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아라 황석호 -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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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차례를 지내고 엄마와 함께 간 큰외삼촌집에서도 내 머릿속에는 선생님밖에 없었다. 혼자 차례를 지내고, 혼자 밥을 먹고, 혼자 TV를 보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명절인데 나라도 놀아줘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꼭 선생님 때문만이 아니라 나 역시도 외갓집에 있는 것이 불편하고 싫었다. 외종사촌, 이종사촌 등 사촌들도 많아서 명절의 외갓집은 시끌벅적했으나 나는 그다지 즐겁지가 않았다. 나를 포함해서 나랑 나이가 같은 사촌이 3명이나 있었음에도 쉽게 동화되지 못했다.
엄마 때문이기도 했다. 집에서는 나를 윽박지르고, 때리고, 심지어 연탈불에 달궈져 빨갛게 달아오른 연탄집게를 내 얼굴 앞에서 휘두르기도 하는 엄마는 외갓집에만 가면 조용했다. 한껏 주눅이 들어 외숙모들이나 이모들에게 제대로 말도 못했다.
한창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이 자식 자랑을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기지였으므로, 명절에 친척들이 모이면 서로 비교질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특히나 동갑인 사촌들이 비교 물망에 오르기가 일쑤여서 큰외삼촌 큰아들, 큰이모 막내아들, 작은이모 큰아들이 동갑이라 주로 비교대상이 되었다. 나보다 5살이 많은 사촌형들은 모두 고등학생이었는데, 전교 1등을 하는 형들에 비해 큰이모 막내아들은 상대적으로 많이 떨어져서 약간 주눅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큰외삼촌 막내아들과 작은외삼촌 막내아들, 엄마의 막내아들인 내가 또 동갑이라 비교대상에 올랐다. 고등학생이었던 형들은 성적 말고 비교할 것이 별로 없었는지라 나를 포함한 국민학생 동갑 사촌들이 더욱 비교가 많이 되어 친척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렸다.
나는 모든 면에서 앞서 있었다. 키도 내가 제일 컸고, 외모는 선생님이 늘 나에게 잘생겼다, 귀엽다는 말을 달고 살았으니 말할 것도 없었다. 공부로 쳐도 국,산,사,자 네 과목은 물론이고 여타 자질구레한 과목들까지 합쳐 나는 많이 틀리면 3, 4개, 올백은 한 번도 맞아본 적이 없지만 보통은 2개 정도 틀렸으니 꿀릴 게 전혀 없고, 선생님이 인정하듯이 나는 노래까지 잘 불렀으니 주눅이 들 것이 전혀 없었다. 엄마가 자랑을 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엄마는 전혀 하지를 않았다.
아이들끼리 방에서 따로 놀았지만 거실에서 떠드는 여자들의 목소리는 어디에도 다 들렸다. 큰외숙모와 작은외숙모가 티티카카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작은외숙모가 아들이 모형 자동차를 어찌나 잘 만드는지 집에 몇 개나 있다고 자랑을 하면, 큰외숙모는 아들이 태권도 검은띠라며 자랑을 하는 식이었다. 키와 외모, 성적에 대한 이야기는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면 엄마가 먼저 말을 꺼내도 될 텐데, 엄마는 대단하다며 맞장구를 쳐주기 바빴다.
나는 너무나 억울했다. 엄마는 한 번도 나에게 모형 자동차는 물론이고 싸구려 프라모델도 사 준 적이 없고, 태권도장에 보내 준 적도 없기 때문이었다. 고난도 고무줄놀이의 달인이었던 내가 태권도장에서 발차기를 못할 리도 없고, 미술시간에 공작품을 만드는 일이 있을 때마다 선생님이 나에게 손재주가 있다고 늘 칭찬했으니 그깟 모형 자동차쯤은 나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다.
나에 대한 말이 입방아에 오르기는 했다. 엄마의 입이 아니라 외숙모의 입이었다.
