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릴레이 소설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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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만
유월이 되니 날씨가 본격적으로 더워진다. 온 산천이 푸르게 변하고 산들바람이 살살 불어오니 벌써 잿빛 도시를 벗어나서 시원한 계곡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영만은 아파트 단지를 돌며 세탁한 것을 전해 주기도 하고 세탁물을 다시 수거하기도 한다.
주변에서 부자들만 산다는 *해피 자이 아파트에는 영만의 단골이 많이 있다. 이곳 아파트 단지는 1천 가구 규모의 대단 위 세대를 두고 다른 세탁소까지 세 군데가 있을 정도로 경쟁이 매우 치열하다.
영만은 계속 핸드폰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용궁 사우나를 다녀온 지 한 달이 다 되어 가지만 아직 정식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고 있었다. 자신이 먼저 연락해 볼까 싶었으나 도무지 용기가 나지 않았다. 실은 정식을 만나고 며칠 되지 않아 문자를 먼저 보내긴 했었다. 그런데 아무런 답장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연락하기가 더 망설여졌었다.
*해피 자이 105동 앞에 도착하니 308호의 노총각이 또 생각이 났다. 곧 볼 텐데 괜히 흥분된다. 평소 세탁물 때문에 여러 번 보기는 했으나 그때처럼 짧은 팬티 차림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동안 그를 제대로 보지 않았었다. 사람이라는 게 참 이상하다.
그전에는 정말 아무런 느낌이 없는 노총각 같았는데, 그날 이후로 가끔 생각이 나는 것이었다. 아무튼 그때의 기억 때문에 약간의 설렘이 일어났다. 세탁물을 전해주려고 308호 앞에 도착 후, 초인종을 누르려는데 이상하게 문이 완전히 닫혀 있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안에서 잠금쇠가 튀어나와서 문이 다 닫히지 않은 것이다. 아무래도 급한 일이 있어 문을 닫다가 모르고 그냥 들어간 모양이었다. 문을 살짝 열며 영만은 일단, 헛기침을 한 번 하고서 말을 했다.
- 안에 계셔요...? 세탁솝니다. 세탁물 가져왔습니다...! (일부러 크게 말을 했다)
그래도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영만은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큰소리로 한번 더 외쳤다. 그래도 조용한 게 아무런 기척이 없어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 제대로 보니 거실의 넓기가 아마 40평은 더 되어 보였다. 영만 가족이 사는 집 보다 혼자 살면서 훨씬 넓으니 쓴 입맛을 다시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 안에 안 계셔요...? 세탁솝니다! 아무도 안 계셔요...?
역시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아니, 문을 다 닫지도 않고 어디 나간 거야? 화장실에 있나? 영만은 화장실 문을 노크해 보았다. 조용해서 문을 열어 보니 역시 아무도 없었다. 이상하다...? 별생각이 다 들었다. 그냥 세탁물을 두고 나갈까...? 아니야 돈도 받아야 하는데…(아내의 찡그린 얼굴이 떠올랐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네! 영만은 거실을 둘러보고 혹시 방에서 자나 싶어 큰 방문을 살며시 열어 보았다. 재수 좋으면 또 그 팬티 입고 자는 모습을 볼지도 몰랐다. 자꾸만 그날의 팬티 입은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러나 문을 연 영만은 깜짝 놀랐다.
- …...!!! 아니! (영만은 너무 놀라 잠시 멈칫했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총각! 총각...!
308호의 노총각은 알몸인 채로 방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큰 타월이 옆에 널브러져 있었는데, 상황을 보니 샤워를 하고 몸을 닦다가 어떤 이유에 의해서인지 몰라도 쓰러진 것 같았다. 영만은 그 짧은 시간에 별생각이 다 들었다.
총각은 몸을 비스듬하게 해 쓰러져 있어 그의 가운데 중요(?)한 부분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영만은 총각의 상체를 일으키며 가볍게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이 모든 행동은 쓰러진 것을 발견하고 신속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일단, 생사를 확인해야 해서 코에 손을 갖다 대니 다행히 숨은 쉬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총각의 몸을 제대로 보고 싶었지만 타월로 체온을 지키기 위해 먼저 덮어 주어야 했다. 그리고는 핸드폰을 꺼내 119에 신속하게 전화를 걸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에 119가 다녀가고 한바탕의 소란이 진정되었다. 119와 경찰이 최종적으로 다녀간 후에 아파트 관리실의 소장이 영만에게 감사의 인사를 대신 전했다.
