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 (12) - 재영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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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서 뭐하세요?”
짜증 섞인, 어제 오늘 듣다 보니 어느덧 익숙해져 버린,
그러나 분명히 짜증 섞인 은석의 목소리가 재영의 귀에 꽂힌다.
*
“아… 깼어요?”
“거기서 뭐 하시나구요.”
아까 횡단보도에서도 느꼈지만, ‘고객’을 대할
때랑은 완전 다른 까칠함이네…
하긴… 역시 영업용 웃음이고 멘트였다 이거지. 당연한
건데 새삼 이걸 의식하는 나도 참.
“아, 잠깐만요, 은석 씨, 벽 치려는 건 알겠는데.”
“… 제 이름 부르지 말아주ㅅ…”
“… 운전자 연락처!”
“…?”
“운전자 연락처 때문에 왔어요. 아까 정신없어서, 내가 멋대로 운전자 연락처 받아놓고 제대로 은석 씨한테 주지도 않고.
그래서 그.. 톡으로라도 은석 씨한테 전달하려고 했는데 은석 씨가 그새 차단한 걸 어떡해요.”
말하면서 폰을 만지작거리다, 은석의 눈 앞에 아까 전송하려다 실패한 톡 화면을
들이댄다.
“…….”
“은석 씨 불편해하는 거 충분히 알겠고, 다른 의도 없어요. 그래도, 보험 처리는 해야죠.”
“…네, 신경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본명 부르지 말아 주시고, 이제 정말 괜찮으니 가 주세요.”
목소리 톤 자체는 한껏 누그러졌지만, 내용은 여전히 가시돋친 말.
“네, 그럼 갈게요. 몸조리 잘 하고, 여기 음료수 마셔요.”
“이것도 그냥 도로 가져가세요.”
은석이 손가락 끝으로 음료수 박스를 슬쩍 민다.
“아니, 이건 다른 뜻 아니고 순수하게 인간 대 인간으로 병문안이니까, 사온 것 뿐이에요 도대체….”
지금까지 고분고분 은석의 입장을 존중하던 재영이 갑자기 울컥한다.
“아니 근데 도대체 뭐가 그렇게 화가 나요? 내가 은석 씨 이름 부르는 거?”
‘그게 아니잖아 재영아. 네가 은석 씨 이름 부르기 전에도, 아까 횡단보도에서부터 얜 너한테 짜증냈어.
그리고 솔직히 뭐 때문인지도 대충 알잖아. 어린 애가 조금 피치 높인다고 똑같이 목소리
높여서 화내고 싶어 진짜로?’
이미 주워담을 수 없는 말과, 혀를 끌끌 차며 이 꼴을 볼 뿐인 재영의 속마음.
“내가 은석 씨 개인정보 아는 게 그렇게 신경 쓰여요? 자! 그럼 제 신상도 봐요. 이러면 돼요?”
지갑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은석에게 던진다. 그걸 또 반사적으로 주워서
보는 은석.
‘와… 박재영 제발… 너 지금 진짜 유치해. ‘자! 이럼 이제 너랑 나랑 쌤쌤이지, 됐지?’ 냐? 무슨 유치원생이냐?’
“아~ 조용히 좀 합시다 거. 싸울 거면 나가서 싸우든가 돈 주고 1인실 가든가.”
다른 침상의 환자 한 분이 부스스 몸을 일으키더니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한 마디 내뱉는다.
“아, 죄… 죄송합니다.”
“씨X, 사내새끼들끼리 사랑 싸움하는 것도 아니고…”
재영의 사과에 중얼거리며 다시 눕는 환자.
그러나 그 덕분인가, 둘 사이의 날선 긴장감은 갑자기 맥이 탁 풀렸다.
재영의 명함을 찬찬히 보던 은석이 갑자기 읊조리듯 말한다.
“… XX 회계법인? 회계사?”
“진짜 XX회계법인에서 일해요? 그 빅3 거기?”
? 뭐야 얘 갑자기 왜 이래… 이거 가지고 태도가 이렇게 바뀐다고?
아… CPA 준비생이라서 그런가? 현직자와의
만남 뭐 그런 거?
“? 네 맞는데요. 왜요.”
갑자기 생각에 잠긴 듯한 은석의 표정을 보며, 재영은 은근슬쩍 아까 그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는다.
‘아… 혹시 그럼 그런 건가? 수험공부하는
데 돈이 필요해서?
시급 1만원 짜리 알바하는 건 공부할 시간 뺏겨 아깝고,
이 일은 이동시간까지 포함시켜 시간당으로 환산해도 못해도 n만원은 되니까?
… 공부는 잘 하는데 집엔 돈이 없는, 뭐 그런 과인가?’
