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그리 버드 1
작성자 정보
- 작성
- 작성일
본문
그가 그곳에 앉아있었다.
이른 퇴근으로 오랜만에 지하철 좌석의 맨 끝인 명당자리에 앉아 유튜브를 보고 있었다.
화면 속에서는 공포로 얼굴이 백짓장이 된 한 젊은 여성이 자신의 뒤를 따라오고 있는 남자를 피해 숲 속으로 난 어두운 길을 목숨을 걸고 도망치고 있었다.
그녀의 숨소리는 마치 금방이라도 넘어갈 듯 가빴고 입 밖으로는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이제 그 둘 사이의 거리가 점점 더 좁혀지면서 검은 실루엣의 남자가 앞으로 뻗은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움켜쥐려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길에 박혀있던 돌부리에 걸린 그 남자가 앞으로 넘어지면서 그의 손에 들려있던 날카로운 단도가 자신의 옆구리에 박히고 말았다.
피를 흘리면서 신음을 하는 그를 내려다보면서 항상 공포영화가 그러하듯이 그런 도망갈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죽어야만 했던 그 여성 캐릭터는 그녀의 두 다리를 촐랑거리면서 오두방정을 떨고 있었다.
입 밖으로는 계속 귀를 자극하는 비명을 질러대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이제 공포에 떨고 있는 것인지, 안도하고 있는 것인지 혹은 기쁨으로 벅차오른 것인지 모를 표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뭐지?’
그런 어이없는 장면에 나도 몰래 슬며시 실소가 나왔다.
긴장으로 잔뜩 움츠려 있던 가슴을 펴면서 크게 한 숨을 쉬었다.
그리고 피식거리는 웃음을 참으면서 고개를 들고 슬며시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그때 그가 나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가 나의 맞은편의 중간자리에 앉아있었다.
예전에 쓰던 검은 뿔테 안경은 사라지고 매끈해지고 뽀샤시해져서 나와 만날때보다 훨씬 더 세련된 모습이었다.
잘 다려진 양복바지의 선이 눈에 띄도록 그는 그의 긴 다리를 꼬고 앉아서 손에 들고 있는 책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순간 그와 눈이 마주칠까 불안해진 마음에 나는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다시 나의 손에 들려있는 휴대폰의 화면으로 시선을 주었다.
마치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칼을 들고 설치는 그 남자와 그의 한뼘 앞에서 ‘퍽(fuck)’을 외치며 비명을 지르면서 지랄을 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더 이상 나의 집중을 끌지 못했다.
그리고 나의 온 신경은 내가 슬며시 고개를 돌리고 있는 그의 존재에 가 있었다.
눈치채지 못하도록 슬며시 흘끔거리면서 그의 그런 모습을 훑어보았다.
깔끔하게 정리되어 넘겨진 머리카락, 비비인지 씨씨인지를 잔뜩 발라 뽀샤시해진 그의 볼의 피부를 따라 그의 매끈한 목덜미가 보였다.
그리고 그의 산뜻한 짙은 청색의 정장은 그의 잘 발달된 가슴 근육을 슬며시 가리고 있었다.
그는 머리가 좋은 만큼 자신의 몸에도 돈과 시간을 아낌없이 투자하는 사람이었다.
매일 헬스장에 가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항상 PT를 받아야 했고 지정된 알맞은 식단을 고수하고 예외없이 따르는 것에 익숙했었다.
그리고 그랬던 그와 헤어진 지도 이제 일년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와 사귈 때 보다도 더 말쑥해 보이고 세련되어 보이는 그는 자신의 시선을 들고 있는 책에 고정한 채로 가끔씩 책장만을 넘기고 있었다.
‘이상하게 나와 헤어진 놈들은 나와 사귈 때 보다도 더 멋있어지더라.’
그것이 정말 사실인지, 이제 내 손안에서 벗어난 그들의 존재가 소위 말하는 ‘내손에 들리지 않은 떡이 더 커 보인다’ 인지는 잘 판단이 되지 않았지만, 여튼 그런 씁쓸한 생각이 나의 머릿속으로 스며들었다.
내려야 할 역을 알리는 방송이 들려오고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해 슬며시 발을 옮겨서 문 앞으로 향했다.
그리고 쓸데 없는 잡념은 지하철 안에 버려놓고 열린 문을 통해 나와서 승강장위를 걷기 시작했다.
역의 밖으로 나오는 계단을 지나 횡단보도를 건너기 위해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다가 무심코 고개를 돌렸을 때, 놀랍게도 나의 시야에 그의 모습이 다시 들어왔다.
사람들 사이에 가려 나와 눈이 마주치지는 않아서 다행이었다.
분명 그도 나처럼 도로를 건너기 위해서 기다리는 듯 보였다.
‘왜?’
갑자기 의문이 들었다.
‘이 근처로 이사왔나?“
‘일년전만 해도 화곡동에 살았었는데....’
