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는 기차가 없다 - 마지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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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12시간에 가까운 수술이 끝나고 마취가 풀려도 용주는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중환자실에서 나와 일반병실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조바심을 내는 학기에게 함께 병실을 사용하는 다른 보호자들이 일주일을 넘기는 경우도 있고 한 달 만에 깨어나는 경우도 있다고 해서 학기는 억지로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학기는 휴가 일주일을 꼬박 병실에서 용주의 곁을 지켰다. 그래도 용주는 깨어나지 않았다. 남편을 의사로 둔 용주 셋째 누나의 주선으로 간병인을 구했다. 출근을 해서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야 병원비도 대고, 용주가 깨어났을 때 재활치료를 병행하며 먹고 살 수 있었다.
한 달이 지나고, 반년이 지났다. 그래도 용주의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다. 호흡기가 없어도 숨을 쉬고, 신진대사가 이뤄졌다. 아주 깊게 잠을 자는 것 같았다. 그와 반대로 학기는 쉽사리 잠을 잘 수 없었다.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에 입을 대기 시작했다. 낮에는 일을 하느라 그나마 버틸 수 있었지만 용주의 곁에서 지내는 밤시간에는 도무지 맨정신으로 있을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소주 한 잔 두 잔이던 것이 점점 늘어가 한 병이 되는 데까지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술이라도 마셔야 그나마 잘 수가 있었다.
가끔 찾아오던 용주의 가족들은 반년이 지나도록 용주가 깨어나지 않자 발길을 뚝 끊었다. 그나마 셋째 누나만이 발길을 끊지 않았다. 아주 가끔 찾아와 변함없는 용주의 상태를 살폈고, 학기를 위로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올 무렵, 용주의 셋째 누나가 한 달 만에 찾아왔다. 의사 남편을 대동해서였다.
“학기 씨.... 학기 씨를 위한 거니까 오해하지 말고 들으세요. 어찌 보면 용주를 위한 것일 수도 있고....”
학기는 다음 말을 잠자코 기다렸다.
“학기 씨가 벌써 몇 달째 이러고 있는 거 안쓰러워서 말하는 건데요....”
누나가 이렇게 운을 띄워 놓고 정작 하고 싶은 말은 의사인 매형이 말했다.
“의사로서 말을 하는 건데요, 이제 가망이 없어 보입니다. 더 이상 희망고문을 스스로 하지 마시구요, 보내주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듭니다. 장기기증을 하면 여러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처남도 가치 있는 삶을 사는 게 됩니다.”
용주 매형의 말에 이어서 서류를 들고 있던 직원이 장기기증의 과정에 대해 학기에게 재차 설명을 했다. 학기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지만 이 사람들도 나름 고민을 많이 했겠다는 생각에 끝까지 들어주기는 했다. 그런데 직원의 마지막 말이 학기의 눈을 돌아가게 만들었다.
“서류에 가족 분들이 다 사인을 하셨습니다. 조만간 일이 진행될 겁니다. 그동안 마음 정리를 하시는 게 좋을 듯 하네요.”
“네?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마음 정리를 하시라고....”
“그게 아니라 가족들이 사인을 했다구요?”
“네, 이렇게....”
직원은 학기에게 관련 서류들을 보여줬다. 학기는 그것들을 발기발기 찢으며 소리를 질렀다.
“누구 맘대로? 이용주 곁에 있는 사람은 난데 누구 맘대로? 무슨 권리로? 가족이면 다야? 그동안 가족이랍시고 한 게 뭔데? 병원비도 내가 다 냈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학기를 향해 용주 매형도 소리를 질렀다.
“누가 그걸 몰라서 그래? 우리도 그거 아니까 지금 당신한테 상의를 하는 거 아냐. 지금 어디라고 누구한테 반말로 소리를 지르고 지랄이야?”
학기가 분을 참지 못하고 용주 매형의 멱살을 잡고 악을 썼다.
“지금 이게 니네들끼리 작당해서 나한테 통보하는 거지 상의를 하는 거야? 절대 안 돼. 형한테 손끝 하나 건드리면 가만 안 둬.”
