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중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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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민재 (1)


민재가 찻잔을 들고 허파에 바람이라도 든 것처럼 계속 실실거렸다. 모처럼 부모님과 거실에 앉아 차를 마시는 중이었지만 정작 민재의 머릿속은 딴생각으로 가득했다. 민재는 어젯밤에 우연히 만난 재은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 녀석 놀란 표정, 정말 귀여웠는데.’


민재가 드디어 식은 차를 홀짝거리며 마셨다. 


“뭔가 좋은 일이라도 있나 보구나. 입꼬리가 내려오지 않는 걸 보니.”


민재 아버지가 신문을 넘기며 돋보기안경 너머로 민재를 바라보았다. 


“그러게 말이에요. 저 애가 저렇게 활짝 웃는 모습,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요.”


이번에는 민재 어머니가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민재는 그제야 자신이 계속 웃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하하하, 그런가요? 크리스마스가 다가와서 그런가 봐요. 크리스마스에는 좋은 일이 생길지도 모르잖아요.”


“네가 장가가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니?”


어머니가 아들을 안타까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말 나온 김에 내년에는 꼭 결혼하도록 해라. 사돈댁을 이렇게 기다리게 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야. 그 집안이 뭐가 부족해서 우리랑 사돈을 맺으려 하겠냐? 이게 다 은정이 그 애가 너를 좋게 봐서가 아니냐?”


이번에는 아버지가 보던 신문을 접으며 근엄하게 덧붙였다. 본격적으로 혼사 얘기를 꺼낼 모양이었다.

재은 생각에 빠져 미소가 떠나지 않던 민재의 얼굴이 대번에 굳었다.


“그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네가 알아서 한다고 해놓고서 벌써 3년이 지났어. 이만큼 기다리게 했으면 충분해. 아닌 말로 사돈댁이 나쁜 마음을 먹고 우리 회사와 거래라도 끊는 날에는 우리 회사 직원 3000명은 당장 길거리에 나앉게 돼.”


아버지의 말은 단호했다. 


“더 생각할 것 없다. 봄이 오면 당장 식을 올리거라.”


“아버지!”


아들과 아버지 간에 강경한 분위기가 형성되자 어머니가 민재를 다독였다.


“은정이면 나무랄 데 없는 아이다. 우리가 어디서 그만한 며느리를 보겠어? 얼굴 예쁘지, 학벌 좋지, 집안 훌륭하지. 게다가 배우 생활하면서도 그 흔한 스캔들 한번 없었잖니? 이번만큼은 민재 네가 아버지 말씀을 좀 들어.”


말은 부드럽게 하지만 어머니도 물러설 낌새가 아니었다. 


“도대체 뭐가 문제냐? 교회에서도 모두 나만 보면 물어봐. 너 장가 언제 가느냐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워낙 강경하게 나오니 더 이상 뭐라고 반박하기도 어려웠다. 일단은 수긍하는 척이라도 하며 넘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보겠습니다.”


“생각할 것 없다. 그냥 해.”


아버지가 더 말할 것도 없다는 듯이 TV를 켰다. 마침 TV에는 동성애자 축제 관련 뉴스가 나오는 중이었다.


“허 참, 말세다, 말세야. 사내새끼들이 벌거벗고 저런 짓을 벌이다니…. 세상이 어찌 되려고 이 모양인지. 쯧쯧.”


“아이고, 흉측해라. 남자끼리 껴안고 입을 맞추다니. 성경 말씀이 딱 맞아요. 말세에는 남자가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를 향해 음욕이 불 일듯 한다잖아요. 아이고, 주여. 저것들을 몽땅 지옥 불에 던지소서.”


어머니가 게이 커플이 키스하는 장면에 인상을 찡그렸다.


“얘 민재야, 너도 조심해라. 어디 가서 저런 것들 하고는 절대 어울리면 안 된다. 목사님이 그러시는데 동성애는 한번 빠지면 어미 아비도 몰라본다더라. 처음이 어렵지 한번 빠지면 마약보다 무서운 게 동성애란다.”


민재가 말없이 TV 속 장면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는데 지금은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


방으로 돌아온 민재는 창문을 활짝 열고 창가에 우두커니 앉아 밖을 내다봤다. 아침부터 내리던 눈은 어느새 그쳤나 보다. 눈에 뒤덮인 창밖 세상은 더없이 고요해 보였다. 골목길에는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고 있었다. 


차가운 겨울 공기가 맨살에 닿자 조금 진정이 되었다. 허파에 찬 공기를 한껏 들이켰다.


영화감독이 되려고 꿈꾸었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젊었고, 매사에 활기가 넘쳤고, 인생이 마냥 아름다웠다. 넘쳐나는 열정을 주체할 수 없어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운명은 민재가 꿈꾸는 대로 살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아버지가 사업 악화로 쓰러지셨고, 그 바람에 민재는 피우지 못한 꿈을 가슴에 묻은 채 유학생활을 접고 귀국해야 했다. 


