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랑새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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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술을 마신다.
잊기 위해 마시고, 기억하기 위해 마시고, 또 기분이 좋아서 혹은 기분이 나빠서, 우울해서 또는 아무 이유 없이도 술집문을 열고 발을 안으로 내딛는다.
혹자는 평상시에는 하지 못할 말을 하기 위해서 마시기도 한다.
그렇게 간이 배 밖으로 나오게 되면,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말을 꺼낸다.
결과가 좋으면 좋은것이고, 나쁘면 술 탓으로 돌리면 된다. 손해볼 것 없는 장사다.
“혹시 너 오늘 무슨 일 있었어?”
나지막하고 따뜻한 목소리로 종석이 옆에 앉아 있는 승환의 얼굴을 슬며시 들여다보면서 물었다.
“왜? 아무일 없었는데....”
그렇게 말하면서 승환은 종석이를 보고 웃어보이려고 했다. 하지만, 어색한 표정이 되어버렸다.
“무슨 일 있는데 뭐.” 종석이 다시한번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평상시 같으면 형 친구들 앞에서 귀염도 떨고 할텐데, 오늘은 너답지 않게 너무 조용한데?” 종석이 손을 승환의 등 뒤로 돌려서 그의 허리를 슬며시 쓰다듬었다.
“그리고 오늘은 술도 꽤 마시는 것 같고... 아직 초저녁인데 벌써 취한 것 같은데?” 종석이 빙긋 웃으면서 승환의 볼에 자신의 코를 한번 갖다 대고 슬며시 간지럽혔다.
그런 종석의 애정표현이 승환에게는 오늘따라 조금 불편하게 느껴졌다.
마음속에는 낮에 주일이 한 말이 끊임없이 메아리처럼 울려왔다. 아무리 마음속에 넣고 꾹꾹 눌러 덮으려고 해도, 끓어 넘치는 냄비마냥 속에서 부글거리면서 올라왔다.
종석이에게 묻고 싶었다.
그 술집의 모임에서 둘러 앉아 있는 종석과 그의 친구들의 얼굴을 돌아보면서도, 승환은 마치 그들 모두 다 알고 있는 사실을 자신만 모르고 있는 듯 느껴져서 혼자 바보가 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종석에게 묻기에는 상당히 불편한 질문이었다.
아무리 그가 우현의 친구였다 하더라도, 이제는 승환의 연인이 된 입장이었다. 현재의 연인에게 과거의 그가 바람을 피운 사실을 묻는다는 것이 얼마나 터무니 없는 일인가.
말하지 않겠다고, 그저 잊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술잔을 기울일수록, 잊으려고 할수록, 오히려 더욱 궁금해졌다.
여느 때 같으면 벌써 취할 때였지만, 승환의 정신은 오히려 더욱 또렷해지는 느낌이었다.
술자리가 끝나고 택시를 타기 전, 집에 돌아가기 전에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같이 둘이서만 커피를 마시고 싶다고 승환은 종석에게 넌지시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지나갈 수 없을 듯 했다.
그럴 거라면 적당히 취한 지금, 그에게 취기의 만용을 빌미삼아서 물어보는 것도 좋을 듯했다.
“너 오늘 과음한거 같은데? 얼굴도 빨개졌고.....” 커피를 테이블위에 내려놓으면서 종석이 말했다.
“그냥 오랜만에 마시려니 잘 들어가네. 그런 날 있잖아. 술이 달게 느껴지는 날....” 종석을 보면서 승환이 피식 웃었다.
커피잔을 입술에 대고 한모금 마시면서 종석이 승환을 보고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여전히 조용하고, 평온한 표정이었다.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잘 타는 자신에 비해, 항상 차분함을 유지하는 그의 삶은 넓은 호수의 잔잔한 물결 그 자체인 듯 보였다. 깊고, 푸르고 또 넉넉한 마음의 소유자였다.
“형.”
넌지시 부르는 승환의 목소리에 종석이 들고있던 커피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승환을 빤히 바라보았다.
“오늘....” 말을 꺼내 놓고도 여전히 그 순간에도 승환은 잠시 망설였다.
“오늘, 종로에 좀 일찍 나왔다가 주일이를 만났어.”
".........."
“만나려고 한건 아니고.... 내가 카페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들어왔더라고... 전에 일 사과한다고...”
“..........”
“근데, 형.” 본격적으로 말을 꺼내기 전 무안해진 표정으로 승환이 종석의 표정을 살폈다.
“우현이 형이 날 만나기 전에... 누구랑 사귀었어?”
“걔가 뭐라고 그래?” 여전히 침착한 표정으로 종석이 물었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잠시 가만히 있던 승환이 드디어 다시 입을 열었다.
“자기가 우현이 형하고 사귀었다고....”
종석의 눈빛이 순간 바뀐 듯 했다. 하지만 다시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승환이 다음 말을 하기를 기다리는 듯 그렇게 희미한 미소를 띄고 승환을 바라보았다.
“승환아.” 잠시 침묵을 지키던 종석이 낮은 목소리로 슬며시 입을 열었다.
대답대신 승환은 그저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우현이 죽던 날...” 말을 꺼내는 종석의 표정이 아련해 보였다.
“그날 딱딱한 시멘트 바닥에 누워서 눈으로 차마 볼수조차 없을 정도로 처참해진 모습으로, 간신이 나를 올려다보면서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우현이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
“나를 보면서... 그 녀석이 네 이름을 불렀어.”
“.......”
“죽어가면서 마지막으로 그 자식 머릿속에 있는 게 너였어.” 그가 빤히 승환을 바라보았다.