용주 매형도 학기의 멱살을 잡았다.
“가만 안 두면 어떡할 건데?”
“형 대신 니 배 갈라서 장기 다 팔아먹고, 니 창자로 줄넘기할 거야.”
결국 또 용주 누나가 뜯어 말렸다. 학기는 누나에게도 섭섭함을 토로했다. 누나는 학기에게 변명을 했다.
“학기 씨도 우리랑 같은 생각일 줄 알았어요. 산 사람은 살아야 되니까....”
“형이 죽었습니까? 뇌사 판정을 받은 것도 아니잖아요. 제 앞가림은 제가 합니다.”
“벌써 8개월이에요. 이쯤 되면....”
학기는 누나의 말을 끊었다.
“형.... 그냥 자고 있는 거에요.... 그리고.... 남자 구실도 해요....”
학기는 출근 전 간병인과 교대를 할 때 가끔 아침 발기를 하고 사정을 한 흔적도 있다는 것을 말했다. 그 말에 누나도 설득을 포기했다. 그러나 병원 직원은 쉽게 포기를 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 직원의 일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정말 집요하다 싶을 정도로 학기를 괴롭혔다.
그렇게 살려 달라고, 수술을 해 달라고 사정 사정을 해도 가족이 아니라고 학기의 호소를 들어주지 않았으면서 죽이려 할 때는 오히려 학기에게 호소를 했다. 학기를 무시하고 가족들끼리 작당을 해서 어떻게 할 수도 있었지만 일말의 양심은 있어서 용주를 법대로 처리하지 않고 학기의 눈치를 봤다. 학기는 오히려 그것에 감사해야 할 지경이었다.
학기는 직원의 집요한 설득에 지쳐 버렸다. 결국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학기는 용주를 데리고 병원을 탈출했다. 미리 물색해 둔 병원으로 용주를 옮겼다. 절차상에 문제가 있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병원끼리 알아서 할 일이고, 학기는 용주와 둘이서만 있고 싶었기에 벌인 일이었다.
바다가 보이는 그리 크지 않은 병원이었다. 게다가 1인실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방해를 전혀 받고 싶지 않았다. 병원에서도 딱히 해 줄 것이 없었기 때문에 학기가 퇴근을 해서 간병인과 교대를 하고 난 이후의 시간은 오로지 학기와 용주 둘만의 것이었다.
학기는 용주의 아랫도리를 모두 벗기고 자기도 옷을 모두 벗었다. 그리고 용주의 다리를 들어 항문을 핥았다. 그 다음, 젤을 바르고 귀두를 항문에 문질렀다. 미친 짓이라는 것을 학기도 잘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라도 하고 싶었다. 그러지 않으면 용주와의 관계가 너무나 무의미했다.
영화 ‘킬 빌’에서 우마 서먼이 총상을 입고 병원에서 의식이 없을 때 나쁜놈들이 겁탈을 하던 장면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우마 서먼이 깨어났듯이 학기도 용주와 섹스를 해서 용주가 깨어나기를 간절히 바랐다.
학기는 용주의 항문에 자지를 넣었다. 하지만 몇 번 움직이지도 못하고 그만 뒀다. 더럽고 냄새도 났기 때문이었다. 학기는 그제야 용주와 함께 하는 동안 용주가 얼마나 깨끗하게 관리를 했는지 깨달았다. 저절로 눈물이 흘러 내렸다.
며칠 후 학기는 또 한 번 용주의 아랫도리를 벗겼다. 그리고 자지를 잡고 빨기 시작했다. 시간이 오래 걸렸으나 신기하게도 용주의 자지가 발기를 했다. 학기는 용주의 자지에 젤을 듬뿍 바르고 그 위에 올라앉았다.
“씨.발.... 형.... 조ㅈ나 아파....”
그래도 끝까지 내려앉았다. 그날 사고만 나지 않았더라도 용주의 자지가 들어왔을 터였다. 학기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기의 자지를 마구 흔들었다. 항문 안쪽에서 찌릿한 느낌이 들고 평소보다 훨씬 강한 사정감이 올라왔다. 오래지 않아 학기의 자지에서 정액이 터져 나와 용주의 배를 적셨다.
