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심리학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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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놈.”
“그 말 할 줄 알았다.”
학교 후문 편의점 앞 간이 파라솔. 아직 해가 지기도 전이었지만, 답답한 마음에 기범이와 캔맥주를 마시며 아까 했던 결심을 털어놓는다. 예상했던 그의 대답.
“제정신 아니네. 미리 말하는데 난 너 기다려주고 그런 거 없다. 먼저 그냥 졸업 할 거야.”
“어. 잘 가라. 만나서 즐거웠고.”
“매정한 새끼. 한 번을 안 잡냐... 음? 너 그럼 송 교수님 수업 빼는 거냐? 오예! 졸업반 A+ 경쟁자 한 명 줄었다.”
“후. 그래. 너 많이 해먹어라.”
“근데 너... 그 교수가 그렇게 좋으냐. 이 시기에 학점도 포기할 만큼?”
노골적으로 놀리며 비웃는 그의 눈매를 마주해야 하는 지금, 이 상황이 아주 치욕스럽긴 하지만... 사실인데 뭘 어떡할까. 그의 말을 부정할 수가 없다.
벌컥벌컥.
“크... 누가 학점 포기했대? 수업 열심히 들어서 점수 잘 받을 거야.”
“크하하. 퍽이나 그러겠다.”
“그리고 네가 나 비웃을 처지는 아니지. 너 작년에 같은 동아리 예쁜 누나 좋다고 통계학과 수업 넣었다가 학점 망한 건 기억 안 나냐.”
“임마! 그건 얘기가 다르지. 난 그래도 어떻게 해볼 가능성이라도 있었다?”
“남자친구 있었다는 거 알고 있었잖아.”
“그랬지. 그 자식이 회계사만 아니었어도! ...붙어볼 만했어. 완전 못생긴 놈이었는데. 근데 넌 그것도 아니잖아. 그 교수 여자 밝히는 카사노바라는데 뭐. 그 덩치로 미남계 써서 홀릴 것도 아니고.”
“그건... 덩치가 문제인 게 아니잖아.”
얼핏 허술해보여도, 맞는 말을 참 얄밉게 잘하는 친구이긴 해. 기범이 말이 맞다. 그 수업을 듣는다고 그와 나 사이에 뭔가 생길 리도 없고. 희망이 없는 헛짓거리임은 불 보듯 뻔했다. 이성적으로 판단하자면 그냥 무시하고 내 갈 길 가는 게 맞지. 그런데 그걸 내가 몰라서 이러겠냐고.
“하긴 뭘 해. 그냥... 보러 가는 거지.”
“무슨 연예인이냐? 그냥 보러 가게. 차라리 그냥 참고 안 보고 말지. 그러지 말고... 보고 싶을 때 가끔 그냥 수업 놀러 들어가면 되는 거 아냐? 송 교수님 꿀수업을 대체 왜 빼.”
“듣는 사람 9명인 수업에 그냥 놀러 가라고? 뭔 깡으로.”
벌컥벌컥.
“크하. 그리고 이젠 교수가 내 얼굴도 알아. 이름 직접 물어봤거든.”
“오오오. 그 교수가 너 이름을 물어봤다고? ...야야, 그거 그린라이트 아니냐? 크큭.”
“...개소리 작작해라. 싸대기 맞기 싫으면.”
“어어? 이 새끼는 무슨 말만하면 손부터 올려. 네가 깡패냐. 그 모습으로 그러면 진짜 무섭다고.”
“네가 맞을 짓만 골라서 하는 거란 생각은 안 해봤냐, 어?”
내 격한 반응에 더욱 신이 났는지, 이제는 아예 배꼽 잡고 크게 웃는 기범. 맥주를 그냥 얼굴에 확 뿌려버릴까.
“그나저나 진오 너 그 수업 빼면 이번 학기 졸업조건 미달 아냐? 전공과목 하나 학점 비잖아.”
“그래서 박상봉 교수님 수업 시간표에 끼워 넣으려고.”
풉!
“아이씨! 더럽게 진짜... 옷에 다 튀었잖아.”
내 말에 크게 놀랐는지, 기범이 들이키던 맥주를 입 밖으로 세차게 분수처럼 뿜어낸다. 임기응변으로 부랴부랴 가방에서 노트 몇 장을 찢어, 젖은 옷과 테이블을 대강 털어 닦는다.
“컥컥. 미안, 미안. 근데 내가 방금 제대로 들은 거 맞지?”
“......”
“천하의 현진오가 1교시를? 와... 콩깍지가 무섭긴 무섭구나.”
“하아. 그러게. 인생 완전 꼬인 듯싶다. ...한 캔 더 하자. 꿀꿀하다.”
