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사람들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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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우는 시간이 날때 마다 준이 부모님 집에 들렀다. 늘 손에는 작은것이라도 들려있었다. 빈손으로 온 적은 한번도 없었다. 여전히 준이 부모님은 못마땅해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서서히 영우가 적응되기 시작한것도 사실이었다.
어느날인가 석이는 집에 불쑥 나타났다. 때 마침 집에 있던 영우는 아무렇지 않게 기다렸다는듯이 웃어줬다. 그러자 극에 달해있던 불안감이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그것은 곧 어떤 확신으로 서서히 자리 잡았다. 엄마는 석이를 보자마자 울었고, 아버지는 밥은 먹었냐고 물어봤다. 비록 자식이 게이여도, 걱정이 앞서는건 어쩔수 없나보다.
현이와 준이에게도 영우가 전화를 했다. 석이는 형들을 마주하기엔 아직 자신이 없었다. 석이는 그럼에도 영우에게 미안한 맘을 쉽게는 지울수가 없었는지, 아직도 머쓱해 했다. 영우가 그런 석이와 집을 나와서 찾아 간 곳은 다름 아닌, 모텔이었다.
술 한잔도 걸치지 않고 맨정신으로.
점잔을 뺄 시간이 없었다. 영우는 누구보다 간절했기에 모든걸 터트리고 싶어서 안달이 난 상태였다. 조금 부끄러워 하던 석이도 곧 적극적으로 돌변했다. 말은 필요 없었다. 들리는건 본능적으로 나오는 신음소리뿐. 두 남자는 열심히도 서로를 탐닉했다.
"... 어... 어... 어.. 어..."
두 남자 모두 숨겨놨던 액체를 서로에게 뿜어내자, 그제서야 거친 숨소리가 난무했다. 그만큼 강렬했고, 오래도 했다.
거친 숨소리가 가시자, 영우가 다시 석이의 배위에 올라왔다. 그리고 입을 맞추고는 말했다.
".. 근데.. 준이형 말이야..."
".. 어?"
석이는 놀랬다. 잠자리에서 형을 떠올리는게 어색하기도 했지만 영우의 물건이 금새 딱딱해져서 자신의 것을 건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자친구 없지?..."
석이가 그 물음에 대해 생각을 하기도 전에 영우의 혀가 석이의 입속으로 번졌다.
영우는 이상하게 현이 보다는 준이에게 정이 더 갔다. 왜 그러는지는 모를일이었다. 한날은 길거리에서 우연히 본 준이를 반갑게 인사를 하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비가 쏟아지고 있었고, 한손에는 캐리어를 끌고 비를 그대로 맞으면서 걸어가는 준이를 아는척을 할수가 없었다. 그때의 준이에게 흐르는 그 적막한 기운이 영우를 꼼짝 못하게 했다.
그리고 우산을 받치면서 준이의 발걸음에 맞춰서 뒤따라가는 중년의 남성을 잊지 못했다. 둘이 꼭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판의 더 진한 섹.스가 끝났다. 상상만 하던일이 현실이 되는건 생각보다 더 짜릿한 일이었다. 샤워를 하고 주섬주섬 옷을 입는데, 밖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서 영우가 얼굴을 빼꼼히 내밀다 얼른 문을 닫았다.
"...뭐야...무슨 일이야?..."
".. 왜? 무슨 일있어?"
발가벗고 있는 석이가 물었다.
그때, 중년 남성의 굵직한 목소리가 문을 뚫고 들려왔다.
".. 이준이!!!!"
석이가 놀란다. 영우도 진정이 안되는건 마찬가지다.
"... 형 이름이 왜 들리는거야?"
".. 준이 형님이 여기 있는것 같은데..."
영우는 그렇게 말하고, 곧 지금 준이 앞에 서 있는 중년남자를 기억해냈다.
................
악수를 마치고 준이를 돌아보며 최사장이 말한다.
