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아라 황석호 - 4
작성자 정보
- 작성
- 작성일
본문
<4>
선생님의 얼굴이 나에게 무척 가까이 붙어 있었다. 수염이 내 볼을 스치고 지나가 까칠하다는 느낌도 잠시, 내 입술이 선생님의 입술에 맞닿았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선지 하필이면 선생님의 혀가 입 밖으로 나와 있었기에, 무언가 말을 하려고 입을 벌리고 있던 내 입에 선생님의 혀가 들어왔다. 나도 선생님도 놀라 서로 고개를 뒤로 젖혔다. 선생님은 무척이나 놀란 표정이었다.
“선생님.... 오늘 화내시는 거 처음 봤어요. 아까 진짜 무서웠어요.”
선생님은 이내 놀란 표정에서 미소 가득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화난 거 아니라니깐....”
“방금 전도 아까처럼 씩씩거리셔서.... 조금 무서웠어요.”
“하하하하하하”
선생님은 큰 웃음으로 나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말하기는 좀 힘들지만 선생님과 나는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 되는 비밀스러운 일을 벌였다. 선생님은 나를 향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영기야, 오늘 선생님이랑 했던 거 절대로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된다. 알았지?”
“형한테도요?”
“누구? 형규?”
“아뇨, 심부름하는.... 병무 형이요.”
“병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형규한테도.... 알았지?”
나는 선생님하고만 아는 비밀이 생겨서 너무나 좋았다. 서로만 아는 비밀을 공유한다는 것은 관계를 더욱 단단한 끈으로 묶는 것과 같았다. 나는 선생님이 내민 굵은 새끼손가락에 내 작은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선생님은 새끼손가락을 걸고, 수건으로 땀이 흘러내리는 자신의 이마를 닦았다. 그리고 내 이마도 닦았다. 선생님은 피아노 의자 위에 놓여 있던 담뱃갑을 들고 창문쪽으로 가서 한 개피를 꺼내 물었다.
“아~ 영기야, 거기 성냥 있나 좀 찾아봐.”
나는 피아노 의자 밑에 떨어져 있던 작은 성냥갑을 들고 선생님 곁으로 갔다. 그리고 성냥 하나를 그어 선생님을 향해 위쪽으로 팔을 올렸다. 선생님은 고개를 숙여 성냥불에 담배를 갖다 댔다.
“영기야, 미안해. 담배 냄새 싫어할 텐데....”
“아니에요. 아버지도 담배 많이 피우셨어요.”
선생님은 창문 밖으로 연기를 길게 내뿜고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뒤에서 선생님을 끌어안고 등에 머리를 기댔다. 널찍한 등이 무척이나 편안했다. 선생님은 담배를 두 대 연달아 피고는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았다. 역시나 나를 다리 위에 앉히고 피아노 건반을 몇 번 짚더니 나에게 말했다.
“영기야, 우리 노래 부르자.”
그렇게 나는 선생님과 함께 노래를 부르고, 피아노를 치며 토요일 오후를 보냈다. 교실 창문 밖으로 노을이 지는 것이 보였다. 그제야 선생님과 나는 학교를 나섰다. 집으로 가는 길에 선생님은 중국집에 들렀다. 우리반 반장 명수네가 운영하는 집이 아니었다. 선생님은 짜장면 곱빼기와 보통을 시켜 먼저 짜장면 보통을 잘 섞어 나에게 내밀었다. 선생님이 곱빼기를 다 비빌 때까지 기다릴 요량으로 젓가락을 들지 않고 있었는데, 내 마음을 선생님이 알아챘는지 한 마디를 던졌다.
“기다리지 말고 불기 전에 어서 먹어. 짜식.... 얼굴도 잘생긴 게 예의도 발라....”
“잘 먹겠습니다.”
나는 나무젓가락을 들고 짜장면을 집어 한 입 크게 넣었다. 아~~ 너무 맛있었다. 그때는 물론이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 내가 먹은 짜장면 중에 최고의 맛이었다. 내가 짜장면과 짬뽕 중에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지 않고 짜장면을 선택하는 것은 아마 그때 먹은 짜장면의 맛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선생님과 짜장면을 먹고 함께 걸어가다 우리집으로 가는 골목 초입에서 선생님에게 인사를 했다.
“선생님, 짜장면 잘 먹었습니다. 목욕 가방 챙겨서 댁으로 갈게요.”
