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는 기차가 없다 -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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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작된 학기와 용주의 사랑은 그다지 알콩달콩하지 않았다. 여느 연인들처럼 토라지고 싸우고 헤어지는 일이 반복되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고 모르는 척 연락을 하면 별일 있었냐는 듯이 다시 화해하고 만나서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영화를 보거나 섹스를 했다. 두 사람 모두 술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섹스를 할 때면 언제나 맨정신으로 최선을 다해 서로를 위해 봉사를 하고 사랑을 속삭였다. 길을 걷다가 다른 사람에게 눈이 돌아가도 아무렇지 않을 만큼 내성이 생기고 연애 근육도 탄탄해졌다.
갈등이 있을 때마다 서로를 봉합한 것은 기차를 타고 떠나는 여행이었다. 차를 몰지 않고 떠나는 여행이어서 언제나 나란히 앉아 같은 곳을 바라봤고 느낌을 공유할 수가 있었다.
용주가 좋아하는 곳은 조용한 사찰이었고, 학기가 좋아하는 곳은 바다였다. 그저 취향의 차이일 뿐, 서로에게 강요하지도 우기지도 않았다. 먼저 장소를 제안을 한 사람의 의견을 따랐다. 다만 지켜야 하는 약속은 기차가 가는 곳이어야 했다. 버스를 탄다고 하더라도 기차가 메인이고 버스는 부수적이었다.
딱 한 번, 용주가 아버지 소유의 차량을 몰고 나와 학기를 태우고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운전이 익숙하지 않은 용주 때문에 불안하기도 했고, 네비도 없던 시절이라 길을 찾느라 애를 먹어서 서로가 불편했다. 용주는 용주대로 운전이 서툴러 학기에게 미안했고, 학기는 자기를 위해 노력하는 용주가 안쓰러웠다. 무엇보다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터라 주변 풍경을 보는 여유가 없었다.
휴게소에 들러 핫바를 사 먹고, 음료수 캔을 들고 담배를 피우며 용주가 말했다.
“김광규 시 중에 ‘젊은 손수 운전자에게’라는 시가 있어. 오늘 그 시가 확 와 닿네.”
“어떤 신데?”
“차를 장만하니까 철따라 달라지는 가로수도 못 보고 과일 장수 생선 장수도 못 보고 아픈 애기 업고 뛰어가는 여자도 못 보고, 대신 교통순경과 신호등만 본다는 뭐 그런 시야.”
“형 보면 참 신기해.”
“뭐가?”
“상황에 따라서 시나 책에서 읽은 구절이 딱딱 떠오르잖아.”
“나.... 국문과 나온 남자야.... 그리고 매번 그렇게 떠오르겠냐? 어쩌다 한 번 떠오르는 걸 말하는 거지.... 씨.발.... 나랑 운전은 안 맞는 거 같애.”
“잘하던데 왜 그래.”
“아버지 대신 운전 제법 하긴 했어.... 말없이 앞만 보고 가면 되니까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너랑 있으면서도 그래야 되니까 조ㅈ나 짜증나. 차 한 대 뽑을까 싶었는데 관둬야겠어. 너두 사지마. 그 돈으로 우리 맛있는 거 사 먹고 구석구석 더 많이 다니자.”
학기도 다른 직원들이 차를 몰고 다니는 것이 부러워 한 대 장만을 할까 싶던 차였다. 가끔 고향에 갈 때 늦둥이 아들이 취직도 하고 차도 샀다는 것을 부모님께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도 있어서였다. 하지만 단지 그것뿐, 차를 장만할 이유가 더는 없었다. 지하철을 타고 30분 남짓 걸리는 출퇴근길은 전혀 불편함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자취방이 있는 골목길에는 주차를 해 놓을 공간도 턱없이 부족했다.
“오케이.”
단 한 번을 끝으로 학기와 용주는 기차를 타고 버스와 연계해서 대한민국의 구석구석 여행을 다녔다. 목적지보다 목적지로 가는 과정이 더욱 즐거웠다. 같은 곳을 바라보고, 그 어느 누구도 서로에게 희생하는 것 없이 평등할 수 있어서 더욱 좋았다.
학기가 나이 서른이 되던 99년의 어느 봄날, 학기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지병을 앓고 있어서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던 터라 큰 충격을 받지는 않았으나 혈육을 잃은 슬픔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다행히 옆에 용주가 있어서 학기는 슬픔의 심연에 빠지지 않고 잘 이겨낼 수 있었다.
