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중설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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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재은 (1)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아서인지 거리에는 제법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교회 첨탑을 장식한 색색의 꼬마전구가 부끄러운 듯 깜박이고, 두꺼운 외투를 입은 사람들이 가족이나 연인들의 손을 잡고 크리스마스트리가 설치된 사거리를 종종걸음으로 지났다.
재은은 집으로 향하다가 문득 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아버지가 일하는 아파트로 가는 버스를 탔다. 아버지는 택시 일을 하다가 몇 년 전 허리를 심하게 다친 이후로 지금은 아파트 경비 일을 하고 있었다.
재은은 아버지를 놀라게 할 생각으로 전화도 하지 않고 조용히 걸었다.
경비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순찰이라도 나가셨나?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는데 저 멀리 재활용 쓰레기 분리수거장에 누군가 혼자 앉아서 박스를 뜯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눈에 익은 뒷모습. 바로 아버지였다.
재은은 아버지에게 선뜻 다가가지 못하고 아버지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한겨울 차가운 바람을 막기에는 아버지 옷이 너무 얇아 보였다. 아버지는 몸을 잔뜩 움츠린 채 면장갑만 낀 손을 호호 불어가며 재활용 쓰레기를 정리하는 중이었다.
재은은 마음이 짠해서 차마 더 보지 못하고 그대로 발길을 돌렸다. 몇 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실의에 빠졌던 아버지는 운전 중에 취객과 시비가 붙어 실랑이를 벌이다가 차도에서 넘어져 크게 다쳤다. 허리도 그때 다친 것이었다.
아버지가 택시를 하며 모은 돈은 엄마 병원비와 약값으로 다 써 버렸다. 당시 지은은 중2, 한창 예민할 시기였고, 자신은 군대에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휴가를 나와서 보니 아버지는 고작 일 년 사이에 10년은 늙어 보였다. 허리를 다치고 할 수 있는 일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당시 아버지가 어떻게 생활을 꾸려가셨는지 알 수가 없다.
그때 다짐했다. 앞으로는 자신이 가장이라고. 동생 학원비랑 대학등록금도 모두 자신이 마련하겠다고.
재은은 발걸음을 돌리며 밤새워 일하고 돌아오실 아버지를 위해 생선이라도 구워놔야겠다고 생각했다.
집 근처 마트에서 장을 보는데 갑자기 누군가 재은에게 팔짱을 끼며 매달렸다.
“어이, 훈남, 잘 생겼네. 우리 연애나 할까?”
귀에 익은 목소리에 재은은 미소부터 지었다.
“다 큰 녀석이 징그럽게 달라붙기는. 좀 떨어져.”
재은이 손가락으로 지은의 이마를 밀었지만 지은은 재은의 팔을 꽉 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싫어. 그런데 뭘 하려고?”
재은은 포기했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젓고 다시 고등어로 눈길을 돌렸다.
“아버지 드시게 고등어 좀 구우려고. 학원은 다 마치고 오는 길이야? 땡땡이친 건 아니지?”
“당연하지 그럼. 내가 얼마나 열심인데.”
“어유 그러셨어요? 태완 팬클럽 회장님? 보나 마나 오늘도 공부는 안 하고 학원에서 팬클럽 회원관리나 열심히 하셨겠지요.”
재은이 바구니에 고등어를 담았다.
“오빠는 둘 다 잘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아? 나니까 그 정도 하는 거지 다른 애들 같으면 벌써 하나는 포기했어.”
“그러니까 둘 다 잘하지 말고 공부만 잘하면 안 되겠어? 당장 내년부터는 고3인데 이 오빠는 심히 걱정된다.”
“안돼. 태완 오빠 내년에 군대 갈지도 모른단 말이야. 우리 태완 오빠 군대 가기 전까지는 팬클럽 회장 자리 내놓을 수 없어. 생일파티도 내가 직접 해줄 거야. 우리 태완 오빠, 머리 깎으면 마음 아파서 어떡해?”
지은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우는 시늉을 했다.
“머리 깎으면 시원하고 좋지 뭘. 내가 군대 갈 때는 아무것도 안 해주더니…. 누가 들으면 태완이가 친오빠인 줄 알겠다? 기분 나빠서 안 되겠다. 가서 태완이한테 저녁해 달라고 해.”
재은이 된장찌개용 두부와 감자를 바구니에 담으면서 짐짓 삐진 척했다. 그러자 지은이 얄밉게 배시시 웃었다.
“오빠! 또 된장찌개야? 우리도 맛있는 것 좀 먹으면 안 돼?”
지은이 안 하던 반찬 투정을 했다.
“응? 맛있는 거 뭐?”
재은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지은이 눈을 생글거리며 애교를 부렸다.
“꼬기~! 요즘 하도 풀떼기만 먹어서인지 똥 색깔도 푸르죽죽하단 말이야.”
“아휴, 여자애가 못하는 소리가 없어. 성한이가 너 이런 소리 하는 거 아냐? 내가 확 다 말한다?”