“같이 가자. 어머니한테 드릴 말씀도 있고....”
내가 목욕 가방과 갈아입을 옷을 챙기는 동안 선생님은 엄마와 마당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마당으로 나갔을 때 엄마는 나에게 목욕비를 쥐어주며 다소 생뚱맞은 한 마디를 던졌다.
“선생님 말씀 잘 들어.”
이 말의 뜻은 나중에 알 수 있었다. 선생님의 집에 도착해 나는 평소처럼 반투명 유리가 있는 알루미늄 문 앞에서 멈춰 섰다. 선생님이 목욕 갈 채비를 하고 나올 때까지 기다릴 요량이었다. 언제나 목욕을 갈 때마다 알루미늄 문을 두드리고 선생님을 부르면 선생님이 문을 열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나를 향해 손짓을 했다.
“영기야, 들어와.”
나는 처음으로 선생님의 집에 발을 들였다. 알루미늄 문 안은 바로 부엌이고, 벽쪽에 창호지가 발린 미닫이문이 있었다. 선생님이 먼저 미닫이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또 나를 향해 손짓을 했다.
“들어오라니깐.”
나는 슬리퍼를 벗고 방으로 들어갔다. 후덥지근했다. 선생님은 바로 선풍기를 켜고 창문쪽으로 걸어갔다. 다소 헐렁하게 붙여 놓은 모기장 위로 손을 움직이며 창문을 열려고 했으나 잘 열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이 씨.... 또 꽉 닫혔네.... 영기야, 밖에 나가서 문 옆에 벽 사이로 들어가면 창문 있거든. 넌 작으니까 좁아도 쉽게 들어갈 수 있을 거야. 밖에서 열면 금방 열리니까 나가서 창문 좀 열고 와.”
나는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알루미늄 문 밖으로 나가 옆을 보았다. 집과 집 사이에 좁은 통로가 있었다. 웬만한 사람은 들어갈 수 없을 만큼 좁았지만 선생님 말대로 작은 체구의 아이 정도라면 몸을 옆으로 하여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좁은 틈 사이로 들어가 창문을 열었다. 파란색 모기장 너머로 선생님이 옷을 벗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에게 주어진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나는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선생님은 선풍기 앞에 앉아 있었다.
“영기야, 너도 이리 와서 선풍기 바람 쐐.”
선생님은 가랑이 사이에 나를 앉혔다. 2단으로 맞춰 놓은 선풍기 바람은 땀으로 끈적한 몸을 시원하게 만들었다. 선생님과 나는 선풍기 바람을 쐬며 선생님의 다리 사이에 앉아 함께 TV를 봤다.
선생님의 방은 제법 컸다. 하지만 세간은 단출했다. 벽 한쪽에 검은색 자개장롱이 붙어 있고, 그 대각선 맞은편 구석에 책상으로 쓰는 듯한 제법 넓은 테이블이, 그 옆에는 3단짜리 서랍장이 놓여 있었다. 14인치 TV는 서랍장 위에 있었다. 놀랍게도 컬러 TV였다. 창문이 있는 곳이 바로 TV 뒤쪽이었다. 그리고 장롱과 벽 사이 공간에 기타 한 대가 놓여 있었다. 선생님은 피아노 말고 기타도 칠 줄 아는 모양이었다.
시간이 흘러 TV를 보는 것도 무료해진 나는 이리저리 방을 둘러봤다. 책상 위에 투명하고 커다란 재떨이가 보였다. 짜장면을 먹고 함께 집으로 걸어가면서 선생님은 담배 한 대를 피우고, 그 후로는 한 대도 피우지 않고 있었다.
“선생님....”
“응?”
“담배 안 피우세요? 혹시 저 때문이라면.... 전 괜찮아요.”
선생님은 고개를 숙여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리고 내 코를 살짝 잡고 흔들었다.
“아우~ 요놈 요놈 어찌 그리 내 맘을 잘 알꼬.... 저기 재떨이 가져와. 안 그래도 피우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어.”
선생님은 일어나기가 귀찮았는지 나를 가랑이 사이에 앉힌 채로 담배를 피웠다. 연기를 뿜을 때마다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봤다. 나도 선생님과 같이 고개를 들어 공중에 퍼져 나가는 담배 연기를 바라봤다.
“담배 연기 안 매워?”
“네. 괜찮아요.”