그 해가 가기 전 초겨울의 어느 날, 용주는 학기에게 집안의 사정에 대해 털어 놓았다. 몇 년을 만나오는 동안 용주가 누나 세 명을 둔 막내 외아들이고, 게다가 2대 독자라 군대도 6개월로 마무리했으며, 부모님 모두 대학교수 출신이라 집안이 엄청 보수적이라는 것은 학기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날 용주는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학기에게 주절주절 자기가 처한 상황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했다.
“이거....”
학기는 용주가 내미는 봉투 하나를 받았다. 해마다 연말이 되면 잊지 않고 주는 크리스마스 카드 같은 봉투였다. 학기는 봉투를 열고 내용물을 꺼냈다. 청첩장이었다. 결혼식 날짜는 크리스마스 다음날인 12월 26일이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신랑의 이름 이용주였다. 학기는 적잖이 놀랐으나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은 아니었기에 겉으로는 침착한 척을 하기 위해 애를 썼다.
“신부가.... 형이 전에 말했던 그 사람?”
“응.”
용주는 학기와 처음 연애를 시작할 때부터 결혼에 대한 압박감이 상당하다는 것을 솔직하게 드러내 왔었다. 나이가 서른을 넘어간 뒤부터는 학기에게 간간이 하소연을 하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같이 자라오면서 집안 어른들끼리 짝을 지어줘야겠다고 얘기하던 여자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신부였다. 오빠, 오빠 하면서 잘 따르는 여자를 용주도 별 사심 없이 대하고 있던 차였다.
그러나 농담인 줄로만 알았던 집안 어른들끼리의 대화가 진심이라고 용주가 느낀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었다. 용주는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항변을 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이미 집안 부모님들끼리는 말이 끝난 상황이었고, 용주와 결혼을 할 여자도 상당히 적극적이었다. 2대 독자라는 용주의 처지는 절대로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을 하기에 보수적인 집안 분위기에서 힘든 일이었다. 거기에 더해 용주 어머니의 건강이 악화되어 결혼을 서둘러야 하는 입장이었다.
학기는 기가 막혀서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용주의 입장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으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나도 하기 싫어....”
“알아. 형 마음.... 이왕 하는 거 잘 살아....”
“그 말 의미가 뭐야? 내가 너한테 꼭 헤어지자고 말한 거 같잖아.”
“나한테 청첩장 보여주는 거 그런 의미 아니었어?”
“내가 미쳤냐? 너랑 헤어지게?”
“그럼 어쩔 건데?”
“어쩌긴 뭐 어째. 그냥 너랑 나랑 이대로 가는 거지....”
“형, 진짜 미친 거 아냐?”
“진짜 미칠 거 같애.... 그래 나 미쳤어.... 암튼 나 너랑 헤어질 마음 하나도 없어.”
학기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용주가 지껄이는 말에 조금씩 설득되어 갔다. 결혼을 이틀 앞둔 크리스마스 이브에 학기와 용주는 여타의 연인들처럼 모텔에서 발가벗고 뜨거운 밤을 보냈다.
“근데 신혼여행을 왜 제주도에 가? 요즘 해외로 많이 가잖아. 우리 부서 직원들 죄다 해외로 갔다 왔던데.”
“그런 데 돈 쓰기 싫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가 제주도 가자고 할 때는 그딴 데는 왜 가냐고, 죽어도 못 간다고 하던 사람이....”
“제주도에는 기차가 없잖아.... 알면서 왜 그래.”
“그래도 비행기 타고 제주도 간다니까 부럽다.... 나 한 번도 안 가봤는데....”
용주의 결혼식 날, 학기도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 입고 참석했다. 자기와 코드가 맞는 사람들과만 교류를 했던 용주의 결혼식에는 우인들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학과 동기들 몇 명과 근무하는 학교의 동료 교사들이 전부였다. 학기는 그 사이에 낄 수가 없었다.
그래도 학기가 결혼식에 참석할 수 있었던 것은 용주의 게이 친구 경수 때문이었다. 학기와 용주의 사랑을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아는 존재였다. 학기와 경수는 둘만 멀뚱히 자리에 앉아 용주의 결혼식을 관람했다. 턱시도를 멋지게 차려 입은 용주는 학기가 참석했던 결혼식의 그 어느 신랑보다 멋져 보였다. 하지만 그것이 더욱 학기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결혼식이 끝이 나고, 사진을 찍느라 부산스러운 틈을 타서 학기는 식장을 빠져 나왔다. 학기의 마음을 잘 아는 경수도 말리지 않았다.