“나.... 엄청 좋았는데.... 형도 좋았지?”
학기는 정말 오랜만에 살아있음을 느꼈다. 학기에게 처음으로 남자구실을 한 용주도 기쁠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학기는 심장이 터질 것 같이 아프고 미칠 것 같이 머리가 지끈거릴 때는 용주의 아랫도리를 벗기고 자지 위에 내려 앉아 사정을 했다.
다시 여름이 찾아왔다. 휴가를 받은 학기는 간병인에게도 휴가를 주기 위해 자기가 병실을 지켰다. 1년이 지나도록 학기는 깨어나지 않았다. 그동안 두어 번의 해프닝이 있었을 뿐이었다. 용주가 갑자기 눈을 뜨는 바람에 벌어진 일이었다. 학기는 감격에 겨워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는데, 담당 의사는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간혹 그런 일이 있습니다.”
의사는 용주의 눈에 빛을 비추며 말했다.
“동공반사가 안 보이죠? 의지에 의한 게 아닙니다.”
그래도 학기는 용주가 눈을 뜰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1년이 지나면서부터 학기도 점점 무감각해졌다. 하지만 매일 매일 팔다리를 주무르고 휠체어에 태워 산책을 하는 일은 한 번도 거르지 않았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자리 잡은 병원은 전망이 좋아서 학기는 용주를 앞장 세워 늘 바짝 붙어 휠체어를 밀고 산책을 다녔다.
“담배 피우고 싶다구? 저기 벤치에서 담배 피자. 형이 앞장 서.”
학기는 휠체어를 밀면서도 항상 용주가 원하는 것처럼 질문을 하고 용주를 앞장 세웠다. 용주가 가는 길에는 언제나 학기가 바짝 붙어서 뒤따라갔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찾아왔다. 학기는 노란 은행잎이 깔린 길을 용주를 앞장 세워 걸었다.
“올해도 단풍 구경 못 갔네.... 내년에는 꼭 갔으면 좋겠어. 어디가 좋을까? .... 장항선 타고 예산성당 갔음 좋겠어. 형이 고풍스러운 성당 건물이랑 단풍이랑 엄청 잘 어울린다고 그랬잖아....”
겨울이 왔다. 병원에서 보내는 두 번째 겨울이었다. 유난히도 매서운 추위가 몰려왔다. 추위를 그다지 타지 않는 학기도 견디기 힘들 만큼 추웠다.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도 학기는 설레지 않았다. 바람이 불어 벚꽃잎이 흩날리는 날, 학기는 용주를 앞장 세워 산책을 하고 꽃비를 맞으며 담배를 피웠다.
“형이랑 나랑 꽃비 맞는 거 좋아했는데.... 오늘은 왜 이렇게 허망하지? 나만 봐서 그런가봐.... 형.... 왜 자꾸 나만 보게 하는 거야.... 늘 같이 봤잖아.... 우리 늘 같은 곳 바라보기로 약속했잖아.... 왜 약속 안 지켜.... 꿈에서 딴놈 만나는 거 아니지? 내가 절대로 바람 못 피우게 하니까 꿈에서 바람피우느라 안 일어나는 거지? 형.... 나 힘들어.... 자꾸 포기할라 그래.... 그러니까 빨리 일어나서 나 붙잡아.... 안 그럼 나 또 바람피울지 몰라....”
학기는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학기에게는 용주의 수술동의서에 사인을 할 권리가 없었으나 곁을 지켜야 하는 의무는 있었다. 굳이 사랑이라는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용주 누나에게 약속을 하지 않았더라도 20년을 넘게 함께 해온 용주에게 지켜야 하는 의리였다. 용주도 같은 상황이 되면 그 의리를 지킬 것이라는 걸 학기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너무 힘이 들었다. 보통의 병수발이라면 영화 ‘남자가 사랑할 때’에서 한혜진이 아파? 하고 물었을 때 황정민이 존내 아파 그랬던 것처럼 감정의 공유라도 할 텐데, 꼬집고 때리고 싸대기를 날려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용주의 수발을 드는 것은 사랑으로, 의리로 감당해 내기에는 너무나 벅찼다. 그저 의무감으로 버틸 뿐이었다.