".. 미국에서 여기까지 왔는데...
.. 어떻게 너는 반겨주지도 않노?"
다분히 유부장을 의식하는듯 보였다. 말을 하면서 슬쩍 유부장의 표정을 살폈기 때문이다.
준이는 이미 울먹거리고 있었다. 최사장이 나타날줄은 상상도 못했었다.
"... 어떻게... 오셨어?"
".. 기억 안나나? 니가 나한테 전화했잖아.."
".. 내가? "
"... 그놈의 주사는... 아픈데 술까지 먹고..인간이.."
최사장이 준이의 턱을 두 손가락으로 만진다.
".. 얼굴 상한거 봐라... 이거..."
툭툭 뱉어내는 말들이 준이는 싫지 않았다. 따듯함을 숨긴채 말하는건 최사장의 방식이라는걸 준이는 알고 있었다.
".. 아빠... 나...."
울음이 터져 나올것같은 얼굴로 준이가 말을 끝 마치기도 전에, 최사장이 보란듯이 준이를 껴안았다. 그러자 봇물 터지듯 가까스로 참아왔던 한이 쏟아져 나온다.
".. 어.. 엉.....엉...엉...어..."
"... 아이고... 완전 애기다.. 애기야..."
꺼억꺼억 최사장 품에 안겨서 우는 준이에게 말했다. 그렇게 울다가 정신이 드는지 준이가 빼꼼히 고개를 내미는데, 최사장이 더 꼭 안으며 말한다.
".. 빨리 짐싸... 가게.."
".. 어디?"
준이가 반말로 답을 했다.
".. 어디긴 어디야? 우리집이지...
.. 아픈 사람이 어떻게 혼자있노.."
준이가 최사장 품을 벗어나 주섬주섬 짐을 싸기 시작할 무렵, 유부장은 아직도 그대로 서 있었다. 심기가 더없이 불편해 보였다. 자기가 가자고 할때는 안가고 버티더니, 그 인간 말 한마디에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울화통이 터질것 같았다. 그리고 최사장을 향한 준이의 반말이 무척이나 거슬렸다. 둘은 왜 그렇게 허물이 없어 보이는지, 은근한 질투심이 올라왔다.
이윽고 준이가 캐리어를 끌고 나왔다. 최사장이 얼른 한손으로 캐리어를 대신 받아준다. 그리고 반대편 손으로 주먹을 말아서 허리춤에 가져다 놓고는 준이를 향해 말한다.
".. 뭐해? "
마치 빨리 팔짱을 끼라고 하는듯 보였다. 하지만 준이는 머뭇거린다. 유부장이 아직도 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최사장이 준이를 팔을 째려보며 고개를 까딱인다.
잠시 망설이던 준이가 최사장의 팔짱을 낀다. 그러자 최사장이 유부장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인다.
"...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당당한 목소리를 내뱉고는 준이를 데리고 모텔을 빠져 나간다. 준이는 최사장에게 질질 끌려가며서도, 유부장에게 말을 한다.
"... 부장님.. 저... 먼저 가보겠습니다...
... 나중에 연락 드릴께요...."
".. 연락은 무슨..."
최사장이 바로 말을 덧붙혔다.
유부장은 멍하니 멀어져 가는 두사람을 붙박힌채로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수가 없는게 답답했다. 다만 확실한건 준이를 최사장에게서 하루빨리 떼어 놓아야 한다는것이었다.
무슨 이유에서건, 아픈 준이가 다시 상처를 받는꼴은 죽어도 보기 싫었다.
............
"... 어떻게 오셨어?"
"... 아들이 아프다는데... 어떻게 안오노?"
"... 가게는?"
"... 그기 문제가? 빨리 먹어...식는다..."
뜨거운 갈비탕에 모락모락 김이 올라온다.
"... 자꾸 죽는다 생각하지말고...
.. 좋은쪽으로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 아직 결과가 나온것도 아니잖아..."
