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심리학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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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컥, .

 

?”

 

시간 맞춰 들어온 강의실에 나 말고 다른 학생들이 자리에 아무도 없다. 이게 무슨 일일까. 강의실을 잘못 찾아왔나, 아니면 날짜를 잘못 알고 온 건가. 하나씩 찬찬히 체크해본다. 교양관 306, 오늘 오후 2... 맞는데? 설마 태형주 교수의 무시무시한 오리엔테이션에 드디어 학생들이 다들 정신을 차리고 전부 떨어져 나간 걸까,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살짝 해보며 저번에 앉았던 자리에 딱 앉자, 그제야 진실을 깨닫는다. 강단 화이트보드에 큼지막한 글씨로 써 있는 휴강공지.

 

죄송합니다. 급한 개인사정으로 인해 휴강합니다. 보강 일정은 다음 수업시간에 고지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 꼭 만나자더니.”

 

뭔가 기다리던 약속을 바람맞은 기분.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잔뜩 긴장해있던 긴장상태가 풀리자 몸이 나른해지며 앉은 자리에 쓰러지듯 엎드린다. 어쩌지. 이 붕 떠버린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기범이 그 녀석도 송 교수님 수업 들어가 있을 테고. 이 찝찝한 상태로는 다른 공부를 한다 해도 분명 전혀 집중 못할 것이다. 요 며칠간 쭉 그래왔으니까. 아마 그를 다시 만나기 전까지는 계속 이래야겠지. 어디에 있는 줄 모르니 확 쳐들어갈 수도 없...

 

벌떡.

 

문득 간밤의 꿈속 장면이 떠오른다. 처음 보는 낯선 공간이었지만 내 무의식이 만들어 냈기에 어딘지 이미 알고 있는 곳.

 

에이, 급한 사정 때문에 휴강까지 했는데... 설마 있겠어?”

 

드르륵.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심 마음 한 구석으로는 그를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일주일이나 참아왔다. 계획을 잃고 할 게 없어진 지금 이 시간을 마냥 빈둥거리기가 싫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서둘러 태형주 교수의 심리학과 사무실을 향해 발걸음 한다.

 

태형주. 부재중

 

교양관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심리학과 건물 그의 사무실 앞. 문 앞에 붙어있는 간이 위치알림판이 부재로 설정되어 있는 걸로 보아 역시나 그는 이 안에 없는 듯했다. 큰 기대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힘이 쭉 빠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여기까지 왔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노크라도 해볼까 손을 들어 올렸다가, 지금 내 모습이 너무 바보 같아 보여 자조 섞인 웃음이 터져 나온다. 또 막상 두드려서 이 안에 있다한들 만나서 뭘 어쩌려고. 더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오늘은 이쯤에서 미련을 접자. 마침 잘 됐지, . 아르바이트도 없는 날인데. 기범이 녀석한테 저녁은 다음에 먹자고 문자 넣어 놓고, 그냥 집에나 빨리 가서 못 다 잔 잠이나 자야겠다고 생각하고 뒤돌아서 가려는데.

 

“...만나서 ...하시죠.”

“...!”

 

문 안쪽에서 들려오는 그의 낮고 굵은 목소리. 환청이나 착각이 아니었다. 분명 들었다. 부재중이 아니었나. 방금 전 만약 내가 노크를 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를 생각하니 순간 아찔해진다. 동시에 순간 슬며시 고개를 쳐드는 욕심어린 잔머리. 리스크는 크지만, 그가 어떤 사람인지 더 확실히 알 수 있을 텐데. 들키지만 않는다면... 여기는 건물 꼭대기 층. 사무실로 교수를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만 없다면 눈에 띌 리 없을 것이다. 심지어 심리학과 교수들 사무실 중에서도 태형주 교수의 사무실은 복도 거의 끝부분 외진 곳에 있어 들킬 확률은 희박하다. 빠르게 위험요소 파악을 끝내고. 호기심과 도덕적 양심 사이에서 아주 잠깐 갈등하다가, 이내 오른쪽 귀를 슬며시 문 가까이로 가져가본다.

 

이렇게 일방적... 끝내시면... 정말 오랜... 찾은 마음... 쏙 드는 분이신데.”

 

방금 뭔가 마음에 드는 사람이라는 말을 했던 것 같은데. 문으로 막혀 있어 소리가 중간 중간 끊겨 들려 답답하긴 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다. 내용이 내용인 만큼 애타는 조바심에 주위를 한 번 더 살핀 후, 좀 더 대담하게 문에 닿을까 말까 할 정도로 바짝 귀를 갖다 댄다.

 

그럼 저희 집에만 와주시는 걸로는 안 되겠습니까. 부탁드립니다. 보수는 나머지 몫까지 얹어서, 아니... 그보다 더 넉넉히 드리겠습니다.”

 

가까워지니 확실히 더 명확하게 전달되는 소리. 대체 무슨 말일까. 마음에 드는 사람을... 돈으로 산다고? 그에게 덧씌워진 카사노바 프레임 때문인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냥 여성 작업이 잘 안 풀려서 질척대는 통화내용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건... 내가 생각했던 방향의 전개가 아닌데.

 

. 그 심정은 충분히 납득이 갑니다만... 아이들이 잘 따르는 분을 찾기란 정말 쉽지가 않아서 그렇습니다.”

 

아이들? 잘 따른다고? 뭐야. 그의 숨겨진 아이들이라도 되는 건가.

