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랑새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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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석이를 만나기로 한 시간이 다 되어 가는 퇴근시간에,  부장의 갑작스러운  소집으로  열린 회의는 끝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화장실에 들른 후에 회의실에 조금 늦게 도착해보니 남아있는 자리는 부장의 바로 옆 자리 밖에는 없었다. 

한성깔 하고 까다로운 부장과 가능한 거리를 두기 위해서 회의에 참석하는 다른 직원들은 일찌감치 회의실에 도착해 부장의 시선이 닿지않는 자리부터 앉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고개를 떨구고 마치 자신들이 준비한 자료들을 아주 심각하게 보는 척 하면서 부장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음이 안봐도 비디오였다. 

 

자리가 사람을 변하게 한다고 했던가?  바로 지난해만 해도, 여전히 과장타이틀을 달고 있들 때에는 부하 직원들과 격이 없는 대화를 좋아한다는 둥, 직원은 가족이라는 둥 하면서 입바른 소리를 곧잘 하던 사람이, 부장으로 승진한 후에는 어느 사이에 항상 까칠하고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직원들을 무시하는 발언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마치 찬물을 끼얹은 듯한 회의실에 앉아서 초조하게 승환은 맞은 편 벽에 걸린 시계를 흘끗거리고 있었다.  

  


부지런히 서둘렀지만, 약속은 30분이 넘게 늦어 버렸다. 


카페의 문을 열고 안으로 한발을 내딛었다.

살 것같은 그 기분, 온몸을 휘감는 시원한 에어컨 바람의 환대를 느끼며 고개를 둘러보다가 구석자리에 앉아서 빙긋 웃고 있는 종석을 보자 승환이 멋쩍은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많이 기다렸지? 미안해 형. 회의가....”

“괜찮아.” 나도 할 일이 있어서 너 기다리면서 일하고 있었어.“ 종석이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를 손으로 가리켰다.

“너 말야..."

승환이 자리에 앉자 테이블의 한쪽 귀퉁이에 올려놓았던 지갑에 손을 뻗으면서 종석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지난 주말에 밴드 모임에서 싸울 뻔 했다면서?” 

“어? 어떻게 알았어?”

“무슨 일이 있으면 말을 하지 임마. 왜 얘기 안했어?” 종석이 나무랐다.

“뭐 좋은 일이라고. 그리고 형한테 말한다고 해서 형 기분도 꿀꿀해질 뿐이지 뭐 달라질게 있나?”

“그래도 얘기를 해야지. 애인이라는게 뭐야?” 지갑을 움켜쥐고 종석이 몸을 일으켰다.

“라떼 아이스 마실거지?” 

종석을 보고 승환이 고개를 까딱 하고는 손수건을 테이블 위에 던져 놓았다.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서류에는 마치 도면 같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는 그 것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방이 세 개, 주방이 하나, 널찍한 거실에 목욕탕의 크기도 그럴 듯 해 보였다.

“뭔지 알고 보는거야?” 승환을 향해 씨익 웃어보이고는 종석이 커피를 승환의 앞쪽의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내가 왜 몰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뒷통수를 긁어보이고는 승환이 도면을 종석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너 앞으로 주일이하고 만나는 거 자제 해."

커피잔을 입에 대고 한모금 마시고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 승환을 종석이 빤히 바라보았다.

"예전부터 그다지 탐탁하게 여기질 않았는데, 이번에  얘기 들어보니 가까이 해서 그다지 좋을 건 없는 애 같다.” 

말을 마치고 종석이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서류를 손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알았어.” 승환이 커피잔을 들어 입에 갖다 댔다.

“짜식, 도대체가 그 일이 있던게 몇 년전 얘기인데 지금까지.....” 종석이 서류를 가방에 넣으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뭐가 몇 년전 얘긴데? 무슨일이야?” 

“어? 별거 아니야. 그냥 혼잣말 한거야.” 종석이 승환의 얼굴을 보고 피식하고 웃어보였다.