너무나 편안했다. 익숙하고 자연스러웠다. 선생님의 커다란 체구는 내가 기대고 앉아 있기에 너무나 푹신하고 안락했다. 선생님이 내뿜는 담배연기마저도 달콤하게 느껴졌다. 선생님은 그렇게 가끔씩 담배를 피웠고, 드문드문 내 일상을 물었다. 나도 선생님에게 이것저것을 물었다.
“선생님은 왜 혼자 사세요?”
“혼자 사는 게 편해서.”
“결혼은 안 하세요?”
“응. 나 여자 싫어해.”
“저두요.”
선생님은 갑자기 허리를 숙여 고개를 앞으로 내밀고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약간 놀란 표정이었다. 그리고 넌지시 내게 물었다.
“여자가 왜 싫은데?”
“엄마랑 누나들이 잔소리를 많이 해서요. 심부름도 많이 시키고.... 앵앵거리는 것도 싫고.... 여자 같다고 놀림 받는 것도 싫고....”
“아~ 그래서~~ 난 또 뭐라고.... 너 여학생들한테 인기 많던데.... 선화가 그러더라. 니가 제일 잘생겨서 너 좋아하는 애들 많다고. 내가 봐도 그렇게 보이고.”
“그럼 뭐해요. 귀룡이 말고는 친구도 없는데.... 선생님이랑 같이 노래 부르고 피아노 치는 게 제일 좋아요. 우리반에서 선생님이 제일 좋아요.”
“아이고~ 고마워라....”
선생님은 나를 돌려 앉혔다.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이마를 쓰다듬고, 뺨도 가만가만히 어루만졌다.
“어쩜 이렇게 잘생겼니.... 나도 우리반에서 니가 제일 좋아....”
선생님과 함께 이런저런 일을 벌이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보니 시간이 흘러갔고, 내 입에서 결국 하품이 나왔다.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 10시를 넘기지 않는 내가 하품을 한다는 것은 시간이 많이 늦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더 늦기 전에 집에 가야할 것 같았다.
“영기야, 졸려?”
“네. 이제 저 가야겠어요. 선생님도 주무셔야....”
“조그만 더 있다가 자자. 내일 늦잠 자도 되니까....”
“네? 저 집에....”
“아까 어머니한테 말씀 드렸어. 너 여기서 자고 갈 거라고.”
“진짜요?”
“응. 왜, 집에 가고 싶어?”
“아뇨. 선생님이랑 여기서 자고 싶어요.”
내가 환호성을 지르는 것을 보고 선생님은 또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선생님의 품 안에서 편안하게 잠이 들었다.
선생님 집에서 하룻밤 자고 난 이후에도 여전히 변함없이 수업이 끝나면 선생님과 함께 노래를 부르고, 피아노를 쳤다.
그렇게 일주일을 보내고 토요일 오후가 되었다. 수업을 마치고 여느 때처럼 선생님과 교실에서 피아노를 치며 시간을 보냈다.
“영기야, 오늘은 이만 하자. 이따가 6시쯤에 목욕 갈 거니까 챙겨서 와.”
나는 이른 저녁을 먹고, 목욕 도구를 챙겨 선생님 집으로 향했다. 알루미늄 문을 두드리고 문을 열어 선생님을 불렀다. 방문이 열리고 선생님이 나왔다. 바로 뒤에 형규 형도 따라 나왔다. 나는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영기 오랜만이네. 한 3주 됐나?”
선생님의 얼굴에는 웃음이 떠나지를 않았다. 목욕탕으로 가는 내내 싱글벙글 웃었고,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그런데 탈의실에서 옷을 벗다가 선생님은 형규 형 가슴께를 만졌다. 형규 형 젖꼭지 옆에 동그란 멍자국 같은 것이 보였다.
“이거 뭐야? 왜 이래?”
“아~ 이거? 아무 것도 아냐. 그냥 길 가다가 부딪쳐서 멍 든 거야.”
선생님은 아무 말 없이 멍자국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다가 한 마디를 던졌다.
“조심 좀 하지. 많이 아팠겠다.”
“아냐. 괜찮아....”
선생님은 다시 웃는 얼굴로 돌아왔다. 목욕을 하는 내내 형규 형과 장난을 치며 즐거워했고, 그것을 보는 나도 덩달아 즐거웠다. 선생님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니 대문을 들어서면서부터 기름 냄새가 진동을 했다. 온식구가 힘을 합쳐 부추전을 부치고 있었다. 집에 여자들만 있다는 것은 한편으로 이런 것에 장점이 있었다. 주말같이 여유가 있는 때에는 이것저것 먹을거리가 풍성했다.