- 정말 세탁 사장님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관리소장이 웃으며…)
- 아휴! 무슨 말씀을요!… 308호가 운이 좋았던 거지요…
- 이래서 혼자 있는 사람들은 겁난다니까! 얼마 전에도 옆 동에서 비슷한 상황이 생겨서 얼마나 놀랐는데요!…
- 아, 이런 일이 종종 있나 봐요...? (영만은 정말 놀랐다)
- 105동에는 혼자 사는 분이 몇 명 안 되는데… 106동엔 제법 많은 독신자가 살거든요… 아무튼 우리 세탁 사장님 아니었으면 오늘 송장 치를 뻔했는데 정말 애쓰셨습니다. 제가 엘리베이터와 안내란에 특별히 이번 일과 해피 세탁소 많이 알리겠습니다. 하하하...!
- 정말입니까! 아이고… 이거 감사합니다. 소장님, 감사합니다...!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대단 위 아파트의 관리소장의 힘은 대단하다. 그랬기에 그의 말 한마디가 세탁소 영업을 좌지우지하는 것이다. 세탁소 뿐만 아니라 각종 배달 음식점 등 모든 게 해당됐다. 관리소장의 암묵적인 용인에 광고를 붙이기도 하고 못 붙이기도 했다. 그런데 각 층의 엘리베이터와 안내란에 이런 좋은 홍보를 알린다니! 영만은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세탁소에 돌아오니 이미 알고 있었는지 아내가 큰 소리로 반갑게 맞이한다.
- 아이고! 여보, 당신 정말 큰일 하셨네요! 목마르시죠. 이거 드세요...! (미리 준비해 놓은 시원한 냉 미숫가루를 내민다)
- 뭘!… 다행스러운 거지… 사람이 안 다쳤으면 됐지...! 그나저나 괜찮겠지...?
- 아휴! 그럼요! 병원에 갔으니 괜찮겠죠! 근데, 어떻게 된 거예요? 어떻게 안에 들어갔데요?...
- 으…응! 그… 그 게… 뭐, 아무튼 그렇게 됐어...! 아이고 피곤하다. 신경을 썼더니 몸이 뻑적지근하네!…
- 그래요...? 여보, 그럼 당신 오늘 특별히 사우나 다녀 오실래요...?
- 사우나...? 오늘 가는 날이 아닌데...? (아내의 눈치를 살피면서 벌써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 당신 그 노총각 살리느라 애먹었을 텐데 가서 사우나 하시고 오세요...!
- 하긴, 오늘 세탁물도 다 수거했으니 바쁜 건 지나긴 했지만… 당신 혼자 괜찮겠어...? 다림질도 제법 있는데…
- 아휴! 바쁘면 바쁜 대로 혼자 하쥬~! 걱정하지 마시고 다녀오세요…
- 그럼, 정말 간~다! 나 후딱 다녀 오리다!
영만은 기분 좋게 세탁소를 나섰다. 들뜬 마음으로 버스를 타고 용궁 사우나로 향했다. 영만의 마음은 이미 용궁 사우나의 수면실에 먼저 가 있었다. 그동안 정식을 만난 후로 매주 용궁사 우나에 갔었으나 매번 허탕만 치고 돌아왔었다. 혹시 정식을 만날까 기대도 했었고, 아니면 다른 대타를 만날까 설레기도 했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하던가! 영만은 이제 마음을 비우고 가는 중이다. 비록, 허탕을 치더라도 왠지 그곳에 가면 마음이 푸근해지고 있었다.
며칠 후, 영만이 바쁘게 일하고 있는데 모르는 전화번호가 떴다. 누구인가 싶어 재빨리 받았다.
- 여보세요...?
- 저… 해피 세탁소 사장님이신가요...?
- 네, 그런데요… 누구시죠...? (영만이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 안녕하세요...? 저… 308호입니다…(조심스레 말하는 듯…)
- 아! 308호! 어떻게... 건강은 괜찮으세요...? (영만은 자신도 모르게 반가워 큰 소리로 말했다)
- 네. 사장님 덕분에 제가 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지금 집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먼저 전화 드리는 겁니다. 먼저 찾아뵙고 인사를 드려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 아닙니다... 정말 다행이십니다! 건강하시다니 잘 되셨어요...! (영만은 정말로 반갑고 기뻤다)
- 제가, 잘 산 것도 아닌데… 이렇게 사장님 도움을 받아 다시 살게 되어 정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제가 집 정리 끝나는 대로 다시 한번 연락 드리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생각지도 않은 전화를 받은 영만은 왠지 마음이 뿌듯했다. 한 생명을 우연찮게 구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낄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 영만이 아니었다면 정말 308호는 어찌 될지도 몰랐었다.