“그것보다.....” 종석이 다시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뭐?”

“너, 내일 모레가 무슨날인지 알지?”

말없이 승환이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정현이 형한테서 오늘 낮에 전화왔었어, 너하고 같이 얼굴이라도 보면 좋지 않겠냐고...”

“........”

“나도 가고 싶은데, 그때 회사에서 일이 좀 많아서 아무리 시간을 내려고 해도 맞출수가 없다.”

“........”

“그래도 그 형이 우현이 살아 있을 때, 너에게도 아주 잘 했잖아.” 종석이 승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너라도 가서 인사라도 해야지?”


   

정현은 우현의 친형이며 유일한 피붙이기도 했다. 


그는  일반세계에서  승환과 우현의 관계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으며 또한 열렬한 지지자였다. 

물론 우현의 형수인 그의 아내도 그들의 관계를 알고 있었지만, 승환은 그녀의 밝은 표정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다지 개의치 않았다.  동성애에 비호감과 증오를 마음속에 담고 있는 인간들이 세상엔 너무나 많이 있고 그들과 논쟁은 커녕 한마리 말이라도 섞는 것은 피차 짜증나는 일이 분명했다. 

그저 그런 감정은 그녀 자신의 마음속에 담아놓고 결코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는 만족했다. 


하지만 그녀를 봐야할 때마다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어쩔수 없었다.  




“어서와라.”

아파트의 현관문을 열어주는 정현의 얼굴이 승환의 시야에 들어왔다.

“오랜만에 뵙네요. 잘 지내셨어요?”

초등학교에 막 들어간 그의 아들 녀석이 쪼르르 따라나와 승환이 들고 있던 작은 과일바구니를 마치 빼앗듯 덥썩 끌어안았다.

  


정현의 얼굴에는  여전히 부드럽고 선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얼굴에서 또한 승환은 우현의 모습을 언뜻언뜻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게 닮지 않은 형제라고 처음엔 생각했지만,  어느 순간 미소를 짓는 눈빛에서, 말투와 목소리 톤에서 문득문득 우현의 느낌이 들기도 했다.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맞는 듯 했다.

가치관과 성격도 아마 틀림없이 비슷했으리라.


마음 깊은 곳에서 잠들어 있던 그립고 아쉬운 감정이 아련하게 그의 목을 따라 뜨거운 덩어리가 되어서 올라왔다.


“어릴 때 부모님을 사고로 여의고 우리 형제 둘이서만 의지하면서 살아왔는데, 이제 나 혼자 남았다.”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아  정현이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어째, 이 나이 되어서도 마치 다시 고아가 된 기분이 드는것 같기도 하고 말야.” 그가 말을 멈추고 하릴없이 웃었다.

씁쓸한 미소를 따라 지으면서 무의식적으로 승환은 고개를 숙였다. 


“건강하지?” 잠시 후 그가 물었다.

“네...”  고개를 들어 승환은 정현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가 지긋한 눈빛으로 승환을 바라보았다.

“녀석이 널 무척이나 좋아했었는데....” 그가 마치 감정을 억누르려는 듯 잠시 말을 멈췄다.

“널 두고 가다니..... 얼마나 너가 보고 싶겠냐.”  말을 멈추고 그가 검지 손가락 끝으로 눈꼬리를 슬며시 문질렀다.


승환은 다시 슬며시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의 앞에 조카 녀석이 사과한쪽이 찍혀있는 포크를 내밀었다. 

가만히 승환이 그 포크를 받아 쥐었다.


“엄마!” 주방으로 뛰어가는 조카의 뒷모습에 시선을 주다가 승환은 우현의 형수와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그녀는 곧 고개를 돌리고 싱크대 위에서 무엇인가를 열심히 다듬기 시작했다.

그녀는 승환이 있는 자리에서 거의 입을 열지 않아서 승환은 그녀의 목소리를 거의 기억하지 못할 정도였다. 

