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아라 황석호 -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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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한 시간이 넘는 시간을 달려 새로 이사를 간 집은 여전히 변두리 동네의, 그것도 전셋집이었다. 엄마가 집을 팔지 않고 전세를 내준 자금으로 집을 구해야 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을 터였다. 오히려 더 열악한 동네였다.
처음 이사를 간 동네의 국민학교에서 처음 며칠은 어색했지만 곧 적응을 해서 재미나게 살았다. 언제 한 번 선생님에게 놀러가야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으나 어린 내가 혼자서 가기에는 상당히 멀었고, 이리저리 노는 것에 정신이 팔려 있었으므로 생각만으로 그치는 때가 많았다.
여전히 음악 시간이 즐거웠고, 노래를 하는 것이 재미있었고, 새로 이사를 간 동네에서 새롭게 알게 된 놀이와 프로야구 원년의 시절을 보내면서 내가 관심을 쏟을 것들이 너무나 많았기에 선생님에 대한 생각도 조금씩 엷어졌다.
그렇다고 해서 선생님을 완전히 잊은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한 번 찾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엷어졌을 뿐 보지 못하는 날이 지속될수록 그리움은 증폭되었다.
겨울방학을 앞둔 어느 토요일, 나는 무턱대로 선생님을 찾아갔다.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한 시간이 넘는 시간을 길바닥에 뿌리며 찾아간 보람이 들 정도로 선생님을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게 누구야. 영기야.... 어쩐 일이야?”
“선생님 보고 싶어서 왔어요.”
“그래 그래 잘 왔어. 밥은 먹었어?”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선생님은 나를 데리고 중국집으로 가서 짜장면을 시켜줬다. 내가 이사를 갈 때보다 키가 한 뼘은 더 자라 있는 나를 보고, 선생님은 탕수육도 추가로 주문했다. 배가 부르게 저녁을 먹은 나는 선생님을 따라 집으로 향했다. 짧은 겨울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방으로 들어온 선생님은 나를 이불 속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선생님은 담배를 피워 물었다. 나는 고개를 돌리며 선생님의 방을 둘러봤다. 예전과 같은 모습이었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TV 옆에 전화기가 놓여 있는 것이었다. 선생님의 모습도 여전해서 익숙함이 느껴졌다. 인자한 미소도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덥수룩하게 자란 수염을 보고는 마음이 조금 무거워졌다. 선생님의 얼굴에 왠지 모를 그늘이 서려 있는 듯했다.
담배를 피우고 이불 속으로 들어온 선생님과 나란히 벽에 기대고 앉아 TV를 봤다. 선생님과 함께 살았을 때는 컬러 TV를 보며 좋아라했었는데, 다시 떨어져 사는 동안 우리집의 흑백 TV를 보느라 재미가 없던 차에 다시 컬러 TV를 보게 되어 마냥 좋았다. 무엇보다 선생님과 함께라는 사실이 더욱 나를 즐겁게 했다.
선생님은 이불 밖으로 나가는 것이 귀찮았는지 재떨이를 끌어당겨 이불 옆에 두고, 이불에 재가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레 담배를 피웠다.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는 것을 보고, 나는 슬며시 선생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선생님은 팔을 뻗어 내가 편하게 기댈 수 있도록 배려했다. 하지만 나는 편하지가 않았다. 역시 나에게 가장 편하고 익숙한 자리는 선생님의 다리 사이였다. 나는 몸을 움직여 선생님의 품으로 파고 들었다. 선생님도 나를 앞에 앉히는 것이 익숙했을 테니 내 움직임을 알아차리고 내가 들어가기 쉽도록 다리를 벌렸다. 나는 벌어진 다리 사이에 몸을 넣어 선생님의 배에 등을 기대고 가슴에 머리를 댔다. 그리고 조심스레 선생님의 손을 잡아 내 허벅지 위에 올렸다. 그렇게 한참 동안 선생님과 함께 TV를 봤다.
