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심리학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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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
“늦은 시각인데. 어디 누구 약속이라도 기다리나요.”
다행이다. 가로등이 멀어 어둑어둑한 가운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빠르게 눈물을 닦아낸 뒤 그를 마주해서 그런지 울던 모습은 못 본 듯했다.
“그게 아니라... 어... 술에 좀 취해서 깨고 지하철 타려고요.”
“여기서요? 오래 있으면 추울 텐데.”
저벅저벅.
“보니까 그리 취한 것 같진 않은데요.”
“...!”
“진짜 취한 사람은 자기가 취했다는 말 잘 안 하거든요.”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그의 잘생긴 얼굴이 나를 빤히 보며 살피자, 숨이 턱턱 막히고 맥박이 빨리 뛰기 시작한다. 조금 전 번개로 만났던 사람의 프로필 나이가 사실이라면, 눈앞의 이 사람과 비슷한 또래라는 이야기인데... 불공평한 신이 과한 장난기가 발동해 이 남자에게만 너무 많은 것을 몰아 준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만큼, 크나큰 외모 격차. 밤이 되어 그런지 낮보다 좀 더 진해진 듯 보이는 수염이 지저분하지 않고 그를 더욱 남자다워 보이게 해 내 가슴을 크게 흔들어 놓는다.
“그런데 요 근래 진오 학생을 자주 만나네요.”
“...!”
태형주 교수의 말에 또 한 번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여기 멀뚱멀뚱 서 있을 마땅한 이유를 찾기 힘들어 대강 둘러대려 머리를 쥐어짜내 보지만 역부족이다. 입을 꿰매 놓은 듯 딱 붙어버린 내 입술. 그가 심리학에 능통하기 때문일까. 뭔가 지금도 나의 생각과 마음을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에, 알 수 없는 부끄러움이 밀려온다.
“마침 잘 됐습니다. 지금 후문사로 교재비 정산하러 가는 길인데.”
“...?”
“받으셨나요, 교재?”
“아뇨. 아직...”
“그럼 저 가는 김에 같이 그거나 받으러 가시죠. 술도 깰 겸.”
“......”
내 대답도 듣지 않은 그가 벌써 저만치 앞서 가고 있다. 보폭이 커서 그런지 걸음 자체는 그리 빠르지 않았지만, 금방 내가 서 있는 위치로부터 멀어진다. 그 속도에 별 다를 생각할 여유 없이, 저절로 내 발이 움직여 그의 뒤를 따른다. 내가 수업을 들을 거라고 확신을 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듣지 않으려는 생각마저 바꾸려는 걸까. 분명 내게 한 번도 ‘너 이 수업 꼭 들어야 해’라고 말한 적은 없었지만, 그와 말과 행동을 섞다보면 마치 텔레파시처럼 그가 원하는 메시지 같은 것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와 그려지곤 했다. 이런 초능력에 가까운 기이한 면도, 심리학의 범주 안에 포함시켜서 봐야 하나.
벌컥. 띠링.
“아이고, 오셨어요, 교수님?”
“안녕하세요. 부탁드린 그대로 책 잘 나왔더라고요. 책값 계산하러 왔습니다.”
후문사 인쇄소에 들어서자, 여러 대의 복사기가 위잉 하고 돌아가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익숙한 종이냄새가 짙게 퍼져온다. 자주 오던 곳인데 둘 다 한 덩치씩 하는 그와 내가 함께 들어오니, 공간이 뭔가 어색하고 비좁아 보인다.
소곤소곤.
“교재비는 안 주셔도 된다니까요.”
“...?”
일부러 엿들으려고 했던 건 결코 아니었다. 후문사 주인이 주변에 들릴세라 태형주 교수의 귓가에 대고 작게 수군거리긴 했지만, 워낙 가까운 거리라 내 귀에도 그 말이 또렷이 들린다. 교재비를 안 줘도 된다는 건 무슨 뜻일까. 학생을 상대로 하는 이런 박리다매 영업장에서 무료 자선사업을 하는 것도 아니고.
“정산은 확실히 해야죠. 아, 그리고 이 학생 교재도 한 부만 부탁드립니다. 아마... 필요한 마지막 교재가 될 것 같네요.”
“마침 찍어놓은 거 하나 남아 있습죠. 여기.”
스윽.
‘교양심리학’
그가 지니고 다니던 바로 그 표지의 교재다. 이걸 받으면 이제 나는 꼼짝없이 그의 수업 수강생이 되는 거겠지. 여기까지 따라와서 뭘 어쩌겠는가. 오늘 참 다사다난한 하루였지만, 돌고 돌아 결국엔 원래 결심했던 그대로 행동하는 것뿐이다. 좋게 생각하자.
