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 (14) - 은석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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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네…”
“그럼 그렇게 할래요?”
“계약조건은 어떻게 되죠?”
아… 이 철두철미함. 너무 좋아.
*
박재영. 따로 검색해 보니 가끔 방송에도 얼굴을 비추는, 신원은 확실한 사람이다.
물론 공인인 연예인들도 감언이설로 사정 있는 어린 애들 꼬드겨서 못된 짓을 하기도 하는 세상에,
방송으로 얼굴 몇 번 비추었을 뿐인 일반 직장인을 무턱대고 신용해야 할 이유는 없다
독서실 대신 자기 집으로 출근하라니? 너무나 수상한 제안이다.
… 그렇지만, 그냥 코웃음치고 지나가기엔 확실히 달콤한 제안이긴 해.
말한 대로 스터디카페 돈만 아껴도 지출이 확 줄어들걸. 그럼 이 일을 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도 맞아.
순수하게 서로 얼굴 보고 얘기한 시간, 다 합쳐도 채 몇 시간이 안 될 터인데,
이렇게 나오는 건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거나,
아니면 내가 본인 전 애인이랑 닮다 보니까 괜히 그 때의 감정이 자극되어서 뱉은 말에 불과할 터다.
(만약 충동적으로 한 말이라면, 차라리 빨리 쐐기를 박아서 이득 보는 게 나아.)
어차피 알 거면 빨리 아는 게 좋으니까 단도직입적으로 전 애인이 생각 나느냐고 물은 건데, 일단은 아니라고 한다.
물론 별로 믿음은 안 가지만, 만약 저 말이 맞다고 하면, 이상한 꿍꿍이가 있을 가능성이 더 크겠지.
일단은 계약조건을 피차 확실하게 정해서 걱정되는 부분을 미연에 차단하는 걸 목표로 하자.
‘-띠링.’
“아, 부모님께서 지금 이 쪽으로 오신다고.”
“아아, 네 그럼 일단… 은석 씨
번호 알려줘요. 자세한 계약조건은,
어차피 은석 씨 일주일 동안은 여기 꼼짝없이 있어야 하니까, 천천히 톡하면서 정해 보죠.”
그렇게 재영 씨는 번호를 교환하고 돌아갔다.
*
(재영) “부모님은? 가셨어요? 뭐라셔요?”
(은석) “네. 처음에 많이 놀라고 걱정하시긴 했는데, 평소에 워낙 니들 하고 싶은대로 살아라~ 주의셔서 그런지
저녁에 한 번씩 들르겠다는 말씀 외에는 딱히 다른 말은 없으셨어요”
(재영) “그래요. 얼른 안정 잘 취해서 퇴원해야죠. 아참, 아까 제대로 얘기 안 하고 돌아와서
혹시 오해하고 있을까 봐 말하는데, 우리 집에서 아예 동거하자는 얘기 아니에요.
집에 부모님도 계신데 당연히 밤에는 들어가야지. 스터디카페 오가던 스케줄 그대로 우리 집으로 출퇴근하란 얘기예요.”
오… 먼저 얘기 꺼내고 명료하게 정리해 준 건 좋긴 한데. 이것도 수작(?)의 일부는 아니겠지?
당연히 경계하면서 들을 수밖에 없는 은석이다.
(재영) “스터디카페에서 짐 빼야 되죠? 어차피 일주일은 쭉 누워 있어야 하는데,
수요일에 이용권 만료라지만 짐 미리 빼서 갖다 줄까요? 공부하게?”
아니… 뭐 이리 적극적이야. 말이 돼? 더 수상하다 수상해…
(은석) “아,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근데 이미 동생한테 정리해서 갖다 달라고 해서, 괜찮습니다 :)“
(재영) “아, 그래요. 음… 아까 얘기한 계약조건 얘기 마저 할까요 그럼?”
(은석) “네 좋습니다.”
별 거 아닌데 말투가 꼭 진짜 무슨 클라이언트랑 계약체결 하는 것 같네.
(재영) “일단… 보통 출퇴근 시간이 언제죠?”
(은석) “오전 대여섯시쯤 운동 갔다가 일곱시에 스터디카페 도착해서… 아홉 시 정도 나옵니다.”
(재영) “오케이. 우리 집에서도 그렇게 해요. 에어컨 켠다거나, 냉장고에 있는 거 꺼내 먹는 거나, 그런 건 맘대로 해요.