선생님은 또 담배 한 대를 피워 물었다. 연기가 앞으로 오지 않도록 머리를 젖혀 연기를 위로 내뿜는 것이 느껴졌다. 오랜만에 맡아 보는 담배 연기라 코끝이 매웠다. 하지만 한 때 너무나 익숙했던 것이라 오히려 친근하게 다가왔고, 선생님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느끼도록 했다. 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선생님을 불렀다.
“선생님....”
선생님은 궁금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천천히 일어나 선생님 앞에 섰다. 선생님은 내 바지와 안에 입고 있던 내복 바지를 벗겼다. 그리고 천천히 내 팬티를 무릎까지 끌어내렸다. 발딱 서 있던 자지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선생님은 놀란 표정을 짓다가 곧바로 환한 미소를 지었다.
“영기 너.... 조ㅈ털.... 이야~~~ 우리 영기 드디어 조ㅈ털이 났구나.... 아우~ 우리 영기 그 새 이렇게 컸어.”
선생님은 나를 다시 앉히고 꼭 끌어안았다. 내 머리를 쓰다듬고 등을 토닥였다. 나에게는 어색하기만 한 것인데, 선생님은 무척이나 기쁘고 감동인 듯 했다. 내 이마며 입술에 몇 번이고 뽀뽀를 한 뒤 나에게 물었다.
“조ㅈ털 언제부터 났어?”
“여름방학 때부터요.”
“제법 됐네. 그래서 이렇게 거뭇거뭇한 거구나.”
“선생님.... 너무 이상하고 어색해요.”
“이상하긴 뭐가 이상해. 선생님은 우리 영기가 조ㅈ털이 나서 좋기만 한데.... 어디 한 번 다시 보자.”
선생님은 나를 일으켜 세워 한참을 바라봤다. 위로 치솟은 자지를 아래로 내리고 거뭇거뭇 올라온 조ㅈ털을 몇 번이고 쓰다듬었다.
“처음 날 때부터 봤어야 하는 건데.... 우리 영기 키도 더 크고 조ㅈ털도 나니까 더 귀엽고 사랑스러워....”
“선생님.... 저.... 여기서 자고 싶어요.”
“그래 그래.... 우리 오랜만에 같이 목욕 가자.”
선생님은 목욕을 하는 내내 자지 둘레에 난 조ㅈ털을 보고 더욱 즐거워했다. 그리고 늘 그랬듯이 바나나 우유를 빨대로 빨아 마시며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선생님은 내가 알려주는 옆집 번호로 전화를 걸어 엄마한테 내일 보내겠다는 말을 했다. 엄마도 쉽게 허락을 했다.
선생님과 나는 지난 1년 동안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전학을 간 학교에서 잘 적응을 했으며 이제는 목욕을 혼자 다닌다는 이야기를 했고, 선생님은 합창 대회 이야기를 하며 내가 없어서 많이 아쉬웠다고 했다. 그리고 귀룡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6학년에 올라가면서 선생님은 더 이상 담임이 아니었고, 반장 선거와 전학 때문에 나와 귀룡이의 관계가 어색해진 탓으로 귀룡이와 선생님도 자연스럽게 멀어졌지만 귀룡이네 집과 관련된 소문은 선생님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골목 몇 개만 지나면 되는 가까운 거리이기도 했거니와 떠돌았던 소문은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만한 사건이었다.
“이렇게 오랜만에 왔는데, 귀룡이도 한 번 보고 가야지?”
“귀룡이가 만나 줄까요?”
“지난 일이잖아. 그렇게 친하게 잘 지냈는데.... 서로 오해가 있는 거는 풀고 그럼 되는 거지....”
다음 날, 선생님이 전화를 해서 귀룡이를 불러냈다. 보지 못하던 시간은 지난날의 감정을 모두 사라지게 만들었고, 오랜만에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정말 오랜만에 선생님은 피아노가 있는 교실로 나를 데리고 갔다. 선생님의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딱 한 곡을 끝으로 선생님은 나에게 노래를 시키지 않았다.
“아이고, 우리 영기 변성기가 왔구나....”