“영기야, 너 빨리 이거 선생님 좀 갖다 드리고 와.”
전 같은 음식은 나눠 먹기에도 좋은 것이었다. 엄마는 커다란 접시 위에 부추전 여러 장을 포개어 담고 쟁반에 올려놓았다. 혹시나 내가 떨어뜨리기라도 할까 싶어 들고 가기 쉽도록 곱게 보자기에 쌌다. 나는 보자기를 들고 선생님 집으로 향했다. 걸어서 5분 남짓 되는 가까운 거리였다.
선생님 집 앞에서 나는 알루미늄 문을 살짝 두드리고 잡아 당겼다. 잠겨 있는지 열리지가 않았다. 선생님을 불렀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반투명 유리창으로 불빛이 비췄으므로 선생님은 집에 있는 것이 분명했으나 조금 더 크게 불러도 반응이 없었다. TV 소리가 새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내 소리가 TV 소리에 묻혀 안 들리는 모양이었다. 나는 선생님 집 창문을 생각해 내고는 좁은 틈으로 들어가 창문 앞에 섰다.
선생님은 방 안에 있었다. 형규 형과 함께였다. 두 사람 모두 발가벗은 알몸이었다. 그때 나는 보고 말았다. 선생님의 자지가 형규 형의 똥구멍에 들어가 있는 것을.
“임형규~! 좋아? 내 자지 좋아?”
“아흐~~~ 좋아. 더 세게....”
“너 오늘 나한테 죽을 줄 알아. 지난주에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선생님은 척척 소리가 나도록 엉덩이를 들썩였다. 그러다 다시 무릎을 세우고 앉아 엉덩이를 들썩였다. 형규 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형은 내가 좋은 거야, 빠.구리 하는 게 좋은 거야?”
“당연히 둘 다 좋지.”
“하우~~~~ 이렇게 빠.구리 좋아하는데 진짜 어떻게 참았을까 싶다.... 혹시 형 영기 따먹은 거 아냐? 맨날 귀엽다 그러잖아.”
“그래 따먹었다 왜? 너는 안 오고, 존나 꼴려서 자지 빨게 했다 어쩔래?”
“미쳤어.... 이 양반이 농담을 진담처럼 하네. 그 쬐끄만 게 형 자지를 잘도 빨았겠다.... 아우~ 힘들어. 빨리 싸.”
“오우케이~~”
선생님의 엉덩이가 빠르게 들썩였다. 그러다 곧 짐승 같은 포효가 들리고, 선생님은 1, 2초 사이를 두고 척~ 척~ 소리가 나도록 엉덩이를 움직였다. 선생님이 돌아앉는 것을 보고 나는 얼른 몸을 감췄다. 좁은 틈에서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한여름에도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흐르고 창문으로 선생님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 맛있다.... 빠.구리 하고 피는 담배가 제일 맛있어. 그치?”
“형, 빨리 씻고 자자. 나 오늘 피곤해.”
“뭘 벌써 자. 한 번 더 해야지.”
“아우~ 됐어. 빨리 씻어.”
미닫이문이 드르륵 쾅 하고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나는 몸을 조금씩 움직여 좁은 틈을 빠져나갔다. 알루미늄 문 앞에서 나는 조금 망설이다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선생님~ 하고 불렀다. 안에서 잠금이 해제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쬐끔 열렸다. 골목에 지나가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선생님은 문을 열어 나를 들어오게 한 다음 문을 닫았다.
“영기 니가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
부엌에서 씻고 있던 선생님과 형규 형은 발가벗은 몸으로 나를 맞이하는 것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듯 했다. 조금 전 함께 목욕탕에 갔다왔기 때문일 터였다.
“이거 좀 드시라고.... 부추전이에요. 엄마가 갖다 드리라고 했어요.”
선생님보다 형규 형이 더 반색을 했다.
“안 그래도 출출했는데 진짜 잘 됐다.”
선생님도 웃으며 내가 들고 있던 보자기를 받았다.
“잘 먹겠다고 말씀 드려.”
“선생님.... 엄마가 덜어 놓고 그릇은 바로 가져 오라 해서....”
“그래 그래....”