“영기 쟤는 클수록 지 애.비를 닮아가네.”
잘생기고 키도 훤칠했던 아버지를 닮아간다는 말은 나 역시도 그렇게 변해간다는 것을 의미했으나 결코 칭찬이 아니었다. 말이 주는 어감은 어린 나도 충분이 느낄 수가 있었다. 그래도 키와 외모 이야기가 나오면 엄마는 키 크고 잘생겼다고 맞장구를 쳐주면 좋을 것을 엄마는 오히려 한 술 더 떴다.
“지 애.비랑 하는 짓도 똑같아서 내가 진짜 미치겠다.”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는 그랬고, 다섯이나 되는 자식들을 남기고 세상을 일찍 떠서 엄마를 개고생 시키는 것은 어린 나도 모를 바가 아니었다. 나를 볼 때마다 개고생을 시키는 아버지가 생각이 나는 마음도 이해했다. 그래서 나는 애.비 없는 자식 소리 안 듣게 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는데, 엄마는 스스로 나를 애.비 없는 자식으로 만들고 있었다.
엄마에게 나라는 존재는 친척들에게 용돈을 받아 갖다 바치는 존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내가 명절 때마다 외갓집에 가기 싫다고 떼를 쓰는데도 기어이 나를 끌고 외갓집에 발길을 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명절 때 아이들에게 용돈을 주는 것은 품앗이의 개념이고, 돈이 돌고 도는 것이라 결국 본전치기였다. 엄마도 지갑을 열기는 했다. 그러나 돈을 꺼내기도 전에 친척들이 모두 말렸고, 엄마는 기다렸다는 듯이 지갑을 닫았다. 그것을 사촌들도 모두 알고 있어서 엄마에게서는 용돈을 받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선생님 생각이 간절했다. 엄마를 놔두고 혼자서라도 선생님 집으로 가서 추석 연휴를 마무리하고 싶었다. 하지만 용돈은 모두가 집으로 돌아가는 때에 줄을 서서 받는 것이었으므로 엄마의 아들 노릇을 해야 하는 나는 억지로 참고 버텼다.
외갓집에서 나오자마자 버스에 타기도 전에 내가 받은 용돈을 엄마에게 바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버스정류장에서 집으로 가려면 선생님 집 골목을 지나쳐야 했기에 가까이 갈수록 내 발걸음이 느려졌다. 나는 결국 엄마에게 내 소망을 말했다.
“엄마, 나 선생님 집에 갈래.”
“이 늦은 시간에? 선생님이 너 귀찮아하지 않아?”
꼭 엄마가 나를 귀찮아하는 의미로 들렸다.
“응. 선생님이 자주 놀러 오랬어.”
“그럼 그러든지....”
엄마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나는 선생님 집으로 달렸다. 알루미늄 문을 두드리며 선생님을 부르고, 놀란 표정으로 문을 열어주는 선생님의 품에 안겨 방으로 들어갔다.
“사촌들이랑 재미나게 놀았어?”
나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 아닌 딴소리를 했다.
“저 오늘 여기서 잘래요. 엄마한테 얘기하고 왔어요.”
선생님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빨리 얼굴이랑 손발 씻고 와. 자자.”
씻고 들어와서 선생님의 옆에 눕는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옷 벗고 자야지....”
선생님은 내 옷을 하나씩 벗겼다. 나는 선생님도 옷을 벗고 나를 간지럽힐 것으로 예상했으나 선생님은 옷을 모두 벗기만 했을 뿐 불을 끄고 내 옆에 누워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선생님의 팔을 베고 포근한 품에 안겨 스르르 잠이 들었다.
