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랑새 (마지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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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공항 3층에 승환이 도착했을 때에는 아직 9시도 채 되기 전이었다.
작은 백팩을 등에 메고 그는 처음 와 본 공항의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지루한 일상생활의 반복적인 틀을 벗어나서 마치 자유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는 듯한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승환은 마치 자신이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러 떠나는 오디세우스인 것 마냥 의기양양해져서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사람들 사이를 누비고 다녔다.
하지만 곧, 시작될 기미도 보이지 않는 출국절차를 기다리면서 그는 점점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편의점에서 물 한 병을 사가지고 나와서 목을 축이면서 다시 자신이 탈 비행기의 항공사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였다.
“승환아.”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낮고 차분한 여성의 목소리에 그가 몸을 들렸다.
그런 목소리 만큼이나 우울한 표정으로 우현의 형수가 작은 손가방을 한쪽 손에 든채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 안녕하세요.” 놀란 표정으로 얼떨결에 승환이 고개를 슬며시 숙여서 인사를 했다.
그녀가 차분한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어디 가시는.....?” 승환이 말끝을 흐리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대답대신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너한테 할 말이 있어서 왔어.” 여전히 어두운 표정으로 그녀가 조용하게 말했다.
“저한테요?” 그녀의 뜻밖의 말에 승환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졌지만, 그녀의 굳어진 표정에 마음이 불편해지고 불안해졌다.
“그럼 어디 앉을데라도...”
그가 그들이 서 있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그런 그를 보며 그녀가 입을 열었다.
"조용하게 얘기하게 그냥 저쪽 구석으로 가자.” 그녀가 출입문과 엘리베이터 사이에 있는 공간을 가리켰다.
“저. 무슨 말씀이신지...” 말을 꺼내지 못하고 파래진 얼굴에 입술을 슬며시 깨물고 있는 그녀의 굳어진 표정을 보면서 긴장된 목소리로 승환이 물었다.
“도련님 얘기야.” 그녀가 입을 열었다.
"........"
예상치 못한 그녀의 말에 그가 놀란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실......"
여전히 말을 꺼내기가 어려운 듯, 그녀가 다시한번 낮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멍한 눈빛으로 주위를 들러보고 다시 입을 열었다.
"도련님 사고로 죽고 나서...... 하루하루 보내는 것이 힘들다.” 그에게서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고 그녀는 다시한번 낮은 한숨을 쉬었다.
“내가 도련님 등 떠밀어 죽게 한 것 같아서...” 창백한 얼굴로 아픈 미소를 지으면서 그녀가 승환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씀 이신지...”
말을 잇지 못하고 다시 그녀는 한숨을 쉬고는 무의식적으로 손에 들고 있던 손가방의 끈을 손가락 끝으로 문질렀다.
“우리 회사 건물 외벽 청소를 간신히 담당 이사님에게 부탁해서 얻어냈어. 도련님이 일하는 청소업체가 일감이 많지 않다고 하길래....” 그녀가 말을 멈추고 낮은 한숨을 쉬었다.
“별건 아니지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해서 몇 개월을 그 이사님한테 비위 맞춰주고 온갖 잡일도 해주면서....."
그녀가 다시한번 쓴 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간신히 기존업체와 계약이 끝나고 연장하는 대신에 도련님네 회사와 거래하기로 했다.”
여전히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한 승환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장마 기간이긴 했지만 마침 비도 멈추고 그 날이 도련님이 우리 회사 외벽을 청소하기로 한 날이었어."
".........."
"아침에 출근준비를 하면서 예정대로 작업하시냐고 도련님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도련님이 '바람도 불고 몸도 찌뿌둥하다고 쉴까하고 생각 중'이라고...” 그녀가 다시 말을 멈추고 입술을 슬며시 깨물었다.
“그 말을 듣고나니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그녀가 다시한번 낮은 한숨을 쉬고 승환에게서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그렇게 떨리는 입술로 감정을 삭이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인지 궁금해진 승환이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내가...."
그녀가 마침내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그랬다. ‘이래서 못하고 저래서 쉬고 그러다가 어느 천년에 돈 버시겠냐’ 고.... "
"..........."
그랬더니, 불같이 화를 내면서 ‘멋대로 자신한테 이것 저것 해라말라 하지 말라’고 하더라."