보자기는 가벼워졌는데,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조금 전 봤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서였다. 선생님이 형규 형과 발가벗고 뒹구는 장면은 며칠이 지나도록 머릿속에서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형규 형이 오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 선생님이 화를 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 장면이 바로 그 이유였다. 이유를 깨닫게 되니 머릿속에 떠오르던 장면도 스르르 사라졌다.
제헌절이 지나면서 곧 방학이 시작되었고, 방학 때에도 매일은 아니었지만 선생님은 나와 함께 교실에서 노래를 부르고 피아노를 쳤다.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형규 형은 8월 첫 주말에 선생님을 한 번 찾아왔다.
방학도 막바지에 이른 어느 날, 정확히 말하면 8월 14일, 광복절 전날이었다. 나는 점심을 먹고 선생님 집으로 갔다. 학교에 같이 가기 위해서였다. 내가 부르는 소리에 선생님은 문을 열고 나왔다. 모시적삼 차림이었다. 속이 비치는데도 선생님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햇빛이 밝은 곳이 아니고, 또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칠 만했다.
선생님은 학교로 가는 동안 기분이 좋아 연신 콧노래를 불렀다. 선생님이 그토록 기다리던 날이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은 방학이라 매일이 쉬는 날이었지만 형규 형은 그렇지가 않았는데, 마침 광복절이 토요일이라 연휴여서 하루 일찍 온다고 며칠 전부터 선생님이 계속 나에게 말을 했기 때문에 나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선생님이 기분이 좋으니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영기야, 교실에 먼저 가 있어. 난 교무실 잠깐 들렀다 갈게.”
피아노의 먼지를 털고 피아노 의자에 앉아 선생님을 기다렸다. 복도에서 커다란 발소리가 들리고 교실 문이 열렸다. 선생님 혼자가 아니었다. 급사 병무 형도 함께 교실로 들어왔다. 내가 인사를 하자 형은 나에게 달려와 머리를 쓰다듬었다. 선생님이 병무 형에게 물었다.
“그럼.... 이번 방학이 끝이야?”
“네. 인수인계 할 거 정리한다고 오늘 출근한 거에요. 선생님도 뵙고 잘 됐네요.... 선생님, 이 교실에서만 5년 정도 됐나요?”
“응. 피아노 옮기기 귀찮아서 내가 박박 우겼지.”
“퇴근하다가 선생님 피아노 소리 듣고 여기로 온 게 5년 전인 거네요. 선생님 노래 소리도 듣기 좋았고....”
“그때 너 뭔가에 씌었었나봐. 다른 사람들은 시끄럽다고 여기 근처도 안 와.... 그나저나 아쉬워서 어쩌나.... 정 많이 들었는데....”
“선생님이랑 저랑 정만 들었나요. 선생님한테 많이 배웠잖아요. 다른 선생님들은 저한테 일만 떠맡겼지 좋은 말 한 번 안 했는데, 선생님은 공부에 피아노에 많이 가르쳐 주셨잖아요. 제가 뜬금없이 피아노 가르쳐 달라고 그랬을 때 선생님 바로 오냐 하셨잖아요. 정말 감동이었어요.”
“그거야 뭐.... 니가 잘생겨서 그런 거지..... 하하하하”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병무 형은 선생님에게 작별 인사를 고하고 교실을 떠났다. 선생님은 아쉬움을 달래려는지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하지만 선생님이 몇 모금 빨기도 전에 형은 다시 교실로 들어왔다.
“제가 깜박하고 있었네요.”
“왜, 뭔데?”
“선생님한테 편지가 왔어요. 아까 챙겨 놓고 선생님 드린다는 걸 깜박했네요. 에이취 쩜 쥐면 형규 형 맞죠? 그럼 저 진짜 갈게요.”
형은 다시 선생님에게 인사를 하고 교실을 나갔다. 선생님이 들고 있는 편지 봉투의 발신란에는 주소 대신 H.G.만 적혀 있었다. 선생님은 담배를 마저 피우고 피아노 의자에 앉아 봉투를 뜯었다. 그리고 안에 들어있던 종이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나는 피아노에 기대서서 선생님이 편지를 다 읽을 때까지 기다렸다.
호기심과 웃음기가 가득했던 선생님의 표정이 편지를 읽는 동안 웃음기는 완전히 사라지고, 흙빛으로 변했다. 편지지를 쥐고 있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관련자료
-
이전
-
다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