그 후로 나는 계속 선생님의 집에서 선생님과 함께 잤다. 엄마와 어떤 이야기가 오고갔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었다. 우리집은 여름이 지나면 작은방에 나눠 자던 누나들이 모두 큰방에 모여 잠을 자는데, 그것은 작은방에 피울 연탄값을 아끼기 위해서였다. 이름만 큰방이지 절대적으로 크지 않은 방에서 여섯 명이나 되는 식구들이 아랫목에 모여 복닥거리며 자야했기에 한 사람이 빠지면 그만큼 자리가 넓어져서 편하게 잘 수가 있을 테니, 엄마가 허락을 한 것도 그 이유가 아니었나 싶다. 손이 많이 가는 국민학생, 거기에다 없는 것이 도와주는 존재인 나였으니 선생님의 제안을 엄마는 쉽게 받아들였을 것이었다.
이유가 어쨌건 나는 선생님과 함께 지내는 것이 좋았다. 잠뿐만 아니라 밥도 선생님과 함께 먹었고, 빨래거리만 일주일에 한 번씩 엄마가 찾아갔다. 담임선생님과 학생이 한집에서 지낸다는 것이 말이 안 되고,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인가도 싶겠지만 우리집의 현실적인 고민과 선생님의 바람이 이루어진 합작품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너무나 행복했다. 답답한 집에서 벗어난 해방감도 느꼈다. 선생님과 나는 진짜 아빠와 아들처럼 한집에서 알콩달콩 살았다. 학교에서도 늘 한 교실에 있었으니 24시간 함께 있는 셈이었다. 청소가 끝나면 교실에서 노래를 부르고 피아노를 치는 것도 여전했다. 더욱 가까워지고, 더욱 친밀해졌다. 정말 꿈만 같아서 오래오래 깨지 않기를 바랐다.
추석이 끝나고 얼마 있지 않아 시험이었다.
“우리 영기 숙제만 하고 공부하는 꼴을 못 봤는데 이번 시험 못 치면 어떡하지?”
“저 원래 공부 안 해요.”
“그럼 그동안 시험은 왜 그렇게 잘 쳤어?”
“몰라요. 그냥 다 풀리던데요....”
“그래? 그럼 이번 시험에 올백 받아서 선생님 기쁘게 해줘.”
뭐 특별히 더 한 것은 없었는데, 평소와 한 가지 다른 것은 선생님이 사다 준 문제집을 풀어봤다는 것이었다. 시험은 평소처럼 쳤다. 71명의 학생들이 친 시험지에 일일이 동그라미를 쳐가며 채점을 해야 했기에 선생님 혼자서 하기에는 힘든 것이었다. 늘 내가 남아서 도운 일이었다. 그런데 한 사람이 더 남았다. 내 친구 귀룡이였다.
선생님은 나랑 귀룡이의 시험지를 골라 먼저 채점을 했다. 채점 결과는 선생님도 놀라고, 나도 놀라게 했다. 나는 올백이었고, 귀룡이는 산수와 자연에서 두 개씩 틀렸을 뿐, 다른 과목은 모두 백점이었다.
나도 귀룡이도 기분이 좋아 신나게 채점을 했다. 하지만 해가 질 무렵까지도 끝내지를 못해서 집에 가져가 채점을 해야 할 판이었다. 그 당시 우리 학교에는 교실마다 전등이 없었기에 더 남아서 할 수가 없었다. 선생님은 아직 채점을 못한 시험지 묶음을 보자기에 쌌다. 귀룡이 집에는 전화가 있었기에 선생님은 교무실에서 귀룡이네 집에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모두 함께 선생님 집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중국집에 들러 짜장면을 먹었다.
채점을 하는 도중에 선생님이 간식거리도 제공해서 동그라미와 작대기를 그어야 하는 단순 노동에 활력이 되기도 했다. 선생님은 간식을 먹는 동안 나는 물론이고, 귀룡이의 꼬추를 만졌다. 그 당시 어른들이 아이의 꼬추를 만지는 것은 친근감의 표시이기도 했기에 귀룡이도 아무 스스럼없이 선생님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어? 뭐야? 꼬추가 커졌는데?”
