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중설 (夏中雪: 여름에 내리는 눈)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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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첫인상 (1)


 

아침부터 날씨가 흐리고 쌀쌀하더니 결국 저녁부터 눈발이 조금씩 날리기 시작했다.

날이 추워서인지 온종일 손님이 두 명밖에 없었는데 그중 한 명은 부동액을 넣으러 온 손님이라 딱히 정비라고 할 수도 없었다.

 

호식은 커다란 냄비에 라면을 끓여 사무실로 가지고 들어가는 중이었다.

 

, 뜨거워.”

 

그때 벽에 몸을 기댄 채 무엇인가에 시선을 뺏긴 경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미친놈처럼 입가에는 헤벌쭉 미소를 짓고서.

 

얼씨구? 저 녀석 어디에 정신이 팔린 거야? 예쁜 여자라도 지나가나?’

 

호식은 냄비를 든 채 경찬의 뒤에 서서 오리처럼 목을 쏙 내밀고 경찬이 바라보는 방향으로 시선을 던졌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아가씨는커녕 아줌마도 안 보였다.

 

여자도 없는데 어디에 넋이 나간 거야?’

 

그러고 보니 여자는 없지만 누군가 있기는 했다.

재은이었다.

 

공업소 바깥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는 재은의 모습이 화보 속에서 튀어나온 연예인 같았다.

 

녀석, 기럭지가 길어서 그런지 기름때로 얼룩진 작업복을 입어도 멋있단 말이야.’

 

작업용 장갑을 뒷주머니에 대충 꽂은 채 재은이 고개를 젖히고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재은의 목울대가 움직이더니 관능미를 뽐내는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잘 익은 자두를 연상시키는 탐스러운 붉은 입술 사이로 허연 연기가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꿈처럼 서서히 퍼져나갔다.

 

담배를 든 손가락조차 차량 정비일을 하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매끈한 투명한 빛을 띠었다. 평소에도 분위기 있는 재은의 두 눈이 오늘따라 더 아련해 보였다.

 

저놈의 자식은 뭘 해도 멋있긴 해?”

 

경찬은 난데없이 말소리가 나자 움찔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 서서 뭐해?”

 

경찬이 인상을 찌푸렸다.

 

뭐하긴, 인마. 그건 내가 묻고 싶은 소리야. 여기서 왜 넋을 놓고 있냐? 지나가는 아줌마도 없는데?”

 

호식이 냄비를 든 채 경찬에게 눈을 부라렸다.

경찬과 호식은 동갑내기였다. 경찬은 무뚝뚝한 편이었지만, 호식은 수다스러운 편이라 성격은 완전히 달랐다. 하지만 그래서 또 둘이 친하게 지내는 것인지도 몰랐다.

 

내가 재은이 외모라면 매일 밤 클럽에서 달릴 텐데. 얼굴이 아깝다, 아까워. 저 자식은 저런 얼굴로 왜 연애 한번 안 하는지 참 미스터리야. 안 그래, 친구?”

 

호식이 팔꿈치로 경찬을 툭 건드렸다. 그러자 경찬이 귀찮다는 듯 얼른 호식의 팔을 피했다.

 

꺼져.”

 

호식이 경찬을 노려보았다.

 

야박한 놈. 너는 라면 먹지 마! 이거 내가 끓인 거니까.”

 

그때 갑자기 누군가 호식의 등짝을 후려쳤다.

!

 

여기서 뭣들 하는 거여? 싸게싸게 들어가지 않고? 라면 다 퍼지겠네, 퍼지겠어.”

 

언제 왔는지 공업소 주인 양 사장이 호식의 뒤에서 도끼 눈을 하고 있었다. 등짝을 맞은 호식이 엄살을 부리며 볼멘소리를 했다.

 

지금 들어가는 중이잖아요? 암튼 성격 급한 건 알아줘야 해. 저렇게 성격이 급해서 화장실에서 볼일 보고 뒤는 닦고 나오는지 몰라.”

 

뭐여, 인마?”

 

양 사장이 다시 등을 후려갈길 듯 손을 쳐들자 호식은 잽싸게 사무실로 들어가며 경찬에게 말했다.

 

재은이 불러. 라면 퍼진다.”

 

그 소리에 경찬이 소리높여 재은을 불렀다.

 

재은아, 라면 먹자.”

 

경찬이 부르는 소리에 재은이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고개를 돌렸다. 연한 갈색이 감도는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살짝 출렁거렸다.

 

금방 들어갈게요. 먼저 먹고 계세요.”

 

그래 빨리 와라. 더 불기 전에.”

 

경찬도 얼른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김 양아, 라면 먹자.”

 

호식이 경리 일을 맡은 김 양을 불렀다.

 

저는 안 먹어요. 많이들 드세요.”

 

김 양이 심각한 표정으로 컴퓨터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그때 양 사장이 따라 들어오며 잔소리를 해대기 시작했다.

