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는 기차가 없다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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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부산맨입니다.

  작년 가을에 1편 올려놓고 이제야 2편을 올리네요. 혹시나 1편 내용을 다시 읽으셔야 할까봐 앞에 붙여 놓습니다.



<1>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학기는 무심히 창밖을 바라봤다. 기차를 타고 여행을 떠나는 것은 오랜만의 일이었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자기 소유의 승용차 한 대씩은 다 가지고 있는 요즘 기차를 수단으로 한 여행은 정말이지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이었다. 좁은 땅덩어리에 사방팔방으로 도로가 깔려 있으니 승용차를 이용하면 목적지가 어디든 쉽게 이동할 수가 있는데, 기차는 전혀 그렇지가 못해서 정해져 있는 기차 시간에 여행의 일정을 맞춰야 했으니 시간이 돈인 요즘 시대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교통수단이었다.

  그래도 학기는 2년 전까지 줄곧 기차를 타고 여행을 했다. 앞서 오랜만이라고 했던 것도 사실은 2년에 불과한 것이었다. 하지만 학기에게는 지난 2년의 시간이 20년처럼 느껴졌다. 극심한 삶의 변화 때문이었다. 정말 오랜 시간 내 사람이다 싶었던 애인 용주가 2년 전부터 변해버린 탓이기도 했다. 학기는 용주를 바로 돌려놓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학기가 이번 여행을 계획한 것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기 위함이었다. 학기의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용주는 등받이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다.


  학기가 탄 기차는 도심을 벗어나 강을 끼고 달렸다. 대규모 하천 공사 이후 만들어진 자전거 길을 열심히 달리는 사람들이 종종 보였다. 학기는 목적지에 도착하는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코레일 앱을 실행했다. 최종 목적지에 가기까지 한 번 환승을 해야 했다.

  학기와 용주가 2년 만에 떠난 기차 여행의 최종 목적지는 경북 영주였다. 그곳은 학기와 용주가 처음으로 선택했던 여행지였다. 25년 전의 일이었다. 그때는 기차를 타고 떠나는 여행이 전혀 시대에 뒤떨어지지도 않았고, 뚜벅이 신세였던 학기와 용주가 선택할 수 있는 두 가지 선택지 중의 하나였다. 두 사람 모두 흡연자였기에 단 1초의 고민도 없이 기차를 선택했다. 그때는 객차 사이의 공간에서 얼마든지 담배를 피울 수 있었고, 심지어 비둘기호를 타면 객실 안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도 있었다.

  게다가 25년 전 그때, 영주로 가는 기차에 오르는 학기와 용주의 손에 들린 것은 종이로 된 승차권이었다. 지금처럼 환승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한 번에 영주까지 가는 직통이었다.


  용주는 여전히 아무 말 없이 눈을 감고 있었다. 학기는 용주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 다시 시선을 차창 밖으로 돌렸다. 상투적인 표현으로 강물이 유유히 흐르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때마침 귀에 꼽고 있던 에어팟에서 이상은이 부른 ‘언젠가는’이 흘러 나왔다. 노래 가사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용주가 좋아하던 노래였다. 학기는 노래를 들으며 입모양으로만 가사를 읊조렸다.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았네. 하지만 이제 뒤돌아보니 우린 젊고 서로 사랑을 했구나. 눈물 같은 시간의 강 위에 떠내려가는 건 한 다발의 추억....


  “학기야, 이 가사 너무 좋지 않냐? 눈물 같은 시간의 강 위에 한 다발의 추억이 떠내려간다니.... 추상적인 관념이 구체적인 이미지로 확 와 닿잖아. 황동규의 시 중에 ‘조그만 사랑 노래’라는 시가 있는데, 첫 구절이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야. 이 짦은 한 문장에서 정말 많은 게 읽히잖아. 그냥 맨 것도 아니고, 동여맸대. 절대로 풀 수 없도록.... 이별의 편지를 받은 감정을 어떻게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 건지, 정말 시는 아무나 쓰는 게 아니라는 게 느껴져. 시간의 강 위에 추억 한 다발이 떠내려가는 것도 같은 맥락이잖아. 사랑이 끝나고 나면 고작 한 다발의 추억으로 남고, 그 추억마저도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했어. 진짜 미치지 않고서야....”