선생님은 변성기를 보내는 동안 내가 주의해야 할 것들을 일러줬다. 그리고 창가에 서서 담배를 피웠다. 나도 선생님의 옆에 섰다. 선생님은 나를 내려다보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루하루 내게 주어진 인생을 살아내면서 이렇게 가끔 윤상호 선생님을 떠올릴 때면 그 기억의 끝자락에 언제나 피아노가 있는 교실 풍경이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선생님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선생님도 내가 사는 곳으로 찾아가겠다는 말을 남겼다. 버스에 올라 선생님에게 손을 흔들었다. 선생님도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버스는 선생님을 남겨 두고 떠났다. 나는 버스 맨 뒷자리에 앉아 선생님과 보냈던 시간들을 되새겼다. 그러다가 문득 선생님 집 전화번호를 묻지 않은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나는 언제 또 한 번 선생님을 찾아가면 그만이라고, 그리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것이 윤상호 선생님과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엄마는 내가 배정을 받은 중학교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이사를 감행했고, 나는 중학교에 입학을 하자마자 한 달 만에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갔다. 새로 이사를 간 곳은 큰이모가 살던 집이었다. 이모네 가족들 모두 특별시로 이사를 가고, 이모네가 살던 집이 팔릴 때까지 우리가 들어가서 사는 조건이었다.
또 전학을 간 학교에서 다시 적응을 해야 했지만 그다지 힘들지는 않았다. 모두들 입학한 지 한 달 정도 된 시점이라 알아가는 과정이었기에 그러했다. 다만 공부를 따라가는 것이 힘들었다. 수업 시간 말고는 공부 따위를 해본 적이 없었던 내가 중학교 공부를 따라가는 것은 참 적응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중학교 1학년은 시험 때 책상에 앉아 있는 버릇을 들이는 데에 신경을 쏟았다.
그리고 나라는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에 대해 확실하게 깨닫는 때이기도 했다. 같이 숙제도 할 겸해서 놀러간 친구집에서 나는 처음으로 포르노 비디오를 봤다. 내 나름으로 충격이었다. 내 시선이 여자가 아닌 남자에게 머무른다는 것을 알려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니까 윤상호 선생님 때문에 내가 남자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원래부터 남자를 좋아하는 게이였기에 자연스레 살갑게 다가오는 선생님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인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내가 먼저 선생님에게 매력을 느끼고 다가선 것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내 정체성을 깨달으며 중학교 2학년으로 올라가고 두 달이 채 못 되어 우리집은 또 이사를 해야 했다. 이모집이 팔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정말 이사를 가기 싫었다. 새 학년 새 학기에 새롭게 반편성이 된 학급에서 전학생의 딱지를 떼고 새 출발을 하는 대다, 나름 중학교 생활에도 적응을 했고, 나를 좋아해주던 영어선생님이 담임을 맡은 터라 나는 그때 한창 기분에 들떠 있었다.
반장 선거에서 반장은커녕 부반장도 떨어져서 총무부장이 되었어도 애당초 욕심도 사라졌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았다. 1교시 시작 전, 아침 자습시간에 칠판에 적힌 문제들을 반 친구들 앞에서 풀이하고 설명을 해야 하는 자습위원이 된 것만으로도 나는 좋았다.
잠깐 다른 데로 새서 자습위원이 뭔지 말을 해야 할 것 같다. 나중에 내가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것과도 관련이 있으니 미리 말해 두는 게 좋을 것 같기도 하고, 내 자랑을 좀 할 필요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이다.
그때 내가 다녔던 중학교에는 아침 자습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었다. 각 과목 선생님들이 정해진 요일에 문제를 내면 학생들은 아침에 등교를 해서 칠판에 적힌 문제를 자습 노트에 적고 푸는 시스템이었다. 모든 학급이 똑같은 문제를 풀었다. 그렇다면 선생님들이 낸 문제를 칠판에 적고, 학생들이 문제를 다 풀면 풀이를 하는 사람이 필요할 터, 바로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 자습위원이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자습위원은 그 학급에서 공부를 가장 잘 하는 학생 중의 한 명임을 증명하는 셈이었다.