잔소리는 최사장의 차를 타면서 식당에 와서까지 이어졌다. 준이는 군소리 열심히 듣는 중이다.
"... 그러게... 내가 담배 끊으라고 했잖아..."
일장연설이 이어진다. 갈비탕을 먹으면서도 연신해서 히죽거리기도 한다. 오랫만의 잔소리라도 좋은가보다.
".. 알겠어..."
그러다, 최사장이 가장 궁금해 하던 본론으로 들어간다.
"...아까.. 그 사람은 왜 온거야?"
"... 어.. 유부장님... 내가 걱정되서 오셨어.."
먹고 있던 국물에 사레가 걸릴것 같았다. 두사람의 신경전을 준이도 느꼈나보다.
"...어떤 직장 상사가 직원아픈것까지 챙겨주노?
.... 다 꿍꿍이 속이 있는거지.."
"... 아니야....나 힘들때 많이 챙겨도 주셨고..
.. 좋으신 분이야..."
"... 좋기는 뭘... 사람 함부로 믿으면 안돼!!"
"...아이고...걱정 안하셔도 된다니까.."
"... 진짜야 임마!! 뒤로 호박씨깐다고!!!
요새 세상이 어떤 세상인줄 아나? "
극도로 경계하는 모습에 준이가 최사장을 진정시켜주려 말한다.
"... 알겠습니다!! 소자 아버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 인간아... 말 좀 들어..."
"...알겠다니까.. 나 귀에서 피난다.. 피나.."
준이의 너스레에 최사장의 잔소리가 잦아든다.
그리고 밥을 거즘 다 먹을때쯤 최사장이 한마디 한다.
".. 닳아져...."
그때 눈이 마주친 준이가 당황해서 머금고 있던 국물을 쏙아낼뻔했다.
"... 얼굴 닳겠다 닳겠어... 그만 좀 봐..."
".. 내가 뭘..."
부끄러운지, 일단은 아닌척을 하고 본다.
".. 내가 그렇게 좋냐?"
준이는 수줍게 국물을 삼키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모습을 본 최사장의 얼굴에 미소가 잔뜩 번진다.
".. 근데...아빠가 한국에 집이 어딨어?"
준이가 조금 부끄러워서 화제를 돌렸다.
"...예전에 미리 투자로 사놨잖아...
....이럴때.. 쓸라고.."
"...우리아빠... 부자는 부자다이...
...마음만 먹으면...가는곳마다 집도 다 살수 있고..."
".. 비꼬기는..인간이..."
..............
한편 유부장은 속이 타는지, 밤새 한숨도 못잤다. 준이와 그 인간의 잔상이 머리속에 계속 남아서 괴롭혔다. 그리고 유부장의 시선은 탁자위에 명품백에 꽂혀있었다.
준이를 처음 만난날, 술집에 놓고갔던 명품백.
어젯밤 유부장은 그 명품백을 다시 꺼냈다. 원래는 진즉에 돌려 줬어야 맞았다. 하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최사장의 편지를 읽고 나자 생각이 바뀐것이다.
"... 얼마나 애를 울궈 먹을라고.."
유부장은 더이상은 참지 못하고, 준이에게 전화를 건다. 하지만 신호만 갈뿐 받지 않는다. 자꾸만 초조해진다. 당장이라도 준이를 데려 오고 싶지만, 특별한 명분이 없는데, 반해 그 인간은 명분이 있었다. 곧 죽어도 양아버지라는 타이틀.
하루종일 시간이 길다. 점심시간에도 수시로 유부장은 전화를 했다. 하지만 어떠한 연락도 없다. 사람들은 그런 유부장을 눈치를 보고 있었다.
"... 어디서 뭘 하는거야? "
큰소리로 외치면서, 주먹으로 책상까지 치자,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다. 그때 유부장의 핸드폰이 울렸다. 준이였다. 그러자 유부장의 얼굴이 온화하게 바뀐다. 미친사람이라고 봐도 무방할정도로 극심한 차이에 직원들은 혼란스럽다.
