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부는 날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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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은 또옥 또옥 떨어지고 있었다.

몸은 샤워해서 인지 촉촉했고 습기 때문에 끈적했다.

저녁이 되억 가고 있어서 날은 서늘해졌고 지는 해는 회색으로 덮여 있었다.

오늘 바다풍경은 덕분에 회색으로 가득했다.

휴대폰을 켜보니 알람이 여러 개 와 있었고 메시지가

내 무거운 마음처럼 쌓여 있었다.

열어 보기도 겁났고 보고 싶지도 않았다.

휴대폰을 켠 것은 날씨 때문에 금방 어두워진 풍경에

조금이라도 불빛을 비춰내고 싶었던 것뿐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때마침 문자가 울렸다.

[지현이도 너 걱정 많이 하고 있어.]

석현의 문자였다. 상태창으로만 보고 당연히 읽지 않았다.

석현이는 언제나 내 주변에서 나를 챙겼었다. 지금도 어쩌면

저 돌 뒤에서 나를 보고 이런 문자를 하는 건 아닐까 생각도 들었다.

석현은 왜 지현의 이야기를 꺼낸 것일까?

내가 좋아할 이유가 전혀 없었을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석현 지현은 정말 오래된 소울 메이트다.

그래 모든 것이 있기 전에 그랬고 행복했던 사이었다.



민석의 기척이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민석의 기척은 참 신기했다. 소리로든 모습으로든 그의 인기척이

느껴지면 여지없이 바다의 냄새가 났다. 깊은 바다.

바다속 깊은 곳에서 우리의 인연이 시작되어서인지 모르겠지만

그의 이름이 떠오르거나 그를 생각나게 하는 모든 것을 만지고 보고 맛볼 때면

어지없이 깊고 푸른 바다의 향기가 났다.


민석은 두손에 바리바리 뭔가 싸가지고 왔다.

'오늘은 평상에서 술 한 잔 해요. 술 할 줄 알죠?'

술 할 줄 아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평상이란 게 뭘까 생각이 들었다.

민석이 갖고온 음식들을 펴들고 있는 모습을 보고 내가 지금 앉아 있는 곳이

평상이구나 싶었다. 언젠가는 들어 본 단어인 것도 같았다.


음식들은 전과 바베큐 들이었고 시중에서 파는 게 아니라, 누구에게 받아온 것 같았다.

막걸리를 휘익 휘익 돌리더니 스텐그릇 위에 두 잔 붓고 새끼 손가락으로 휘익 휘익 젓는 것을

구경하듯이 바라 봤다. 내게 준 잔 한 잔을 받아들고 멍하니 민석의 얼굴을 바라 봤다.

민석은 짠!이라고 하며 내 그릇에 자신의 그릇을 부딪쳤다.

딩~하는 청명한 것 같으면서도 둔한 소리가 났다.

민석이 먼저 꿀꺽 꿀꺽 시원하게 마신다.

그 모습을 끝까지 쳐다볼 때까지 난 아무 말도 없었고 그 자세로 가만히 있었다.

막걸리의 뽀얀색이 요구르트 같았다. 살짝 입술을 갖다댔는데 차갑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무척 부드러웠다. 혀끝에 닿는 촉감이 신 요구르트 마시는 느낌이었다.

놀랐긴 했지만 예상과 전혀 다른 게 아니라서 한 모금을 마시고 꿀꺽꿀꺽 반절은 마셔버렸다.

"잘 마시네요."

민석이 말했다. 여전히 어른 말투였다.


"옆집 민박집에서 바베큐 파티 있어서 좀 얻어 왔어요. 이런 날도 있어야지요."

민석은 손가락으로 고기 한 점을 집어 입에 넣었다. 우적우적 씹는 모습이 귀여웠다.

민석은 스스로 자신이 얼마나 귀여운지 모르는 것 같았다. 아마 본인 스스로는

상남자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게 더 귀여웠다.




막걸리 두 병을 다 마시고 집에 있는 복분자주를 갖고 왔다.

민석은 의외로 술이 약해 보였다. 얼굴이 전체가 불그스름해졌는데

원래의 구릿빛 색깔과 혼색이 되어서 더 야릇한 느낌을 주었다.

민석은 생각보다 잘 마시는 내 모습을 보고 더 먹여 보고 싶었나 보다.

그러더니 본인이 먼저 꽐라가 되었다.


마신지 두 시간 정도 지나니깐 밖은 완전히 어두워지기도 했고

날씨가 흐려 쌀쌀했다. 집안으로 들어가자고 했는데 한사코 밖에서 마시자고 하는 민석이.

민석은 분위기를 은근히 잡으며 진지하게 나를 바라 봤다.

그리고는 손을 쭉 뻗어서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기 저기 보란 말이예요. 저기요."

난 눈기를 바꿔 민석이 가리키는 곳을 봤다.

절벽이 보이는 곳이다.

"저기서 떨어지는 것을 봤단 말이예요. 저기요."

난 갑자기 죄책감이 들었다.

민석은 나를 살려준 은인이지만 난 조금도 고마워 하지도 않았고

나야 죽었으면 그만이었지만 민석은 내가 뛰어내린 그 장면을 실시간으로 목격한 장본인이었던 것이다.

그에게서는 그 순간 절체절명의 순간이었으면 얼마나 놀란 관경이었을까.

그리고 나를 살리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일들을 했는지 나는 한 동안 생각해 내지도 못했다.

계속 저 절벽을 가리키는 손을 두 손으로 잡아서 위로해줬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저 마음만 아파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끝내 민석은 눈물을 흘렸다.

"내가 그때... 얼마나 놀랐는지 말아요?"

나도 역시 주르륵 눈물이 났다.

저 절벽에서 뛰어내리려는 그 순간에도 나지 않았던 눈물이 주루룩 빗처럼 흘렀다.


"에이 씨"

민석은 속상했는지 복분자주를 연거푸 몇 잔을 더 마시고는 정신을 잃었다.

내가 챙겨야겠다고 생각하고 그를 부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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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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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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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읽었습니다 ㅎㅎ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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