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는 기차가 없다 -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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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2년 전, 정동진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용주는 먼저 제주도로 건너갔다. 그리고 한 달에 한두 번 금요일 저녁 비행기로 와서 일요일 밤 비행기로 돌아갔다. 학기도 가끔 제주도에 가려고 했으나 용주가 한사코 말리는 바람에 가지 못했다. 집이 팔리지 않았고, 용주가 돈을 절약하느라 고시원 같은 곳에서 생활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금요일에 출발하여 일요일에 돌아가는 비행기는 학기가 움직이는 것보다 용주가 움직이는 것이 표를 구하기도 쉽고 가격도 저렴했다.
“너 오면 구경시켜 주려고 내가 좋은 곳을 물색하고 있어. 휴가 때 원 없이 돌아다니자. 그때까지만 참아.”
용주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학기는 용주와 함께 하는 첫 제주도 여행을 위해 여름휴가가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휴가 일정이 잡히자마자 첫날 아침 비행기로 예약을 해 둔 터였다.
휴가가 시작되는 전날, 학기는 퇴근을 하자마자 짐을 쌌다. 여행을 처음 가는 것도 아닌데 시간이 제법 많이 걸렸다. 짐을 거의 다 쌌을 무렵 용주에게 전화가 왔다.
“짐은 다 쌌어?”
“거의 다 쌌어. 빨리 내일이 왔음 좋겠는데....”
“나두 그래. 내가 공항에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게. 너 제주도 처음이니까 출구 나오면서부터 내가 안내해야 하지 않겠어?”
“형이 내 가이드니까 당연히 그래야지.... 형 보고 싶다....”
“나두.... 비행기 예약은 니 이름으로 해놨으니까 항공사 창구에 가서 신분증만 보여주면 돼.”
함께 여행을 갈 때 예약을 하고 일정을 짜는 것은 용주가 담당했으므로 학기 혼자 제주도에 가는 비행기도 용주가 예약을 했다. 제주도 일정이 끝나면 함께 돌아와 용주의 방학이 끝날 때까지 같이 있을 예정이었다.
“내가 애야? 진짜 선생 아니랄까봐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쳐.”
“너 혼자 비행기 타는 거 처음이잖아.... 이번에 처음이 많네. 제주도 여행도 처음, 비행기 혼자 타는 것도 처음....”
학기는 혼자 간직하고 있다가 제주도에 가서 터뜨리려고 했던 것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나 처음으로 바텀 해 볼래. 아프다고 욕 안 하고 형 쌀 때까지 받아 볼 거야.”
“진짜?”
“응. 할 수 있을 거 같애.”
“더 기대되네.... 설레서 오늘 밤 못 잘 거 같애....”
“안 돼. 빨리 자. 나도 빨리 잘 거야. 그래야 내일이 빨리 오지.”
“그래, 우리 빨리 자자. 그럼 잘 자고 내일 봐.”
“응. 형도....”
학기는 너무 설레서 잠을 설치다 새벽녘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늦지 않게 일어난 것이 기적일 정도였다. 학기는 공항으로 달려가 9시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잠시 졸았다가 눈을 뜨니 비행기 창으로 낯선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제주도였다. 비행기에서 내려 캐리어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용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들리기도 전에 용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비행기 내렸어?”
“응. 근데 짐이 안 나와. 씨.발 조ㅈ나 짜증나. 형 빨리 보고 싶은데....”
“릴렉스 릴렉스.... 여행 첫날부터 짜증내면 안 돼. 출구에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짐 나오면 바로 나와.”
학기는 캐리어가 나오자마자 출구로 달려 나갔다. 첫눈에 용주가 보였다. 용주가 들고 있는 휴대폰에 커다란 글자가 흐르고 있었다.
- 사랑하는 정학기 어서와~ 제주도는 처음이지?
학기는 냉큼 달려가 용주를 끌어안았다. 다른 사람의 시선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고객님의 제주도 여행을 책임질 이용주라고 합니다. 정학기 고객님.... 담배부터 피시죠.”