".........."
힘들게 자존심 다 버리고 몇개월간 비위 맞춰가면서 그 일 받아온 것 생각하니 그러는 도련님 태도에 너무 화가 나서 나도 ‘그러려면 알아서 독립하시라’고 짜증을 냈다. 그랬더니 나를 한번 쏘아보고는 집을 나가버렸다. 그리고 나도 출근을 하고...”
멍하니 넋이 나간 표정으로 승환은 그녀의 움직이는 입술을 바라보았다.
“문자로 도련님한테 ‘그깟 바람 조금 분다고 일을 쉴 생각말라’ 고 했다. 이 세상엔 더 위험하고 힘든 일을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고....”
그제서야 승환은 왜 우현이 쉴 것이라고 하던 그 바람이 부는 날에 일을 하겠다고 고층 작업대에 올라간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일 하지 않고 또 어디로 가버렸으면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같은 사무실 직원이 외벽 청소 하는 것 보고 왔다면서 ‘바람이 많이 부는데 괜찮을까’ 하더라. 그래서 어떤가 하고 건물 밖으로 나오는데, 무슨 소리가 들렸어. 누가 비명 지르는 것도 들리고..."
그녀가 말을 멈추고 어두운 표정으로 입술을 물었다.
"그래서 뛰어갔더니 도련님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어. 너무 무섭고 놀래서 구급차 좀 불러달라고 외쳤는데, 옆에 있던 경비원이 그러더라 ‘이미 죽은 것 같다’고....”
“도대체 왜....” 멍하게 정신이 나간 듯 보였던 승환의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그녀를 보고 마치 신음하듯 입을 열었다.
“왜 그러셨어요. 왜! 조금이라도 위험할 것 같았으면 일을 한다고 해도 말리셨어야죠!”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표정으로 승환이 두 손을 자신의 가슴 위로 모아 올려 경련을 일으키는 듯이 떨고 있었다. 마치 그녀의 목이라도 조르려는 모습 같았다.
“왜 그렇게 잔인하게 구셨어요. 왜요!” 마침내 그의 양 눈꼬리 끝으로 눈물이 맺히더니 볼을 타고 흘러내셨다.
“도대체 왜!”
“너무 미워서 그랬다.‘ 여전히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입술을 떨면서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 인간이 너무 진절머리나게 싫었어!” 그녀의 일그러진 표정속에 차가운 눈빛이 비쳤다.
“그 역겨운 손으로 내 아이 만지고 안아주는 것도 싫었고, 같은 식탁에 앉아 같은 반찬에 젓가락 닿는 것도 싫었어. 음식 씹는 소리 조차도 끔찍했고......"
그녀가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그녀의 머리카락이 그녀의 얼굴 앞으로 쏟아져 내렸다.
"작은 공간 안에서 매일 매일 같이 생활하는 것도 소름끼칠 만큼 혐오스러웠다.”
그녀의 말에 승환이 크게 한방 맞은 것처럼 충격에서 순간 벗어나지 못했다.
“왜요?” 굳어진 표정으로 그가 물었다.
“왜 그렇게 미웠던 건데요? 설마 형이 게이라서요?” 이제 말투에 분노가 배어있는 승환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당신이 죽인거야.” 그가 울먹였다.
“당신이 우현이 형을 죽인거야!”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왜. 나를 찾아 온 거예요. 지금!” 그가 이를 악물었다.
“왜! 나에게 자랑이라도 하려고? 얼마나 잔인한지? 얼마나 편협했으면 자기 게이 시동생 죽여 놓고 나에게 자랑이라도 하려고요?”
그가 일그러진 표정으로 억눌린 잔인함을 표출하듯이 그녀에게 쏘아붙였다.
“그게 아니야.... ”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처참한 표정으로 허공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면서 기가막혀하는 그를 보면서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런게 아니야.” 그녀가 떨리는 손으로 손가방을 열고 그 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무슨 핑계를 대려고...” 그런 그녀를 노려보면서 조소하는 투로 그가 내뱉었다.
“냬 얘기를 좀 더 들어봐.” 눈물에 마스카라가 젖어서 눈 아래가 거무스름하게 번진 채로 그녀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조금 전의 차가움은 어딘가로 사라지고 고통에 잠긴 나약한 삼십대의 여성의 표정이었다.
