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아라 황석호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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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전학을 간 중학교에는 내가 다녔던 국민학교 남학생들이 모두 다니고 있었기에 아는 얼굴이 많아 적응을 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었지만 그토록 보고 싶던 선생님을 다시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나를 지배하고 있어서 힘든 나날을 보냈다. 전학을 가자마자 한 달도 안 되어 갔던 수학여행이 하나도 재미가 없고, 그저 하루하루 가방만 집에서 학교로, 학교에서 집으로 옮겨 놓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음악시간이었다. 노래를 배우기 전에 먼저 계이름을 읽고, 한 사람이 대표로 가사 대신 계이름으로 선창을 하면 모두 따라하는 방식으로 수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늘 대표를 맡아서 하던 학생이 계이름을 버벅거렸다. 악보 맨처음 높은음자리표 뒤에 플랫이 여러 개 붙고, 중간중간 음표에 임시표도 붙어 있어서 그런 것 같았다. 선생님도 학생도 난감해하던 상황에 한 학생이 내 이름을 거론했다. 5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학생이었다.

  선생님은 반신반의한 눈빛으로 나에게 해보라고 시켰고, 나는 일어나서 정확한 계이름으로 노래를 불렀다. 5학년 때 바이엘을 배우면서 악보 보는 법도 나름 열심히 배웠으므로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게다가 변성기의 터널을 무사히 지나 평생을 안고 갈 목소리가 장착되었다는 것을 전학 오기 전에 확인도 했으니, 나는 기쁜 마음으로 속이 후련하게 노래를 불렀다.


  수업이 모두 끝나고 청소를 하는 시간에 음악선생님이 나에게 직접 찾아와 청소가 끝나면 음악실로 오라고 통보를 했다. 합창 연습이었다. 나는 바리톤 파트에 배정이 되었다. 5학년 때 이후로 3년 만에 합창단에 소속이 되어 내 기분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높은 톤의 합창이 아닌, 모두 변성기가 지난 남자들만으로 이루어진 합창단이었기에 묵직하게 깔리는 소리는 웅장하기까지 해서 내 심장을 쿵쿵 두드리기에 충분했다.

  전학을 와서 재미없는 시간을 보내던 나에게 합창 연습은 새로운 활력소가 되었다. 어서 수업이 끝나고 합창 연습 시간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남자들이 이루어내는 화음의 세계는 나를 천국에 데려다 놓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내 인생에 있어서 나를 규정짓는 무언가를 깨달은 지점이 있다면 국민학교 5학년 때와 중학교 2학년 때라고 할 수가 있다.

  계속 말해왔듯이 국민학교 5학년은 내가 노래를 하는 것에 재미를 붙인 시기라면, 중학교 2학년은 거기에 더해 문학에 눈을 뜬 시기였다. 글짓기를 하면 상을 휩쓸었고, 한글날 기념 백일장에서도 3학년 형들을 제치고 장원을 먹었다. 국어선생님의 눈에 띄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국어선생님이 지도교사로 있는 독서회 활동도 하게 되어 자연스레 문학에 눈을 뜨게 되었다.

  아들이 나 하나밖에 없는 집안 분위기에서, 나는 식구들이 그어 준 길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고 걸어갔으므로 언제나 모범생 소리를 들었고, 당연히 애.비 없는 자식이라는 소리는 들을 일이 전혀 없었다. 노래를 부르고, 책을 읽으면서 아무 탈이 없는 중학교 시절을 보냈다.




  이렇게 계속 무탈한 삶을 살았으면 오죽이나 좋았으랴만 인생이란 탄탄대로만 걸을 수는 없는 것이어서, 남들은 사춘기의 고민과 방황을 중학교 시절에 끝내고, 고등학교 시절에는 공부에만 전념을 하는데 나는 그러지를 못했다. 이미 육체적 성숙은 중학교 시절에 모두 갖추고, 남들은 상상도 못하는 성적 정체성을 바탕으로 어린 시절에 섹스 행각도 벌였던 나였지만 그와 반대로 정신적 성숙은 너무나 더뎌서 사춘기가 고등학교 때 와 버렸다.