여전히 집 거실에는 턱시도를 입고 찍은 사진이 걸려 있고, 주민등록등본에도 함께 이름이 올라 있었지만 학기는 용주의 집에 얹혀 사는 동거인일 뿐, 그 흔한 사실혼 관계라는 것도 학기와 용주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둘 다 남자이기 때문이었다. 남자들의 사랑은 공인 받을 수가 없기에 이별도 공식적이지 못했다.
너무 힘이 들어서 용주에게 이별을 선언하고 싶었으나 그것은 일방적인 이별 통보이기에 재미도 없을 것 같았다. 가지 말라고 붙잡히지도 못하고, 설령 용주의 곁을 떠난다 하더라도 그 이별의 아픔을 학기 혼자서만 감당을 해야 했다. 옛날처럼 외로움에 몸부림칠 것이 뻔한 용주를 떠올리고는 너도 나처럼 많이 아프지 하며, 나 없이 얼마나 잘 사는지 지켜볼 거야 하고, 처음에는 통쾌한 마음으로 있다가 용주에게 사과의 전화나 문자메시지가 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상황은 있을 수가 없었다.
학기가 떠나도 용주는 이별을 한 줄도 모르기 때문에 학기는 용주의 곁을 떠날 수가 없었다.
봄이 가고 날씨가 더워진다 싶더니 바로 여름이 찾아왔다. 휴가를 받은 학기는 하루 종일 용주의 곁을 지켰다. 용주를 앞장 세워 바닷바람을 맞으며 담배를 피우다 용주에게 말을 걸었다.
“형.... 나 휴가 받았어.... 2년 동안 여행을 못 갔더니 좀이 쑤.셔 죽겠어.... 형도 나랑 여행 가고 싶지? .... 우리 오랜만에 기차 타고 여행 다닐까? 형도 그러고 싶잖아.... 형.... 우리 부석사 가자. 우리가 제일 처음 여행 갔던 데.... 부석사 먼저 갔다가 기차 타고 여기저기 다니자.... 형이랑 마지막으로 갔던 정동진도 가고.... 내일 아침에 일찍 떠나자....”
학기는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새벽같이 병원을 나섰다. 그리고 영주로 가는 기차에 용주와 함께 몸을 실었다.
학기는 난간에 처박힌 휠체어를 그냥 내버려두고 용주를 업은 채로 길을 걸었다. 인적이 없는 백사장에 도착해서 용주를 가만히 내려놓았다. 조심을 한다고 했는데도 용주는 모래 위에 털썩 쓰러졌다. 학기는 용주를 일으켜 자기의 허벅지 위에 머리를 대고 눕혔다. 눈앞에는 푸른 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져 있었으나 학기의 가슴은 답답하기만 했다.
“형.... 우리 제주도에 괜히 간 거 같지?”
학기는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제주도에는 기차도 없는데....”
학기는 답답한 마음을 달래고자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내가 갑자기 가슴이 아픈 건 그대 내 생각 하고 계신 거죠 흐리던 하늘이 비라도 내리는 날 지나간 시간 거슬러 차라리 오세요 내가 갑자기 눈물이 나는 건 그대 내 생각 하고 계신 거죠....”
학기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이 노래 때문이었다. 이 노래로 우는 것이 벌써 세 번째였다.
2013년의 어느 날, 별 생각 없이 영화를 보러 갔다가 영화의 마지막에 황정민이 밥 먹으면서 우는 때부터 시작해 버스 장면에서 나오는 이 노래를 들으며 학기와 용주는 한혜진과 함께 눈물을 펑펑 쏟았다. 남자가 사랑을 하는 진심이 느껴져서였다. 게다가 학기와 용주는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고 있었으므로 그 진심이 두 배로 느껴졌다.
“형은.... 내가 아프면 병수발 해 줄 거야?”
