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사람들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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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다 뻐팅기며 준이의 병실에서 옹기종기 자고 있던 때에, 최사장이 조용히 눈치를 살피며 몸을 일으켰다. 큰숨과 작은 숨이 난무했지만, 자는건 확실해 보였다.
준이도 곤히 잠에 빠져있다. 최사장이 침대 옆에 자리를 잡고, 준이를 마음속 깊이 빼곡히 눈에 담는다. 바람불면 날라갈까 한숨쉬면 땅으로 꺼질까 노심초사로 보낸날이 수없이 많았다. 표현할 수는 없고, 알아도 모른척을 해야했던 억겁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흐른다. 그저 준이 곁에 맴돌면서 잘해주면 된다고 믿었다.
애가 탔다니. 어느정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어도, 순간 죄인처럼 느껴져서 아무말도 할수가 없었다. 다 버리고 준이에게 갈 자신도 없었다. 자식들이 너무나 어렸고, 무엇보다 준이에게 헛된 희망을 줘서는 안될것 같았다.
남자가 남자를 사랑할 수도 있는걸까?
준이가 미국을 떠난뒤로 계속 그 생각만 했다. 하지만 흐릿해져 있던것은 서서히 선명해졌다. 자꾸 걱정이 되고, 생각이 나고, 눈에 아른거렸다. 생각보다 괴롭고 힘든시간이었다.
최사장이 주변을 살핀후에, 미소를 띄우더니 준이의 입술에 입을 맞춘다. 그리고 준이를 살짝 깨웠다.
"..안 주무셨어?"
대답도 하지않고, 무사귀환을 빌며 묻는다.
".. 무서워?"
고개를 살짝 흔들며 ".. 조금..." 이라고 답한다.
최사장은 최대한 감정을 잡으려 노력하는지, 꾹꾹 힘을 주어서 말을 한다.
".. 내가 여기 있는데.. 뭘 걱정이고.."
그러자, 준이가 웃어준다. 준이가 미국을 떠나고 늘 동경했던 것이었다.
".. 근데.. 왜 내가 사준거 안하노 ?"
".. 뭐?"
".. 너 생일날 사준거.."
".. 아.. 그거.. 아껴야지.. 막하고 다니면 어떡해?"
어디에 있는지 준이는 짐작도 못할것이다.
".. 다음에 나 만나러 올때 신고와.. 어? "
".. 자.. 받어..."
최사장이 새 휴대폰을 내민다.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준이의 얼굴을 감싸준다. 다 잘될거라고. 아무일 없을거라고. 최사장은 준이가 잘때까지 가슴을 두드려 주었다.
마음이 착찹해진 최사장이 병실을 나간다. 한참 복도를 걷는데, 갑자기 누군가 불러세웠다. 뒤를 돌아보니, 어느샌가 그 인간이 걸어오고 있었다.
둘은 병원밖 벤치에 앉았다. 손에는 캔 커피가 들려있다. 금방이라도 못잡아 먹어서 안달이난 사람처럼 굴더니, 같이 나란히 새벽시간에 앉아 있으니 오묘한 기운이 감돈다.
".. 사돈어른이세요?"
유일한 유부장의 약점을 파고들며 물었다.그 점에 대해선 할말이 없긴했으나, 그렇다고 기 죽을 사람은 아니었다.
".. 근데요? 왜요?"
하도 당당하게 나와서 최사장은 어이가 없었다.
".. 그런데 준이를 사랑한다고요? "
어이 없기는 유부장도 마찬가지였다.
".. 왜요? 내가 준이를 사랑하면 안되는 법있습니까? "
하도 목청을 높이는 바람에 소리가 멀리 울려퍼졌다.
".. 사돈댁 큰형을 사랑한다니..제 정신입니까?"
유부장은 잠시도 뜸을 들일 생각이 없어 보인다.
".. 그쪽은 남자를 좋아하기는 합니까?
" 네? "
".. 그쪽 게이냐구요? 전 게이 된지 ..."
갑자기 말을 하다말고, 유부장이 손가락을 접으며 며칠이나 되는지 세어본다.
".. 딱.. 세달 되었네요.... 준이 때문에.."
그러자, 최사장이 답답하다는듯 말한다.
".. 전.. 남자를 좋아하는 사람 아닙니다..
..준이를 사랑하는 사람이죠..
..근데 준이가 남자인거 뿐입니다..."
한방 먹었다. 유부장이 손가락으로 이마를 괜히 긁다가, 회심의 일격을 날린다.
".. 그럼 다 버리고 준이한테 올수 있겠네요!.."
잠시 최사장이 머뭇거린다. 그러자 유부장이 말을 바로 잇는다.
".. 전 다 버리고 갈수 있습니다!."
최사장은 잠시 뜸을 들이다, 묻는다.
".. 당신 딸도 버릴수 있어요?"
"... 우리 딸을 내가 왜 버립니까?"
그러자, 최사장이 아련한 눈빛으로, 목소리를 떨며 묻는다.
"..어디 하나도 안버리고..
.. 얻을 수 있는게 세상에 있었습니까?"
잠시도 쉬지않고. 단호한 어조로 유부장이 답한다.
".. 저는 준이를 위해서는 다 버릴수 있습니다."
유부장이 그말을 하고 자리를 뜨는데, 최사장이 소리치며 말한다.