  식구들이 그어준 길이 아닌 샛길로 들어가면 정말 재미난 일이 많다는 것을 그때서야 깨달았고, 거기에 빠져 허우적댔다. 내가 배정을 받은 고등학교가 쓰레기 같았던 것도 내가 방황을 하는 것에 한몫을 담당하지 않았나 싶다. 인정 욕구가 강했던 내 성격도 크게 작용을 했다.


  항상 선생님들의 인정을 받으며 국민학교, 중학교 9년을 살아왔던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투명인간으로 전락해 버렸다.

  중학교 입학을 하면서 공부에 적응을 못해 1학년 1학기 첫 시험 성적이 엉망이었던 것처럼 고등학교에 입학을 해서도 1학년 1학기 첫 시험이 엉망이었다. 연합고사를 마치고 고등학교 진학을 하기 전에 다른 학생들은 수학의 정석에 성문기본영어나 맨투맨영어 기본편은 다 학습을 하고 들어왔는데, 나는 전혀 그러지를 못해서 수업을 따라가기가 벅찼기 때문이었다.

  중학교 때의 전교등수보다 못한 등수가 반등수로 나와 있는 성적표를 받아들고 충격을 받아, 그 다음 시험은 정말 열심히 공부를 해서 어마어마한 성적 향상을 이뤘는데, 오히려 그것이 나에게 독이 되었다. 담임선생님에게 불려가서 칭찬은커녕 의심을 받았다. 너무나 억울했다.

  게다가 중학교 때 음악선생님으로부터 바리톤을 하면 성공하겠다는 말까지 들었던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와서 치른 첫 가창 실기시험에서 꼴찌 점수를 받았다. 뭐가 문제인지 항의를 했다가 교사의 절대 권위에 반기를 들었다는 이유로 교무실 문 앞에 꿇어앉아 있기도 했다. 문을 드나드는 선생들로부터 싸대기 세례를 받았고, 싸가지 없는 새끼로 낙인이 찍혔다.


  학교에 다니기가 싫었다. 그렇다고 자퇴를 할 용기는 없어서 꾸역꾸역 무거운 가방에 도시락 두 개를 싸들고 학교를 찾아가서 시간을 때웠다. 당연히 성적은 바닥을 쳤지만 그래도 걱정을 하지 않은 것은 나는 하면 된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야간 자율학습을 빠지고 학교 담을 넘어 밤거리를 배회하다 자율학습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들어가기가 일쑤였고, 집에서 식구들과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집은 그저 잠시 몸을 뉘어 잠을 자고 나오는 공간에 불과했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이던 어느 날, 정확히 어린이날, 엄마와 누나들은 조카를 보러 큰누나 집에 가고 나 혼자 집에 있던 날이었다. 나가기도 귀찮고, 할 일도 없어서 TV를 켜고 이리저리 채널을 돌렸다. 어린이날답게 어린이들이 나와 동요를 부르는 프로그램이 방송되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떠올라 채널을 고정하고 TV 화면을 응시했다.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학생에게 카메라의 초점이 맞춰졌지만 간간이 객석이나 참가자들이 차례를 기다리는 대기석에도 카메라가 돌아갔다. 스치듯 지나가는 화면에서 나는 누군가를 발견하고 숨이 막혀 버렸다. 윤상호 선생님이었다. 분명했다. 몇 달을 함께 살기까지 했으니 내가 선생님을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모시적삼은 아니었지만 단정하게 차려 입은 개량한복도 선생님이라는 것을 증명해줬다.


  선생님의 옆에는 통통하게 생겨서 한눈에 봐도 노래를 잘할 것 같은 여학생이 앉아 있었다. 조금 의외였다. 노래를 잘하는 남학생을 못 찾은 듯싶었다. 만약 선생님과 내가 함께 지낼 때 이런 프로그램이 있었다면 선생님의 옆자리는 내가 아니었을까 상상을 했다. 상상만으로도 즐거웠다.