“미쳤냐? 요즘 간병은 전문가한테 맡겨야 돼. 혹시 내가 늙고 병 들면 너도 병수발 할 생각하지 말고 돈 많이 많이 벌어서 비싼 간병인한테 맡겨줘. 나 전문적으로 캐어 받고 싶어. 니가 똥오줌 닦으면 조ㅈ나 찝찝할 거 같애.”
“형은 진짜 말이라도 좀 병수발 해준다고 하면 안 돼?”
“내가 못한다는 거 잘 알면서 왜 그런 말해 가지고 나를 나쁜놈 만드냐? 영화는 영화고 현실은 현실이야.... 암튼 나 너 병수발 절대 못하니까.... 아프지 마. 천년 만년 건강하게 살아.... 너 아파서 병실에 누워 있으면.... 가슴 찢어질 거 같애. 우리 처음 만났을 때처럼 걷고 얘기하는 정도도 못하잖아.... 그리고 너 나보다 나이도 어리니까 절대 나보다 먼저 죽지도 마. 나이도 어린놈한테 절하기 싫단 말야.”
“싫어. 나도 형한테 절하기 싫어. 그러니까 형도 나 두고 먼저 가지마.”
“당연하지. 절대 먼저 안 가. 너 혼자 남아서 니가 딴놈이랑 같이 있는 거 죽어서도 못 봐. 그래서 말인데.... 우리 모든 거 같이 하니까.... 죽는 것도 같이 죽자. 같은 날에 떠나는 거 어때? 어차피 난 너 없으면 못 살 거 같은데....”
“나두 그래. 나도 형 없이 못 살아.... 그래도 끝까지 간병인은 고용해 주기. 콜?”
“콜~!”
2015년 여름휴가를 앞둔 어느 날, 학기는 이 노래를 들으며 또 울었다. 용주와 대판 싸우고 학기가 집을 나와 따로 살고 있을 때였다. 매년 찍은 웨딩 사진도, 주민등록등본에 두 사람이 함께 올라 있는 것도 소용이 없었다. 학기는 모텔을 전전하다 원룸을 구하고 난 뒤 용주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여기 주소로 내 물건 부쳐줘. 택배비는 나중에 줄게.
그러나 오라는 짐은 오지 않고 용주에게 전화가 왔다. 학기는 전화를 받자마자 짜증을 내며 말했다.
“왜 짐 안 부쳐?”
용주에게는 대답이 없고, 대신 피아노 반주 소리에 이어 익숙한 용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용주가 부르는 노래였다.
“.... 함박눈 하얗게 온 세상 덮이는 날 멀지 않은 곳이라면 차라리 오세요....”
노래가 끝나고 또다른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경수였다. 음악 교사인 경수에게 피아노를 치게 하고 노래를 부른 것 같았다.
“학기야.... 제발 용주 좀 데려가라. 귀찮아 죽겠어. 내가 이렇게 쉬는 날까지 학교에 나와서 진상새끼 오부리를 해줘야 되겠냐? 그리고 이제 너네 다 늙어서 안 팔려. 그러니까 그냥 둘이 계속 같이 살아....”
학기가 아무 말이 없자 경수가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너네 진짜 너무한 거 아니니? 일본 여행 같이 가기로 했잖아. 니들이 먼저 우리 커플한테 가이드 해 준다 그래놓고 이러면 곤란하지.”
학기는 조심스레 경수에게 물었다.
“용주 형이 예약 취소한 거 아니야?”
“와~ 진짜.... 학기 너도 진짜 양심이 있으면 그러는 거 아냐. 니가 우리 자기한테 일본 여행 같이 가자고 바람 넣었잖아. 택진이 지금 엄청 기대하고 있는데 어떻게 예약을 취소해. 내가 용주한테 너 혼자라도 가야된다니까 절대로 혼자 못 간대. 너랑 여권에 도장 같이 찍어야 된대. 미친 니들 때문에 나도 돌아버리겠어....”
“형.... 부탁이 있는데...”
“빨리 와서 이 새끼 데려가라니까 뭔 부탁?”
“오부리 한 번만 더 해 줘. 일본 가서 내가 밥이랑 술 살게.”
“밥이랑 술 말고 니 몸을 줘. 우리 자기가 너 따먹고 싶대.”