신호등이 바뀌면서 나도 그에 대한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이제 어디서 뭘 하면서 살던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야. 각자 자기 인생 사는 거지 뭐.’
길을 따라 걷다가 골목을 지나고 작은 경사가 진 언덕을 넘었다. 그리고 승용차만 지날 수 있는 좁은 길을 건너기 전 무심코 뒤를 돌아다 보았다. 그리고는 깜짝 놀랐다.
여전히 그가 내 뒤를 따라 걸어오고 있었다.
가방은 한쪽 어깨에 메고는 한손으로 두툼한 책을 쥐고 나의 뒤의 경사로 길을 따라 올라오고 있었다.
‘뭐지?’
순간 당황함과 함께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지하철안에서 날 본거였어?’
등에서 땀이 배어나는 듯 느껴졌다.
‘그래서 날 따라온거야?’
갑작스러운 생각에 초조해져서 나는 발걸음을 빠르게 하고 길을 건너 다시 골목을 돌았다.
‘설마, 나에게 아직까지 마음이 있어서 날 따라오는 건 아니겠지?’
‘설마....’
손에서 땀이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나를 아직도 잊지 못하고....’
그러자 잡자기 마음 한 구석에 그를 향한 안쓰러움이 번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설마 아니겠지.’
하지만 여전히 그는 나의 뒤를 묵묵히 따라오고 있었다.
‘아, 씨*발.’
입안이 말라오기 시작했다.
이제 길만 건너면 아파트 입구였다.
망설일 여유도 없이 다시 부지런히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다시 사귀자고 하면 어쩌지?’
심장이 콩닥거리면서 뛰기 시작했다.
‘아..... 새끼들. 한번 헤어지면 끝인거지 꼭 이렇게 집착을 하냐. 사람 피곤하게....’
슬며시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었다.
집에까지 찾아와서 다시 만나달라는 둥 하면서 소란을 부리면 더 쪽팔리고 큰 일이 되는 것이었다.
슬며시 몸을 돌려 내 뒤를 따라오던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 그가 나를 보고는 움찔하는 표정을 지었다.
“형!”
그래, 나보다 두 살 위니 그래도 옛정을 생각해서 형이라고 불러준다.
그렇게 그를 부르는 나를 그는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짜식, 연기 드럽게 못하네.’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아직까지 내 뒤를 따라오고는 결정적인 순간에 놀란척이라니....’
“형, 왜 그래요?”
“......”
똥그래진 눈동자로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왜 날 따라와요?”
여전한 그의 표정이 어이가 없어서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다.
“아니, 그게 아니고.....”
“형, 우리 헤어진지 벌써 일년이 넘었어요.”
“그게 아니고...”
“이제 그만 형 인생 사세요. 사람 피곤하게 하지 마시고!” 마치 두통이라도 있다는 듯 나는 손을 올려 손가락 끝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야!”
그의 불쾌하다는 듯한 투의 목소리에 시선을 그의 눈에 두었다.
“나도 얘기 좀 하자.”
뻣뻣해진 표정으로 그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 여기 살아.”
“........”
그가 나를 잠깐 더 빤히 바라보더니 손을 들어 앞쪽에 있는 106동을 가리켰다.
“저기 이층에 산다. 204호!”
“..........”
“너 따라온 거 아니야. 그러니까 혼자 오해하고 오바하지 마라.”
여전히 그렇게 말하는 그의 말이 믿겨지지가 않아서 슬며시 다시 그의 표정을 살폈다.
그렇게 나를 빤히 바라보던 그의 눈이 한순간 나의 등 뒤로 옮겨가면서 그의 얼굴이 환하게 바뀌었다.
그리고 슬며시 손을 들어 한번 흔들어 보였다.
그의 시선을 따라 나의 어깨 너머로 고개를 돌려 돌아보았을 때, 나보다 서너살 어려보이는 녀석이 실쭉한 웃음을 지으면서 다가왔다.
“누구.......”
그의 곁에 서서 슬며시 그의 팔을 잡고는 그 어린 녀석이 나를 아래위로 훑어 보았다.
“아.”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열기도 전에 그가 입을 열었다.
“그냥 전에 한두번 봐서 얼굴만 아는 애야. 이 동네 사나봐.”
그리고는 나를 무시하고 그는 녀석의 손을 잡고 끌어 당겼다.
' 아 쪽팔려.'
고개를 돌려 옆으로 침을 내 뱉었다.
'아, 씨*발. 이게 왠 개쪽이야.'
그렇게 멀어지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쪽팔림과 함께 슬며시 분노가 마치 검은 구름처럼 뭉실뭉실 거리기 시작했다.
‘나쁜새끼!’
나 없이 못산다고 그렇게 지랄하더니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딴 놈하고 잘 살고 있다.
관련자료
-
이전
-
다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