".. 여보세요? 준이냐?"
심지어 목소리에도 온화함이 묻어있다.
"... 네.. 부장님... 무슨 일 있어요?
..왜 이렇게 전화를 믾이 하셨어요? "
어제부로 유부장은 깍듯한 말투가 싫어졌다.
"...아니... 너.. 괜찮나 해서... 괜찮아?"
애써 꾹꾹 감정을 삭히는 유부장. 사실은 왜 전화를 안받았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 괜찮아요.. "
"... 어.. 그렇구나...."
".. 무슨 큰일 난줄 알았어요..."
"... 어.. 뭐.. 혹시나.. 했지..."
머뭇거리는 유부장은 말을 계속 더듬는다. 그러자 준이가 말을 한다.
".. 근데요.. 부장님.. 저 한테 이제..잘 안해 주셔도.."
그러다 유부장이 다음말은 듣고 싶지 않다는듯, 말을 자르고 숨겨놨던 감정을 터트린다.
"... 내 아들때문에 잘해주는거 아닐수도...
.. 아니, 으흠..."
목을 고쳐놓고 다시 말을 잇는다.
".. 처음엔 그랬어.. 니 말이 맞는데...
.. 지금은 아닌거 같아... 아니,
.. 지금은 아니야...아들 때문에 잘해주는거.."
"... 네?"
"... 저기... 저... 내가 나중에 전화할게..."
유부장의 심장이 뛴다. 언제 사람 때문에 심장이 뛰어봤는지, 하도 오래되서 기억도 나질 않았다. 전화기를 가슴에 품고는 한참을 앉아서 진정을 시켰다.
퇴근후에도 온통 준이가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유부장은 술을 마신다. 그럼 좀 진정이 될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자꾸만 더 감정이 격해진다. 그래서 준이에게 다시 전화를 걸기로 했다.
"... 여보세요?"
준이의 목소리를 듣는데, 갑자기 마음이 진정이 되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어디야?"
"....지금.. 사장님 집에 있어요.."
"... 같이?"
".. 네...근데.. 전 지금 방에서 있고요...
.. 사장님은 거실에... 근데 또 술 많이 드셨어요?"
".. 왜! 집까지 나갔으면서 사모님 역할까지 할라고?"
"... 아니요... 걱정..."
".. 좋냐?"
유부장이 말을 자르고 대뜸 물었다. 준이의 목소리는 편안하고 안정돼 보였다. 그래서 자꾸만 자신과 있을때 불안에 떨던 목소리와 비교가 되었다. 일단은 그 인간에게 잠시 준이를 놔둬야 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 뭐 좋다기 보다는... 그냥...."
잠시 머뭇거리더니...
"... 좋아요..."
밝게 대답했다. 명료하게. 그때 유부장은 가슴이 무너지는것 같았다. 그래서 다음말을 잇는게 참 힘들었다.
".. 니가 좋으면 .. 좋은건데... 그래도...
.. 너무 막 많이 좋아하진 말고..."
끝끝내 걱정하는 유부장의 말 뜻을 준이는 잘 알고 있었다. 결국에는 가질수 없는 사람이라는걸.
".. 지금은 니 몸 낫는거 신경써야 되니까.."
".. 네... 그럴게요..."
".. 그리고!! 매일매일 살아있다고 나한테 보고 좀 해"
"...매일이요? 왜요?"
"... 나도 너가 신경쓰이기 시작했으니까..
준이는 무슨말인지 곱씹어 보는중이었다.
"... 끝는다..."
유부장은 조금 민망한지, 전화를 끊으려는데, 갑자기 희미하게 그 인간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냐?"
"...아니요..!!"
준이가 급하게 전화기를 손으로 막고 외쳤다.
"... 오늘은 같이 잘까?"
"... 으흠... "
유부장은 괜히 목소리를 크게 다듬는다.