  선생님의 차례가 되기를 간절히 기다렸으나 마지막 참가자가 노래를 부를 때까지 선생님과 학생은 나오지 않았다. 내가 방송을 보기 전에 노래를 부른 것 같았다. 축하공연이 이어지고 시상식 시간이 되었다. 나는 선생님과 학생을 마음속으로 응원하며 계속 지켜봤다. 장려상부터 발표가 되었다. 장려상으로 호명이 된 학생은 옆에 앉아 있는 선생님과 함께 무대로 나가 상을 받았다. 자막으로 학생의 이름과 소속된 학교, 학년이 나왔다.

  선생님이 상을 타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상도 상이었지만 자막으로 나오는 학교가 더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당장에라도 달려가서 선생님을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우수상, 최우수상을 발표할 때까지 선생님이 데리고 나온 학생의 이름이 불리지 않았다. 마지막 대상을 발표할 때는 대기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카메라가 풀샷으로 잡았다. 긴장되는 순간이었지만 선생님의 표정은 너무나 담담했다. 분명 선생님은 상 욕심이 없었을 터였다.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학생을 고르고, 연습을 하는 과정에서 이미 즐거움을 누린 것으로 충분히 만족할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달랐다. 선생님은 꼭 대상을 타야만 했다. 그래야 내가 선생님이 소속된 학교를 알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대기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 모두 긴장된 표정이었지만 선생님은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편안하게 앉아 있었다. 내가 긴장이 되고 조바심이 났다. TV에서 흘러나오는 두구두구두구 하는 소리는 내 심장 소리와 같았다.


  대상은 선생님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로 돌아갔다. 대상을 탄 학생의 앵콜송이 나오면서 방송이 끝났다. 요즘 같았으면 인터넷 홈페이지에 들어가 참가자들의 명단을 확인하고 연락을 취해볼 수도 있으련만, 내가 고등학교 2학년이던 1987년 5월에는 방송이 끝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혹시나 재방송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일주일 넘게 매일 신문을 사서 TV 프로그램 편성표를 확인했지만 어린이날 특별방송이라 재방송도 없었다. 내 희망의 마지막 끈이 떨어진 셈이었다.


  나의 사춘기적 방황은 더욱 심화되었다. 집에서는 말도 안 하고, 조금만 거슬리면 소리를 빽빽 질렀다.

  이런 나를 집 식구들은 이해를 못했다. 나도 답답했다. 내 방황을 붙잡아줄 사람이 간절히 필요했지만 여자들로만 구성된 집식구들은 남자인 나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아버지의 부재를 느꼈다. 내가 믿고 따를 수 있는 존재가 나에게는 없었다. 엄마를 비롯한 누나들은 커버린 나를 보호해주기는커녕 이해도 못하는 존재였기에 내 믿음은 모두 사라졌다.

  정말 나는 그때 아버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형이라도 있었으면 답답한 마음을 토로하거나, 남자들끼리 통하는 말로 조언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전혀 그러지를 못했으니 내 발걸음은 집이 아닌 다른 곳으로 향했다. 윤상호 선생님이 간절하게 그리웠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다행히 고3이 되면서부터 끝이 보이지 않았던 내 방황도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고3이라는 타이틀은 내 스스로도 정신을 차릴 수 있는 좋은 약이 되었다. 그러나 역시 쓰레기 같은 고등학교 생활은 여전히 이어졌으므로 쉽사리 공부 속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게다가 2년 동안 방황을 하느라 학습 결함이 누적이 되어 눈덩이처럼 불어 있었기에 그것을 메우는 데는 1년으로 부족했다.


  너무 힘들어서 죽고만 싶었던 고등학교 3년이었다. 그래도 내가 죽지 않고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역시나 노래였다. 그때는 노래방 같은 데도 없었던 때이니 노래를 부르는 대신 많이 들었다. 둘째 누나가 사놓고 방치해 두었던 삼성 마이마이 카세트는 내 차지가 되어서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이어폰을 귀에 꼽고 살았다. 있는 집 자식들이 들고 다니던 소니 워크맨이나 아이와, 파나소닉 등의 미니 카세트에 비하면 탱크 같이 크고 투박한 것이긴 해도 나에게는 감지덕지였다.