그리고 다시 일주일이 지났나...? 영만의 폰으로 저장해 둔 번호가 떴다. 바로 308호였다. 다림질을 계속하면서 블루투스로 연결했다.
- 네, 해피 세탁소입니다….^^
- 사장님 308호입니다… 잘 지내셨어요...?
- 네. 건강은 좋으시죠...?
- 덕분에 잘 있습니다. 이제 제가 많이 안정되었습니다…
- 네… 다행입니다…
- 혹시… 저녁에 일 없으시면 저녁 식사를 같이하실 수 있겠는지요...? 더 이상 미루기가 그래서요…
-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부담 갖지 마세요…
- 아녜요… 그게 아니라… 제가 곧 여기를 떠나게 되었어요…
- 네? 아니, 왜요...?
- 이번 일로 혼자 지내는 것을 집에서 반대하셔서 본가로 다시 들어 가게 되었습니다… 아무튼 자세한 것은 만나서 말씀드릴게요… 저녁에 몇 시로 할까요...?
- 에이… 그렇게 까지 안 하셔도 되는데…(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만나고 싶었다)
- 괜찮습니다. 부담 갖지 마시고요… 이렇게라도 해야 제가 마음이 편하잖아요… 그럼, 저녁 6시쯤에 제가 세탁소 앞으로 모시러 오겠습니다. 괜찮으시죠...? 사모님도 같이 가셔도 좋습니다…
- 아이고… 무슨! 마누라까지… 아닙니다. 그럼 저녁에 뵙죠!
- 네. 감사합니다. 오후에 모시러 갈게요… 그럼…
아내에게는 함께 가자고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정말로 따라 나서면 골치 아프고, 혹시나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원천 차단을 한 것이다.
정확히 6시에 검은 제네시스8을 몰고 그가 나타났다. 검정 수트로 멋을 낸 그는 평상시보다 훨씬 멋있는 남자로 변신하였다. 몰라볼 정도로 그는 세련되어 있었고, 풍기는 분위기가 지금까지 영만이 보았던 사람들과는 결이 달랐다.
308호의 이름은 최민호, 나이는 44의 돌싱남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몰랐지만 민호는 심장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그날도 외출 후에 집으로 들어오는데 몸이 너무 안 좋아 문이 제대로 닫혔는지도 몰랐었다고 했다. 잠금쇠가 튀어나와 있는 줄도 몰랐던 게 자신의 목숨을 살린 것이다.
차는 시외로 접어들고 있었다. 경기도 고양시 부근이었는데, 바깥에서 보아도 규모가 꽤 큰 한정식 가게였다. 차가 미끄러지듯이 가게 안의 넓은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예약이 되어 있었는지 룸으로 안내가 되었다. 자리에 앉으면서 민호가 말을 했다.
- 사모님께서 함께 오셔도 되는데… 아쉽습니다…
- 아닙니다… 가게 문을 닫기도 그렇고… 고맙다며 그냥 다녀오라고 하더군요…(거짓말을 하니 아내에게 좀 미안했다)
- 술 좀 드시죠...? (민호는 핸드폰으로 술을 주문하였다)
- 주문을 핸드폰으로 하는 가 봐요? (폰으로 주문을 하는 게 너무 신기했었다)
- 네… 가게 앱이 있어 추가 주문이나 여러 가지 콜을 할 수 있어요…
- 참, 세상 좋아졌습니다! 하하하...!
- 그러면 뭐 합니까! 사람이 쓰러져도 사람이 없으면 말짱 꽝인 걸 요...!
- 네…(그건 그러네...!)
- 제 소개를 정식으로 하겠습니다. 저는 최 민호입니다. 올해 44살이고요…(민호는 일어서서 인사를 했다)
- 아… 네, 박영만입니다. 내가 딱 10살 위네요… 하하하...! (영만은 상대의 나이가 어리다 보니 엉거주춤하게 서서 말했다)
- 저보다 한참 형님이시네요… 말씀 편하게 하세요…
- 아닙니다…(영만은 손사래를 쳤다.)
*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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