  “형, 또 직업병 나온다.”


  “그런가? 근데 내 말 이해 돼?”


  학기는 용주를 사랑했지만 가끔 장황하게 설명을 하며 가르치는 듯한 화법은 정말 싫었다. 게다가 말을 잘 알아들었는지 다시 꼭 확인을 하는 데에는 학기의 고개가 저절로 저어졌다. 그래도 학기는 용주와의 사랑을 절대로 의심하지 않았다.


  “학기야, 나는 이런 멋진 표현을 절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이니까 너한테 이별의 편지를 쓸 일도 전혀 없고, 우리 사랑을 추억 한 다발로 묶어서 강물 위에 던지는 일은 절대로 없을 거야.”


  “그걸 어떻게 믿어?”


  “너 공대 나왔으니까 너도 절대로 이런 표현 못하잖아. 이 정도 표현이 아니면 니가 이별 편지를 수백 통을 써도 나 안 받아줄 거야. 너 ‘정석가’ 학교 다닐 때 배워서 알지? 모래 벼랑에 군밤 다섯 되 심고 어쩌고 하는 거.”


  “응. 배운 거 같애.”


  “천 년에 비가 한 방울 내리는 사막에 홍수가 나면 그때 나 너한테 어제를 동여매는 편지를 보낼 거야.”


  “진짜 형 직업병 때문에 내가 질린다 질려. 정말 약도 없어. 누가 형 직업병 고치는 약을 개발하면 그때 그 약을 편지 봉투에 넣어서 이별 편지랑 같이 보내줄게. 토끼 머리에 뿔 날 때까지는 약이 개발되겠지?”


  이렇게 말이 많았던 용주였는데, 이제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학기는 다시 용주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 등받이를 젖히고 용주처럼 눈을 감았다. 기차가 강물을 거꾸로 거슬러 달리듯이 학기의 머릿속에는 시간이 거꾸로 흘러 어느새 25년 전의 그날에 학기를 데려다 놓았다. 용주를 처음 만났던 그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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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996년 1월, 찬바람이 몰아치던 어느 날 학기는 극장으로 향했다. 할 일이 없고, 몸이 후끈 달아오르는 날이면 찾는 곳이었다. 어떤 영화를 상영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영화는 뒷전이고 극장 선택이 중요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사람들이 자신과 같은 목적으로 영화를 보러오는가였다.


  사람들 사이에서 그렇고 그런 사람들이 모인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간 그곳, 두 편의 영화가 번갈아 상영이 되는 극장이었다.

  학기가 떨리는 마음으로, 반은 호기심으로, 반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처음 찾아갔던 그곳은 그에게 그리 좋은 인상을 남긴 것이 아니었다. 영화가 한창 상영이 되고 있는 중에도 바깥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들, 자리가 많이 비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리에 앉지도 않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사람들, 어두컴컴한 극장 뒷자리에 기대고 서서 오가는 사람들을 아래위로 훑어 내리고 있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 속으로 학기는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로 끼어 들었다.


  극장에 들어섰을 때 학기는 주위로부터 따가운 시선을 느꼈다. 마치 새로운 먹이를 발견한 듯이 다가서는 사람들을 헤치고 학기는 자리에 앉았다. 철지난 영화가 스크린에 뿌려지는 가운데, 사람들은 학기가 앉아 있는 곳을 지날 때마다 한 번씩 꼼꼼히 훑고 지나갔다.

  학기는 조금 두려워졌다. 심장이 마구 뛰는 것도 느껴졌다. 주위를 두리번거릴 용기도 생기지 않았다. 학기는 이런 곳에 왜 왔나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자리를 뜨지 않고 계속 앉아 영화를 봤다.


  첫 번째 영화가 끝나고 두 번째 영화가 시작되었다. 첫 장면부터 남녀의 성애 장면이 노골적으로 묘사되는 영화였다. 학기는 그것을 보면서 자신이 조금씩 흥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학기는 누군가 자신의 옆자리에 앉는 것을 느꼈지만 감히 옆을 돌아볼 수 없었다. 옆에 앉은 사람의 시선이 자신의 온몸에 닿아 있는 것도 느꼈다. 두려웠다. 처음 당하는 일이었기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한참을 어색한 기분으로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는데, 무릎에 옆에 앉은 사람의 손이 닿는 것이 느껴졌다. 그 손길을 뿌리쳐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생각뿐이었다. 조금씩 옆 사람의 손이 위로 올라왔다. 학기는 전기의자에 앉아 있는 것처럼 부들부들 떨었다.