  가요든 팝송이든 장르를 가리지 않고 이것저것을 마구마구 들었다. 한국 노래 들을 게 뭐가 있냐고 팝송만 고집하는 친구도 있었지만 나는 우리나라 노래가 더 듣기 좋았다. 가사 때문이었다. 노래의 가사에 담긴 감성이 곧바로 전달되었기에 방황으로 점철된 10대 후반의 나를 더욱 붙잡았다.


  쓰레기 같은 학교에, 쓰레기 같은 선생들이 즐비했고, 학교 선배 중에 쓰레기 같은 사람이 쓰레기 같은 정당의 국회의원이 되어 이런저런 방송에 나와 쓰레기 같은이 아니라 쓰레기 발언을 내뱉고 있지만, 그때 당시 동급생들은 그렇지가 않아서 모두들 순박하게 자신들의 욕망을 책받침으로 표현했다.

  대부분의 고등학교 남학생들이 그러했겠지만 우리반에서도 크게 두 파로 나뉘었다. 김혜수와 이상아였다. 미모로 보면 최수지도 밀리지 않았지만 우리들에게는 조금 올드한 느낌이어서 같은 또래였던 김혜수와 이상아가 책받침 모델의 대세였다. 동갑의 나이여서인지 김혜수의 책받침이 더 많았는데, 고3에 올라가면서부터는 특이하게 배우가 아닌 가수가 책받침 대열에 합류했다. 이지연이었다. 정말 그 인기는 말할 것이 없었다. 물론 나는 가수가 아닌 노래를 좋아했다.


https://youtu.be/hh_JZpRABes 

이지연 ‘ 그 이유가 내겐 아픔이었네’


  이지연의 맑고 고운 음색은, 10대 후반의 뿜뿜대는 에너지를 발산하지 못하고 학교에 갇혀 살아야 하는 우리들을 촉촉하게 적셔주며 위로했다. 특히나 나는 ‘내게 손짓하던 가을비도 할 말 잃어 차가운 눈동자에 줄을 댄다’ 이 가사에 삘을 받았다. 눈물을 이렇게도 표현하는구나 싶어 이 노래를 엄청 좋아했는데, 내 친구 현준이는 심드렁했다. 백두산 유현상이 돈독이 올라 기집애 하나 앞세워 돈벌이를 한다고 폄하했다.

  모두 듣는 귀가 다르고, 입장 차이가 있는 것이니 나는 현준이가 그러거나 말거나 이 노래를 반복해서 들었다. 제목과 가사에 잊어야 하는 그 이유가 아픔이라고 말하면서 정작 그 이유가 무엇인지 나오지 않지만 오히려 그래서 내 상상력을 자극했다. 내 상상 속에서 잊어야 하는 이유는 노래를 들을 때마다 달라졌고, 내가 상상하는 이유들은 모두 아픔이고 슬픔이었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80년대 후반에는 지금 들어도 눈물이 날 것 같은 노래들이 많이 발표되어서 감수성이 폭발하던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귀에서 이어폰을 빼려야 뺄 수가 없었다.

  내 마이마이에는 참 많은 테이프들이 꽂혔다. 그 중에서 이문세의 테이프가 가장 많이 꽂혀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3집이, 2학년 때는 4집이 꽂혀서 늘어질 때까지 내 귀를 호강시켜 줬고, 고등학교 3학년 가을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5집이 나와서 겨우 방황을 접고 학력고사 공부에 매진하던 나를 공부가 아닌 노래에 잠 못 들게 만들었다.

  이문세와 이영훈 콤비가 만들어낸 이 앨범 3개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앨범은 3집이었다. 비닐봉지에 묶여 냉동실에 들어갔다 나오기도 하고, 한 앨범을 시차를 두고 또 구매한 처음이자 마지막 앨범이기도 할 만큼 무진장 들었다. B면 첫 번째 노래 ‘휘파람’과 두 번째 노래 ‘소녀’는 지금도 노래방에서 자주 부르는 내 애창곡이다. 금영노래방은 휘파람이 3294번, 소녀가 3674번, 태진노래방은 휘파람이 2031번, 소녀가 332번이라고 외울 정도로 많이 불렀다.