은석의 눈치 빠름이 두드러져서 그렇지, 재영도 절대 눈치가 없는 편은 아니다.
그랬으면 회사에서 일 잘한다는 소리를 들을 리가. 빠르게 머리를 굴려 추론하는
재영.
“그… 아까, 미안해요, 보려던 건 아닌데 에코백이 저렇게 벌어져 있어서,
커튼 치다가 봤는데 CPA 준비해요?”
… 말없이 끄덕이는 은석.
“지금 대학생이에요? 몇 살?”
“…졸업하고 1년 정도 회사 다니다가 연초에 퇴사하고 공부 시작해서 올해 시험 봤어요. 스물여덟이요.”
? 뭐야 갑자기 왜 이렇게 온순해졌어? 뭔데 이렇게 순순히 자기 얘기를 털어놓는데?
갑자기 흥미가 동한 재영. 이런저런 질문을 해 보기로 한다.
“스물여덟이면… 살짝 늦은 나이긴 한데 완전히 늦은 나이는 아니에요. 괜찮아요.
서른 넘어서 들어오는 사람도 있는데 뭐. 나도 스물여덟에 합격했어요.”
… 물론 그 전에 약 2년간 인고의 시간이 있었지만. 올해
초에 공부 시작했으면 빠르면 내년, 아니면 내후년?
늦은 나이는 맞지만 처음 몇 년 본인한테나 좀 콤플렉스지 연차 쌓이면 결국 실력 싸움이라 상관 없을 텐데.
‘하긴… 저 나이는… 20대 후반… 인생 길게 보면 아직 얼마든지 뭘 시작해도 되는 나이인데
아무래도 주위에 하나둘씩 자리잡기 시작하고… 더러는 후배들도 자기보다 빨리 잘 되는 걸
보면서…
불안한 게 당연하지… 나도 그랬고.’
아까 추측한 대로, 시험 준비 때문에 마사지 일을 하는 건지 등등을 물어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아직은 순서가 아니다. 기껏 마음의 문(?)을
열고 있는데 도로 다시 빗장을 걸어버릴지도.
“올해 시작했으면… 2차까지 봤어요?”
“네.”
“아 1차는 바로 붙은 거예요? 올해
시작했는데? 대단한데요 그건. 학교 다닐 때 경영학과였어요?”
“아뇨, … 문헌정보학과요.”
와… 진짜 갑자기 이쪽 관련된 질문을 하니까 술술술 자기 얘기를 하네. 무슨 심경의 변화지?
진짜 현직자의 조언을 구하려는 건가? 에이, 시험이랑
그건 완전 별개지. 내가 시험 본 게 6년 전이다.
요즘 시험 경향은 어떤지 1도 모르는데. 이
눈치 빠른 애가 그 정도도 못 헤아릴 리는 없고.
“아니, 그런데 어쩌다가 늦깎이로 회계사 시험준비를 시작할 생각을 했어요?”
“그냥… 회사에서 일하다가… 이런 식이면 커리어
쌓는 데 필연적으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겠다…
늦은 건 알지만 답은 전문직이다… 뭐 이런 생각이 들어서.”
음, 뭐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긴 한데… 그런 식이면 세상 사람들 죄다 전문직 해야지.
그치만, 어떤 마음인지는 알겠다. 문과
중에서도 비주류인 학과 출신에…
자세히는 몰라도 자기만의 어떤 계기가 있었겠지. … 이쯤에서 한 번 화제를 돌리자.
“그, 다 지난 얘기 뚱딴지 같은 소리긴 한데. 대충… 짐작하죠? 어제 제가 왜 그랬는지.”
“…전에 만났던 사람이 저랑 많이 닮았나요?”
하… 예상은 했지만 소름돋게 눈치가 빠른 애네.
“…. 네 맞아요. 미안해요. 주책맞게 그 순간에 그걸 겹쳐보고 그런 식으로 본인 자존심 상하게 내쫓듯이 보내서.”
“… 아니에요. 저라도 그랬을 거예요. 헤어진 사람이랑 돈 주고 그런 걸 한다고 생각하면…”
갑자기 은석이 곁눈질로 아까의 그 호모포비아 환자 쪽으로 눈짓을 하더니, 볼륨을
한껏 낮춰 대답한다.
“아 그… 나갈까요 은석 씨? 침대
옆에 이 목발 짚으면 움직일 수는 있어요?”
은석의 눈짓을 확인한 후 속삭이듯 숨죽여 묻는 재영, 그 질문에 말없이 끄덕이는 은석.
그에 부응하여, 재영은 최대한 소음에 주의하며 은석을 일으키고, 목발을 짚을 수 있게 돕는다.