  학기는 옆 사람의 손이 사타구니를 지나 민감한 부분에까지 올라왔을 때에야 그 손길을 뿌리치고 자리에서 일어날 용기를 냈다. 그리고 바로 출입문 쪽으로 달려가 극장을 빠져 나왔다.


  집으로 오는 동안 학기는 온몸이 더러움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스스로에게 더러운 자식이라고 욕을 퍼부어댔다. 욕을 하면서 자신의 옆에 앉았던 사람을 떠올렸지만 머릿속에 그 모습이 그려지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학기 자신이 음흉하게 미소 짓는 모습만이 떠올랐다.

  학기는 집으로 돌아와 찬물을 틀어놓고 온몸을 박박 문질러댔다. 몸의 더러움을 씻어 내고, 머릿속의 기억까지도 깨끗이 씻어 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머릿속은 더욱 복잡해졌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던 날에도 꼭 이런 기분이었다. 친하게 지내던 친구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던 날, 친구는 비웃음과 함께 그에게 주먹을 선물했다. 그리고 가슴을 도려내는 말도 던졌다.


  “이 더러운 호모 새끼야.”


  학기는 집으로 돌아와 바로 손목을 그었다. 시무룩한 얼굴로 집에 들어와 밥도 먹지 않고 방에서 나오지 않는 아들 녀석이 궁금해 들어온 어머니에게 발견되어 목숨을 건졌지만 한동안 심한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 날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하지만 그때처럼 죽음까지 생각하지는 않았다. 죽을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저 몸뚱이만, 머릿속의 잡념들만 씻어낸다면 평소대로 되돌아 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학기는 아주 오랫동안 찬물 세례를 퍼부었다. 그리고 살갗이 벗겨질 정도로 문질러댔다. 거울 속에 비친 얼굴에 입술이 푸르게 변해 있었다. 그제야 학기는 욕실을 빠져 나왔다.


  첫 번째 방문은 그 다음을 불러왔다. 첫경험에서 느꼈던 더러움은 시간이 지날수록 만약 옆사람의 손길을 뿌리치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하는 궁금증으로 바뀌었다. 한 번 생긴 궁금증은 풀지 못한 숙제와 같은 것이어서 학기를 괴롭혔다.

  학기는 마감 시한이 지난 리포트를 제출하는 마음으로 극장을 찾았다. 제출해야 하는 리포트는 쌓여 있고, 새로운 리포트가 계속 주어졌으므로 학기는 극장을 찾는 일이 잦아졌다. 혼자 작성하는 리포트는 퀄리티가 현저히 떨어졌다. 애초에 영화가 목적이 아니었기에 빈자리가 많아도 앉아 있는 일이 드물었다.

  조별 과제 같은 성격의 리포트여서 가만히 앉아 있어서는 제대로 작성을 할 수가 없었다. 함께 리포트를 작성할 사람을 찾기 위해 움직여야 했다. 한창 영화가 상영이 되는 중에도 상영관을 나와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훑어보거나 영화를 볼 때에도 맨뒷자리에 서서 목적이 같은 사람들과 행동을 함께 했다.


  학기는 옆에 사람이 다가와 서면 슬쩍 고개를 돌려 얼굴과 체구를 확인한 뒤 나쁘지 않다 싶으면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손이 사타구니를 더듬어도 가만히 있었다. 극장 출입이 몇 번 반복이 되면서부터 학기는 점점 담대해졌다. 바지 지퍼가 열리고, 팬티 안으로 손이 들어와도 사람만 괜찮으면 그대로 받아들였다.

  어떤 날에는 장소를 이동하여 리포트를 작성했다. TV가 있고, 욕실이 구비된 곳은 리포트의 퀄리티를 높이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무엇보다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모두 벗어던질 수 있어서 좋았다. 목욕탕에 갈 때마다 항상 보는 남자의 나체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으나 은밀한 공간에서 보는 남자의 맨몸은 차원이 달랐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목적으로, 같은 시선을 통해 서로의 알몸을 바라보는 것이었으므로 욕망을 숨기지 않아도 되었기에 신체의 변화를 굳이 감출 필요도 없었다. 평소와 다르게 커지고 딱딱해진 것으로 속살을 문지르다 보면 어느새 하얀 물감으로 그림을 완성할 수 있었다. 리포트의 완성인 셈이었다.


