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여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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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가에서 햇볕이 사라지기 시작한 늦은 오후였다.
미리 예약해 놓은 카페의 창가의 자리에 앉아 재훈은 들고 있던 가방을 옆에 의자 위에 올려놓았다.
창 밖에 지나치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자리에서 슬며시 일어선 그는 손을 올려 창의 블라인드를 적당히 내렸다. 그리고 다시 자리에 앉기 전 카페 안을 둘러보았다.
갈 곳 없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카페안은 그들이 벌이는 수다로 어수선해 보였다.
그들에게서 시선을 돌려 다시 창밖을 지나치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주고 있던 재훈이 옆에 놓여있던 가방을 손에 들고 지퍼를 열었다.
검은색의 매끈한 다이어리를 손에 쥐었을 때 그가 주문한 음료가 준비되었다는 아르바이트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넉넉하게 일찍 출발한 덕분에 혜원과 만나기로 한 약속시간은 아직 30여분이나 남아 있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잔을 내려놓고 그는 그의 다이어리를 펼쳤다.
그는 사실 회사의 경영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느긋하게 회사일을 천천히 배워나가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부모님의 생각은 달랐다. 한시라도 빨리 자신들의 아들이 다른 주변인들의 눈에 능력있는 2세로 보이기를 바랬다. 그가 서른이 된 지난 해부터 갑작스럽게 조바심을 내기 시작하던 그의 부모님은, 특히 어머님은, 회사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시시콜콜 물어보시기 시작했으며 그가 대충 얼버무릴 때마다 날카로운 목소리로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며느리감으로서 그녀가 그렇게 기다리던 혜원이 돌아오자 어떻게든 결혼을 시키시려고 작정하신 것이었다.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20대를 적당히 즐겼고, 손하를 만나게 되어 남들 다 해보는 소위 말하는 연애라는 것도 해보았다.
20대는 그에게 마치 서핑을 타는 것과 같았다.
그렇게 아슬아슬한 파도타기의 스릴을 순간순간 즐겨왔고, 이제 30대가 된 자신은 다시 해안가의 나무 그늘에서 해먹에 누워 느긋하게 바닷바람을 즐기며 시원하고 향긋한 칵테일을 음미할 차례였다.
혜원과 적당히 만나고 적당히 관심을 보이면 되는 일이었다.
어짜피 자신이나 그녀나 상대방에 죽고 못 사는 사랑이라는 이유로 결혼하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아니란 것 쯤은 서로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것이 부모의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는 거래조건인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렇게 세상의 모든 것은 주고받는 것이다.
기브 앤 테이크. 부모와 자식간에도 당연히 존재하는 거래인 것이다.
그렇게 서로 타협하고 결혼하고 나서 서로 사적인 생활을 따로 즐기면서 가임기간에 적당히 섹스를 해 주면 적당히 아이도 한둘은 생기는 것이고 그렇게 인생은 흘러가는 것이다.
“뭐하냐?”
그렇게 느긋한 얼굴 표정으로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고 있는 그의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형우구나?”
고개를 돌려서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 한 후, 재훈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가 무슨 말을 꺼내기 전 걸음을 옮겨 형우는 그의 맞은편 자리에 슬그머니 앉았다.
“누구 기다리냐?”
여전히 싱글거리는 웃음을 지으면서 그가 재훈에게 물었다.
“아....”
“혹시....손하 오냐?”
그의 말에 재훈의 표정이 굳어졌다.
“주말이니 만나는 거 아니야?”
“야!‘
형우를 한번 노려보고는 그가 주위를 살폈다.
”괜찮아. 아무도 없다.“ 그런 그를 보고 형우가 피식 웃었다.
”너, 피차 무덤까지 서로 모르는 척 하기로 약속한 것 잊지마라.“
신경이 곤두선듯한 재훈의 말에 그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임마. 나도 눈치는 있다.“
”나, 혜원이 만난다.“ 여전히 얼굴에 해벌쭉한 웃음을 짓고 있는 그를 보고 표정을 가다듬으며 재훈이 말했다.
”여기저기서 얘기는 들었어.“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지하게 만나는 거야. 결혼할까 하고....“
”진짜?“ 그의 말에 놀랍다는 투로 형우가 재훈을 빤히 바라보았다.
”혜원이하고?“
”......“
”너 괜찮겠냐? 걔 감당하기 힘들텐데....“ 다시 표정에 웃음을 되찾으면서 형우가 물었다.
그런 그의 말에 재훈이 피식하고 웃었다.
”손하는?“ 그가 목소리를 낮추고 슬며시 물었다.
”걔도 알고 있냐?“
”헤어졌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재훈이 손을 뻗어 자신의 커피잔을 들었다.
”지난주에....“
”손하가 가만히 있었어?“
대답없이 재훈이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그래도 상처 많이 받았겠네. 너네 사귄지 꽤 오래 됐을텐데...“
”........“
뭐라고 다시 재훈이 입을 열기 전 형우가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애들하고 만나기로 해 놓고 나 이러고 있다.“ 재훈을 내려다보면서 그가 피식 웃었다.
”지나가다가 너 보여서 들른거야. 나중에 다시 보자.“
그가 손가락으로 재훈의 어깨를 툭툭 건드리고는 그의 등 뒤로 사라졌다.
”그래, 손하와 헤어졌다.“
그가 슬그머니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쉽게 헤어지는 이유로 그는 자신의 아버지의 건강을 팔았다.