 

내가 공구 쓰고 나면 제 위치로 딱딱 갖다 놓으라고 몇 번을 말했냐? 왜 베아링이랑 펜치가 아무 데나 굴러다녀야! 그리고 아까 용접기 쓰고 파워 안 끈 놈 누구야? 얼른 자수하고 광명 못 찾겠냐? 호식이 너지?”

 

그러자 호식이 버럭 역정을 냈다.

 

저 아니에요. 맨날 무슨 일만 있으면 나래.”

 

호식이 억울한 듯 구시렁거리자 양 사장의 도끼눈이 더 샐쭉해졌다.

 

뭐여? 네놈 아니면 그럴 사람이 여기서 누가 있냐? 경찬이가 그러겠냐, 재은이가 그러겠냐?”

 

누가 들어도 편파적인 양 사장의 말에 호식이 입술을 부루퉁 내밀었다. 경찬이 그 모습을 보고 낄낄 웃었다.

 

그때 재은이 사무실 유리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얇은 작업복만 입고 찬 바람을 쐬어서인지 귓불이 빨갛게 얼어 있었다.

 

제가 뭘 그래요? , 추워. 가뜩이나 추운데 눈까지 오려나 봐요.”

 

재은이 들어오자 경찬이 옆에 있던 의자 하나를 얼른 난로 가까이 놓았다.

 

앉아. 앞으론 담배 피울 때도 뭐 좀 걸치고 나가. 감기 걸린다.”

 

경찬의 말에 재은이 빨갛게 언 손을 난로에 녹이면서 싱긋 웃었다.

 

, .”

 

재은이 웃는 모습을 본 경찬의 입가에 슬그머니 미소가 떠올랐다.

 

흐미, 꿀 떨어지겠다. 꿀 떨어지겠어.”

 

호식이 그런 경찬을 보며 놀리자 양 사장이 호식의 뒤통수를 다시 딱 소리 나게 때렸다.

 

내 입에서는 침이 떨어진다, 이 녀석아! 헛소리 그만하고 얼른 라면이나 좀 담아 줘봐.”

 

그러자 호식이 뒤통수를 붙잡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라면 끓여 왔으면 됐지, 그릇에까지 담아 드려야 해요? 내가 무슨 사장님 종이에요?”

 

씩씩대는 호식을 놀리는 것이 재미있는지 양 사장이 시치미를 뚝 떼고 말했다.

 

암만. 내가 월급 주는데 그 정도는 해 줘야지.”

 

호식이 덜어준 라면을 양 사장이 후루룩 소리 내어 먹더니 김 양에게 말했다.

 

김양아, 우리 김치 다 먹었냐? 라면에는 김친데 말이여.”

 

김양은 여전히 고개도 돌리지 않고 무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냥 드세요. 김치 다 떨어졌어요.”

 

아따, 떨어졌으면 싸게싸게 좀 사놓재. 내가 김치 없으면 라면 못 먹는 거 빤히 암시롱

 

사장님!”

 

갑자기 김양이 책상을 쾅 치면서 양 사장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글거리는 눈에서 레이저 광선이라도 뿜어낼 기세였다.

 

저 지금 월말 결산 중이거든요? 이렇게 방해하시면 나중에 숫자 틀려도 저 몰라요!”

 

김양이 소리를 꽥 지르자 양 사장이 움찔해서 김양 눈치를 봤다.

 

워매, 가시나, 저 성질머리 좀 봐야. 알았다, 알았어. 김치 달란 소리 안 할 테니 숫자만 틀리지 말어.”

 

양 사장은 이상하게도 김양에게는 꼼짝을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호식이 라면을 후후 불며 비아냥거렸다.

 

아이고 누가 사장이고 누가 경리인지도 모르겠네.”

 

그 말에 양 사장이 라면 그릇 너머로 호식을 째려보았다.

 

네가 오늘따라 등짝이 많~이 가려운 갑다이?”

 

그러면서 양 사장이 호식의 등짝을 다시 한번 시원하게 내리쳤다.

호식은 맞은 자리가 아픈지 울상을 지었다.

 

하여튼 우리 정비소에서는 내가 호구라니까.”

 

두 사람 맞은편에서 라면을 먹던 재은은 그런 광경이 재밌어 미소를 지었다.

 

다른 정비소보다 월급이 박하기는 해도 사람 냄새 나는 이런 분위기 때문에 여기서 일한 지도 벌써 3년이 다 되어 갔다.

 

오늘은 춥고 눈도 오는데 일찍 문을 닫을까나?”

 

양 사장이 이렇게 말하는 중에 갑자기 바깥에서 하고 차 소리가 났다.

 

아이고, 산타클로스보다 더 반가븐 고객님이 오셨구마이. 그라믄 문을 닫으면 안 되재.”

 

우거지상이던 양 사장의 얼굴이 갑자기 환해졌다.

 

사장님, 그게 저... .

 

호식이 라면을 먹다 말고 눈이 휘둥그레져서 부들부들 떨며 손가락으로 밖을 가리켰다.

 

손님 온 거 나도 알아야. 싸게 안 나가보고 뭐 한다냐?”