“종석씨가 얘기하지 말라고 신신당부 했는데, 꼭 해야겠다. 응?” 그녀가 두 손을 가슴위로 모으고 그를 보고 사정이라도 하듯 그녀가 말을 이었다.
“승환아. 너 6년이나 사귀었다지만 우리 도련님을 몰라.”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
“도련님은 다른 사람을 책임질 만한 사람이 아니었어. 형한테 얹혀 살면서 자기 자신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면서 살았어.” 그녀가 그의 눈치를 살피면서 말을 이었다.
“너에게는 성실해 보이고 인생 열심히 사는 살가운 연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도련님 독립심 없고 끈기 없어서 일 하나도 제대로 오래 못했어. 그리고 형하고 나한테 당연한듯이 손 벌리면서 살았다."
".........."
"너와 만나면서 너에게 쓴 돈도 우리 집에서 많이 가져간거야.”
그녀의 터무니 없는 말에 기가 찬 듯한 표정으로 승환이 비웃었다.
“내가 지금 하는 말이 거짓말인지는 나중에 종석씨에게 물어보렴. 그리고 지금은 그냥 내 얘기 좀 들어줘. 응?” 그녀가 다시 사정하는 표정으로 그의 눈치를 살폈다.
“7년 전 쯤에 너가 도련님하고 사귀기 전에, 종석씨가 먼저 너 좋아했었다. 너는 몰랐겠지만....."
".........."
"어떤 모임에서 너를 처음 본 순간부터 네가 마음에 들었다고 했어. 그런 말을 듣고 난 후에, 도련님이 그럼 자기가 다리 놔주겠다고 너를 만났던거야. 그리고 종석씨한테는 ‘승환이는 너 같은 스타일 안좋아 한다더라’ 고... 그래서 자기랑 사귀기로 했다고 그랬다.
".........."
"내가 직접 들은 말이야. 그때에는 종석씨가 집에 자주 놀러와서 도련님하고 술도 같이 하고 그랬거든."
".........."
"그 말 듣고 종석씨 그냥 웃고 넘기더라. 너 전혀 몰랐지?” 그녀가 손에 쥐고 있던 손수건으로 눈 아래를 슬며시 문질렀다. 하지만 마스카라 자국은 지워지지 않고 더 번져 버렸다.
“그때, 도련님은 주일인가 뭔가 하는 애와 사귀고 있었는데, 너를 보면서 너와도 만나게 된거야. 그러다가 걔가 도련님이 자기 말고 누군가도 만난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되어서 크게 싸우고 헤어졌고..."
그를 죽음으로 몰아갔던, 그녀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오기 시작하자 승환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의 말은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어떤 의도를 가지고 사실을 왜곡하기 위해서 거짓말을 늘어놓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가 이렇게 말하는 목적이 무엇일까? 분노가 끓고 있던 와중에서도 순간 그녀의 말에, 믿고 있던 우현의 전혀 다른 모습이 충격으로 다가와 슬그머니 허탈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때에도 정해진 직업이 없던 도련님은 형한테 매달 용돈 타면서 살았다."
".........."
"얼굴 반반한것 하고 피티 받으면서 몸짱 만든다고....."
".........."
"그렇게 아무 영양가 없이 겉만 번지르르한 도련님한테 연락오는 남자들도 많았지."
".........."
"툭하면 나한테 손 벌리고 비상금 있으면 내 놓으라고, 나중에 자기 뜨면 다 갚는다고...” 그녀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노는 것만 좋아하면서 허영만 가득차고...아무것도 없으면서 자기 외모가 무슨 대단한 것인 것처럼 자기도 성공할 방법이 다 있다고 하면서...."
".........."
“주인집에서 전세금 올려 달래서 힘들게 마련해 놨는데.... 자그마치 육백오십이다. 돈있는 사람이야 푼돈일지 몰라도, 나에게는 목숨하고 바꿀만큼 큰 돈이었어."
그녀가 붉어진 눈으로 승환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것도 몰래 들고 나갔다가 며칠만에 다시 빈 손으로 들어오고... 남편은 하나 있는 핏줄이라고, 부모 없이 힘들게 자라서 그렇다고, 도련님이 비빌 언덕이 자기 밖에 더 있겠냐고. 날더러 좀 더 너그럽게 이해하고 관심 가져주라고 그랬다.” 그녀가 다시 손수건으로 눈꼬리를 슬며시 눌렀다.