".. 부장님.. 나중에 연락드릴게요.."
준이가 급히 전화를 끊고 방에서 나왔다. 최사장 손에는 따뜻한 한약이 김을 모락모락 피우고 있다.
"... 마셔..."
"... 이게 뭔데요?"
"... 몸에 좋은거야... "
후후 불어가며 조심히 마시는 준이를 최사장은 흐뭇하게 쳐다보며 조심히 묻는다.
".. 누구랑 통화하는거 같던데..."
예전부터 꼬치꼬치 캐묻는건 알아줘야 했다.
".. 친구..."
준이는 대충 둘러대면서 한방울도 남기지 않고 마셨다.
"... 아우... 써...."
"... 자..."
사탕 하나를 까서 준이의 입에 직접 넣어준다.
"... 뭘 이렇게 까지...."
"... 왜 내가 너무 오바하는거 같냐?"
최사장은 겸연쩍은지 너스레 비슷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 .. 아니.. 뭐... 나야 좋긴 한데...
.... 술 드시고 계셨어요? "
거실 낮은 탁자에 꼬냑을 보고는 화제를 돌렸다. 이 순간이 너무 황송하면서 어색해서였다.
"... 어..... 근데.. 너는 마시면 안되지!!"
노파심이 앞서서 대답하다가 소리를 질렀다.
".... 안마셔.. 근데..안주도 없이... 속 버리셔...속...
... 내가 뭐 간단한거라도 만들어 드릴까?"
"... 아이고.. 됐어... 아까 많이 먹었잖아.."
".. 그래도...."
"... 그러면 여기 소파에 누워서 말동무나 해주던지..."
".. 그거야.. 돈드는것도 아니고 얼마든지..."
준이는 하늘색 가죽 소파에 냅다 누운다. 그리고 최사장은 소파에 등을 지고 술잔을 기울인다.
잠깐의 침묵. 각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것일까.
그때 준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 나... 물어 보고 싶은거 있는데..."
"... 왜.. 또... 뭐...."
누워있는 준이를 향해 뒤돌아보며 애써 웃어보였지만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나한테... 왜 그랬어?"
곧 최사장의 웃음기가 가셨다. 그러고 한참을 술 한잔을 기울이며 가만이 있는다. 그 침묵의 시간은 그들을 과거로 데려가고 있었다.
사실 준이도 명확하게 무엇을 물어보는지 몰랐다. 최사장도 그러했다. 그럼 무엇을 그랬냐고 물어볼만도 한데, 그러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뭉틍거린 날카로운 질문은 그 둘사이를 빙빙 돌고 있었다. 둘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걸까?
"... 그때가.. 참 좋았어..."
그 애매한 질문은 여전히 날을 세우고 휘몰아치고 있는데, 준이가 난데없이 다른 말을 했다.
"..왜? 언제? 또 이상한 말 하려고 하지?"
준이는 잠시 회상에 빠진다.
"... 옛날에 가게에서 내가 좀 속이 안좋았거든..
... 컨디션도 별로고.. 그래서 사람들이..
.. 나 아프다고.. 얘기했나봐... 아빠한테.."
"... 그래?"
최사장은 기억이 안난다는듯 반문했다.
"....그러니까 아빠가 사람 시켜서 약을 사오라고 했어..."
".... 그게 참 좋았어... 난..."
최사장이 고개를 돌려 누워있는 준이를 바라봤다. 그때를 회상하는지 밝아져있었다.
"... 아프다는 사람 약사주는게 .. 뭐가 그렇게 좋노?"
".. 사람들이 그러더라..
..사장님이 준이는 끔찍이도 챙긴다고..
그 소리가 참 듣기 좋더라고...
..내가 되게.. 특별해지는것 같고.... "
"... 아이고.. 별게 다 기분 좋은 기억이십니다!!"