새 천년을 앞둔 거리는 활기가 넘쳤다. 학기는 어디로 가야할지 방향 감각을 상실한 채로 네거리 신호등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슬펐다.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해서 슬펐다. 사랑하는 사람의 결혼식을 지켜보는 것이 슬펐다. 사랑하는 사람의 결혼식에서 그 옆자리에 설 수 없는 현실이 슬펐다. 사랑하는 사람의 옆자리에 서 있는 사람에게 어딜 넘보냐고 싸대기를 때리고 부케를 집어 던지면서 이 결혼은 무효라고 떼를 쓸 수 없어서 슬펐다. 사랑하는 사람의 집안 식구들에게 나 정학기는 이용주를 진심으로 사랑하며 검은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사랑하겠노라고 할 수가 없어서 슬펐다. 나이 서른에, 대한민국 육군 병장 출신으로 국내 최고의 공기업에 재직 중이며 이용주를 업고 100미터 달리기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신체 건강한 사람이니까 저를 믿고 아들을 달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없어서 슬펐다. 결국 사랑하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할 수가 없어서 슬펐다. 남자라서, 남자이기 때문에, 남자니까, 남자를 사랑하는 남자이므로 사랑하는 사람이 결혼을 하는데도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어서 슬펐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을 놔두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을 한다는 것이 더욱 슬펐다.
1999년의 남은 날들을 학기는 혼자서 보냈다. 2000년 1월 1일과 2일도 그러했다. 1999년 새해 첫날, 2000년으로 넘어가는 그 순간에 함께 섹스를 하면서 천년을 이어가자던 용주는 자기가 한 약속을 스스로 저버린 것이었다.
해가 바뀌고 며칠이 지난 날이었다. 용주가 결혼을 하고 난 뒤 처음으로 연락을 해왔다. 학기는 전화를 받고 용주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전화를 끊었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고, 그래야만 했다. 용주를 위한 것이라고 마음속으로 핑계를 댔지만 사실은 학기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학기도 용주와 헤어지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용주와의 관계를 이어간다는 것은 곧 학기 자신이 불륜의 대상이 되는 것이라 그것이 너무 싫었다. 용주를 향한 마음은 예전과 다를 것이 전혀 없었으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용주의 결혼이 사랑을 불륜으로 만들어 버린 현실이 원망스러웠다. 학기가 게이의 삶을 선택한 것이 아니듯이 용주와의 관계를 끊는 것도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이었다.
며칠 뒤 다시 용주에게 전화가 왔다. 이번에도 용주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전화를 끊었지만 곧바로 다시 전화가 왔다. 학기는 용기를 내어 용주에게 말했다.
“형.... 이제 전화하지 마.... 형.... 유부남이잖아. 나.... 유부남 싫어.”
마음에도 없는 말이었다. 유부남이라는 단어가 용주에게 얼마나 상처를 주는 말인지 학기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야만 용주가 가정에 충실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학기 본인을 위한 일이라 생각했지만 결국 용주를 위한 일이었다.
한동안 연락이 없던 용주가 설날 연휴를 지내고 얼마 있지 않아 다시 학기의 일상으로 침범했다. 이제는 전화가 아니었다. 학기의 자취방 앞 전봇대에 기대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학기는 용주를 보자마자 뒤돌아 발걸음을 옮겼다.
자꾸만 용주가 눈에 밟혔다. 한 달 남짓 지났을 뿐인데 얼핏 본 용주가 수척해 보이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이 너무 안쓰러웠다. 학기 자신보다 용주가 훨씬 더 괴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일이 손에 안 잡힐 정도로 머릿속에 용주 생각밖에 없었으니 용주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학기는 다시 발길을 돌리지 않았다. 학기 본인도 그렇고 용주도 이겨내야 하는 일이었다. 학기와 용주에게 주어진 새로운 숙제였다. 이전의 숙제가 하얀 종이 위에 알록달록 예쁜 그림으로 채워나가는 것이었다면, 새로 주어진 숙제는 그것을 눈물로 조금씩 지워나가야 하는 것이었다. 처음은 잘 지워지지 않아 얼룩이 지고 뭉개져서 엉망이겠지만 그렇게 계속 지워가다 보면 색이 바래고 점점 희미해질 것이 분명했다.