  처음에는 리포트 작성이 서툴러서 상대방이 작성하는 것을 보고만 있던 학기도 여러 번의 리포트를 작성하는 동안 점차 능숙해졌다. 맨살끼리 부딪히는 느낌은 학기가 극장으로 내딛는 발걸음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그런 일이 잦아질수록 학기는 자신의 정체성을 더욱 확실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수동적으로 애무만 받던 것에서 벗어나 자신이 받았던 애무를 능동적으로 상대방에게 되돌려줬다.


  그런데 사정을 한 후의 마음은 또 달랐다. 뜨겁게 달아올라 맨몸을 부딪치다가도 사정을 하고 나면 차갑게 식었다. 자지 주변에 뿌려진 정액은 욕망의 찌꺼기 같아서 학기의 마음을 더욱 허탈하게 만들었다. 어쩌다 학기가 함께 리포트를 작성한 사람의 입에 사정을 해서 정액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사정을 하고 난 뒤의 쪼그라든 자지가 학기의 마음을 완벽히 대변했다.

  간혹 상대가 완벽한 리포트 작성을 요구할 때가 있었다. 학기도 마음이 흔들리곤 했다. 그러나 상대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게이들이라면 본능적으로 느끼는 바이러스에 대한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얇은 보호막으로 얼마든지 날려버릴 수가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함께 리포트를 작성하는 상대방이 더 나은 퀄리티의 리포트 작성을 제안하거나 요구해도 학기는 고개를 저었다. 정말이지 고퀄리티의 리포트를 작성할 수 있는 상대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학기가 크고 딱딱해진 도구로 하얀 물감을 짜낸 곳은 거의 대부분 상대방의 허벅지 사이였다. 그것이 학기가 작성하는 리포트의 최선이었다.

  학기는 비록 참을 수 없는 욕구에 굴복해 극장을 찾고, 그곳에서 사람을 만나 욕구를 분출하기는 해도 언젠가는 정말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 일반 친구들처럼 알콩달콩 연애를 하는 것을 꿈꾸었다. 욕망에 충실한 남자들에게서 연애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 불가능할 것도 같았으나 그래도 사람의 일은 모르는 것이어서 몸과 마음이 동시에 가는 사람을 위해 마지막 하나는 남겨두고 싶었다.


  1996년 1월, 찬바람이 몰아치던 그 어느 날은 극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평소와 조금 달랐다. 학생의 신분에서 벗어나 사회 초년생으로 첫발을 내딛는 해가 밝아서라고 생각했다. 더 이상 연세 드신 부모님의 땀내 가득한 학비를 받지 않아도 되고, 스스로가 먹고 살 길을 개척하여 지금껏 받아온 용돈을 되돌려 줄 수 있는 때가 멀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학기는 마음이 들떴다. 지도교수의 추천장을 받아 지원을 한 공기업에 봄이 되면 정식사원으로 출근을 한다는 사실은 학기의 마음을 들뜨게 하기에 충분했다.

  들뜬 마음은 학기의 욕망을 자극해서 해가 질 무렵 학기를 극장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굳이 사람을 만나 욕망의 찌꺼기를 내뿜고 싶은 마음보다 조그만 자취방에 혼자 있기 싫은 마음이 더 컸기에 학기는 처음으로 극장 앞에서 어떤 영화가 상영이 되는지를 확인했다. 옥보단이었다. 말의 성기를 이식하여 엽색 행각을 벌이는 주인공이 나온다는 말만 들었을 뿐 보지는 못했던 것이라 학기는 기쁜 마음으로 돈을 치르고 극장으로 들어갔다.