"... 그냥 그랬다고... "
천장을 바라보며 읖조리던 준이가 최사장을 향해서 몸을 틀었다. 그러자 최사장의 향이 강렬하게 났다. 순간 뒤에서 안아보고 싶은 욕구가 강렬하게 일었다.
그래서 다시 몸을 틀어서 천장을 바라봤다.
"... 난... 왜 그렇게 아빠한테 항상 서운했을까?
"... 왜 서운했어?"
"... 그냥 하나 하나가 다 의미부여가 되고,
.. 어떨때는 조그만 일에 기뻤다가, 서운했다가..
...섭섭했다가...."
"... 니가 날 그만큼 좋아했나보지 뭐..."
최사장이 고개만 뒤로 돌리며 우스갯소리를 한다.
좋아했다는 표현이 준이는 영 부끄러운지 말을 더 이상은 잇지 못한다. 아무렇지 않게, 내가 많이 좋아했었나보다 라고 충분히 웃으면서 넘길수도 있었다. 하지만 준이는 그 말을 쉽게 내뱉을수가 없었다. 말하는 순간 영영 최사장에게 또 다시 빠져버릴것만 같았다.
"...아빠는? .. 나 좋아했어?"
".... 너는 뭘 그런걸 낯 간지럽게 물어보노?"
최사장은 말이없다. 대답대신 다시 꼬냑 한잔을 그대로 원샷을 한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 올랐다.
"... 그게 뭐가 중요해!! 그치?
... 이렇게 멀리서 와주면 됐지..."
준이는 대답을 기다리다 먼저 말을 꺼냈다.
" 그럼!! 전화받고 바로 비행기티켓 끊었잖아.."
최사장도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 참... 우리 최영성씨.. 나한테 정말 잘해줬다...."
"... 왜그래... 아프니까 철이 좀 드냐?"
직원들이 가게를 오픈 하고 있으면, 최사장은 출근을 해서 등을 지고 서 있던 준이의 엉덩이를 치며 인사를 하곤했다.
준이는 자기한테만 그러는게 너무 좋았다고 했다.
한번은 쇼핑을 같이 갔는데, 시계부터 악세서리까지, 바지 자켓은 말할것도 없고, 심지어 팬티, 양말, 모자 신발까지 다 사준적이 있었다. 준이는 그때 머리부터 발끝까지 필요한걸 다 사주는 사람은 처음이라고도 말했다.
그 외에도,
직원들에게는 현금 200불을 보너스로 줬지만,
준이에게만 아이패드를 선물해준일.
골프 레슨을 시켜준일.
자동차를 살때도, 현금 3000천불을 보태준일.
같이 장보러 갈때마다, 식료품을 계산해준일.
절대 소소하지 않았던 귀중한 추억을 한참 이야기 하다가 잠이 들었다. 최사장은 방으로 들어가서 이불을 가져다가 준이의 몸에 덮어준다. 그리고 탁자에 걸터 앉아서 잠든 준이를 바라보면서 한참을 남아있던 꼬냑을 마셨다.
"....좋아하지.."
잠이든 준이에게 최사장의 목소리가 그대로 사정없이 귓가에 꽂힌다. 순간 움찔거리는것을 가까스로 참아낸다.
"...알아도 모른척 하는거라...
.. 내 마음을 니가 알았다고 한들...
... 뭐가 달라졌겠노? 힘들기만 하지...."
"....띠리리리리리"
최사장의 핸드폰이 울린다.
급하게 전화를 받고는 작게 말한다.
"... 어... 자기야..."
"... 준이씨는 좀 어때요?"
"... 어... 아직 검사 결과 제대로 나와야 알지.."
"... 많이 놀랬겠네..."
"... 어.. 뭐.. 조금 진정됐어..."
"... 내가 시켜놓은거 좀 먹였어?"
"... 어... 지금 그거 먹고... 자고있어..."
최사장은 시선을 준이에게 맞춘다. 생글생글 눈웃음이 지어진다.