대신 공부하러 오는 거니까 TV나… 방 구석에 있는 내 노트북… 책상 자리만 건들지 마요.”
(은석) “네 알겠습니다.”
아니 금방금방 정하네. 좋긴 한데, 뭐 이렇게 청산유수야 마치 애초부터 작정한 것처럼..?
(재영) “보통 오늘 공부는 괜찮았다, 스스로 판단하는 기준이 뭐예요?”
(은석) “아… 측정해서 순공시간
10시간 넘었는지랑… 자기 전에 그 날 본 거 빠르게 안
보고 복기하는데
100%는 아니어도 웬만큼 복기가 되는가. 정도인 것 같습니다.”
(재영) “음, 베이직한데 가장
확실한 방법이네요. 그러-면 우리 집에서도 그렇게 하죠. 주말 없이.
주말이라고 무지성으로 쉬기 시작하면 자꾸 흐트러져요. 해 봐서 알죠?
대신에… 퇴원하고 한동안은 재활치료도 받아야 하고.. 가족이랑도 시간 보낼 일 있고 할 테니까,
그 때 잘 얘기만 해요. 증빙도 보여주면 좋은데 그건 뭐… 본인 양심 맡길게.”
…기타 여러 조항을 정하다가, 6항까지 정하고 나서.
(은석) “… 이만하면 다 정한 것 같은데요.”
(재영) “음… 아! 하나만 더 넣죠.”
(은석) “……?”
(재영) “서로 원하지 않으면 성적 접촉하지 않는 걸로.”
아… 하긴. 당연한 거긴 하다. 처음에 아무래도 그런(?) 식으로 만났기도 했고.
헤테로라고 알고 있으면 모를까 서로 이쪽인 거 뻔히 알고 맨몸도 봤겠다,
내 얼굴은 자기 전 애인 닮았겠다… 서로 가만히 냅두면 그게 이상하긴 하네.
철저해서 그건 좋은데… 아… 괜히 의미부여 하게 되네.
그냥 조심스러운 타입이라 꺼낸 제안일 수도 있긴 하지만…
내 몸이 좋았든, 내가 본인 몸을 만져주는 게 좋았든 어쨌든 둘 중 하나는 좋다는 뜻을 보여주는 걸로 봐도 되려나.
대신에 함부로 접촉하면 안 되는 이유가 따로 있는 거지… 전 애인 때문인지 뭔지는 몰라도…
절대 경계심을 풀진 말자. 기억하자. 굳이
나한테 잘해줄 이유가 뭔지, 최대한 빨리 알아내야 내 마음이 편해진다.
(은석) “네, 그렇게 하시죠.”
*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 어느덧 은석이 퇴원하는 날-토요일-이다.
재영 씨와 얘기해서 집에 있다 세 시쯤 출근하기로 했다.
2시 50분쯤. 재영의 문 앞에서 잠시 심호흡.
‘그래… 별 일 없을 거야. 나만 정신 바짝 차리고, 나를 받아들이기로 한 의중만 빨리 파악하면.’
병실에 있는 한 주 동안 생각할 시간도 많았던 은석. 재영을 아직 100% 신뢰할 수는 없었기에,
지내는 초반에 최대한 빨리 재영의 의중을 파악하는 것을 1차 목표로 삼았다.
고심 끝에 생각한 전략은, 이솝우화 속 해님과 바람 이야기에서 따온, 바람 전략.
마치 바람을 쉴새없이 일으켜 외투를 벗기듯이, 정신 못 차리게 유혹해서 속셈을 드러내게 하기.
‘만약 내 몸이 탐나서, 그런 쪽으로 수작을 부려 보려는 거라면?
아니면 전 애인이 생각나서 그 연민으로 잘해주려는 거라면?’
은석이 생각하기에 이 두 가지 경우가 가장 유력하다.
만약 전자의 속셈이라면, 은석이 유혹했을 때 ‘어렵게 갈 것 없겠네, 얘도 좋다는 거지 지금?’ 하면서 금방 속셈을 드러낼 것이다.
반대로 후자의 속셈이라면, ‘XX이가 생각나는데 내가 어떻게…’ 하면서 애써 뺄 것이다.
물론, 정말 은석의 몸에 관심이 없거나, 순수하게 은석이 공부에 집중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경우일 가능성도 있긴 하지만,
현 시점에 은석은 그 가능성은 낮다고 전제하고 접근하고 있으니까, 일단 배제하고 본다.