유학 시절 잠시 알았던 대기업 장녀 은정이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고, 은정과 함께 다니면서 참 많이도 변했다. 마음은 그렇지 않았지만 겉으로는 항상 도도한 척해야 했고, 사람을 만나면 기부터 죽이려고 허세를 부려야 했다.

 

탈 때마다 불편한 차도 실은 은정이 해 준 것이었다. 친구들에게 기죽기 싫다며. 한심하고 유치해도 어쩔 수 없었다. 은정이의 뜻에 맞추어 주려면. 


언젠가부터 내 인생은 그렇게 내 뜻과 상관없이 흘렀다. 그런데 설재은 그 녀석을 본 순간, 식은 줄로만 알았던 가슴이 다시 뜨거워졌다. 어쩌면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 녀석만 옆에 있어 준다면…. 




창문을 열어놓고 한참 동안 상념에 잠기다 보니 몸이 으슬으슬했다. 창문을 막 닫으려는데 전화기가 울렸다. 은정이었다. 그날 혼자 택시를 타고 사라진 이후로 통 연락이 없더니 결국 먼저 전화를 한 것이다. 꼭 일주일 만이었다.


민재는 전화기를 침대 위로 던져 버렸다. 전화를 받을 기분이 아니었다.

일 분도 안 되어 다시 문자가 올 것이다. 왜 전화를 안 받냐며.


국내 10대 그룹의 하나인 세나 그룹의 장녀이자 잘 나가는 인기탤런트 고은정을 누가 감히 거스른단 말인가. 아버지 회사는 세나 그룹 규모의 10분의 1도 안 된다. 은정에게 자기 같은 납품업체 사장 아들은 눈에 차지도 않을 것이다.


띠링. 문자 알림음이 났다.

예상대로 고은정이었다.


- 전화 왜 안 받아? 이딴 식으로 해봐. 어떻게 되나.


“후-” 


민재가 문자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문자가 아니라 협박이다. 칼만 안 든.

 

아버지 회사만 아니라면 마음에도 없는 은정에게 이렇게 끌려갈 일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부모님을 버리지 않는 이상, 이 관계가 바뀔 리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영원히….


띠리리링.

전화벨이 또 울렸다. 은정은 자존심이 세서 전화벨이 세 번 울릴 때까지 받지 않으면 바로 끊어 버렸다. 민재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전화벨이 곧 끊어지기를 기다렸다. 


띠리리링. 띠리리링.

그런데 전화벨은 세 번을 넘어서까지 계속 울렸다. 그제야 민재가 전화기를 들었다. 이번에는 은정이 아니라 은수였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민재가 통화버튼을 눌렀다.


“왜?”


“아 씨, 형! 어제 그렇게 가는 법이 어디 있어? 내가 거기서 형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그냥 가려면 간다고 말이라도 해야 할 거 아니야.”


은수는 제대로 화가 나 있었다. 어제 재은 뒤를 급히 쫓아가느라 은수에게 전화할 생각을 못 했다. 변명거리가 전혀 없었다.


“미안하다. 갑자기 급한 사정이 생겨서 그렇게 됐어. 이해해 줘.”


“아 됐어. 미안하면 당장 나와서 술이나 사. 나 지금 기분 너무 더러우니까.”


“어딘데?”


“여기 압구정 ** 룸살롱이야.”


“그래. 금방 갈게. 기다려.” 


민재가 다시 옷을 챙겨 입었다. 오늘 기분도 안 좋은데 나도 술이나 한잔해야겠다.


****


멤버십으로 운영되는 고급 룸살롱 문을 열고 들어가자 웨이터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은수가 있는 방으로 안내했다. 항상 어울려 다니는 폭주족 친구들과 함께 있을 것으로 생각했건만 의외로 룸에는 은수밖에 없었다. 은수는 술이 꽤 된 듯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몸을 휘청대고 있었다.


“오! 사랑하는 우리 매형! 왔어?”


민재가 들어가자 은수가 혀 꼬부라진 소리를 하며 일어나더니 민재를 꽉 끌어안았다.


“왜 이렇게 술을 많이 마셨어? 아직 초저녁인데.”


“그야 형이 어제 나를 버리고 딴 년과 같이 가서지. 아니, 딴 놈인가? 히히히.” 


은수는 민재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 비틀거렸다.


“그래서, 재미는 좀 봤어?” 


“일단 앉아. 물 좀 마셔.”


물잔을 건네는 민재의 손을 은수가 뿌리쳤다.


“어제 누나한테 간 건 아니지?”


은수가 취해서 분명치 않은 발음으로 따져 물었다. 민재는 대답하지 않고 술을 한 모금 마셨다. 