그 말을 들은 기범이 잽싸게 일어나 편의점으로 맥주를 더 사러 뛰어간다. 짓궂게 놀리는 게 얄밉긴 해도, 아마 이 친구가 없었다면 이 답답한 상황을 털어놓을 구석조차 없었겠지. 그의 존재가 이럴 땐 그나마 큰 위로가 된다. 술이 들어가자 마음이 더욱 심란해진다. 진짜 상사병이라도 났나. 얼마나 지났다고... 문득 벌써 그가 보고 싶다.
**********
“후우우. 어우, 어지러워.”
한 캔만 더하려고 했는데. 한 캔이 두 캔이 되고, 두 캔이 소주가 되어버렸다. 술은 늘 마시고나면 숙취와 후회만 남는 걸 알면서도, 또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나보다 더 취한 기범이를 먼저 집에 보내고, 이대로 장거리 지하철을 타기엔 크나큰 민폐라는 생각에 술도 깰 겸 학교 안을 좀 돌다 집에 가기로 한다. 어느새 해가 떨어져 가로등이 없으면 주변이 잘 보이지 않는 컴컴한 밤. 외투를 걸치지 않으면 아직은 추운 3월의 봄 날씨였기에, 점퍼 호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 넣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산책로를 걷는다.
저벅저벅. 흠칫.
“......”
저만치 앞쪽 길가 벤치에 앉아있는 두 명의 남녀. 처음에는 데이트 중인 대학생들인 줄 알았다. 예전부터 이 길은 가로등이 유난히 드문드문 있어, 어두침침한 점을 이용해 데이트하는 캠퍼스 커플들이 많은 곳이었으니까. 그런데 점점 가까이 가면 갈수록, 머릿속 침범한 작은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어간다. 저 큼직한 실루엣. ...그 사람이다. 그것도 옆에 어떤 여자와 단 둘이 함께. 술 취해서 헛것을 보나 눈을 끔뻑거리며 비벼 봐도 눈앞 광경이 달라지지 않는다. 잘못 볼 리는 없었다. 술 마시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줄곧 내내 보고 싶어 하고, 그리워하고, 생각해오던 사람이었으니까.
띠링!
“...!”
젠장! 하필이면 이런 때 문자가... 혹시 알림 소리를 듣고 이쪽을 쳐다볼까봐, 등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오던 길을 다시 밟아 돌아간다.
저벅저벅저벅.
“하아. 하아. 후우우.”
단숨에 학교 언덕을 넘어 후문에 도착한 뒤, 술기운이 섞인 날숨을 몰아 내쉰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어두웠으니 날 못 알아봤겠지. 제발 그랬다고 믿고 싶다. 내 입장에서도 예기치 않은 우연한 만남이었을 뿐이지만, 지금 마주치면 꼭... 자기를 따라다니는 스토커처럼 보일 것 아닌가. 으, 상상만 해도 치가 떨린다.
스윽.
「엄마 오늘 일하는 날이야. 꽃게탕 끓여놨으니까 데워서 저녁 먹어. 다이어트 한다고 굶지 말고.」
이제야 확인하는 문자. 엄마였다.
“결국 고집부리고 그 일을 하러 갔네.”
답장을 할까 하다가 심통이 나 그냥 핸드폰을 주머니 속에 찔러 넣는다. 이거나 저거나 다 나를 괴롭게 하는 일들뿐이구나. 그나마 방금 전 일 때문에 술은 많이 깬 것 같다. 그나저나... 누굴까, 옆에 있던 그 여자는.
“카사노바란 소문이 사실인가.”
선입견이라는 게 참 무섭다. 정식으로 교제 중인 여성일 수도 있고, 그냥 동료 교수일 수도 있는데 이런 의심부터 하는 걸 보면. 사실 그는 어차피 미혼 싱글남이니, 어떤 여자를 언제 어디서 만나든 그것은 흠잡을 일이 아니다. 다만 방금 전 광경을 본 뒤,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이 분노와 절망감은... 나로서는 어떻게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 씨벌. 심리학은 개뿔. 내가 뭐가 아쉬워서.”
어차피 아무런 가능성이 없는데, 굳이 왜 내가 더 오래 괴로워할 게 뻔한 길을 가려하는 걸까. 다른 괜찮은 남자 만나면 되는데. 순간 호승심이 치밀어 휴대폰을 꺼내 아주 오랜만에 게이 데이팅 앱에 로그인한다. 간단한 프로필과 비교적 잘 나온 사진을 하나 등록한 후, 듬직한 중년 만나길 원한다는 글을 남긴다. 다행히 얼마 기다리지 않아 금방 메시지가 하나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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