처음 우현이 그를 집으로 초대했을때가 떠올랐다.   그때에도 집안으로 들어와  인사를 할 때 그녀는 어색한 미소를 얼굴에 띄는 듯 싶더니,  곧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는 몸을 돌려 주방쪽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때부터 그녀에게는 자신이 환대를 받지 못할 존재로 여겨지면서,  승환은 그녀가 여전히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울 와이프가 좀 싹싹한 맛은 없는데 그래도 사람이 참하고 착해.” 마치 승환의 마음을 읽었던 듯, 주방에 시선을 두고 있는 승환의 얼굴을 보고는 그가 말했다.



늦은 시간, 일어서는 승환의 손을 슬며시 그가 잡았다.

“가끔 와서 얼굴 좀 보여주고 해. 와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얘기도 좀 해주고.” 그의 표정은 마치 어려운 부탁을 하는 사람의 그것마냥 간절함이 뭍어나 있었다.

승환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보고 고개를 슬며시 끄덕였다.



  


골목길을 따라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이제 큰길에 닿으면 택시를 탈 생각으로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는 그의 눈에 큰길가에 서서 웃고 있는 종석이의 모습이 들어왔다.

“어? 형! 왜 여기 서 있어?”

겸연쩍은 미소를 띠면서 종석이 슬며시 다가오더니 손을 내밀어 승환의 손을 잡았다. 

“내가 왜 여기 있겠어. 너 기다렸지.”  나긋한 목소리로 종석이 대답했다.

“왜 안들어 왔어? 형이 종석이형도 기다리시는 눈치던데.” 

“사실..."  그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 형은 너가 나하고 사귀는 거 몰라.” 그가  멋쩍게 웃었다.

“혹시라도 둘이 같이 갔다가 말 실수라도 하거나, 행동에서 티가 날까봐.”

“그러다가 내가 형하고 사귄다고 말하면 어쩔려구?” 종석에 세워놓은 차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승환이 물었다.

“너가?” 그가 소리를 내어 웃었다.

“넌, 가서 우리 둘이 사귄다고 말하라고 해도 못할 걸?” 승환을 보고 다시한번 피식 하고 웃어보이고는 그가 차의 문을 열었다.



“형은 잘 지내시지?” 핸들을 두손으로 붙잡고 사거리의 빨간색 신호등을 올려다보면서  종석이 입을 열었다.

“응.”

“형수는 어때?” 그가 다시 물었다.

“형수도 뭐 잘 지내는 것 같던데. 왜?” 

“아니... 뭐... 가족들 다 잘 지내나 궁금하니까.” 신호가 바뀌고 다시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혹시 형수가 무슨 말 안하지?” 조용한 음악만이 가득 채우던 차 안에서  잠시동안의 침묵 후에 다시 종석이 물었다.

“무슨 말?” 승환이 고개를 돌려 종석의 옆 모습을 보면서 물었다.

“아냐. 그냥...” 그가 말을 얼버무렸다.

“뭔데? 무슨 일 있어?”

“일은 무슨 일... 오랜만이니 안부가 궁금해서 그러는거지.”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종석이 곁눈질로 승환을 흘끗 보았다.

“정말? 혹시 나 모르는 일 있는거 아냐?”  장난섞인 투로 승환이 물었다.

“일은 무슨 일. 오바하지 마라.” 그가 피식하고 웃어보였다.

“피곤할텐데. 좀 자 둬. 집에 도착하면 깨울테니까.” 



고개를 뒤로 젖히고 승환은 흘러나오는 음악을 낮은 목소리로 따라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 순간 그는 눈을 감고 종석의 곁에서 잠이 들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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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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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상 퀴즈하듯 매회 작가는 인물들의
사연, 관계 등에 대해  조금씩 풀고 있다.
독자는 그 속에서 상상의 즐거움을 만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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