*
“깁스는 얼마나 하고 있어야 한대요?”
“일주일 정도요. 심한 건 아니고, 근육이
놀란 거랑 오른쪽 다리뼈에 좀 금간 정도인데 금방 붙을 정도라나 봐요.
퇴원하고 나서는 재활치료 좀 받구요.”
어느덧 둘 사이에 아까의 날선 신경전은 사라진 지 오래다.
날이 더워서 밖에는 나가지 않고, 음료 자판기와 곳곳에 의자가 놓인 병원 라운지에서 쉬는
두 사람.
“아… 이 폭염에 깁스까지 하고 있으면 엄청 짜증날 텐데. 그나마 오래 안 하고 있어도 되는 게 다행이네요.
… 아참! 그 운전자랑 아직 통화 못 했죠. 나
화장실 좀 다녀올 동안 편하게 통화해요.”
재영은 자리를 비켜준다.
잠시 후, 화장실 다녀와 물 묻은 손을 털면서 다시 은석의 옆자리에 앉으며, 재영이 다시금 질문한다.
“공부는 평소에 그럼 어디서 하고 있어요?”
“아, 스터디카페요. XX역 쪽에.”
“아 그렇구나. 하긴 나 때랑 다르게 요즘 워낙 스터디카페가 우후죽순 생기긴 하더라. 집중 잘 돼요?”
“네 뭐… 저 하기 나름이죠.”
‘음… 이젠 슬쩍… 물어봐도 되지
않을까.’
“공부하는 데 시간 뺏길 것 같아서 그 일 하는 거예요?”
잠깐 머뭇거리다가, 이내 은석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아니 근데 1년밖에 일 안 했긴 하지만 그래도 일하면서 모아놓은 돈도, 퇴직금도 있지 않아요?”
“네 있는데요. 현실적으로 올해 한 방에 붙을 거라고는 기대 안 하고 내년까지
보고 있거든요.
올해 2차 보고 시험장에서 나올 때.. 직감에
떨어질 것 같기도 하고. 아직 결과 발표는 안 났지만.
그런데… 대충 지출 미리 계산해 보니까 지금 모아둔 돈으로는 좀 빠듯하겠더라고요.
그래서 아예 요 몇 달 내에만 바짝 벌고 그 후로는 손 씻고
돈 걱정 안 하면서 모아놓은 돈 까먹으면서 수험공부에만 집중하자… 뭐 그런 생각이었어요.”
“…집에다 손 벌리기 싫어서 그러는 거죠? 대학도 이미 졸업했겠다.”
역시 돌아오는 건 은석의 끄덕임.
하긴 그래… 대학 졸업하고 백수인데 집에 손 벌린다… 그거
자존심이 허락 안 하지. 부모님께 죄송하기도 하고.
이유야 뭐였든 일단 퇴사한 것도 본인의 결정이니까, 그에 대한 책임도 본인이 져야 한다. 당연한 생각이긴 해.
그래도 그렇지 아무리 그래도 그런… 일을.
아니 근데 그 스킬들은 도대체 어디서 배운 거야? 애무는 그렇다 치고 마사지는 야매가 아니던데.
아냐. 아직 이 질문도 물어볼 타이밍은 아니야.
“근데 그럴 바에야… 돈을 바짝 벌기보다 지출을 줄이는 게 낫지 않아요? 스터디카페 너무 비싸던데.
나도 저번에 뭐 공부할 게 있어서 잠깐 시간권만 끊고 하려니까 꽤 비싸서 놀랐던 기억이 있어서.
더군다나 수험 같이 긴 기간 끊으면 다달이 돈이 많이 깨지겠던데.”
“차라리 식비를 줄이지 그건 못 줄여요. 집에서 하면 집중이 안 되니까요.”
그건 그래. 집에서 공부한다는 사람 치고 집중 잘 되는 사람 손에 꼽지.
생각해보니 나도 한참 수험공부할 때 독서실에 붙박혀 있었지. 우리 땐 스터디카페가 아직
흔하지 않을 때라…
“…사실 집에서 공부하는 걸 시도해 보긴 했어요. 요새는 캠스터디란 게 있어서
집에서도
그룹에 가입해서 규칙 정하고 서로 공부하는 모습 캠으로 찍을 수 있거든요.
그런데 그것도 얼마든지 loophole(허점)이
있더라구요. 차라리 아는 사람들끼리면 확실히 눈치가 보일 텐데,
스터디 그룹이라 해도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남남이니까 풀어지면 또 풀어지게 돼서.
그렇다고 졸업한 데다 과도 문헌정보학과겠다, 주위에 아는 사람 중에 수험 준비하는 사람이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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