덥석.
“감사합니다.”
“학생 영광인 줄 알어. 여기 이 교수님으로 말할 것 같으면...”
“사장님! 하하. 거기까지만 하시죠. 여기 현금... 거스름돈은 외상으로 달아두시고.”
그렇게 그가 빳빳한 오만 원 권 지폐 두 장을 테이블 위에 펼쳐놓고는, 내 쪽으로 돌아서서 처음 보는 당황 섞인 다급한 표정으로 나가자는 눈치를 준다. 영문은 모르겠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이고 그의 뜻에 따라 가게를 나가려는데, 뒤에서 주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휴, 교수님! 그러다 쌓인 외상으로 이 가게도 사시겠어요. 돈 받아 가셔야죠!”
“정 그러시면 이 학생 앞으로 달아주시든가요. ...여기 또 올 거죠?”
“...예?”
“사장님, 대답 들으셨죠? 저희 갑니다.”
끼이익. 탁.
“후. 하마터면 잡힐 뻔 했네요.”
“...?”
“여기 좋아하긴 하는데, 사장님한테 한 번 붙잡히면... 말씀에 끝이 없어요. 정이 많으신 분이라.”
“......”
“가만 있어보자, 지금 시간이... 딱 지금쯤 집으로 출발하면 되겠네요. 진오 학생도 집으로 바로 갑니까.”
“예. 술 깼으니 이젠 지하철 타러 가려고요.”
“...그러시죠, 그럼. 전 다시 학교 지하광장 주차장으로 가야해서. 조심히 들어가세요.”
휙. 저벅저벅.
“저, 교수님!”
“...?”
“오늘 알아봐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강의실에서도, 그리고 아까 후문에서도요.”
이거 학생이 교수에게 할 수 있는 말 맞나. 선 넘는 건 아니겠지. 다짜고짜 입으로 먼저 말하고 나서 머릿속으로 내 말을 되새기는 어색한 느낌. 대체 어디에서 샘솟은 용기였을까. 술김에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진심이었다. 그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그런 걸 복잡하게 따지지 않고, 순수하게 감사를 꼭 표현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에 저질러 버린 일이었다. 몸을 반쯤 돌려 옆으로 선 채로 내 말을 듣던 그가 잠시 어둠 속 그 자리에 멈춰 있다가, 무슨 생각에서인지 다시 내 쪽으로 돌아 성큼성큼 걸어온다.
“어느 쪽입니까.”
흠칫.
“예?”
“...집이요.”
“......”
“서로 가는 방향 맞으면 가는 길까지 태워드리죠.”
식겁했다. 그가 안 그래도 중저음인 목소리를 진지하게 깔고 묻자 그 무게감이 한층 더해진다. 어느 쪽이냐고 묻는 그의 물음이, 왜 나는 일순간... 이쪽이냐고 묻는 것처럼 들렸을까.
“엇, 아닙니다, 교수님. 술 다 깼으니... 전 그냥 따로 지하철 타고 가겠습니다.”
“미안해서 그러는 거면 거절할 필요 없습니다만. 내가 불편한 거라면 그건 어쩔 수 없고요.”
두근두근.
반칙이다. 아까 강의실에서 보였던 그 특유의 애간장 녹이는 눈웃음을 띈 채 그가 묻는다. 가던 길 돌아 내게 다시 와서 말했을 정도면 빈말은 아닌 듯하다. 이 제안은 무슨 의도일까. 이것도 방금 전 후문사에서의 일처럼 가는 김에 던진 단순한 제안일까. 아무리 그가 좋더라도, 일단 지금은 거절을 하는 게 맞는 거라고 생각했다. 미안함과 불편한 마음 모두에서였다. 그의 차를 같이 타기엔 지금의 내 상태가 그리 좋지도 않고. 헌데 그가 이러면... 도무지 내가 거절할 수가 없잖아.
“저... 봉천동입니다.”
“어우, 꽤 멀리서 통학하시는군요. 봉천동이면 가는 길에 지하철 타기 편한 곳이... 아마 삼성역 쯤 되겠네요. 삼성역 괜찮나요?”
“전 교수님께서 편한 곳 아무데나 내려주시면 됩니다.”
“좋습니다. 차로 가죠.”
...이것도 실화인가.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게 이렇게 한 순간일 줄이야. 오늘 일어났던 일련의 모든 일들이 서로 긴밀한 타이밍에 맞물려, 결국 나는 지금 그의 차 앞에 서 있다. 푸른색 포드 익스플로러. 교수님들은 보통 승차감이 좋은 세단을 선호하는 줄 알았는데. 다시 잘 생각해보니 이 차가 오히려 그에게는 더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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