“용주 형만 허락하면....”
학기의 부탁에 다시 반주 소리와 함께 용주의 노래 소리가 들렸다. 중간에 감정이 북받치는지 목소리가 떨렸다. 학기도 마찬가지였다. 용주가 노래를 다 부르고 나서 우는 소리로 말했다.
“학기야.... 흑흑흑 나 짐 안 부칠 거야.... 흑흑흑.... 미안해....”
학기도 감정이 북받쳐 우는 소리로 대답했다.
“형.... 흑흑흑.... 나도 미안해.... 그래도 짐은 싸.... 경수 형이랑 일본 같이 가야지.... 흑흑흑.... 형.... 우리 오늘 밖에서 사 먹자. 뭐 먹고 싶어?”
이번에는 변해 버린 용주에게 학기가 노래를 불러주는 셈이었다. 학기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 내가 갑자기 눈물이 나는 건 그대 내 생각 하고 계신 거죠 새하얀 눈꽃이 온 세상 날리는 날 멀지 않은 곳이라면 차라리 오세요 이렇게 그대가 들리지 않을 말들을 그대가 들었으면 사랑이란 맘이 이렇게 남는 건지 기억이란 사랑보다 더 슬퍼....”
학기는 노래를 부르고 담배를 한 대 피워 물었다. 기억이란 용주와 이런저런 말을 주고받으며 공유할 때는 더없이 행복한 것이었지만 혼자서 기억을 더듬는 것은 다 부질없고 행복했던 기억마저도 슬픔으로 왜곡시켰다.
학기는 담배를 깊게 빨아 당기고 길게 연기를 내뿜었다. 늘 용주와 함께 뿜어낸 담배 연기가 공중에서 엉켜 사라지던 것이 이제 학기가 내뿜는 연기만이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금세 사라졌다.
“형은 2년 전에 담배 끊었는데.... 나는 아직도 못 끊고 있어.... 아마 죽을 때까지 못 끊을 거 같애.... 형 처음 만났던 순간 우리가 제일 먼저 한 게 같이 담배 피운 건데.... 혼자 피는 담배는 너무 맛이 없어. 그래서.... 이것만 피고 이제 나도 형처럼 담배 끊을 거야.... 형도.... 내가 담배 끊는 거.... 이해해 줄 거지? .... 대답이 없네.... 내가 아무 말 없으면.... 형은 항상 긍정으로 받아들였잖아.... 나도 형이 이해하는 걸로 받아들일게....”
학기는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한 모금을 길게 빨아 당기고는 한숨처럼 연기를 내뿜고 모래 위에 담배 필터를 꽂았다. 생담배 연기가 하늘로 피어올랐다.
학기는 용주를 안고 자리에서 일어나 바다를 향해 걸었다. 파도가 밀려와 학기의 운동화를 적셨다. 그래도 학기는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신발을 벗고 바다를 향해 계속 걸어 들어갔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바닷물이 어느새 두 팔로 안고 있던 용주의 등까지 적셨다.
바로 그때였다. 용주가 눈을 떴다. 학기는 용주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마음 약해지게 왜 이래.... 눈을 떴으면 나를 봐야지.... 형 데리고 찬물에 들어가는 나를 말려야지....”
학기는 두 팔로 떠받치고 있던 용주를 바로 세워 겨드랑이에 팔을 넣고 끌어안았다. 그리고 바다로 더 깊이 들어갔다. 수면이 가슴을 지나 턱 밑까지 왔지만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한여름의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고 있었다. 학기가 꽂아둔 담배가 다 타들어 가서 더 이상 연기를 피워 올리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새 학기와 용주의 검은 머리도 바다 속으로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 끝
※ 글쓴이의 말
그동안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두들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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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님의 고생이 느껴집니다.
학기와 용주 사랑하는 캐릭터일텐데 이렇게 보내야하는군요.
두 사람 사랑하는 마음이 마냥 부럽습니다.
사랑한다면 학기나 용주처럼 해야하는 걸까봐 사랑의 용기도 못내고 살고있네요.
그래서 부러운가봐요.
더운 2022년 여름 고생하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