  이문세의 노래들이 대중적이고 듣기가 좋아서 많이많이 들었던 것이라면, 내가 노래를 듣고 울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려준 노래도 내가 고등학생이던 시절에 듣던 노래였다. 감히 노래를 망칠까봐 노래방에서 잘 부르지도 않는 노래.... 들국화 1집의 ‘행진’....


https://youtu.be/ByFPlUo2q84 

들국화, '행진'


  처음 행진을 들었을 때의 감동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사랑 타령에 지친 나에게 들국화의 노래들은 한 줄기 빛과 같은 것이었다. 피아노 전주 부분도 좋았고, 특히 후렴 부분의 드럼 소리는 행진을 하는 발소리 같은 느낌이어서 내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행진’뿐만이 아니라 ‘그것만이 내 세상’은 또 나를 얼마나 울렸던가.


  내가 밴드 음악에 처음으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이 들국화의 노래라면, 나에게 처음으로 들국화의 노래를 들려준 이가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 바로 그 친구는 나처럼 학교생활에 전혀 관심이 없어서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 그리고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엎드려서 음악만 듣던 현준이었다. 앞서 이지연의 노래를 폄하했다던 그 친구 맞다. 나 역시도 노래만 들었기에 서로 죽이 잘 맞았다고 볼 수 있는데, 자율학습 시간에 둘이 책상에 수학의 정석과 성문종합영어를 포개 놓고 머리를 대고 누워 있다가 눈이 맞은 친구였다.

  건전지가 다 되어 마이마이가 돌아가지 않아 답답해하고 있을 때, 현준이는 아무 말 없이 이어폰 하나를 뽑아 나에게 건넸고, 나는 그것을 별 생각 없이 귀에 꽂았다. 그때 나온 노래가 바로 들국화의 ‘행진’이었다.


  내가 아버지나 형이 없어서 방황을 했다면 현준이는 나와 전혀 반대의 이유, 그러니까 아버지와 형 때문에 방황을 했다. 현준이의 형은 서울대에 다니고 있었다. 공부에는 별 취미가 없는 현준이였으니 뭐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아도 현준이가 집에서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알 만하지 않는가. 집뿐만이 아니라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고등학교 선배이기도 한 현준이의 형은 학교 선생들도 다 아는 사람이어서, 현준이는 자기 이름보다 현성이 동생으로 더 많이 불렸고, 같은 잘못을 해도 현준이는 ‘형 반만이라도 좀 해라’라는 잔소리를 덤으로 더 들었다.

  현준이는 나보다 더 방황의 강도가 높았는지 더욱 음악의 세계에 빠져 들어 있었고, 나보다 훨씬 더 노래를 듣는 것에 집착이 강했다. 내가 행진을 듣고 눈물이 맺히는 것을 본 현준이는 다음날 테이프에 들국화의 노래들을 모두 녹음을 해서 나에게 건넸다. 있는 집 자식이었던 현준이는 LP를 사 모으는 게 취미였는데, 학교에서는 LP를 들을 수가 없으니 테이프에 녹음을 해서 소니 워크맨으로 들었다. 덕분에 나는 현준이가 녹음을 해 주는 테이프를 선물로 받아 다양한 노래들을 들었다. 딥 퍼플, 주다스 프리스트, 오지 오스본, 메탈리카 등을 내가 알고 있는 것도 현준이 때문이었다.

  사운드는 좋은데, 와 닿지를 않는다는 내 말에 현준이가 또 녹음을 해 준 밴드가 부활과 시나위였다. 밴드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싹튼 시기가 바로 이때였다.