“누굴까? 도대체 누구기에 우리 잘생긴 매형이, 곧 결혼할 우리 누나도 버리고, 매제가 될 나도 버리고, 갔을까?” 


민재가 눈길을 피하자 은수가 고개를 돌려가며 집요하게 민재의 눈길을 쫓았다. 은수가 술기운을 가누지 못하고 개업 이벤트에 쓰이는 바람 인형처럼 계속 휘청댔다.


“대답 좀 해봐, 하민재씨. 도대체 누굴 만나러 갔던 거야?” 


“너 취했다. 일어서. 바래다줄게.”


“아 씨벌, 나 버리고 누구 만나러 갔었냐고! 대답 좀 해보라고!”


은수가 자신을 일으키려는 민재의 손을 거칠게 쳐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바람에 민재는 그만 중심을 잃고 소파 위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 순간. 


은수가 갑자기 민재에게 입을 맞췄다. 


“읍-!”


은수의 혀가 알싸한 알코올 냄새를 풍기며 놀란 민재의 입속으로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너무나도 갑작스레 일어난 일이라 은수를 막을 겨를도 없었다. 은수는 민재의 입술을 뜯어먹기라도 할 듯한 기세였다.


“하-. 하-.”


은수가 입을 벌려 민재의 입술을 깨물더니 자신의 혀를 민재의 입속으로 집어넣었다. 갈증 난 사람처럼 민재의 혀를 거칠게 빨아들이던 은수가 민재의 타액을 꿀꺽꿀꺽 삼켰다. 두 사람의 입술이 서로의 타액으로 범벅이 되어 푸른색 네온 불빛에 번들거렸다.


“형, 내가 형 좋아하는 것 알지? 응?”


은수가 손을 뻗어 민재의 바지 앞섶을 더듬었다. 민재의 가랑이를 움켜쥐더니 다급한 손길로 바지 지퍼를 내리려 했다. 

혼란스러움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민재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얼른 은수의 손을 뿌리치고 일어섰다. 


“이게 무슨 짓이야?”


민재가 매서운 눈초리로 은수를 노려보았다. 아무리 취했다고 하지만 이런 짓까지 용납할 수는 없다. 테이블에 놓인 티슈를 뽑아 입술에 묻은 은수의 타액을 닦았다. 은수에게 깨물렸는지 빨간 핏자국이 함께 묻어났다.


“너 이러는 거 네 누나는 아냐?”


“누나 얘기는 꺼내지도 마. 어차피 형도 누나 사랑해서 결혼하는 거 아니잖아.”


“너…!”


마치 제 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 같은 은수의 말에 민재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항상 자신의 마음은 자신보다 타인이 더 잘 아나 보다. 

지난번 경찬과 자신이 그랬고, 지금 자신과 은수가 그렇다.


“내가 그 정도 눈치도 없는 줄 알아? 하지만 형, 나는 형이 없으면 안 될 것 같아. 나, 정말 형을 사랑한단 말이야.”


은수가 민재를 바라보며 울먹였다. 기다란 은수의 속눈썹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형도 내가 싫지 않잖아? 말해봐. 형도 사실은 내가 좋은 거잖아. 나 알아. 형도 나와 같은 부류라는 걸….”


은수의 말이 민재의 뇌리를 강타했다. 민재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뭐, 뭐라고?”


“형도 남자 좋아하잖아, 씨벌!”


은수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질렀다.


“내가 벌려준다니까. 내가 얼마든지 대준다고. 형은 그저 내 구멍에 박고 원하는 만큼 즐기기만 하면 돼. 내가 바라는 건 그뿐이야.”


“은수야!”


민재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누나랑 결혼해. 어차피 형은 우리 누나 간판이 필요한 거잖아. 하지만 형도 사람이니 외로울 거 아니야. 그거 내가 달래줄게. 내가 달래준다고! 그럼 서로 좋은 거잖아. 그러니까 우리-”


“이 자식이!”


민재가 참지 못하고 은수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은수가 휘청거리며 소파 위로 넘어졌다. 입가가 찢어져 피가 맺혔다.


“너 말하는 꼬락서니를 보니 내가 안 챙겨도 되겠다. 오늘 네가 한 말, 못들은 걸로 할 테니 너도 정신 똑바로 차려. 아니면 네 아버지와 누나에게 다 말해버릴 테니까.”


민재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갔다. 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룸에 혼자 남은 은수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씨벌…. 하민재, 이 개.자식아. 왜 몰라. 왜 내 마음을 모르냐고!”


“아아악!”


은수가 참지 못하고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발버둥을 쳤다. 얼굴을 감싼 은수의 손가락 사이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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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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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남이 매형될 사람을 좋아하고 있었구나.  세 남자에게 어떤 일이  다가올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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