자습위원은 한 반에 6명이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과목과 요일이 정해져 있었다. 그 과목이란, 소위 말하는 주요과목이었던 국어, 영어, 수학, 과학, 사회였다. 다섯 과목에 하루가 남는 것은 영어를 하루 더 끼워 요일을 가득 채웠다. 자습위원은 담임선생님이 뽑았고, 과목도 담임선생님이 지정했다. 내가 맡은 과목은 영어, 그러니까 영어 자습위원 둘 중 하나였다.
자습위원은 모든 수업이 끝나면 교무실에 가서 과목별 출제 노트에 적힌 문제들을 자기의 자습 노트에 적고, 그것을 그대로 자기 반 교실 칠판에 적어 놓아야 했다. 간혹 아침에 일찍 학교에 나와 적는 학생도 있었지만 나는 집에 가기 전에 칠판에 옮겨 적었다. 그리고 다음날 담임선생님이 조례를 하러 교실에 오면 자습위원은 칠판 앞에서 학생들에게 문제를 풀이하는 것이 그 임무였다.
나는 그때 이 자습위원의 임무를 즐겼다. 교무실에서 다른 반 자습위원들과 부대끼며 노트에 베껴 적는 것이 짜증이 나기는 했지만 분필을 들고 깨끗이 닦은 칠판에 옮겨 적을 때는 꼭 내가 교사가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5학년 때, 윤상호 선생님이 판서하기가 귀찮을 때면 나에게 시키기도 했었으니 그리 낯설지도 않은 일이었기에 이쁘게, 또박또박 칠판에 문제를 적었다.
그리고 또 내가 자습위원이라는 것은 내가 스스로 공부를 하는 데에도 상당히 도움이 되었다. 하필 내가 맡은 과목이 담임선생님의 과목과 같았으므로, 나는 제대로 설명을 하기 위해 그때 당시 동아출판사에서 나온 ‘영어 완전정복’을 뒤져가며 진짜 제목 그대로 완전정복을 하는 마음으로 공부를 했다.
중학교 2학년 1학기의 영어 문제라 봐야 뭐 어려운 게 있으랴만, 그것을 풀이하고 설명을 한다는 것은 다른 차원이었다. 원래 쉬울수록 설명은 더 어려운 법이었다. 이게 왜 답인지, 혹은 왜 답이 아닌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머리를 엄청 굴려야 했다.
대머리 대통령 정권은 과외금지 조치를 단행하여 오로지 학교에서 배우는 것으로만 공부를 하고 시험을 쳐야 했는데, 나처럼 가난한 집안의 자식들은 정말 좋은 일임에 틀림이 없었다. 나중에 커서 이게 다 꼼수였다는 것을 깨닫긴 했지만 어쨌든 나는 그 누구의 도움이 없이 혼자 공부해서 해결을 했고, 담임선생님에게 설명을 잘 한다고 칭찬을 받기도 했다.
자습위원의 경험은 훗날 내가 대학입시 공부를 할 때도 도움이 많이 되었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식으로 공부를 하는 내 학습 방법 때문이었다. 혹시 이 글을 읽는 사람들 중에 학교에 다니는 자녀가 있다면, 다 게이들이라서 나처럼 자식이 없으려나.... 아무튼, 이 공부 방법을 자녀에게 소개하는 것도 좋을 것이라 확신한다. 시간이 걸리고, 품을 팔아야 하지만 머릿속에 확실히 남고, 응용을 하는 데에도 이 방법이 최고다.
요즘처럼 사교육 비용으로 허리가 휘는 이때,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자녀가 스스로 자기주도학습을 해준다면 얼마나 좋은가 말이다. 사교육에 쏟아 부을 돈으로 돼지고기 먹을 거 소고기 먹을 수 있고, 여름휴가 때 동남아 대신 더 멀리 갈 수도 있지 않을까? 아~ 안타깝다. 이런 팁을 게이들에게 말하고 있다는 것이....