  노래를 듣는 것 말고 또 나를 이승에 붙잡아 둔 것은 책이었다. 수업 시간이 아닌 때에 노래를 들었다면 수업 시간에는 책을 읽었다. 이청준, 황석영, 박완서, 이문구, 윤흥길 등 한국문학사에 길이 남을 작가들의 작품은 고등학교 시절에 다 읽었다. 특히 내가 빠져 살았던 작가는 이문열이었다. 지금에야 이가 갈리는 작가지만 어린 나이에 읽었던 이문열의 소설들은 나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아무튼 나는 노래와 소설에 정신이 팔려 늦게 찾아온 사춘기 시절을 그나마 큰 사고를 치지 않고 견뎌낼 수 있었다. 내가 노래와 문학의 늪에 빠져 허우적댈 수 있도록 적극 장려해 준 XXX고등학교 선생들에게 이 글을 통해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아무리 괴로워도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라 내 고등학교 3년도 흘러갔다. 학력고사를 기점으로 학교생활도 실질적으로 끝이어서 대학 합격의 여부와 상관없이 마음은 홀가분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겨울방학에 들어갔으니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매일매일 TV 앞에 앉아 있었다.


  다시 국민학교 5학년이던 1981년으로 살짝 돌아가 보면, 내가 윤상호 선생님과 함께 살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일본을 제치고 우리나라에서 올림픽을 유치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88 올림픽이었다.

  올림픽을 유치하자마자 우리 반 모두는 88 올림픽에 관련된 포스터를 그려야 했고, 표어를 만들어 제출해야 했다. 어린애들이 유치하게 그리고 만든 포스터와 표어가 왜, 어디에 쓰인 것인지 지금도 알 수 없지만 하루 종일 교실에서 포스터를 그렸다. 윤상호 선생님은 우리가 포스터를 그리는 것을 지켜보다가 애들한테 쓸데없는 거나 시킨다고 투덜댔다. 선생님은 할 일이 없어 지겨웠는지 포스터 물감이 다 마른 그림을 내가 걷을 때까지 피아노를 쳤다.

  아무튼 그 당시 호돌이 인형 하나쯤은 어느 집에든 다 있었고, 여기를 가도 88, 저기를 가도 88, 어디를 가나 88이었다. 뭘 해도 88, 해야 하는 이유도 88,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도 88이었던 내 학창 시절이었다. 가장 잘 팔리는 담배까지 88이었으니 더 말해 뭐하나 싶다.

  도대체 1988년이 오기나 하는 걸까 하는 생각으로 살다보니 내 고등학교 끝물에 1988년이 걸렸고, 고3 막바지에 올림픽이 끝이 났다.


  내 방황의 종지부를 찍었던 1988년. 그런 1988년을 일주일 남겨 둔 12월 24일 토요일이었다. 내가 이날을 요일까지 기억하는 것은 나에게 어쩌면 운명과도 같은 날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날 내 우상을 만났다. TV로 방영된 1988년 대학가요제에서였다.

  1985년에 강변가요제에서 남녀 듀엣으로 나와 부른 ‘J에게’가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같이 나왔던 남자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이선희 혼자 종횡무진 활약하는 것을 보며 그때부터 강변가요제와 대학가요제는 챙겨 보는 프로그램 중의 하나가 되었다. 내가 살던 지방 출신들이 참가하여 좋은 노래들을 불러서 더욱 관심이 갔다. 이정석의 ‘첫눈이 온다구요’는 대상을 받은 곡보다 더 인기가 많아 나도 테이프에 녹음을 해놓고 열심히 들었다.

  게다가 1988년은 강변가요제에서 대상과 금상을 탄 ‘담다디’와 ‘슬픈 그림 같은 사랑’ 이 두 곡이 엄청난 인기몰이를 한 터라, 그 열풍이 미처 가라앉지 않은 연말에 열린 대학가요제여서 나는 시작 전부터 TV 앞에 앉아 기다렸다. 대학 합격 발표가 아직 되지 않아 정말 마음 편하게 시청을 했다.