학기는 지하철을 타고 다시 회사 근처로 가서 모텔에 투숙했다. 용주의 성격으로 봐서 며칠은 계속 기다릴 터였으므로 일주일 정도는 이곳에서 머물러야 할 것 같았다.
대충 씻고 침대에 누워 담배를 피워 문 학기의 입에서 담배 연기가 한숨처럼 새어 나왔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사랑하니까 헤어진다는 말이 나올 때마다 학기는 비웃었다. 사랑하는데 왜 헤어지냐고, 사랑이 끝난 것을 감추기 위한 변명이라고 생각했다. 사랑을 한다면 끝까지 그 사랑을 이어가기 위해 온갖 지랄을 다 해야 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사랑하는데, 너무 사랑하는데, 사랑하니까 헤어져야 한다는 것을 학기는 몸소 체험하고 있었다. 그 사랑이 불륜으로 변질되어 추악해지기 전에 그만 두는 것이 옳은 일이었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결혼은 개인의 결합이 아니라 집안과 집안의 결합이었으므로 사랑 어쩌구하는 개인적인 감정이 개입될 소지가 전혀 없었다.
그런 면에서 학기는 자기보다 용주가 유리한 측면에 놓여 있다고 생각했다. 자기는 이별의 후폭풍을 혼자서 감내해야 하지만 용주는 옆에 법적으로 공인된 배우자가 있고, 그 사람에게서 새로운 생명이 탄생한다면 훨씬 극복하기가 쉬울 것 같았다. 가족 중심의 대한민국 사회에서 용주는 처자식을 먹여 살리는 가장이 되어 책임감 있는 삶을 살 것이었다. 학기는 용주가 그러한 사람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러므로 용주를 사랑하지만 용주를 위해 헤어지는 것이 백만 번 옳은 일이었다.
학기는 일주일 만에 집으로 돌아갔다. 용주가 보이지 않았다. 전화도 없는 것을 보니 용주도 학기의 마음을 아는 것 같았다. 마음이 편할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사랑하니까 헤어지는 일은 학기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지만 어쩔 수 없이 헤어질 수밖에 없어서였다. 사랑만으로 따진다면 용주 옆의 배우자는 학기여야 했다. 그러나 법이, 제도가, 사회적 통념이 그것을 막고 있었다.
학기가 용주를 두 번째 만나는 날, 유행가 가사 속의 주인공이 되어 하늘의 구름이 솜사탕인 것마냥 하늘에 뛰어 오르고 싶었던 것처럼 용주를 단념해야 하는 시점에서도 유행가 가사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용주 곁을 떠나는 것을 후회할지도 모르지만 용주를 사랑하기 때문이고, 용주만을 사랑하는 걸 잊을 수는 없지만 슬픔 속에 용주를 지워내야 했다. 학기는 마음속으로 유행가의 마지막 가사를 읊조렸다.
‘사랑하는 그대여 안녕....’
학기는 용주를 슬픔 속에 지워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것은 곧 일상에 충실하는 것이었다. 아침엔 우유 한 잔과 간단한 토스트로 때우고, 점심은 구내식당에서 맛나게 먹었으며 저녁은.... 역시 구내식당에서 해결했다. 일에 매진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이 최선이었다.
사무실 안에서는 언제나 활기차게 일을 했고, 동료들과 담배를 피우면서는 짐짓 호탕한 웃음으로 즐겁게 세상을 산다는 걸 과시했다. 여직원들과도 사이좋게 지냈다. 탕비실에서 커피를 타며 우스갯소리로 즐거운 분위기를 만드는 것은 물론이고, 말단 여직원이 정수기 물통을 갈고 있을 때면 재빨리 달려가 단번에 정수기 구멍에 물통 꼭지를 쑤.셔 박았다.
회식 자리에서도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충실히 했다. 2차로 단란하게 놀 수 있는 곳에 가면 중앙홀 무대 위에서 커다란 덩치로 춤까지 춰가며 노래를 불렀다. 울림통이 커서 학교 다닐 적 음악 교사로부터 성악을 해보는 게 어떠냐고 진지하게 제안을 받기도 했고, 음주가무에서 주만 빼고는 다 좋아하는 학기였으므로 분위기를 띄우는 데에는 제격이었다.
그런데 학기의 문제는 회식자리에서 터졌다. 2분기를 마감하는 회식이라 꽤나 더운 날이었다. 학기가 술이 약하고, 술을 마시지 않아야 2차에서 더욱 즐겁게 노는 것을 사무실 직원들도 다 아는지라 학기는 완전히 맨정신이었다.