귀룡이는 그저 말없이 웃었다. 키는 그리 크지 않아도 다부진 체격이어서 공놀이도 잘하고, 달리기도 빠른 아이였다.
“영기는 전에 내가 물어봐서 알고.... 귀룡이 너는 딸딸이 치니?”
귀룡이는 별 부끄러움 없이 대답했다.
“네.”
“그래서 선생님이 만지니까 금방 커졌구나.... 딸딸이 치면 조ㅈ물은 나와?”
귀룡이는 자랑스러운 듯이 대답했다.
“네.”
“오~~~ 남자 다 됐네.... 꼬추도 제법 큰 거 같은데?”
“선생님 보여 드려요?”
귀룡이는 질문을 던지고 선생님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냉큼 일어서서 바지와 팬티를 벗었다. 발기된 꼬추가 드러났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꼬추였다. 나보다 확실히 더 컸다. 선생님도 감탄을 했다.
“이 정도 크면 조ㅈ물 나오고도 남겠네. 하하하하”
귀룡이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대범한 친구였다. 선생님의 말을 칭찬으로 받아들였는지 조ㅈ물을 뺄 기세로 자지를 흔들었다. 남자를 좋아하는 선생님인지라 굳이 말리지 않았다.
귀룡이는 자기가 먼저 시작했음에도 혼자 하기는 뭣 했는지 나도 끌어들이고, 급기야 선생님에게 도발까지 했다.
“선생님.... 혼자 사시니까 우리처럼 딸딸이 치시는 거죠?”
“당연하지. 나도 남잔데....”
“어른 자지는 냄새 많이 나던데 선생님도 그렇죠? 우리 조ㅈ물이랑은 다르죠?”
귀룡이는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 기어이 선생님도 자지를 꺼내도록 만들었다. 대단한 녀석이었다.
“귀룡아~ 앞으로 영기랑 더 친하게 잘 지내야 한다. 알았지?”
“네.”
“서로 아껴주고.... 지켜주고....”
“네.”
“귀룡아, 이제 늦었으니까 집에 가야겠다. 나머지는 선생님이 영기랑 할게.”
귀룡이는 선생님의 말씀대로 나랑 더욱 친하게 지냈다. 그리고 서로 아껴주고 지켜주는 사이가 되었다.
그 일은 얼마 지나지 않아 증명이 되었다. 체육시간이었다. 여학생들은 피구를 하고, 남학생들은 발야구를 했다. 발로 하는 것은 젬병이었던 나는 발야구가 너무나 싫었는데,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하면 언제나 문제가 생기는 법이었다. 그럭저럭 수비는 발로 하는 것이 아니었으니 할 만했으나 공격이 문제였다. 우리편 마지막 공격에 하필이면 내가 차야 하는 차례가 돌아왔다. 원아웃 상태라 나 때문에 끝이 나지는 않겠다는 마음에 공을 찼다. 내 나름으로 세게 찬 공은 직선으로 날아갔고, 너무나 정확하게 가운데 정면으로 날아가 맨 앞에서 수비를 하던 친구에게 바로 잡혔다. 그것으로 끝이었으면 좋았으련만 공은 2루로 송구가 되어 미처 베이스로 돌아가지 못한 친구마저 죽게 만들었다. 병살 플레이였다. 우리편 친구들의 눈총이 따가웠다.
다음 마지막 수비에서 점수를 내주지 않으면 이기는 경기였는데, 병살타를 날린 것이 자꾸 머릿속에 남아 있어서 수비를 할 때도 공을 놓쳐 점수를 내주고 말았다. 결과는 우리편의 패배였다. 미안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렇잖아도 나 때문에 져서 마음이 무거운데, 이름도 기억이 안 나는 녀석이 나에게 다가와 욕을 하며 투정을 부렸다.
“씨.발.... 기집애 같은 새끼가 피구나 하지 괜히 발야구를 해서 너 때문에 졌잖아.”