  학기가 극장에 들어선 때는 옥보단의 상영시간이 아니었다. 다음 회차가 옥보단이었으니 처음부터 제대로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학기는 상영관으로 들어가 어둠을 뚫고 스크린이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영화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제목도 모르고, 중간부터 보기 시작했으니 줄거리 연결이 되지 않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학기는 자리에서 일어나 상영관을 빠져 나가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고, 상영관 바깥에 있는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리고 학기처럼 상영관 바깥을 서성거리는 사람들을 흘낏흘낏 쳐다봤다. 그 사람들도 학기를 힐끗거렸다. 학기의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없었다. 그 사람들도 학기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듯 이내 시선을 거두고 제 갈 길을 갔다. 학기는 그렇게 의자에 앉아 극장에 갈 때마다 사들고 가는 씨네21을 펼쳐 읽으며 담배를 피웠다.


  영화가 끝이 났는지 상영관의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빠져 나왔다. 학기는 잡지에서 시선을 떼고 사람들을 또 흘낏거렸다. 그저 그런 사람들이었다. 극장에 온 목적이 학기와 같은 사람들이 눈에 띄긴 했으나 학기의 시선을 머무르게 만드는 사람은 없었다.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학기에게는 선뜻 다가설 용기가 아직은 장착되지 않았기에 시선이 가는 사람이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였다.

  학기는 다시 잡지를 읽기 시작했다. 짧은 기사 한 꼭지를 읽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영화가 시작한다는 벨이 울렸다. 그래도 학기는 계속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웠다. 누군가 옆에 앉는 것을 느꼈으나 눈을 계속 잡지에 두고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불 좀 빌려 주세요.”


  학기는 라이터를 꺼내기가 귀찮아서 여전히 잡지에 눈을 박은 채로 불이 붙은 담배를 건넸다.


  “고맙습니다.”


  담배를 다시 받기 위해 고개를 드는 순간 하얀 얼굴에 살짝 미소를 띤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남자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며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그리고는 몇 모금 피우지도 않고 담배를 끄고는 상영관 문으로 사라졌다.

  학기도 서둘러 담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나 자석에 이끌린 듯 상영관 안으로 들어갔다. 불이 꺼진 상영관 안에서도 남자가 자리를 잡기 위해 상영관을 가로 지르는 모습이 보였다. 학기는 남자가 앉은 뒷줄 몇 칸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스크린에는 그토록 보고 싶던 옥보단이 상영되고 있었지만 앞선 영화와 마찬가지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학기는 앞줄에 앉아 있는 남자의 모습만 바라봤다. 스크린에 뿌려지는 빛의 밝기에 따라 남자의 옆얼굴이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를 거듭했다. 귓바퀴도 참으로 이뻤다.


  학기는 문득 자신이 하등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에 집중을 하든지 아니면 다른 목적을 위해 행동을 취하는 것이 학기가 극장에 온 이유였다. 학기는 영화에 집중하기 위해 스크린을 응시했다. 기대한 것보다 옥보단은 야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학기가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 먼저 담배를 한 대 피우고, 1층이 아닌 2층 뒷줄에 서서 자신과 같은 목적으로 극장을 찾은 사람들 중에 마음에 드는 사람을 물색하는 일이었다.

  학기는 약간 아쉬운 마음에 앞줄에 앉은 남자의 뒷모습을 다시 한 번 쳐다보고는 냉큼 일어나 허리를 숙이고 좌석을 지나 상영관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워 물었다. 내심 남자도 자신과 같은 목적으로 극장에 왔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쓸데없는 생각이었기에 스스로에게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담배가 반쯤 타 들어갔을 무렵, 상영관의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나오는 것이 보였다. 바로 그 남자였다. 학기의 시선이 남자에게 향해 있었으므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학기는 다시 남자가 자신의 옆으로 와서 담뱃불을 빌리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남자는 이내 시선을 거두고 등을 돌려 발걸음을 옮겼다. 학기는 남자도 자기처럼 영화가 생각보다 덜 야해서 그냥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을 했는데, 남자의 발걸음은 출입문이 아닌 2층 상영관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향했다. 1층 상영관에도 자리가 많은데, 영화가 상영되는 중에 2층 상영관으로 올라간다는 것은 영화 관람이 아닌 다른 목적이 있음을 의미했다.