살짝 협박도 해보지만 지은은 꿈적도 하지 않았다.
“그게 뭐? 지저분한 건 걔가 나보다 더해. 맨날 내 앞에서 콧구멍 후비지, 트림하지. 또 코털, 겨털은 왜 그리 자주 삐져나오는지. 아주 더러워 죽겠어. 그것보다 오빠, 나 꼬기 먹고 싶다니까. 꼬기!”
지은이 재은의 팔에 매달려 폴짝폴짝 뛰며 졸랐다. 동생의 애교에 재은이 결국 넘어갔다.
“그래. 그럼 간만에 삼겹살이나 구워 먹을까?”
“삼겹살 말고 소고기 먹고 싶어. 이거 한우 꽃등심.”
그 말에 삼겹살 포장육으로 가던 재은의 손길이 주춤했다. 한우 꽃등심은 120g에 3만원이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간에 기별도 안 갈 것이다. 세 식구가 먹으려면 적어도 600g은 사야 할 텐데 그러면 고깃값만 10만 원이 넘는다.
순간적으로 재은의 머릿속에 띠링 소리가 나며 이달 치 생활비가 재빨리 계산되었다. 나가야 할 돈은 빠듯한데 한 끼 밥값으로 10만 원은 아무래도 무리다.
재은이 망설이는 모습에 지은이 집었던 한우 꽃등심 팩을 슬그머니 놓았다.
“봐줬다. 오늘은 삼겹살 먹고 다음에 오빠 돈 생기면 꽃등심 사줘. 꼭 한우로 사줘야 해. 아, 맞다. 지금 몇 시야? 우리 태완 오빠 나올 시간이야. 빨리 가자, 오빠.”
눈치가 없는 듯하면서도 은근히 오빠 마음을 헤아리는 동생을 보며 재은은 미안했다.
다음번에는 한우 꽃등심 꼭 사줄게.
****
토요일 밤, 재은이 간만에 민아를 보러 나갔다. 일하랴 집안일 하랴 한시도 쉴 틈이 없는 재은의 유일한 낙은 가끔 민아와 만나 맥주 한잔 홀짝이는 것이었다. 고등학교 동창인 민아는 수다스럽고 좀 여성스럽긴 해도 아무것도 숨길 필요가 없는 유일한 친구였다.
민아와 친해진 이유는 이름 때문이었다. 재은도 여성스러운 이름 때문에 피곤할 때가 많았지만, 민아는 성까지도 하필이면 ‘신’이라 동명의 여자 탤런트와 이름이 똑같았다. 그래서 고등학교 때 남자애들에게 놀림도 무척 많이 받았었다. 일종의 동병상련인 셈이었다. 물론 친해지게 된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재은아, 여기야!”
과도하게 멋을 부린 하이넥 코트에 깔맞춤 모자를 쓴 민아가 길 한복판에서 손을 크게 흔들었다.
재은은 민아를 보는 순간, 창피한 나머지 못 본 척 돌아갈까 하고 잠시 고민했으나 민아는 어느새 득달같이 달려왔다.
“야, 사람을 봤으면 아는 척을 해야지 왜 고개를 돌려?”
“으, 응? 누가 고개를 돌려? 아니야, 이제야 봤어.”
재은이 민아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민아가 갑자기 재은을 아래위로 쭉 훑었다.
“한 달 만에 보면서 옷이 이게 뭐냐? 지난번이랑 똑같잖아. 나 만나러 올 때는 좀 꾸미고 나오랬지? 나, 배우 지망생이야. 나랑 같이 다니려면 패션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어?”
민아가 어깨에 힘을 주며 모델처럼 도도한 포즈를 취했다.
“지랄을 해라, 아주.”
재은이 참지 못하고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민아가 흥분한 표정으로 재은의 팔을 끌다시피 하며 걷기 시작했다.
“빨리 가자. 드디어 고은수가 오는 바를 알아냈어. 지난번에도 누가 걔를 거기서 봤대.”
“고은수가 누구야?”
“고은수 몰라? 요즘 제일 인기 있는 드라마, ‘구름 위의 달빛’에서 세자로 나오는 애 말이야.”
민아의 말에 그제야 고은수가 누군지 떠올랐다. 동생이 꼬박꼬박 챙겨보는 퓨전 판타지 사극으로 한창 주가를 올리는 신인 배우였다. 나이는 자신과 비슷한 또래지 아마?
“걔 누나가 탤런트 고은정이지?”
재은이 묻자 민아가 호들갑을 떨었다.
“그래, 맞아. 유전자가 같아서 그런지 둘 다 너무 괜찮지 않냐? 걔네들 볼 때마다 우리 엄마, 아빠가 너무 원망스러워. 왜 나한테는 요따구 유전자밖에 못 만들어줬는지.”
“나, 고은정 봤다?”
재은의 말에 민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 언제? 어디서? 야, 왜 진즉 얘기 안 했어? 예쁘지? 예쁘겠지. 화장품 광고에 소주 광고까지 싹쓸이하는 배우니.…”
민아가 쫑알쫑알 혼자 묻고 혼자 답하기 바빴다.