내가 자습위원을 하면서 공부에 맛 들여 지내던 4월은 우리 학교에 교생 실습이 진행되던 때였다. 학교 근처 사립 여자대학교의 4학년 학생들이 우루루 몰려왔기에 당연히 교생들은 모두 여자였다. 사춘기에 접어 들어 남성 호르몬이 뿜뿜대고, 딸딸이를 치기 시작한 남자 중학생들의 가슴을 뒤집어 놓는 사건이었다. 물론 나는 제외지만. 담임선생님의 따까리로 우리 반에 들어온 영어담당 교생선생님은 다른 반 학생들이 우리 반을 부러워할 만큼 예뻤다. 그때도 게이긴 마찬가지였던 나도 인정했다. 긴 생머리에 수수한 화장을 한 모습은 사춘기 남자 중학생들의 로망을 충족시키기에 딱 알맞았다.
교생선생님은 담임선생님이 조례를 할 때도, 영어 시간에도 늘 교실에 들어와 참관을 했다. 교생선생님이 서 있던 자리는 맨 뒤에 앉아 있던 바로 내 뒤였다. 우리 반 애들은 나를 무척이나 부러워했지만 나는 그게 귀찮고 싫었다. 고개를 내밀어 내가 필기하는 것을 자주 훔쳐봐서 귀찮았고, 그때마다 풍기는 화장품 냄새가 싫었다. 우리 집에서 나랑 같이 사는 둘째누나에게서 나는 냄새였기 때문이었다. 비록 지역예선 최종까지 갔다가 떨어지긴 했지만, 81년도 말에 미스 MBC라고, 여배우 김청을 배출한 대회에 나갔던 둘째누나랑 같은 화장품을 쓰는 듯 했다.
이것과 관련해 한 마디를 더 하면, 윤상호 선생님과 함께 살 때 둘째누나가 나갔던 지역예선 대회는 지방방송으로 녹화 중계되었는데, 나는 선생님에게 안겨 컬러TV로 그 장면을 지켜봤다. 녹화방송이었는지라 나에게 이미 결과를 들어서 알고 있던 선생님은 긴장감 없이 보다가 나에게 한 마디를 했었다. 둘째누나가 제일 예쁘다고. 거기에 덧붙여 한 마디를 더했다. 우리 영기도 잘생겼으니까 탈렌트를 하라고.
아무튼 교생선생님은 자기한테 전혀 관심도 없는 나를 귀찮게 했지만 그리 나쁜 것은 아니었다. 선생님은 나에게 칭찬도 많이 했다. 내가 칠판에 적힌 문제를 설명하고 내 자리에 들어오면 여지없이 내 등을 토닥이며 설명을 참 잘한다고, 나중에 자기처럼 선생님 하면 딱 좋겠다는 말을 했다.
또 한 번은 내가 교무실에서 자습 문제를 노트에 베끼고 있는데, 나를 불러 교생선생님들이 몰려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집에만 가면 늘 봐야 해서 지긋지긋한 여자들의 무리가 가득 차 있었다. 그녀들이 풍기는 화장품 냄새에 질식할 정도였다. 교생선생님은 모여 있던 다른 교생선생님들에게 말했다.
“얘야 얘. 진짜 잘생겼지? 얘 공부도 잘해. 우리 반 자습위원이야.”
여기저기서 어머나 등의 여러 감탄사들이 터져 나왔다. 나는 여자 무리들에 둘러싸여 여기저기 만짐을 당했다. 수치스러울 것까지는 없었는데, 조ㅈ같은, 아니다, 조ㅈ은 좋은 거니까, 개씹 같은 기분이었다. 어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교생선생님은 내 손에 과자 몇 개를 쥐어주었다. 빨간색 포장지에 들어 있는 오리온 다이제스티브였다. 이날부터 다이제스티브는 내가 싫어하는 과자가 되었다.
나중에 다시 얘기하겠지만, 나는 이렇게 어릴 때부터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국민학교 반장 선거 때도, 교생선생님들에게도. 그 이유는 한 가지였다. 잘생겼으니까. 외숙모들이 엄마에게 했던, 지 애.비 닮아간다는 말도 다 내가 더욱 잘생겨진다는 의미였다. 지금도 내 방에 걸려 있는 아버지의 흑백 초상화는 서양의 어느 배우를 연상시켰다. 담배를 물고 있는 제임스 딘. 그러니까 내 말은 유전적으로 나는 잘생길 수밖에 없다, 그 말이다.