  학기는 서둘러 담배를 끄고 남자를 따라 2층 상영관으로 올라갔다. 먼저 계단을 오른 남자가 2층에 도착해 몸을 돌리는 과정에서 학기와 눈이 마주쳤다. 학기는 남자의 얼굴에 약간 미소가 번지는 것을 보고 자신감이 생겼다. 하지만 곧바로 따라 들어가기에는 너무 속셈이 뻔해 보여 2층 상영관 입구에서 담배를 반쯤 피우고 2층 상영관 안으로 들어갔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마자 학기는 남자를 찾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남자는 2층 상영관 출입문에서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다. 학기는 보일 듯 말 듯한 걸음으로 남자의 옆으로 다가섰다. 남자는 학기가 바로 옆에 다가온 것을 알면서도 학기를 바라보거나 하지 않았다. 그저 멀리 영상이 뿌려지는 스크린만 바라봤다. 학기도 남자의 옆에 가만히 서서 영화를 응시했다. 그리고 남자의 손길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제법 오랜 시간이 흘러도 남자의 손길이 다가오지 않았다. 학기는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어서 처음으로 먼저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저 손을 아래로 내리면 닿을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학기는 조금씩 발을 움직이며 남자에게 더 다가갔다. 아래로 늘어뜨린 손등에 남자의 몸이 닿았다. 눈만 내리깔고 바라보니 남자의 허벅지 바깥쪽이었다. 거부반응이 없는 것을 확인한 학기는 좀 더 용기를 내어 허벅지 안쪽으로 조금씩 손을 옮겼다. 거의 개미가 기어가는 속도였다.

  팔짱을 끼고 있던 남자의 팔이 아래로 내려왔다. 그 바람에 학기의 손과 포개졌다. 학기는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적잖이 당황하여 손을 거둬들이려 했으나 남자가 학기의 손을 잡는 것을 느끼고는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봤다. 남자는 여전히 스크린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렇게 또 제법 오랜 시간이 흘렀다. 이번에는 남자의 손이 먼저 움직였다. 잡고 있던 학기의 손을 자신의 사타구니쪽으로 끌어당겼다. 학기의 손등에 딱딱한 것이 닿았다. 굳이 고개를 숙여서 보지 않아도 남자의 그것이 분명했다. 학기는 잡은 손을 놓고 손바닥으로 남자의 그것을 쓰다듬었다. 남자가 가만히 있었으므로 학기는 용기를 내어 지퍼를 내리기 위해 바지 앞섶을 찾았다. 하지만 남자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고 학기의 손을 덥석 잡았다. 하지만 뿌리치려는 것이 아니라 잡아 끄는 것이었다. 학기는 남자의 손에 이끌려 상영관 밖으로 빠져 나왔다.


  밝은 곳으로 나온 학기와 남자는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특히 남자는 학기를 바라보며 거의 깔깔거리는 수준으로 웃었다. 남자가 학기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


  “어색하죠?”




-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 글쓴이의 말


  먼저 연재가 늦어져서 기다리신 분들께 송구스럽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굳이 변명을 해보자면 연말에 하기로 되어 있던 일이 두 달 정도 앞당겨지면서 일이 꼬여 버렸습니다. 1편을 올리자마자 그때부터 지금까지 쉬는 날 없이 일하고 있습니다. 주말에는 원래 제가 하던 일을 계속 하고, 평일에는 새로운 곳에서 일을 하고 있거든요. 투잡까지는 아니고 같은 일을 두 곳에서 한다는 말이겠지요.

  거기에 더해 나이가 들면 생기는 약간의 건강상 문제도 있어서 글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시간이 전혀 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는데, 지금까지 써오던 버릇이 있어서 시간이 날 때 찔끔찔끔이라도 쓰는 게 좀 어려웠습니다.

  이제는 새로운 곳에서의 일도 좀 적응이 되고, 경제적으로도 심적으로도 안정이 되어서 다시 쓸 힘을 찾았습니다. 여전히 쉬는 날이 없이 일을 하는 것은 변함이 없어도 야행성인 저에게 밤 시간은 혼자만의 시간이기에 생각을 정리해서 조금씩이나마 부지런히 쓸 계획입니다.

  한 회 분량을 A4 10장으로 잡고, 하루에 한 장씩, 상대적으로 시간이 나는 주말에는 좀 많이 쓰면 일주일에 한 편 간격으로 올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시 시작했습니다.

  모쪼록 더운 여름 몸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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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pa…
  • 작성일
읽기도 전에 답글답니다
이제라도 돌아와줘서 고맙습니다!
일도 좋지만 우리또랜 건강 많이 생각해야 합니다.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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