뼈를 때리는 말이었다.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냥 고개를 숙이고 발끝으로 운동장 바닥만 툭툭 차고 있는 내 앞을 귀룡이가 지나가는 것이 언뜻 보이는가 싶더니 나에게 욕을 했던 녀석과 한 판 붙었다. 싸웠다기 보다는 일방적으로 귀룡이가 녀석을 팬 것이었다. 피구를 하는 곳에 가 있던 선생님이 오기 전에 우리가 말려서 싸움은 끝이 났지만 귀룡이는 녀석에게 계속 욕을 해댔다. 선생님의 중재로 귀룡이와 녀석이 악수를 하며 화해를 했지만 결국 귀룡이는 선생님의 지시로 수업이 끝나고 교실에 남았다. 그날은 피아노를 칠 수가 없는 분위기였다. 나는 혹시나 귀룡이가 혼이 나면 편을 들어줄 생각으로 나도 함께 남았다.
“귀룡이 너 아까 왜 그랬어? 친구를 그렇게 일방적으로 때리면 안 되지....”
“선생님 잘못했습니다.... 근데.... 참을 수가 없었어요.”
“왜?”
“영기를.... 기집애 같다고 놀려서요.”
선생님은 나랑 귀룡이를 번갈아 바라보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던졌다.
“그래도 때리면 안 되지. 충분히 말로 할 수 있었잖아. 친구 때린 거는 귀룡이 니가 잘못한 거야.....”
귀룡이는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선생님의 말이 이어졌다.
“근데.... 영기 편 들어준 것은 잘했어.”
귀룡이는 다시 웃음을 찾았다. 선생님은 귀룡이와 나를 데리고, 예전처럼 중국집에 들렀다. 귀룡이와 함께 먹는 짜장면은 더욱 맛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나는 귀룡이와 더욱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그렇게 선생님과 함께 사는 동안 5학년의 마지막인 겨울이 찾아오고 있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선생님과 함께 살았던 때였다. 정서적으로 봤을 때도 그때가 가장 안정적이었다. 고민도 없었고, 선생님과 함께 노래를 부르고, 피아노를 치고, 공부를 하고, 어린 나이였지만 섹스를 하는 것은 무한한 즐거움이었다.
해가 바뀌고, 2월 말 봄방학까지 선생님은 나의 담임이었으므로 동거 생활은 계속 되었다. 3월이 되어 새 학년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당연히 담임선생님이 바뀌었지만 아직 추운 날들이 이어졌으므로 선생님과의 동거는 끝나지 않았다. 이미 담임과 제자와의 관계를 넘어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선생님과 나의 동거는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엄마 때문이었다. 엄마는 맹자의 엄마에 빙의된 듯 과감히 우리가 살던 변두리 동네를 떠날 결심을 했다. 명분은 내가 괜찮은 중학교에 입학을 해서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되도록 빨리 이사를 해서 내가 적응을 하는 것이 좋다는 판단에 6학년에 올라가자마자 이사 갈 집을 찾으러 먼 동네까지 가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결국 엄마는 이사 갈 집을 찾아냈고, 이사 날짜도 정해졌다. 3월 하순으로 들어서는 시점이었다.
내가 선생님에게 이사를 간다는 사실을 통보했을 때 선생님은 긴 한숨만 쉴 뿐 말이 없었다. 나도 옆에서 한숨만 내쉬었다. 하지만 어느 사이 나는 빨리 이사를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6학년 담임선생 때문이었다.
1학년에서 2학년으로 올라갈 때 반편성 없이 그대로 올라갔었는데, 5학년에서 6학년에 올라갈 때도 그대로 올라갔다. 귀룡이와 헤어지지 않은 것이 기쁨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나와 귀룡이 사이가 묘하게 틀어지는 사건이 하나 있었다. 반장 선거였다.