“몇 년 전에는 또 그 주일인가 하는 놈하고 다시 바람이 나서 돌아다녔어, 그때에도 돈 좀 달라고 하길레 내가 매몰차게 없다고 했더니, 내가 애 유치원비를 봉투에 넣어서 식탁위에 잠시 올려놓았는데 그것마저 들고 나갔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고 낮은 목소리로 흐느끼기 시작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우현과 그녀가 지금 그의 앞에서 말하는 사람과는 절대로 일치 하지 않는 괴리감으로 그는 순간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었다.
“견딜 수 없이 너무 속이 상해서 종석씨한테 전화해서 하소연을 했다. 그랬더니, 종석씨가 그날 애 유치원비 내라고 돈 봉투 들고 왔더라. 그리고 우현이와는 대화가 통하지 않을테니 주일이한테 잘 얘기해 보겠다고 그러더라. 그러더니 잠잠하길래 얘기가 잘 통했나보다 했다.” 그녀가 말을 멈추고 낮은 기침을 했다.
“나중에 도련님이 누군가하고 통화하는 걸 우연히 들었는데, 종석씨가 주일이한테 좋게 말해서는 말 안듣는다면서 힘좀쓰는 자기 친구들 데리고 가서 잡아다 놓고 한번만 더 말 안듣고 또 만나면 아픈 눈, 아예 두 눈 다 빼서 돼지한테 던져주겠다고 알아서 기라고 협박하고 그랬다고 상종못할 나쁜 놈이라고 욕하고... 그래서 한동안 도련님하고 종석씨 사이 좀 멀어졌었어.”
그녀가 말을 멈추고 멍한 얼굴의 승환을 바라보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종석씨는 주위 사람들한테 너한테 절대 그런말 흘리지 말라고 입단속 시켰다고 했어. 마음약한 너 상처 받는다고... 너 그거 몰랐지?” 그녀가 여전히 눈물자국 가득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 다음에 또 돈이 필요하니 종석씨한테 손 벌리면서 다시 화해하고... 그래도 여전히 도련님은 종석씨 눈 피해서 주말에는 너 만나면서 주중에는 일 없을 때에는 툭하면 안산이나 천안까지 가서 어떤 놈들 만나고 오고.... 직접 얘기 안 해도 집에서 남들 듣던 말던 큰 소리로 휴대폰들고 통화하면서 하루 종일 보내니 모를래야 모를수가 없지.” 그녀가 말을 멈추고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렇게 몇 푼 버는거 다 써버리고 나중에는 우리 애가 저금통에 고사리 같은 손으로 한푼 두푼 모은거, 그게 몇만원이나 된다고.. 그걸 들고 나가더라.” 그녀가 다시 말을 멈추고 눈물을 참는 듯 눈을 꼭 감았다.
“아주 지긋지긋해서....애만 아니었으면 진작에 이혼했을거야. 하루에도 몇 번씩 도련님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너무 화가 치밀어 올라서 밥을 먹어도 소화도 못시키고... 내가 왜 사나 그런 생각만 들고 죽고 싶었고...” 그녀가 다시 낮은 목소리로 흐느끼기 시작했다.
“곧 정신 차리고 돈 좀 벌어서 집에서 나가서 독립하겠지 하고 혼잣말로 내 감정 다스리려고 나 무척 노력했다. 그런데 장마라고 또 꼼짝 안하고 집에서 놀면서 쓸 돈 좀 달라고 하는 도련님의 그 뻔뻔한 얼굴을 보니 참을 수가 없었어. 바람 심하게 부는 게 무슨 대수인가 했다. 도련님이 안하겠다면 나라도 올라가서 청소하고 싶었어. 누가 그 돈 나한테 준다고 하면!” 말을 멈추고 그녀가 얼굴을 손수건에 파묻고 흐느꼈다.
“나는 몰랐어요.” 전혀 알지 못했던 놀라운 사실의 충격을 소화하지 못하고, 여전히 괴리감을 완전히 없애지 못한 채로 그녀를 보면서 승환이 마치 중얼거리듯 말했다.