그날도 학기는 2차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무대로 소환 당했다. 학기는 무대로 나가 번호를 누르고 마이크에 대고 큰 소리로 외쳤다.
“김밥에 김이 없대~~~~!!!”
학기는 반주에 맞춰 랩을 하며 춤을 췄다. 유승준의 열정이었다. 군대 문제로 시끄럽기 전이어서 2000년 여름에 분위기를 띄우는 데는 유승준이 딱이었다. 무엇보다 학기가 제대로 댄스가수의 안무를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할 수 있는 노래이기도 했다. 용주 때문이었다.
용주가 청첩장을 학기에게 건네기 얼마 전이었다. 늘 그랬듯이 학기는 용주를 만나기 위해 집을 나섰다. 약속 장소는 용주가 근무하는 학교였다.
“애들이 소풍 때 장기자랑 연습한다고 하는데 짜장면이라도 사줘야지.”
이것이 용주가 학교로 약속 장소를 정한 이유였다. 교실에는 예닐곱의 학생들이 책상과 의자를 다 밀어 놓고 앞에 놓인 TV 화면을 보며 한창 춤 연습을 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연습을 잠시 멈추고 학기를 슬쩍 쳐다보고는 누구냐고 물었다.
“선생님 애인.... 짜장면 올 때까지 계속 해.”
학생들은 용주의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이고 계속 연습을 했다. 오랜만에 중학교에 온 학기는 모든 것이 생소했다. 옛날 학기가 학교를 다닐 때와는 엄청 달라져 있었다.
“형.... 교실에 TV도 있네.”
“촌스럽게.... 우리는 그냥 앉아서 구경이나 하자.”
그러나 학기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너무 신이 나서 어깨가 저절로 들썩였다.
“나도 학교 다닐 때 우리반 대표로 장기자랑 나갔는데....”
“진짜?”
“응. 수학여행 갔을 때.... 소방차 노래했거든. 내가 정원관 역할이었어.”
“하하하하 어울려 어울려....”
교실에 둘러앉아 짜장면을 먹으면서 학기가 학생들에게 물었다.
“니네들.... 선생님 좋니?”
학생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네.”
학생들이 엄지척을 하는 것을 보고 학기가 제안을 했다.
“그래서 말인데.... 장기자랑 나가면 1등해야 되잖아.... 니네 선생님이랑 같이 하는 건 어때?”
“미쳤냐?”
용주가 학기에게 발끈했으나 학생들까지 말릴 수가 없었다. 학생들은 짜장면과 탕수육을 다 먹어 치운 뒤 다시 책상을 밀어 놓고 연습을 했다. 자기네들끼리가 아닌 용주와 함께였다. 학생들과 학기가 떠미는 통에 용주도 어쩔 수 없이 TV화면을 보며 동작을 따라했다. 유승준의 열정이었다.
용주가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학기도 함께 따라했다. 학기가 뚱뚱한 몸이어도 제법 잘 따라하는 것을 보고 용주도 노래 제목처럼 열정을 다해 연습을 했다. 학기도 진심으로 용주네 반이 1등을 할 수 있도록 역시 열정을 다해 같이 춤을 추며 용주를 도왔다. 한 번 꽂히면 그것만 하는 용주답게 진심을 다해 연습을 하고, 소풍 당일에는 유승준처럼 머리까지 밀고 가서 모자를 던지는 퍼포먼스를 보여주어 1등을 했다고 학기에게 자랑을 했다.
그렇게 학기는 용주와 함께 연습을 하던 것처럼 열정을 다해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용주를 지워내기 위한 몸부림이었지만 그것마저도 용주와 연결이 되는 역설적 상황이었다. 학기의 마음은 썩어 들어가는데, 그것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학기의 거대한 춤사위에 박수를 치고 웃으며 즐거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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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과 개인의 결합이아니라 가족, 사회와 타협해야하는 그 결혼 문화가...다들 어머니, 여자들에게서 부모 자식간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의식이라는..
집안을 보고 상대 배경이라고 아니면 학벌이나 우수한 재원이라던가.... 사랑의 또 하나의 걸림돌 같다는.... 언제나 달라지려나...
좋은건 망치고 소중한건 놓쳐버린다는.........(이승한의 노래 "내게만 일어나는 일"이란 노레 듣고 있습니다..)-
내게만 허락되지 않는 영원한 나의 사랑' 이라는..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