  지금껏 그래왔듯이 또 마음을 울리는 좋은 노래들이 나올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시청을 하는데, 좀 그랬다. 치열한 예심을 뚫고 나온 노래들이니 뭐 적당히 괜찮은 곡들이 이어졌다. 대금 연주자를 대동한 곡이 좀 내 관심을 끌었으나 다들 그저 그랬다. 살짝 졸음이 오려고 할 정도였다. 저 노래들 중에 대상도 있고, 금상도 있겠거니 생각을 하니 이번 대학가요제는 좀 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게 그렇게 여러 노래들이 지나가고 마지막 참가자가 나왔을 때도 그저 그러려니 했다. 작은 체구에 희여멀건한 동안의 남학생이 나와 엄마 보고 싶다고 하는 인터뷰를 볼 때도 쟤 뭐야 싶었다. 인터뷰가 끝나고 그룹명 무한궤도에 자막으로 ‘괄호 열고 서울대, 연세대, 서강대 괄호 닫고’ 등의 학교가 나왔을 때도 학벌은 좋네 이것뿐이었다.


https://youtu.be/SVxiqGiLMCM 

무한궤도, ‘그대에게’ - 1988 대학가요제 LIVE


  그런데.... 그런데.... 곧이어 빠바바바바바바밤빰 빠바바밤빠밤~~ 이렇게 전주가 나오면서 약간 졸음에 겨워하던 내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것이 비단 나뿐만이었을까. 삶이 끝날 때까지 언제나 사랑을 하겠다고 외치는 노래를 들으며 대상이네 싶었다. TV로 보던 나도 그랬는데, 현장에서 직관을 하던 관객들은 오죽 했을까. 수미상관 격으로 전주의 멜로디가 다시 후반에 나올 때 관객들의 박수 소리가 달랐다. 그리고 반주 없이 보컬 혼자서 노래를 부를 때는 거짓말 같이 박수 소리가 잦아 들고 모두가 경청하는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그렇게 하라고 시켜도 될까 싶을 정도로 조용했다. 그리고 모든 노래가 끝나고 박수 소리와 함께 환호성을 치는 소리가 TV 밖으로 새어 나왔다.

  시상식은 보나마나였다. 대상을 발표하기 전에 객석에서 16번을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16번을 외쳤다. 그리고 사회를 맡은 이택림 씨도 16번을 호명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이때는 노래를 부르던 사람이 신해철이라는 것도 몰랐고, 내 우상이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대학가요제가 끝나고 며칠 뒤 나는 대학 입시에서 낙방을 했다. 공부를 못 했으니, 아니 안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추운 거리를 방황하다 저녁 무렵 집에 돌아왔더니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수히 쏟아지는 잔소리였다. 아들 하나 있는 거 대학 보내겠다고 모두 희생을 했는데, 떨어지면 어떡하느냐고 엄청 쏟아 부었다.

  모두 맞는 말이었다. 누나들 모두 나 때문에 실업계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취업 전선에 나서야 했으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잔소리만 있을 뿐 그 어떤 위로도 없었다. 어차피 기대도 안 했으니 아쉬울 것도 없었다. 오히려 나에게 확고한 목표 하나가 섰다. 이 집을 떠나야 한다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때까지 내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가 이 집을 떠나 선생님과 함께 살 때였으니, 내 행복을 위해서는 이 집을 떠나는 것이 정답이었다.


  후기 대학 준비를 위해 곧바로 도서관을 찾아 공부를 했다. 사놓기만 하고 풀지 않았던 모의고사 문제집을 붙잡고 열심히 풀었다. 목표가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이 집을 떠나기 위해서는 특별시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하는 것만이 답이었기에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하지만 후기 대학 시험을 준비하는 기간은 너무나 짧았고, 특별시에 있는 후기 대학에 원서를 넣겠다고 우기는 나에게 집 식구들로부터 돌아온 대답은 미쳤냐였다. 결국 나는 원서도 못 넣었다. 대신 졸업을 하고 난 바로 다음날부터 재수학원에 다녔다. 그나마 내가 고3 때 정신을 차리고 책상에 좀 앉아 있었기에, 떨어지긴 했지만 지방 거점 국립대에 원서를 넣었던 것이 엄마를 비롯한 집 식구들에게 약간의 희망을 안겨준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 희망은 나에게도 전달이 되어 내 목표를 더욱 굳건히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게다가 어릴 때부터 내가 늘 비교를 당했던 작은 외삼촌의 막내아들도 나와 똑같은 학원에서 재수를 했으니, 내 스스로 사촌과 비교를 해가며 열심히 공부를 했다. 오로지 학력고사를 위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진도는 내가 새로운 마음으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발판을 마련해줬고, 꼭 특별시에 있는 대학에 합격을 해서 집을 떠나야 한다는 내 목표는 나를 엉덩이가 짓무르도록 의자에 붙들어 맸다.