 

마음 같아서는 탄 김에 집 앞까지 태워주고 싶은데, 오늘은 꼭 시간 맞춰 집에 가야할 일이 있어서요.’

“...!”

 

그래. 그날도 그렇게 말하긴 했지. 집에 자녀들이 있다면, 귀가시간이 중요할 만도 하고... 에이, 설마... 그래도... 뭔가 엄청난 그의 비밀을 파헤치고 있다는 생각에 손에 땀이 날만큼 긴장되는 순간. 계속 듣고 있기엔 그 내용의 무게가 너무 막중하여 덜컥 겁이 난다.

 

만나주지도 않으신다 하시니 답답하네요. 혹시 그럼 생각이 바뀌신다면... 연락 주실 수 있으실까요? 아마 연락 주실 때까지 빈자리일 겁니다. 아이들이 워낙 예민해서 말이죠.”

“......”

 

싱글에 미혼이라며. 그럼 사실 그는 미혼부고, 지금 결혼할 상대를 애타게 찾고 있는 건가. 그것도 노골적으로 금전적인 면에 호소해가면서까지... 혹시 그럼 지금 통화하고 있는 사람이, 그날 저녁 다람쥐길 산책로에서 그의 옆에 있던 그 여자...

 

뭐해요, 여기서?”

!”

 

하마터면 너무 놀란 나머지 사무실 문에 머리를 박을 뻔했다.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어서 미처 눈치 채지 못했다. 내 오른편에 있는 복도 끝 건물 외벽으로부터 태형주 교수의 사무실 사이 딱 한 개의 사무실이 더 있었는데, 불운하게도 하필이면 그곳에서 지금 사람이 튀어나올 줄이야. 기척도 없이 언제 다가온 거지. 아니면 내가 너무 집중해서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 다가올 때까지 눈치 채지 못한 건가. 고개를 돌려보니 방금 전 간드러진 목소리의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 여성이, 의심가득한 눈으로 나를 째려보고 있다. 어깨까지 떨어지는 단발. 끝부분만 살짝 바깥쪽으로 말려 올라가는 웨이브. 여성 세미 정장 수트... ?

 

“...?!”

왜 놀란 눈을 하고 그래요? 놀랄 사람은 난데. 교수 사무실 앞에서 뭐하시냐고요. 우리 과 학생이에요?”

 

그 여자다. 어두운 가운데 봤던 실루엣이라 확실치 않지만, 그날 산책로에서 그의 옆에 있던 사람이 바로 내 눈앞에 서있었다. 잠깐만. 그러면 지금 그와 통화하고 있던 사람은 대체...

 

벌컥!

 

“...!”

“...!”

서 교수님. ...진오 학생?”

 

그 순간 거짓말처럼 열린 그의 사무실 문. 일주일 내내 그토록 보고 싶어 안달하던 얼굴이지만, 지금 이 난감한 상황에 인사는커녕 그의 눈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한다. 왜 난 항상 이렇게 최악의 순간에 그를 마주하게 되는 걸까. 도저히 이 상황을 교묘히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는다. 저지른 범죄를 들키면 딱 이 기분일까. 초조한 마음마저 가시고, 머릿속엔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다.

 

태 교수 아는 사람이야?”

. 제 수업 학생입니다.”

사무실 문 앞에서 뭘 열심히 엿듣고 있던데?”

“......”

시험지 도둑일지도 몰라. 앞으로도 유심히 지켜볼 필요가 있겠어.”

 

, 젠장. 망했다. 꿈은 현실과 반대라는 개소리한 새끼가 누구야. 현 상황을 놓고 봤을 때, 어젯밤 악몽은 예지몽 그 자체다.

 

근데 태 교수 지금 수업 중 아니었어?”

휴강이요. 급한 일이 있었거든요. ...지금은 다시 없어졌지만.”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대답한다. 평소 그 표정 그대로인데 왠지 화가 잔뜩 난 듯 얼음장처럼 차가워 보이는 그의 모습. 벌써부터 그에게 심문을 당하듯 숨이 옥죄어온다.

 

그래? 잘 됐네. 나 뭣 좀 물어볼 거 있었는데. 같이...”

아뇨. 지금은 이 학생 문제가 더 급할 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서 교수님. 다음에요. 진오 학생. 휴강이라 시간 있을 테니 나랑 얘기 좀 하러 가실까요. 긴히... 나눌 이야기가 있을 것 같은데.”

 

그 말을 끝으로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성큼성큼 계단을 향해 걸어가는 태형주 교수. 얼른 그를 따라 자리를 뜬다. 굳이 강렬했던 그의 눈빛이 아니었더라도, 지금 이 순간 나에겐 그의 뜻을 거부할 수 있을 권리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체념한 마음으로 순순히 단두대에 목을 내걸며, 곧이어 있을 최후의 심판을 기다릴 뿐.

 

살살해, 태 교수.”

 

뒤에서 얄미운 여 교수의 목소리가 들린다. 저 사람만 아니었어도... 이럴 일 없었을 텐데. 아니, 사실 이 절망적인 상황은 내가 그의 비밀을 엿듣는 데서부터 비롯된 것이니까. 다 내 잘못이다. 그러나 뉘우쳐봐야 때는 너무 늦었다. 그의 뒤를 따르는 지금 이 순간이, 차라리 어제와 같은 악몽이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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