내 자랑은 이제 그만하고, 아무튼 내가 이사를 가기 싫어했던 이유 중의 또 하나는 새로 친하게 된 창렬이 때문이었다. 동글동글하게 생긴 창렬이의 집에는 포르노 비디오가 있었고, 늘 집이 비어 있어서 학교를 마치고 자주 놀러갔다. 친구 서너 명이 떼를 지어가기도 했고, 나 혼자 가기도 했다. 물론 포르노 비디오를 보기 위함이었다. 착하고 순진해서 이용당하기만 하던 창렬이는 나에게도 이용을 당하는 셈이었다.
우리집이 이사를 가기 얼마 전, 창렬이는 자기 집으로 나를 혼자만 데리고 갔다. 점심시간에 부모님 방 옷장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고 내 귀에 대고 속삭인 날이었다. 창렬이와 나는 둘이 나란히 앉아 새로 발견한 포르노 비디오를 시청했다. 어떤 내용이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포르노 비디오가 다 그렇듯 살색의 향연이 눈앞에 펼쳐졌다. 내 옆에서 창렬이가 나에게 말했다. 단둘이 있었는데도 창렬이는 내 귀에 속삭였다.
“영기야, 자지가 이상하지 않냐?”
나는 처음에 바보인가 생각했다. 지금에야 나이가 들어서 다운 받은 야동을 봐도 아무 반응이 없지만 그때는 중학교 2학년이었으니 포르노라는 말만 들어도 자지가 발딱발딱 서는 때였기에 자지가 이상해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내가 바보였다. 창렬이가 이상하다고 한 말은 발기가 아니었다. 내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창렬이는 다시 내 귀에 속삭였다.
“너는 자지에서 물 안 나와? 나는 이거 보면 자지에서 물 나오던데....”
그때 당시 우리 반 놈들은 거의 대부분 딸딸이를 치고 있으면서 자기는 그런 거 모른다고 발뺌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창렬이가 내게 던진 말은 다소 도발적이고, 솔직한 자기고백이었다. 나도 다른 놈들처럼 딸딸이 치는 것을 함구하던 때라 모르는 척을 했다.
“글쎄.... 나는 모르겠는데....”
“나만 그런가? 이거 보고 나서 오줌 눌 때 보면 빤스가 젖어 있어.”
창렬이도 나에게 솔직하지 않았다. ‘오줌 눌 때 보면’이 아니라 ‘딸딸이 치려고 빤스 내리면’이 더 정확한 말일 터였다.
나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난감했다. 나도 그렇다고 솔직하게 고백을 해야 할지, 너만 그런 거라고 무시를 하며 거짓말을 해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내가 선택한 것은 침묵, 그러니까 무반응이었다. 창렬이는 나의 반응 없음을 입 닥치고 보기나 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인 것인지 내가 집에 돌아갈 때까지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창렬이에게 인사를 하고 집으로 가는 동안 나는 길 위에 걸리적거리는 모든 돌멩이를 차면서 걸었다. 후회의 반응이었다. 아쉬움의 표현이기도 했다. 또 나를 향한 질책의 의미도 있었다. 진짜 나는 바보였다. 창렬이에게 무심한 듯 물이 얼마나 나왔는지 보자고 말을 해야 했다고 후회를 했다. 나도 너처럼 물이 나왔다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자지를 꺼내 보여줄 기회를 놓친 것 같아 아쉽기만 했다.
집으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어서 나는 다시 한 번 창렬이와 단둘이 포르노를 보게 되면 절대로 후회할 일을 남기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 집에 가서 오줌을 누려고 보니까 나도 빤스가 젖어 있더라고 먼저 말을 꺼내고, 창렬이가 동조를 해오면 같이 빤스를 벗고 자지를 꺼내서 비교하다가 슬쩍 비디오 화면을 가리키며 우리도 저렇게 해볼래? 하고는 내가 먼저 자지를 빨겠노라고 계획을 짰다. 우리끼리 비밀이라며 창렬이의 자지를 내 똥구멍으로 안내하는 상상까지 했다.