  내 입으로 말하기는 좀 그렇긴 하지만 나는 안 해서 그렇지 그렇게 못 하는 것은 아니었기에 재수를 하는 동안 모의고사 성적이 고3 때와는 확연히 달라졌다. 쓰레기 같던 고등학교 선생들을 벗어나 입시 전문 강사들의 수업을 듣고, 야간 자율학습을 밥 먹듯 빼먹던 때와는 달리 밤늦게까지 학원에 남아 공부를 했으니 당연한 일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열심히 재수 생활을 하다 대학 원서를 접수하는 기간에 나는 서점에서 특별시에 있는 대학교의 원서를 샀다. 집식구들은 당연히 고3 때처럼 지방 거점 국립대에 원서를 넣은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나는 끝까지 입을 닫았다. 어차피 나중에 알게 될 것이었으므로 국립대 보다 낫다고 평가될 만한 학교를 골라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점수가 낮은 과를 택하는 수밖에 없었다. 문과 남학생들이 선호하는 법대와 상대는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고른 것이 국문과였다. 문학을 좋아했으니 들어가서 공부를 하는 데에도 무리가 없을 듯도 했다.

  출신 고등학교에 가서 원서를 써야 했으므로 가기 싫은 것을 억지로 참으며 찾아가 내신성적이 나와 있는 석차연명부를 발부받아 원서 봉투에 넣고 밀봉을 했다. 그리고 우체국으로 달려가 내가 가려는 학교에 우편으로 보냈다. 그리고 바로 학원으로 다시 돌아가 열심히 공부를 했다. 목표가 더욱 분명해졌기 때문이었다.


  내가 대학입시를 치르던 때는 선지원 후시험 제도여서 대학 시험을 내가 지원한 학교에 가서 치러야 했으므로 학력고사를 치르는 전날부터 나는 특별시에 가 있어야했다. 그러려면 기차표가 있어야 했기에 나는 학력고사 일주일 전에 집 식구들에게 수험표를 보여줬다.

  당연히 난리가 났지만 어쩔 수가 없고, 돌이킬 수도 없는 일이었다. 기차표를 예매하고, 학력고사 전날에 올라가 친척집에 머물며 시험을 치고 면접을 봤다. 그리고 다시 내려와 합격 발표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합격이었다. 시험을 좀 잘 친 것 같아 내심 기대하고 있었는데, 역시나 점수가 잘 나왔는지 장학생 명단에도 올라 있었다. 다행이었다.


  그렇게 나는 목표를 달성했고, 십여 년 만에 다시 내가 태어난 특별시로의 입성을 앞두고 있었다. 내가 특별시에 살았을 때는 아무도 살지 않았던 외갓집 식구들이 제법 많이 이사를 해서 특별시민이 되었던 터라 엄마는 외갓집을 접촉하며 내가 살 곳을 마련하려 했지만 나는 당당히 거부를 했다. 명절에도 가기 싫어하던 외갓집을 살기 위해 들어간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엄마는 모든 지원을 끊겠다고 협박을 했지만 나는 절대로 굴하지 않았다. 장학금으로 학비도 상당 부분 충당되었고, 다행히 지방 출신에 장학생이었으니 기숙사에 쉽게 들어갈 수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앞으로 험난한 대학 생활이 예상되었으나 나는 아무래도 좋았다. 대학에도 붙었고, 집을 탈출했고, 게다가 특별시에서 살게 되었으니 나는 완전한 자유인이었다.


  그것이 1990년 2월 말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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