지 한 묶음이었고 사무실은 뽀얀 사막이었다.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었을때에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강대리님! 외부전화 와있어요. 통화끝나면 받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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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편 기다리겠습니다.
민우님의 감정에 완전 몰입이 됩니다.
은혁의 대화가 당돌하면서도 재미있네요
양념역할 톡톡히 했음 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