“너가 아는게 뭐가 있는데?” 그녀가 코맹맹이 소리로 말하고는, 손수건에 코를 ‘팽’ 하고 풀었다.
“너 항상 순진한 얼굴로 우리집에 와서 내용은 하나도 모르면서 좋은 얘기만 듣고 대접만 받고..... 너무 답답하고 화가나서 너 붙잡고 진작에 다 털어놓으려고 했다. 그런데 종석씨가 그러지 말라고 사정을 하더라 너 어리고 여려서 상처 받는다고, 너 그런 내용 알아서 뭐 득될게 있느냐고... 시간 지나면 다 과거일 되는 거니까 너 아픔주지 말고 조용히 지나가자고..... 그렇게 나한테 만날때마다 내 눈치 보면서 부탁한다고 해서 내가 참았던거야.”
“그런데, 도련님이 죽고 나서 내 인생도 너무나도 편해지고 살 것 같아서.... 하루하루가 너무 행복해져서...” 그녀가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흐르는 눈물을 다시 그 손수건으로 문질렀다.
“평범한 남들만큼 행복해지니까 오히려 살 것 같아서 도련님한테 미안한 가책이 느껴지더라. 행복해지는 만큼 내가 그날 도련님 등 떠밀면서 한 말이 가책이 되어서 스멀거리면서 내 발목을 붙잡았어.” 그녀가 다시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피곤하고 고통스러운 표정이었다.
“도련님은 이미 이 세상에 없다고 해도, 그래도 그 일로 고통받았을 너 생각하니, 언제 너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말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어. 종석씨도 한사코 말렸고... 그래도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애 아빠가 너하고 통화하는 거 듣게 되었어. 이제 종석씨가 대전으로 이사가고, 너도 이제 점점 우리집에 들를일도 없어질 테고.... 그래서 이제는 얘기 해야겠다고 단단히 결심하고 온거야.” 그녀가 말을 멈추고 고개를 떨구었다.
“나 때문에 너가 고통받은 것이라면, 내가 정말 미안하다. 네가 겪은 고통의 몫을 내가 어떻게 해줄수도 있는것도 아니고, 나를 용서해달라고 하는 것도 아니야.” 그녀가 손을 들어 손가락으로 눈 주위를 문질렀다.
“형이 사고로 추락했을 때...” 승환이 힘들게 입을 열었다.
“그때, 종석이 형이 같이 있었어요?”
“그 사람이 왜 그때 거기에 있었겠어.” 그의 뚱딴지 같은 말에 그녀가 그를 올려다보고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나중에 애 아빠가 병원에서 전화했지. 금방 달려왔더라. 너한테 연락했냐고 해서 안했다니까 자기가 전화하겠다고....”
힘들게 몸을 움직이던 비행기가, 천천히 빨라지더니 어느 순간 힘차게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창 밑으로 건물들과 산과 바다가 내려다 보였다.
그녀가 그와 헤어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말이 떠올랐다.
"그래도 나 너무 원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여전히 붉어진 눈을 한 채로 우울한 표정을 그녀는 지어보였다.
"꼭 내가 등 떠밀어서 그날 도련님이 작업을 하게 된 것은 아니야."
"........"
"여전히 종석씨가 너 좋아하는 거 알고 있던 도련님이 종석씨에게 제안을 했어. 삼개월간 군소리 않고 꾸준히 일하고 너 포기하는 조건으로 자기 작은 가게하나 차려줄수 있냐고...."
그녀의 그 말에 승환은 순간 숨이 막혀왔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처음에 우리집에서 둘이 술 마시면서 그 말 했을때, 난 취중농담으로 들었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그런말을 입 밖으로 낼 수있을까 생각했었어."
".........."
"그런데 나중에 알게 되었다. 정말로 도련님이 멀쩡한 제 정신에 종석씨에게 그렇게 말했다는 걸...."
".........."
견딜 수 없는 충격에 승환은 그녀가 그 이후로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떻게 그녀가 그런 그를 보고 몸을 돌렸는지 멍한 상태였다.
멀어지는 그녀의 모습을 승환은 여전히 아무 느낌도 없는 멍한 상태로 지켜보았다. 한참 후에서야 그의 옆으로 지나치는 사람들이 내는 소음이 조금씩 들려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그가 맞이한 전혀 다른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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