큰 병을 앓고 있는 그의 아버지가 올해를 넘기지 못할 것 같다고 그는 둘러댔다.
사실, 그는 건강하고 정력적으로 생활하고 있는 그의 아버지를 손하에게는 오래전부터 지병이 있어서 삶을 힘들게 이어가는 사람처럼 묘사를 했었다.
하지만 사실 그는 그것을 그의 어머니에게 배웠다.
그가 늦게 집에 들어올때마다, 또는 외박을 할 듯 보이면 ’아빠가 아프시니 빨리 들어오라‘ 라는 그의 어머니의 전화를 받곤 했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여전히 살가웠던 부자 사이였던터라 열일을 마다하고 놀래서 집으로 달려온 그의 눈 앞에 자신보다도 더 건강한 모습으로 서재에서 신문을 읽고 있는 그의 아버지를 마주하곤 했다.
어이없어하는 그에게 그의 어머니는 태연한 얼굴로 ’방금전에 소화가 안된다고 하셔서 약을 드셨다‘는 말을 하셨다. 어이없어하는 그의 표정을 흘끗 보고는 그의 어머니는 커피잔을 들고 유유히 주방쪽으로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런일이 반복되자 그는 그렇게 양치기 소년이 된 어머니의 말을 믿지 않게 되었고, 더 이상 그의 어머니도 그를 집에 일찍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 그런 핑계는 대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가 손하 몰래 번개에서 만난 누군가와 바람을 필 때면 그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도 모르게 그의 아버지의 건강을 팔기 시작했다.
’조금 아프시다‘에서 시작한 거짓말은, 하룻밤 연락을 끊기 위해서 ’응급실에 실려가셨다‘ 라는 거짓말로 커지기 시작했고, 그의 집에 와 본적도 없고 그의 부모를 본적도 없는 손하는 처음부터 그저 그렇게 병약한 아버지를 모시고 살아가는 둘도 없는 효자인 재훈을 안쓰럽게 여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손하와 헤어지기 위해서 그는 마지막으로 그의 아버지를 시한부 환자로 만들어버렸다.
의사의 말에 의하면 올해를 넘기기 힘들겠다는 그의 아버지의 소원은 그가 자신이 원하는 며느릿감과 결혼을 하는 것이라고 그는 손하에게 말했다.
금방이라도 세상이 멸망할 듯 잔뜩 고뇌에 찬 얼굴에 금방이라도 눈물이 흘러내릴 듯 한 그의 눈빛과 표정은 그런 말을 듣고 있던 손하의 마음까지도 아프게 했다.
”너에게 죽을 죄를 짓는 거라는 걸 뻔히 알지만....어쩔수가 없어. 정말 미안해.“ 그가 고개를 숙이고 손바닥으로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그래서 어젯밤에 전화에 대고 그렇게 울었던 거야?“ 얼굴 가득 안쓰러움이 배어있는 채로 하염없이 손하가 그를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전부였는데.....내 정신적 지주였는데... 이제 돌아가시면 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가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너가 이렇게 힘든 줄도 모르고.....“ 그런 그를 보면서 손하는 더 사려깊지 못했던 자신을 탓했다.
”나는 그냥 항상 계획만 세웠어.“ 아랫입술을 깨물고 마치 죄를 지은 사람마냥 손하가 그를 다독였다.
”다음에 너를 만나면 무엇을 해야지. 나중에 너에게 어떻게 해줘야지 하고.......“
재훈은 여전히 고개를 속이고 고통스러운 듯, 가만히 있었다.
”그냥 너하고 같이 있는 순간순간 너에게 더 잘할 걸. 이럴줄 알았더라면.... 더 많이 안아주고, 더 많이 사랑한다고 말하고.. 더 오래 같이 있을 껄 그랬어.“
”.........“
”바보같이 미래에 같이 있을 시간이 많을 줄만 알고 계속 미루기만 했어. 네 사정도 모르고....“
재훈이 간신히 얼굴을 들고 팔을 뻗어 그런 손하의 손을 잡았다.
”정말 미안해. 아버님이 돌아가시면 그때 그 여자에게 사정얘기 다 밝히고 너에게....“
”그럼 그 여자는 또 어떻게 되는 건데....“
재훈의 손을 잡은 손에 손하가 힘을 주었다.
”그 여자 인생 또 망치면서 우리가 행복해질 리가 없잖아...“
”.......“
”여튼, 지금은 아버님 곁에서 병간호 잘 해드려. 그것만 생각해.“
다른 손을 뻗어 손하가 그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렇게 그는 손하와 헤어졌다.
그런 손하의 눈물젖은 얼굴을 기억하면서 재훈이 피식 하고 웃었다.
”진짜 순진한건지 아님 모자란건지.....“
”뭐가?’
그의 그런 말을 듣기라도 한 듯, 그런 그의 앞에서 그를 빤히 바라보면서 서 있는 혜원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커피한잔 마시고 좀 이르긴 하지만 저녁 먹으러 갈까? 내가 근사한데 예약 해 놨는데....”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희미한 웃음을 짓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냥, 저녁 대신에 술 한잔 하는거 어때? 내가 하고 싶은 말도 있는데......“
그렇게 묘한 표정으로 그녀가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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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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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끊어버릴 수도 없는 것이 인연이더라.
인연들 하나하나 잘 엮어서 흘러가는 소설이라서
참 좋다.
흥미로운 사연들이 인연들 사이에서 어떤 놀이를
하고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