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심리학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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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가 교재 30페이지에 해당되는 내용입니다. 지금 시간이... 네, 이것으로 수업 마칠게요. 오랜 시간 수업 듣느라 다들 수고했습니다.”
드르륵.
90분 수업이니 실제로는 그리 짧지 않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금방 흘러간 시간이기도 했다. 쓰지도 않은 노트와 필통을 정리해 가방에 넣는 동안, 아까 눈여겨보았던 우리 친구들 몇 명이 어느새 그의 주변에 몰려있다. 다들 정말 수업을 듣고 궁금해진 내용을 질문하려는 건지, 아니면 그에게 말 한 마디 건네 보고 싶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기분이 언짢아진다.
“나 뭐하냐. 쟤네들 헛수고라고 비웃을 때는 언제고.”
뭐라도 된 마냥 질투하는 스스로의 꼴이 우스워 고개를 가로젓는다. 가방을 둘러메고 학생들에게 둘러싸여있는 그를 보며 조용히 목례만 끄덕한 뒤, 그대로 빠르게 강의실을 빠져나가려는데.
“잠깐만!”
멈칫. 휙.
“...?”
“거기 본인 부른 거 맞아요.”
“저, 저 말씀이세요?”
“뒤에 수업 없으면... 잠깐 저 좀 보고 갈까요.”
분명 그가 확실히 내 눈을 마주친 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너무 놀라 바보 같이 말까지 더듬는다. 이 의아한 상황이 나만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닌지, 또 다시 우리 친구들의 질투어린 시선을 한 몸에 받는다. 너희들 생각 다 들려. 그런데 나도 지금 나 따위가 그에게 지목받는 이 상황이 너희들만큼이나 당황스럽다고. 그가 학생들의 질문을 차례로 받는 동안, 교단 한 쪽 구석에 서서 그를 기다린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도저히 그 이유를 모르겠다. 그렇지만 왠지 지금 이 상황이... 싫지만은 않다. 만약 내가 그에게 단순히 엑스트라 같은 학생1, 학생2가 아닐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분 좋을 일이니까.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변마저 다 마치고. 나를 제외한 모든 학생이 강의실을 완전히 빠져나가자, 그가 나에게로 한 걸음씩 성큼성큼 다가온다. 그에 맞춰 내 가슴이 점점 더 빠르게 뛰는 게 느껴진다.
“불러놓고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그런데 왜 저를...”
“구면이죠? 저와는. 그날 학교 앞 카페에서.”
화끈.
“예? 예...”
전혀 못 알아볼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그가 그 날의 내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면 설마... 내가 일부러 자신을 보러 오늘 이 수업에 들어왔다는 사실마저 눈치 챈 걸까. ...아니다. 관점을 바꿔 생각하자. 평범한 일반의 사고 구조라면, 자신에게 반한 남학생이 자신을 한 번 더 보러 청강하러 왔다는 생각을 할 리가 없지. 침착하자.
“우리 학교 학생이었네요.”
“...그때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제가 실수하는 바람에.”
“아뇨. 내가 미안합니다. 나 때문에 사장에게 많이 혼났나요? 그 분 표정이 썩 좋지 않던데.”
“......”
“평소 같았으면 못 본 척 그냥 받았을 텐데, 그날 화가 좀 많이 난 일이 있어 예민해진 바람에... 사실 덕분에 난 오히려 얼음으로 열나는 속도 식히고 좋았었는데.”
비록 별다른 표정 없이 하는 말이었지만, 차가운 사람이라면 절대 해줄 리 없는 빈말이었다. 어느 정도 확신이 선다. 이 사람, 별종이니 싸이코니 하는 소문만큼 그리 나쁜 사람 같지는 않다.
“이름이 뭔가요? 출석부에도 없어서.”
“청강 왔습니다. 현진오입니다. 그리고... 말씀 편하게 하시죠, 교수님.”
“수업 중에도 말했듯 제 수업의 학생이 된다면 그렇게 할 겁니다. 그 전까진 아니죠.”
아까도 이런 느낌을 받긴 했지만, 방금 그의 말이 꼭... 내가 자신의 학생이 되길 바라고 있다는 뉘앙스로 들린다. 단순히 내 바람이 투영되어 그렇게 들리는 걸까. 헷갈려 혼란스럽다.
“진오 학생은 원래 심리학에 관심이 좀 있었나요.”
“어... 조금요.”
당황해서 이상한 답변이 튀어나와버렸다. 조금이 뭐냐, 조금이. 열정도 없이 무심해 보이게.
“하긴 많았다면 전공을 했을 테고, 아주 없었다면 오늘 이 자리에 없었겠죠. 적절한 대답이군요.”
후. 천만다행이다. 그가 별 생각 없이 내 이야기를 받아 넘긴다.
“그럼 하나만 더. 혹시... 그 전에도 우리가 만난 적 있었는지.”
“예? 아까 그날 카페에서 절 봤다고...”
“그날보다 더 전에요. 그날에도 뭔가 낯이 익다는 느낌을 받아서. 내 수업을 들었었다거나.”
“음... 아마 아닐 겁니다, 교수님.”
이건 또 무슨 말일까. 그 전에도 날 봤었다고? 아닐 거라고 확신한다. 그 전에도 내가 이 사람을 봤었다면 진작 누군지 알고 있었겠지. 이상형이라는 게 그리 쉽게 변하지는 않으니까. 내 대답을 들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다가 갑자기 다시 입을 다문다. 그러고는 뭔가를 고민하는 듯 시선을 살짝 사선으로 내리 깔며 선 채로 잠시 동안 침묵을 지킨다. 표정만 봤을 때는 뭔가 심오한 대답이 나올 줄 알았는데. 싱겁게도 그는 별말 없이 그대로 작별을 고한다.
“알겠습니다. 대답해줘서 고마워요. 나가 봐도 좋습니다.”
“수업 감사합니다.”
그에게 이번에는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한 뒤,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나온다. 지척의 거리에서 그를 마주한 것이 생각보다 더 긴장됐었는지, 강의실에서 멀어지자 그제야 한숨 돌리며 다리가 조금 후들거린다. 방금 전의 대화가 현실인지 꿈인지조차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내 정신은 저 멀리 나가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별다를 것 없는 내용의 대화였지만, 그렇다고 아주 의미 없는 대화는 아니었다. 그러나 질문했던 그의 의도를 읽어보려 안간힘을 쓸수록,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에 머리가 아파온다. 그만하자. 고민해봤자 나올 답도 아니고. 하지만 오늘 수업을 통해 그래도 몇 가지 얻어가는 것은 있다. 그는 사실 소문만큼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어제까지 내가 알고 있던 그보다 외면과 내면 모두 더욱 매력적인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그래서 그를 더 알고 싶어진다. 학생과 교수 사이, 그 이상을 넘는 어떤 일이 그와 나 사이에 생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제 수업의 학생이 된다면 그렇게 할 겁니다. 그 전까진 아니죠.’
“...까짓 거 공부 열심히 해서 시험 잘 보면 되는 거지, 뭐.”
애써 혼잣말로 큰소리 쳐보지만... 오늘 수업의 집중도만 봤을 때는, 아마 나는 시험 기간에 고전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 돌이키기엔 너무 늦었다. 이 수업을 거르기엔, 난 이미 태형주 교수... 그 사람에게 깊이 빠져버렸다. 기범이 그 녀석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아마 나보고 미쳤다고 하겠지. 그렇게 나는 이미 마음속으로 그의 학생이 되리라 결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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