“......”
“그런데, 더 뭐가 필요해?”
종석의 말에 승환은 고개를 숙였다. 눈꼬리에서 눈물이 배어나왔다.
“너랑 사귀게 되면서도, 계속 그 자식의 마지막 모습이 순간순간 떠올라. 그래도, ‘나중에 우리 인생 끝나고 다시 만날 때까지 내가 곁에서 니 대신 승환이 잘 보살펴 주다가 갈게.’ 라고 나 그 자식에게 얘기한다.”
“.......”
“그래, 너 만나기 전에 잠시 우현이가 주일이 만났어.” 잠시동안의 침묵후에 손을 뻗어 승환의 손을 슬며시 잡으면서 종석이 다시 입을 열었다.
“두세달 정도 만났을 거야. 그때에는 주일이도 풋풋했거든, 스물이나 됐나 할 정도였으니까. 걔가 그래도 생긴 건 봐줄만 하잖아. 그렇게 어린 녀석이 지가 가진 매력 알고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들 앞에서 살살 꼬리 흔드는 것 보면서 우리가 그랬거든, ‘물건’이라고...”
그의 말에 일그러진 표정으로 승환이 피식 하고 웃었다.
“그때, 그러다가 그 녀석이 우현이를 따라다니기 시작했어. 우현이는 너무 어리다고 부담되어서 싫다고 했지. 근데 그 자식 끈덕지게 떨어지질 않아서.... 열 번 찍어 안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우현이가 두 손 든거야. 사귀어 보자고...”
“그런데 왜 그렇게 빨리 헤어졌대?”
“좋다고 달라붙는 놈 많으니, 어린 녀석이 마음이 쉽게 변했지. 우현이 금방 차이고....” 말을 멈추고 종석이 피식 하고 웃었다.
“그 다음에 우현이 너 만나고 사귀게 되면서 나중에 주일이가 다시 자기 애인 때문에 힘들다고 얘기나 들어달라고 해서 한두번 만났을거야. 아마 그때가 그 녀석이 눈 때문에 안과 계속 다닐 때 였을거야. 그때 그 녀석이 다시 잘 해보자고 꼬리치는 거 우현이가 단칼에 잘랐어. 아니라고. 자신한테는 너가 있다고...”
그의 말에 순간 우현을 의심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진 승환이 붉어진 얼굴로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너, 그 녀석말에 혹시라도 우현이 의심하면 절대 안되는거야.”
승환이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걔가 바람 핀 사람은...”
“한둘이어야지.”
“.........”
“사람마다 살아가는 방식이 달라. 제각기 살아가는데 우리가 뭐라고 할 건 없지. 하지만 엮이진 마. 너는 네 방식으로 살아야지. 그렇지?”
그의 말에 다시 승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 공연히 과거 얘기 때문에... ” 그가 말을 잇기 전 겸연쩍은 표정으로 씨익 웃었다.
“이제 나 형한테 더 잘할게.” 승환이 슬며시 종석의 손을 잡았다.
“그럼. 당연하지.” 손을 뻗어 승환의 볼을 슬며시 어루만지면서 종석이 피식하고 웃었다.
한참 보고서에 오타를 교정하고 있을 때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일 열심히 하고 있지?” 종석의 목소리가 귀의 안에서 퍼졌다.
“당연히 열심히 하고 있지. 근데 무슨일이야?” 그가 컴퓨터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슬며시 기지개를 켰다.
“방금 결정된 건데. 나 다음달부터 대전 지점으로 출근하게 됐다.”
“뭐?” 승환의 눈이 똥그래졌다.
“그래도 대전 안멀어. KTX 타면 금방이야”
“그렇긴 하지만...”
“가기 전에 우리 시간 내서 여행이나 갔다오자. 우리 사귀면서 아직 먼데로 여행 한번도 안갔다 왔잖아.”
“나야 좋지. 근디 어디로?” 느긋한 목소리의 종석의 제안에 승환이 마치 기운을 내려고 하는듯,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후쿠오카 어때?” 종석이 물었다.
“일본?” 승환의 커진 목소리에 주변의 직원들이 승환에게 시선을 돌렸다.
빨개진 얼굴로 그는 고개를 슬며시 숙이고 다시 휴대폰을 귀에 바짝 댔다.
“예전에 한번 갔던 적이 있는데, 공원도 좋고 바닷가도 볼만 하거든. 같이 비행기도 타보고..”
“나야 좋지. 형. 나 외국에 처음 가보는 건데.”
“그럼 주말에 한번 잡아본다. 이제 짤리지 않게 열심히 일해.” 말을 마치고 종석이 전화를 끊었다.
휴대폰을 내려놓고 승환은 다시 고개를 돌려 노트북의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와의 여행이 마냥 즐거운 기분이 드는 것은 아니었다.
너무 갑작스러웠다. 대전으로 가게 된 것부터 여행까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너무 뜻밖의 일들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 머리를 저었다.
갑작스럽게 대전으로 발령나게 되어 떨어져 지내게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고,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둘만의 시간을 오롯이 둘만이서 보내려는 종석의 배려인것이 틀림 없었다.
이제야 과거는 그렇게 정리가 되는 듯했다.
어떻게 우현의 사고 현장에 종석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세상은 우연으로 가득한 곳이었다. 아니면 일이 끝나고 그 둘이 만나기로 한 곳이 바로 그 작업을 하고 있던 건물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여튼, 우현의 마지막이 외롭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끼면서 승환은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그렇게 그의 오전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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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고 지나갈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다른 반전이 있을 듯한 이 불안한 행복은 무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