용주는 학기를 데리고 흡연 장소로 향했다. 담배를 피워 물고 용주가 학기에게 한 마디를 던졌다.
“공항 풍경부터 다르지?”
“응. 우리나라 안 같애.”
“그치?”
용주는 학기의 캐리어를 끌고 앞장을 섰다. 버스정류장을 지나 횡단보도를 건너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반짝반짝 윤이 나는 그랜저 앞에서 학기에게 외쳤다.
“서프라이즈~~!!”
차량에는 그 어떤 스티커도 붙어 있지 않고 번호판도 ㅎ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었다.
“형 뭐야~~~~ 차 샀어?”
“응. 제주도 살면 이 정도는 있어야지.”
“언제 샀어? 왜 말 안 했어?”
“너 놀래켜 주려고.... 출고한 지 며칠 안 됐어. 그래서 완전 새 차야. 좋지?”
“조ㅈ나 좋아. 이게 형 차라니....”
“우리 차야.... 너도 여기 와서 살면 같이 몰고 다닐 거니까.... 그때부터 할부금 반띵. 오케이?”
“씨.발 수학선생도 아니면서 조ㅈ나 계산적이야.... 오케이. 됐냐?”
학기와 용주는 서로를 바라보며 밝게 웃었다. 용주가 트렁크를 열고 학기에게 재촉했다.
“빨리 짐 실어. 나 배고파. 너도 아침 안 먹고 출발했을 거 아냐. 밥부터 먹으러 가자.”
용주가 학기를 데리고 간 곳은 고기국수로 유명한 맛집이었다. 학기는 음식이 나오자마자 탄성을 질렀다.
“국수에 고기 있는 거 처음 봐.”
학기는 크게 한 젓가락을 떠서 후루룩 들이마시듯 면치기를 했다.
“우와~~ 진짜 맛있어.”
“너 좋아할 줄 알았어. 나도 처음 먹고 너처럼 그랬으니까....”
식사를 마치고 담배를 피우며 학기가 물었다.
“어디부터 가는 거야?”
“오늘은 해안도로 따라서 반시계방향으로 제주도를 한 바퀴 돌 거야. 제주도는 바다 색깔부터가 달라. 가는 곳마다 다 달라. 어쩌면 너도 보자마자 푹 빠질지도 몰라.... 내일부터는 내가 점찍어 놓은 데를 하나씩 다닐 거야. 올레길도 같이 걸어보고....”
“어디서 자는 건데?”
“오늘은 제주 시내에 좋은 호텔 잡아놨어. 제주도 한 바퀴 돌고 나서 저녁 먹고.... 정학기 똥꼬도 따먹을 거야. 조ㅈ나 기대돼.”
“나두....”
용주는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학기가 안전벨트를 매자마자 소리쳤다.
“오빠~~~ 달려~~~!!”
새로 뽑은 용주의 자동차가 미끄러지듯 주차장에서 빠져 나와 도로를 달렸다. 이호테우 해변을 지날 때부터 학기가 탄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용주도 신이 나서 학기에게 말했다.
“그럴 줄 알았어. 내가 여기에서 살자고 한 거 이해되지?”
“응. 완전 좋아.”
“이제 시작이야.”
외도초등학교를 지날 때 용주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바로 저기 해미안이라고 목욕탕이 있는데, 바다 옆에 있어서 엄청 좋아. 저기도 갈 거야.”
일주도로를 달리던 용주는 애월 해안도로로 접어 들었다. 바다 옆을 달리다 보니 학기가 또 탄성을 질러댔다. 용주의 차는 돌염전을 지나 계속 해안도로를 달렸다. 그리고 다락쉼터에 차를 세웠다.
“여기서 담배 한 대 피고 가자.”
학기와 용주는 차에서 내려 바다를 바라보며 담배를 피웠다. 자전거를 탄 남녀 커플이 지나갔다.
“여기 자전거 길도 좋지?”
“응.”
“너도 와서 살게 되면 우리도 자전거 타고 돌아다니자.”
“나 자전거 못 타는데....”