".... 자기는 괜찮아?"
"...어?"
".... 괜찮냐고?"
"... 어...응.... "
순간 최사장의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감정에 북 받치는걸 애써 참아내는듯 보인다.
"...얼른 자..."
"... 응..."
전화를 끊자마자,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한번 훔치고는,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준이는 방문소리가 닫히자, 경직되어있던 몸을 겨우 푼다.
'...알아도 모른척 하는거라...
.. 내 마음을 니가 알았다고 한들...
... 뭐가 달라졌겠노? 힘들기만 하지....'
귓가에 맴도는 최사장의 독백. 마음을 어지럽게 한다.
..............
어찌된일인지 전화도 없었다. 매일 매일 보고 하라고 했는데. 아예 월차까지 낸 유부장은 핸드폰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 말은.. 하여튼 징하게 안들어!!!"
유부장이 몇번이나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를 받지 않자, 초조한 심경으로 있는데 때마침 준이에게 전화가 왔다.
".. 여보세요?"
"...왜 전화 안해? 매일 보고 하라니까!!
.. 전화는 왜 안받고?"
역정이 났는지 유부장의 목소리가 커졌다.
".. 죄송해요... 지금 사장님이랑 쇼핑중이라서요.."
" 아픈 사람을 데리고 무슨 쇼핑을 해? 그사람 제정신이야? "
" 누구야? "
최사장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소리가 들린다.
"..아..우리회사 부장님.."
너무 가까이 있어서 차마 거짓말을 할수가 없었다.
"... 그 사람은 왜 전화를 하는거야? "
".. 아... 그게..."
중간에서 난처하다. 눈치를 보며 준이가 말한다.
"..부장님... 저기.. 죄송한데.. "
" 너.. 거기 어디야?"
".. 네?"
" 거기 어디냐고? "
" 아.. 여기 세중 아울렛이예요..."
" 기달려... 내가 지금 바로 갈테니까.. 전화 받아!"
.................
최사장과 준이는 쇼핑을 마치고 식사중이었다.
몰 안에 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이다. 준이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최사장이 사준 옷으로 변신되어 있었다.
"... 봐라!! 얼마나 좋냐!!"
준이가 피식 웃는다.
"... 센스야.. 패션은 센스라고..."
최사장은 흐뭇해보인다. 준이와 옷이 꽤 어울리는 모양이다. 한참을 만족해 하다가 파스타를 집어든다.
"... 괜찮지? 여기?"
"... 미국에 살면서 여기는 또 어떻게 아셨데?"
"... 센스야 센스... 내가 모르는게 어디있노?"
"... 네...대단하십니다..."
"... 띠리리리"
준이의 전화가 눈치없이 울린다. 유부장일게 틀림이 없어서 괜히 준이는 주눅이 든다. 느낌은 정확했다.
".... 다왔다... 어디야? "
다짜고짜 유부장이 외쳤다.
"... 저.. 지금 사장님이랑 밥먹고 있어요..."
"... 어디서!!!!!"
위치를 파악한 유부장은 발에 땀이 나도록 뛴다. 얼굴은 비장함마저 들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알수없는 긴장감이 들게 만들었다.
준이는 좌불안석이다. 최사장에게 잠깐 유부장을 만나고 오겠다고 하면 분명히 난리를 칠게 뻔했다. 그러나 두사람이 만나는건 상황을 악화시킬게 뻔했다.
"... 저기... 나.. 잠깐 부장님좀 만나고 와야 될거 같아..."
"...뭐? 그 사람이 왔어? 여기까지?"
의아해하면서 얼굴이 금새 일그러지는 최사장.
".. 금방이면 돼요.. 회사에 급한 일이..."
"... 무슨 부장이..직원 쉬는데까지 찾아오노?"
준이는 급하게 자리를 뜬다. 그렇게 가게문을 향해서 조금씩 걸어가는데, 급하게 가게문이 열린다. 유부장이었다. 한달음에 달려왔는지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다.