그러나 내 계획과 상상은 실현되지 못한 채 이사를 가야하는 주말이 다가왔고, 나는 전학을 가기 전 그 학교에 마지막으로 등교를 했다. 토요일이었다.
조례 시간에 담임선생님은 내가 전학을 간다는 사실을 반 친구들에게 알리고, 마지막 등교라는 것을 밝혔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다 아는 사실이었다. 선생님은 나를 불러내 인사를 하도록 배려했다. 나는 교탁에 서서 정이 들자마자 떠나게 되어 아쉽다고 간단히 말했다. 정말 아쉬웠다. 창렬이의 얼굴을 보니 더욱 그랬다. 내가 자리에 들어가려는 찰나 담임선생님이 나에게 한 마디를 던졌다.
“이영기, 이왕 나온 거 노래 한 곡 하고 들어가라.”
정말 오랜만이었다. 변성기가 지나갔는지 약간 쉰 듯한 목소리도 이제 완전히 사라졌으니 마음껏 소리를 질러도 될 것 같았다. 나는 빼지 않고 노래를 불렀다. 그 주에 처음으로 가요톱10 1위를 찍은 노래였다.
김수철 - 못다 핀 꽃 한 송이
조례가 끝나고 난 뒤, 내 뒤에 서 있던 교생선생님이 고운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영기야, 너 노래 진짜 잘하네. 전학 가서도 공부 열심히 하고 잘 지내라.”
교생선생님은 나에게 하얀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잡고 몇 번 흔들었다. 이별의 인사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교생선생님은 살짝 나를 안고 등을 토닥였다. 반 친구들의 환호성이 터졌다. 이유는 내가 부러워서일 것이 분명했다. 남의 속도 모르고, 거의 난동 수준으로 소리를 질렀다. 수컷들의 본능이었다.
선생님이 교실 밖으로 나가자마자 수컷들이 나에게 달려 들어 선생님과 악수를 했던 내 오른손을 조물딱거렸다. 간접키스도 아니고, 내 손을 매개로 한 교생선생님과의 간접악수였다. 선생님이 손 대신 자지를 만지고 갔으면 이것들이 내 자지를 만졌겠다 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었다가 수업 종이 울리는 것과 동시에 사라졌다.
오전 수업만 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모두들 이삿짐을 싸느라 분주했다. 나는 남자라서 음식을 만드는 데에는 자동적으로 제외가 되었지만, 나는 집안에 하나밖에 없는 남자였기에 이삿짐을 싸는 데에는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손을 걷어붙여야 했다.
엄마는 1년에 한 번씩 이사를 다니는 것이 귀찮아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다시 변두리 동네 우리집에 돌아가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다. 맹자 엄마를 닮으려 했던 엄마가 변두리 동네를 떠난 지 만 2년 1개월 만에 다시 귀환했다.
트럭에 짐과 함께 실려 엄마 소유의 집에 도착해서, 이삿짐센터 아저씨들과 함께 큰 짐을 내려놓고 대충 가구들이 제자리를 잡았을 때, 나는 윤상호 선생님의 집으로 달려갔다. 6학년 말에 한 번 보고 처음이었다. 그동안 한 번도 만나지 못했어도 내가 찾아가기만 하면 언제든 만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그곳에 살고 있지 않았다. 월요일에 전학 수속을 마치고 첫 등교를 했던 날, 수업이 끝나자마자 내가 다녔던 국민학교로 선생님을 찾아갔지만 거기에도 선생님은 없었다.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간 것이었다. 중학생이었던 내가 쉽게 찾아갈 수 없는 다른 지역의 학교였다.
귀룡이도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가고 없었다. 원래 살았던 동네로 돌아가야겠다는 엄마의 말에 선생님과 귀룡이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설렘으로 며칠을 들떠 있었는데, 이 들뜬 마음으로 창렬이에 대한 아쉬움을 누를 수 있었는데, 들뜬 마음이 사라진 곳에 허망함과 상실감이 자리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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