“나도 못 타. 근데 배우면 되잖아. 이제 우리 운동도 좀 하고 살자. 벌써 우리 50대야.... 너도 이제 살 좀 빼. 그 나이에 당뇨가 뭐냐?”
“형이나 걱정해. 콜레스테롤 약은 매일 잘 먹고 있지?”
“응.... 너 오면 담배도 끊을 거야.”
“될까 싶긴 하지만.... 우리 같이 시도는 해 보자.”
용주는 다시 차를 몰았다. 학기는 고개를 돌려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고내포구를 지나자마자 학기가 소리쳤다.
“형~~ 물이 맑아서 바다 아래로 현무암이 다 보여. 바다 색깔도 장난이 아냐. 저기 봐~~ 너무 이쁘잖아.”
“어디 어디?”
“저기 저기....”
“우와~~ 진짜 그러네....”
언제나 그랬듯이 학기와 용주는 같은 곳을 바라보며 느낌을 공유했다. 기차를 타고 여행을 다닐 때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함께 보는 것이 습관처럼 되었기 때문이었다.
“으아~~~~악!!”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차가 멈춰 섰다. 학기가 정신을 차렸을 때 상황은 이미 벌어진 이후였다. 사이렌 소리가 시끄러웠다. 학기는 차가 아닌 다른 것에 누워 있는 것을 깨달았다.
“정신 드세요?”
주황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학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학기는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키며 소리를 질렀다.
“형~~~ 우리 형은요? 저랑 같이 차 타고 있던 사람....”
다른 들것 하나가 구급차로 향하는 것이 보였다. 거기에 용주가 누워 있었다. 학기는 벌떡 일어나 달려가려 했으나 구조대의 제지에 막혀 갈 수가 없었다. 그저 용주가 구급차에 실려 떠나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괜찮으세요?”
학기는 몸을 움직여 봤다. 몸이 뻐근하긴 했으나 움직이는 데에는 전혀 무리가 없었다.
“네.”
학기는 들것에서 내려 차에 다가갔다. 엔진룸이 박살이 나 있었다. 학기가 앉아 있던 조수석에 에어백이 터져 있었다. 그런데 운전석에는 그런 흔적이 전혀 없었다.
학기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학기도 사고 차량에 함께 있었으므로 방사선 촬영 등의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학기의 머릿속에는 용주밖에 없었다.
용주는 응급실에 누워 있었다. 응급한 상황이었다. 의식이 없었다. 담당의사가 학기에게 수술이 필요한 상황이라 했다.
“보호자 되십니까?”
“네.”
“수술 절차를 밟아야 되니까 저 분 따라가셔서 서류 작성하시죠.”
학기는 직원의 안내에 따라 테이블에 앉아 여러 서류들을 받았다. 환자 본인이 작성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용주가 의식이 없으니 보호자가 대신 하는 것이었다. 학기는 용주의 인적 사항을 적고, 평소의 건강 상태와 같은 내용도 빠짐없이 적었다.
“환자분이랑 어떤 관계신가요?”
학기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친굽니다.”
간단히 대답을 하고 사인을 하려는 찰나 직원이 제지를 했다.
“다른 보호자분은 없나요?”
학기는 의아한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제가 보호자라니까요. 제가 사인하면 되잖아요.”
“친구분이라면서요? 제가 말하는 보호자는 가족을 말합니다. 배우나자 직계존비속 가족이요.”
“제가 가족이고 배우자나 마찬가집니다. 저랑 같이 살아요.”
용주가 제주도에 먼저 내려와 살고 있었지만 전입신고를 하지 않아 주민등록상으로는 여전히 같은 집에 살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학기는 주민등록증을 보여주며 주소가 같은 것을 직원에게 확인시켰다.
“동거인은 안 됩니다. 진짜 가족의 확인이 필요합니다.”
학기는 교통사고의 충격이 지금에야 온 것처럼 머리가 지끈거렸다.