‘너무 긴장 말고. 손님들한테 꼬리치는 기술을 살짝만 응용하면 돼.’
아직 비밀번호를 모르는 은석, 문 앞에서 재영에게 전화한다.
“선배님 문 앞입니다.”
“아, 그래요 잠시만요 열어 줄게요.”
재영이 문을 열자 해바라기꽃 한송이를 든 은석이 서 있다.
“뭐예요 웬 꽃? 퇴원한 거 축하한다고 내가 꽃을 사다 줘야 할 판에.”
“에이 아닙니다. 무슨 말씀이세요. 퇴원하자마자
선뜻 제 공부를 도와 주시겠다는 선배님 마음에 제가 감사해야죠.”
의심되는 건 일단 묻어두고, 어쨌거나 이렇게 본인의 삶의 공간을 오픈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숙식비도 안 받겠다, 꽃 선물은 기본적인 예의 표시랄까.
“받으세요. 8월이 한참 철인가 봅니다.
여기 오는 길에 꽃집 앞에 진열된 거 보니까 햇빛 받아서 그런지 더 예쁘던데요.”
“아하하, 네 그럼. 고마워요.”
꽃을 건네 주면서, 전용기(?)인 살인미소도 잊지 말기.
“집 비밀번호는 ****이에요. 다음부터 그냥 들어와요.”
“네 알겠습니다~” 자연스레 식탁 앞 의자에 앉는 은석.
“행여나 뭐 막 집어갈 생각 마요. 저기 카메라 보이죠?”
꽃을 꽂아두기 위해 찬장에서 안 쓰는 긴 병을 주섬주섬 꺼내며 재영이 말한다. 천장 모서리에
달려 있는 카메라.
“캠스터디 뭘로 찍을까 했는데, 저걸로 하면 될 거 같아요.
녹화도 되고 내가 앱으로 바로 볼 수 있고, 내가 원하면 내 목소리 오디오 타고 나오게
할 수도 있고.”
“아아~ 저거 그거네요. TV에서 광고하는 그… 집에 혼자 있는 강아지나 고양이 보게 해주는 그거 맞죠?”
이미 합의한 내용에 따른 거긴 한데 생각하기에 따라 속셈이 굉장히 검어 보일 수 있는 요소.
출근해 있는 동안… 그러니까… 엿보는 거잖아?
게다가… 제품이 제품이니까 더 묘한 생각이 드네. 집 지키는 강아지, 고양이… 펫…
이런 생각이 피어오르자 자연히 은석의 아랫도리에 힘이 들어간다.
SM을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워낙 식의 커버리지가 넓은 은석인 만큼 약간 흥분이 된다.
음… 그래, 이 정도 생체반응은 자연스러운 거니까. 그치만 정신줄은 꽉 붙들자.
“아아 그거 맞아요. 광고 혹해서 샀네. 성능
괜찮을 거 같아서.”
“저거 한 두 푼도 아닐 텐데 저 때문에 사신 거면… 아…
또 너무 죄송한데.”
“괜찮아요. 그런 말 들으려고 단 거 아니니까. 공부 열심히 해서 빨리 붙는 게 나한테 갚는 거예요.”
“흐… 감사합니다.”
“그럼, 피차 잡소리로 시간낭비하지 말고 이 식탁 테이블에서 바로 공부 시작해요.
뭐.. 병실에서 누워서 하긴 했겠지만 어디 제대로 집중이 됐겠어요.
떨어진 폼 복구하려면 좀 걸릴 텐데 더 지체하면 안 되죠.
나도 저기 보이는 (제 노트북이 놓인 구석 책상을 가리키며) 책상에서 내 할 일 할 테니까.”
“네~ 알겠습니다!”
“아, 오늘은
보니까 책을 많이는 못 가져온 거 같은데, 조금씩 가져와서 저기 책장에다 꽂아요.
보다시피 고향집에서 내 책 갖다 꽂아 놨는데도 책장에 자리 많이 비니까.”
“넵 감사합니다! ㅎㅎ “
오… 곧바로 공부. 다른 마음이
정말 없거나, 아니면 있지만 티 나기 전에 구실 좋게 숨기고 싶거나.
뭐, 은석에게는 어느 쪽이든 지금으로서는 땡큐다.
‘그래… 서두를 필요는 없지. 한 걸음씩, 알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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