재은이 눈을 가늘게 뜨고 민아를 흘겨보았다. 그제야 민아가 머쓱한지 입을 닫았다.
“며칠 전에 고은정이 남자친구랑 우리 공업소에 왔었어.”
재은의 말에 민아의 목소리가 롤러코스터를 탄 듯 다시 급격히 올라갔다.
“뭐? 고은정이 남자친구랑? 완전 특종이네. 어때? 잘생겼어? 훈남? 근육남? 짐승돌? 고은정 남자친구는 인터넷에도 안 나와. 사진 좀 찍어놓지.”
문득 민재의 얼굴이 떠올랐다. 왕재수 새끼.
“그 자식, 재수 없어.”
“...?”
재은의 입에서 거친 말이 나오자 민아가 두 눈을 토끼처럼 동그랗게 떴다.
“엥? 그거 칭찬이지? 나쁜 남자 콘셉트라는 거지? 완전 짱이다. 졸라 멋있다.”
“나쁜 남자 콘셉트는 무슨. 그냥 재수 없다니까.”
재은이 민아를 뒤에 두고 성큼성큼 앞서 걸었다.
재은이 지나가자 남자, 여자나 할 것 없이 모두 힐끗거리며 쳐다보았다.
큰 키에 균형이 잘 잡힌 몸매, 희고 갸름한 얼굴에 차가운 눈빛. 재은은 청바지에 검은색 목폴라 니트, 그리고 헐렁한 카멜색 코트 하나만 걸치고 있었지만 잔뜩 멋을 낸 민아보다 더욱 주목을 받았다.
재은이 앞서가자 민아가 종종걸음으로 따라와 재은 옆에 바싹 붙었다.
“저기 저 남자애, 너한테서 눈길을 못 뗀다야. 괜찮아 보이는데 어때?”
“관심 없어.”
재은이 무심한 표정으로 걸었다. 그러자 민아가 재은 몰래 고개를 돌리고 입을 삐죽거렸다.
“아오, 재수 없는 놈. 재수 없는 건 너라니까.”
“뭐라고? 안 들려. 크게 얘기해.”
재은의 말에 민아가 급 방긋 웃었다. 크게 얘기하긴. 방금 너 욕한 건데.
“참, 너 내 친구 상수 알지?”
“상수? 등산 모임 친구라는 그 상수?”
“그래. 상수가 너 본 뒤로 자기 상사병 걸렸다고 제발 다리 좀 놓아달래.”
재은의 까칠한 성격을 아는 민아가 눈치를 보며 슬쩍 말을 꺼냈다.
“관심 없어.”
재은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무조건 노!
“야, 너 동생 뒤치다꺼리도 좋지만 네 인생도 있는데 연애도 하고 좀 즐기면서 살아야 할 거 아니야?”
“내가 지금 연애를 어떻게 하냐? 연애하면 시간 깨지고 돈 깨지는데. 지은이 대학등록금도 아직 다 모으지 못했어. 그리고 연애하고 싶은 사람도 없고.”
“미친놈. 그러니까 애들이 너보고 엘사라고 하지.”
“엘사?”
“왜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에서 손만 대면 다 얼려버리는 애 있잖아? 네가 하도 뻣뻣하게 구니까 그런 별명이 붙은 것 아냐. 사람이 좋아해 주면 적당히 좀 넘어가는 맛도 있어야지, 맨날 말도 못 붙이게 하니, 원. 다들 남의 속도 모르고 네가 눈이 너무 높아서 그런 줄로만 안다니까.”
“부르고 싶은 데로 부르라고 해. 난 상관없으니까.”
“넌 상관없지만 나는 괴롭단 말이야. 다들 전부 나한테 와서 얘기한다고.”
민아가 또 앓는 소리를 했다. 어휴, 하루 이틀도 아니고 저놈의 청승은….
딴에는 민아에게 미안하기도 했지만 재은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나도 연애하고 싶고, 데이트도 하고 싶고, 애인이랑 같이 여행도 가고 싶다. 하지만 자신의 처지에 그런 게 가당키나 할까.
문득 요 전날 재활용 쓰레기를 분리하시던 아버지 뒷모습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오늘도 일하시는데 답답하다고 내가 이렇게 나와도 되는 걸까.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지은이 대학등록금은 녀석 대학 가면 알아서 하라고 해. 언제까지 오빠가 그렇게 다 챙겨야 해?”
“지은이 대학 가면 공부해야지, 일할 시간이 어디 있어?”
재은의 대답에 민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너도 참 독종이다. 에휴, 내가 괜한 소리를 했네. 들어가자. 어차피 너 오래 있지도 못할 텐데 빨리 들어가자.”
두 사람은 은수가 출몰한다는 게이바의 문을 열었다. 재은과 민아가 바에 들어서자 약속이나 한 듯 사람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꽂혔다. 정확히는 재은의 얼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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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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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한회한회 정성이 묻어나는
장면들로 상상의 즐거움이 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