“저랑 10년 넘게 한 집에 같이 살았어요.... 저랑 24년을 함께 한 사람이에요. 가족보다 더 가까이 지내왔어요. 진짜 가족은 저라구요.... 여기 나와 있는 대로 제가 다 책임질 게요. 수술비용도 제가 다 부담할 겁니다.... 여기에 사인하면 되는 거죠?”
“안 됩니다.”
지극히 사무적인 대답에 학기는 하는 수 없이 용주와의 관계를 솔직하게 밝혔다.
“제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부부랑 같아요.”
학기는 휴대폰에 저장된 사진을 직원에게 보여줬다. 턱시도를 입고 손을 맞잡은 사진이었다.
“이거 보세요. 우리가 어떤 사인지 이 사진이 증명하지 않습니까.”
“지금 급합니다. 빨리 환자 가족분에게 연락하세요. 연락되면 저한테 알려 주시구요.”
직원은 테이블에 널린 서류들을 수습했다. 학기는 직원의 손을 잡고 애원을 했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제가 보호자고 진짜 가족이라니까요. 사진 보셨잖아요. 급하다면서요. 제가 사인하면 되잖아요.”
“그 마음은 알겠는데....”
학기가 소리를 질렀다.
“그 마음을 알면 빨리 사인하게 해 주고 수술해 주세요. 사람 목숨이 중요하지 이딴 서류에 가족이든 아니든 누가 사인하는 게 뭐가 중요해요.”
“의료법상 안 됩니다. 빨리 다른 가족분에게 연락하세요. 그럼 이만....”
학기는 망연자실하여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 지난 20년이 넘는 세월을 용주만 바라보며 살아온 학기였다. 용주가 없는 삶은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런 용주가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학기는 모두가 자기 잘못인 것 같아 괴로웠다. 운전에 방해되지 않게 입 닥치고 풍경만 바라봐도 될 것을 손가락을 가리키며 같은 곳을 보도록 종용했던 것이 후회가 되었다. 하지만 때늦은 후회일 뿐이었다.
시간을 돌리고 싶었다. 용주가 여행의 마지막 날마다 황진이의 시조를 인용하며 밤 시간을 길게 길게 늘이고 싶다고 했던 것처럼, 슈퍼맨이 빛의 속도로 지구의 자전 방향과 반대로 돌아서 시간을 거꾸로 되돌려 연인을 구했던 것처럼 학기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용주를 구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할 수가 없었다. 황진이처럼 시를 잘 쓰지도, 슈퍼맨처럼 초능력이 있지도 않았다. 그저 당뇨 증세로 손발이 저린 뚱뚱한 아저씨일 뿐이었다.
용주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고 자부하던 학기였다. 누군가 용주 대신 죽을래? 하면 1초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도 있었다. 용주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사경을 헤매는 용주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용주가 죽음의 문턱에서 꺼내달라고 소리치는데 그 어떤 도움도 줄 수가 없는 존재였다.
사랑한다는 것은 추상적인 단어일 뿐, 냉혹한 현실 앞에서 대신 죽어줄 수도 없고, 수술동의서에 휘갈긴 사인은 그 어떤 효력도 발생시키지 못하는 무용지물에 불과했다. 아니 사인을 하는 행위마저도 거부를 당했다. 20여년을 함께 살아온 실질적인 배우자라고 아무리 항변을 해봤자 그것은 학기와 용주가 개인적으로 부여한 의미였을 뿐, 바람이 나서 수십 년을 떨어져 사는 형식적인 부부만도 못한 것이었다.
학기는 어느 영화제작자가 동성애인과 결혼식을 올리는 기사를 보고 용주에게 비아냥거리듯 말한 적이 있었다.
“왜 이러는지 모르겠네. 우리처럼 그냥 조용히 살면 되잖아. 꼭 이렇게 티를 내고 살아야 되나? 이러니까 괜히 욕 듣고 똥물도 뒤집어쓰는 거잖아.”
용주가 학기를 달래는 듯이 말했다.
“너무 그러지마. 우리도 웨딩사진 찍고 난리 부르스를 쳤잖아.”