 

그게 아니라 저기, 저기 한 번 보시라니깐요.”

 

귀신이라도 본 듯한 호식의 얼굴에 그제야 경찬과 재은도 유리문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노란색 스포츠카가 공업소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옴마야!”

 

갑자기 양 사장이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저거슨 말로만 듣던 람보르기니 아니냐?”

 

그냥 람보르기니가 아니예요. 올해 출시된 람보르기니 우라칸 퍼포만테 LP640-4라고요. 찻값만 4억이 넘을 텐데.”

 

흥분한 호식의 말에 양 사장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4억이라고야? 우리 공업소 4개는 거뜬히 짓고도 남겠구마이. 근데 저 차가 어쩌자고 여기로 왔을까나? 혹시 유턴해서 나갈라고 하는 거 아니여?”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요?”

 

재은이 바깥에 멈춘 차량을 보며 말했다.

 

제가 한번 나가볼게요.”

 

재은이 라면 그릇을 테이블 위에 올리고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평소에 한번 보기도 힘든 외제차가 공업소로 들어오자 호식과 양 사장, 김 양까지 문밖으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유일하게 경찬만 일없다는 듯 라면을 계속 먹었다.

 

재은이 차량 쪽으로 다가가자 차 문이 열리더니 검은색 수트를 말쑥하게 차려입은 남자가 내렸다. 남색에 가느다란 스트라이프가 살짝 들어간 수트는 한눈에 보기에도 몇백만 원을 호가하는 명품이 분명했다. 남자의 손목에 찬 시계도 예사로워 보이지 않았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재은이 뒷주머니에서 작업용 장갑을 빼 들며 접대용 멘트를 날렸다.

180인 재은보다 몇 센티미터는 더 큰 듯한 남자는 일단 담배부터 하나 찾아 물더니 도발적인 표정으로 재은의 얼굴에 연기를 내뿜었다.

 

기어가 좀 이상한데 봐줄 수 있어?”

 

남자가 재은을 내려다보며 다짜고짜 반말을 했다. 행색을 보아하니 어느 갑부댁 도련님이 분명했다. 재은은 돈 좀 있다고 다른 사람 무시하는 사람이 제일 싫었다. 남자를 바라보는 재은의 눈가에 불쾌한 빛이 살짝 떠올랐다.

 

기어가 어떻게 이상한데요?”

 

재은이 남자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되쏘아보며 물었다.

남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재은을 계속 빤히 바라보면서 재은의 얼굴에 다시 하고 연기를 내뿜었다.

 

재은도 담배를 피우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의 담배 연기가 정면으로 자신의 얼굴에 닿자 불쾌감을 참을 수 없었다.

 

일부러 기분 나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꾹 닫고 살짝 고개를 돌렸다. 더 이상 그러지 말라는 암묵적인 신호였다.

 

그때 조수석 쪽 창문이 내려가더니 신경질적인 여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런 변두리 정비소가 우리 차를 본 적이나 있겠어? 그냥 다른 데로 가자니까.”

 

선글라스를 쓴 여자가 기름때 묻은 재은의 작업복을 불쾌한 듯 바라보았다.

 

아휴, 불결해.”

 

사람을 앞에다 세워 놓고도 다짜고짜 불결하다니.

도대체 차를 보라는 거야, 보지 말라는 거야?

 

재은은 팔짱을 낀 채 눈살을 찌푸리며 여자와 남자를 번갈아 응시했다. 여자 얼굴은 어디서 봤는지 왠지 낯익은 느낌이었다.

 

괜히 뭐 잘못 만져서 더 망가지기라도 하면 어떡해? 아휴, 저 기름때 좀 봐. 옷을 빨지도 않고 입나 봐. 수리 맡겼다가는 오히려 차에 얼룩만 잔뜩 남을 것 같아.”

 

, 젠장. 전형적인 갑질 남녀로군.

 

재은은 여자의 말을 듣고도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었으나 속으로는 이미 욕을 퍼붓고 있었다.

 

나가는 길은 저쪽입니다. 도로가 좁으니 인도에서 후진해서 나가시기 바랍니다.”

 

재은은 남자가 아무 말이 없자 수리할 의사가 없을 것으로 판단하고 몸을 돌리며 말했다.

재은이 사무실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동안 차가운 겨울바람이 재은의 갈색 머리칼을 흩뜨렸다.

 

기어 변속이 안 되는 것 같아. 다른 정비소까지 갈 수 있는지만 봐줘.”

 

등 뒤에서 갑자기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은이 고개를 돌리니 남자가 발로 담배를 땅바닥에 비벼 끄고 있었다.

 

자신 없으면 관두고. 나도 자신 없는 사람에게 굳이 맡길 생각은 없어. 변두리 정비소라는 사실을 떠나서 말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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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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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pa…
  • 작성일
몇 년 전에 썼던 글입니다. 왕유치하고 오글거리고 뒷부분에는 좀 폭력적인 내용도 나옵니다만, 그래도 재밌게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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