이미 3월에 들어서면서 나는 곧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야 한다는 것이 정해져 있었지만 나는 윤상호 선생님 말고 그 어느 누구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다. 6학년 담임도, 귀룡이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반장 선거 전날 후보가 발표되었다. 여학생 후보들은 5학년 때와 마찬가지로 똑같았지만 남학생 후보는 나를 제외하고 두 사람이 바뀌었다. 그런데 그 두 사람 중 하나가 귀룡이였다.
그날 밤 나는 엄청난 고민을 했다. 내 문제였으므로 같이 살았던 선생님에게도 말을 하지 않고 혼자서 끙끙 앓았다. 어차피 전학을 갈 것인데 반장, 부반장이 무슨 상관이냐고, 사퇴를 하는 게 낫다고, 귀룡이를 응원하는 것이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그놈의 반장 욕심은 나를 끝까지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결국 나는 사퇴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결과는 비참했다. 나도 귀룡이도 아닌 다른 친구가 반장이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고민할 것이 없었다. 나는 부반장 선거에서 투표 종이에 내 이름이 아닌 귀룡이의 이름을 적었다. 귀룡이가 부반장이 될 것을 그토록 바랐으나 또 여학생들이 나에게 몰표를 던진 것인지 내가 부반장이 되었다.
그냥 여기까지였으면 좋았으련만 선거가 끝나고 반장과 여학생 부반장으로 당선이 된 엄마들이 학급을 어떻게 운영해 나갈 것인가를 의논하기 위해 우리집에 찾아왔다. 명분은 그러했지만 결국 돈을 내라는 것이었다. 엄마는 일언지하에 거절을 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집이 이사를 할 것이고, 내가 곧 전학을 간다는 것이 밝혀졌다.
다음날 학교에 그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고, 당연히 담임선생의 귀에도 들어갔다. 나에게 바로 타박이 들어왔다. 전학을 갈 것이면서 반장 선거에 왜 나갔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귀룡이도 나에게 섭섭한 것이 있는지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충분히 이해했다.
숨이 막히는 날들이 계속 되었다. 수업도 재미가 하나도 없었다. 5학년 때와는 다른 설명 방식 때문에 적응하기도 힘들었거니와 6학년 담임선생의 이상한 교육 방식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6학년에 올라오자마자 담임선생은 우리들에게 교과서 맨 앞 장에 있는 국민교육헌장을 암기할 것을 지시했고, 그 기한이 2주일이었다.
나는 전학을 가는 몸이었기에 귀찮아서 암기를 하지 않았는데, 그 결과는 수업 시간에 자리에 앉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담임선생은 2주일이 지나고도 암기를 못한 학생들을 세워놓고 수업을 진행했다. 왕따처럼 지내는 것도 짜증이 나고, 대놓고 나를 차별하는 담임선생에 대한 반발심으로 나는 끝까지 암기를 하지 않고 버텨보려고 했으나 이틀을 서서 수업을 받다보니 다리가 아파서 어쩔 수 없이 암기를 했다.
내가 집에서 늦게까지 국민교육헌장을 암기하는 것을 보고 선생님은 별 미친 짓을 다 한다고 6학년 담임선생을 들먹이며 욕을 했지만 선생님도 내가 다 외울 때까지 교과서를 들고 봐줬다.
다음날 등교를 하자마자 나는 담임에게 가서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를 시작으로 하여 ‘새 역사를 창조하자’는 말로 마무리를 하고 내가 정확히 암기를 하고 있음을 증명했다. 그리고 내 자리에 가서 앉았다.
이렇게 숨 막히는 시간을 보내다보니 선생님과 헤어져야 한다는 안타까움과 아쉬움보다 빨리 탈출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커져서 오히려 이사 가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막상 이사를 하는 주말이 되었을 때 나는 발가벗은 몸으로 선생님의 품에 안겨 울었다. 선생님도 발가벗은 몸으로 나를 끌어안고 내 등을 토닥이기만 했을 뿐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바이엘도 다 떼지 못하고 윤상호 선생님과 이별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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