"... 부장님..."
준이는 급하게 인사를 하고 얼른 밖으로 나가서 이야기할 모양새를 갖췄다. 하지만 유부장은 준이의 팔을 낚아채고는 최사장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돌진했다.
".. 죄송합니다만..애가 아픈데 ..
쇼핑이 지금 가당키나 합니까?"
매서운 눈빛으로 쏴부쳤다.
정중한 편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최사장은 가소로운듯 아무런 동요도 하지 않는다. 헛웃음을 치면서 고개를 돌리더니,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 놓으며 유부장과 눈을 적극적으로 맞추기 시작했다.
"... 내.. 아들입니다...
...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 진짜 아버지도 아니시잖아요...
.. 제가 데려가겠습니다..."
준이는 벌써부터 든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며 발만 동동 구르면서 유부장과 최사장을 번갈아 가면서 쳐다보고 있다.
"... 저기... 좀.. 생각보다 무례하시네요.."
"... 무례한것보다, 지금은 무식한게 문제입니다..."
"... 가자...빨리..."
유부장은 준이의 손목을 덜썩 잡는다.
그러자 최사장이 일어나서 준이의 손목을 낚아챈다.
".. 무식이요? 부장님이 지금 와서 이렇게 하는게 무식한것 같은데요.."
유부장은 아무래도 감정이 많이 올라온것 같다. 평소에는 아무리 화가나도 잘 모르는 사람에게 지금과 같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 아버지란 사람이.. 애를 이지경이 두도록 놔둡니까?"
"... 이사람이 정말?"
"... 딱 보면 몰라요? 속이 새까맣게 타는거?"
최사장은 갑자기 잡고 있던 준이의 손목을 더욱더 꽉 쥔다.
유부장은 그때 하늘을 찌를듯이 소리를 질렀다.
"... 애가타 죽는 애를 왜!!! 왜!!! 십년을 곁에 둬요?
.. 그러고도 당신이 사람이야?"
그리고 조금 작게 혼자 읖조렸다.
"... 나는.. 얘... 3개월만 봐도.. 불쌍해 죽겠구만...."
"...그만들 하세요..."
준이는 난처했지만, 더이상 가만이 있을수는 없어서 한마디를 했다. 그러자 최사장이 짐짓 표정이 변했다. 그리고 나지막히 준이에게 말했다.
"...가자... "
최사장은 할말을 잃은 사람처럼 보였다. 유부장의 말을 피하는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오묘한 표정으로 준이의 팔을 잡고 이끈다. 준이는 그 힘에 이끌려서 몸을 움직인다. 모든걸 쏟아낸 유부장은 그 모습을 힘이 빠진채로 바라본다.
이윽고 그 둘이 가게문을 열고 빠져나가려는데, 유부장이 쉼호흡을 한다. 눈매는 살기가 느껴질정도로 살아있다.
"...이준이!!!"
할수있는한 최대한 목청을 높여서 질렀으므로, 가게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다. 그리고 약속이나 한듯이 숨죽이고 유부장의 다음말을 기다렸다.
"...아무래도.. 너를 사랑하는거 같아..
.. 사랑한다고!!. 이준이!!"
그렇게 늘 긴가민가 했던, 가끔은 다가가지 않으려 노력했던 저만치 숨겨놨던 진심을 온힘을 다해서 퍼붓고는, 무릎까지 꿇어버렸다.
주위사람들은 당혹스러운듯 야유같은 웅성거림이 여지없이 공간을 가득메웠다. 그럴만도 했다. 중년남자가 그것도 남자에게 하는 고백을 어디서 본적이 있었겠는가.
최사장과 준이는 그 자리에 섰다. 순간 유부장의 고백에 압도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최사장은 준이의 손을 이끌며 가게를 빠져 나가고 있는데도, 준이는 눈은 휘둥그래져서 무릎을 꿇고있는 유부장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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