“우리는 우리끼리만 한 거니까 얘네들이랑은 다르지. 결혼식에 혼인신고까지 한다고 그러잖아. 안 되는 거 뻔히 알면서 말야. 그거 다 형식인 거잖아. 실질적인 게 중요하지 형식적인 게 뭐가 중요하냐고.”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거지. 우리가 사진 찍고, 주민등록등본에 같이 이름 올려서 부부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야.”
“그래두.... 안 되는 거 알면서 괜히 억지 부리는 것 같잖아. 그래서 이슈가 돼 가지고 싸잡아서 욕 듣는 빌미만 주고 말야.... 댓글 좀 봐.... 진짜 싫어....”
학기는 함부로 지껄였던 지난날의 자신을 후회했다. 함께 동참하지는 못할망정 욕부터 했던 것을 반성했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우리만 좋으면 된다며 살았던 지난날들의 결과는 사랑하는 사람의 수술동의서에 사인도 못하는 현실이었다. 20여년을 함께 하면서 다져온 사랑은 형식을 강요하는 현실 앞에서 그 어떤 힘도 발휘하지 못했다.
용주는 응급조치만 받고 더 이상의 조치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의식을 잃은 채 가만히 누워만 있는 용주를 학기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자책감이 폭풍처럼 밀려왔다.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는 용주의 모습은 학기의 가슴을 갈가리 찢어 놓았다. 너무 답답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이 아팠다.
용주 옆에 있어봤자 학기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으므로 학기는 병원 건물을 빠져 나와 담배를 꺼냈다. 빈 갑이었다. 편의점에서 담배를 사기 위해 지갑을 꺼내드는데, 카드 옆에 꽂아둔 명함 뭉치가 보였다. 학기는 모아 둔 명함을 모두 꺼내 찾기 시작했다. 용주에게 선물을 받고 오랜 기간 사용하던 지갑에는 용주의 셋째 누나가 건넨 명함이 들어 있었다.
용주의 누나에게 연락이 가면 곧바로 수술에 들어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학기의 의도와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일이 흘러갔다. 용주는 응급헬기에 실려 학기가 사는 대도시의 대학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의료진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학기도 대도시로 돌아와야 했으므로 용주 누나의 말에 동의했다.
수술동의서에 용주 누나의 사인이 적히자마자 용주는 수술실로 들어갔다. 일련의 과정들은 용주 누나의 남편, 그러니까 용주의 셋째 매형이 의사라서 벌어진 일이었다. 대수술인지라 시간이 상당히 오래 걸렸다. 학기는 수술실 문 앞에서 머리를 싸매고 앉아 기다렸다.
그러는 동안 용주의 다른 가족들도 병원에 찾아왔다. 셋째 누나에게 대략의 사정을 들은 사람들은 학기에게 따지듯이 누구냐고 물었다. 학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용주의 큰 매형이 학기에게 처남은 사경을 헤매는데 너는 왜 말짱하냐고 따지듯이 물었다. 학기도 그것이 궁금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차를 타고 사고가 났는데, 사랑하는 사람은 수술실에 있고 자기는 멀쩡한 몸으로 타박을 듣고 있는 현실이 너무 괴로웠다.
아무 말도 못하는 학기는 용주의 매형들에게 멱살도 잡혔다. 덩치가 커서 위로 들리지 않았지만 학기는 멱살이 잡힌 채로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결국 셋째 누나가 나서서 식구들을 말리며 소리를 질렀다.
“지금까지 용주한테 관심도 없었으면서 지금 와서 왜 이래? 용주가 우리한테 말도 못하고 어떻게 살았는지 알아?
셋째 누나의 말이 억지로 참고 있던 학기의 눈물샘을 터뜨렸다. 학기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통곡을 했다.
- 마지막 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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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우리만 좋으면 그만이라 생각하지만 세상은 우리에게 냉혹한 현실인거죠.
제 주변에도 같이 살던 분을 떠나 보내고 가족들에 의해서 쫓기듯 나온 지인이 있는 데
이게 현실의 벽인거겠죠?
많이 아프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