"..당신이야 말로.. 준이 그만 애태우고 보내줘..
..당신 욕심에 불과한거 아니야?"
걸어가던 유부장이 다가와서 한마디를 한다.
".. 다 버리고나 오세요!
.. 그럼 상대 해줄테니까... 용기도 없는 주제에.."
사실 아무런 계획도 대책도 없던 유부장이 먼저 자리를 일어선건, 최사장이 맞는 말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유부장에게 급하게 전화가 왔다. 남주임이었다.
".. 부장님.. 이사님께서 이번에 휴가 쓰실려면,
.. 해외 출장 몇주만 다녀 오시라는데요.."
한편, 최사장은 벤치에 남아서 곰곰히 상념에 빠져있다. 무엇을 골똘히 생각하는지, 날이 밝을때까지도 계속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그때 와이프에게 전화가 온다.
"...자기야.. 자기 어머니 위독하시다는데..?"
.......
석이는 걱정이 앞서서 집에 와서도 혼자서 계속 한숨을 내뱉는 중이다. 진즉부터 느끼고 있던 영우가 맥주 두개를 딴다. 그리고 한개를 석이에게 건네준다.
".. 살꺼야.. 준이형님.. 걱정마.."
그런데, 석이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 이석이!!"
".. 어?"
맥주까지 받아놓고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려서 영우 목소리가 들리는곳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 그러니까.. 니 말은.. 준이 형을 두고 두사람이 싸우고 있다? 이말이야? "
".. 니 형 내일 암 수술해..
.. 너는 지금 이상황에서 그런게 중요하냐?"
".. 아.. 몰라.. 그게 가능한 일인가 싶어서.."
".. 너는 게이 주제에 무슨 그런 말을 하냐?
.. 어쨌든 난 부장님한테 한표다!!"
석이는 맘에 안드는지, 입을 뾰족거리며 말한다.
".. 저게 뚤린 입이라고.. 막말 하는거봐..
너랑 나랑 이미 우리 집안 쑥대밭으로 만들어 놨는데.. 너는 그런말이 나오냐? .. 무조건 최사장님이지.. "
"..잘도 최사장님이 다 버리고 형님한테 오겠다!"
"..너는 그럼 우리 조카가 나중에 할아버지랑 삼촌이랑 사귀는 사이라는걸 알면 어떻겠냐? 우리도 이미 충분히 벅찰텐데.."
" 니가 그때 유부장님 눈빛을 봤어야 됐는데.."
"뭐? "
" 어찌나 그윽하던지.. 내가 다 반할것 같더라..
사랑하는 사람을 잡을수 없는 사나이의 그 한..
부장님한텐 그게 있었어.."
회상을 하던 영우가, 표정을 돌변하고 묻는다.
" 니가 그런것에 대해서 알기는 하냐? "
" 아유.. 또 지자랑 할려고..
지겹다.. 이 레파토리..그만 해라.. "
석이가 듣기 싫다는듯 표정을 지어 보인다. 영우는 능글능글하게 말을 잇는다.
" 니가 나 아니었으면,
오늘같이 화끈한 밤을 보낼수 있었겠냐?
나 만난걸 평생 감사해라.."
갑자기 영우가 춤까지 추면서 어디서도 들어본적 없는 노래를 만들며 부른다.
".. 머신 머신 섹.스 머신
.. 싸고 나도 5분이면 다시 살아나요.. "
영우는 석이를 데리고 침실로 갔다. 석이는 어쩔수없다는 듯이 못이긴채 따라갔다.
...........
모두들 숨죽여 기다리는데, [수술중] 이라는 작은 간판이 꺼졌고 이윽고 담당 의사가 나왔다.
"... 아이고 의사 선생님 어떻게 됐습니까?"
"...일단 수술은 잘 끝났습니다..."
그제야 모두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준이 엄마는 계속해서 감사하다고 인사를 했다. 그리고 고맙게도 다음날 준이가 움직임을 보이더니 눈을 서서히 뜨기 시작했다.
"... 준아! 엄마 보이냐? 엄마 알겠어?"
아버지도 덩달아 얼굴을 비춘다. 그리고 현이, 석이, 영우까지 그리고는 아무도 없었다. 찾는 기색이 역력한걸 알아채고는 영우와 석이가 콤비처럼, 자신이 각각 응원하고 있는 사람의 상황설명을 해줬다. 현이는 옆에서 통곡을 하고있었다. 누가 보면 정말 애절한 사이는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준이 아버지는 준이에게 큼지막한 미소를 보내고는 금새 어깨가 축 쳐져있다. 영우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 아버님.. 피곤하시죠...."
영우는 딱 달라붙어서 어깨를 주무른다. 마른 어깨에는 뼈만이 앙상했다. 한참을 주무르다가, 갑자기 영우가 울컥거리면서 병실을 뛰쳐 나갔다.
준이가 수술받기전, 준이 아버지는 따로 할 말이 있다고 불렀다. 수술비가 조금 모자르다고 한참을 뜸을 들이다 물었고, 영우는 부족한 금액을 선뜻 내놓았다. 연신 고맙다는데, 영우가 민망할정도였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원무과로 가서 수술비를 내려는데, 여자 직원이 생긋 웃으며 말했다.
".. 211호 이준이씨.. 수술비 완납 되었는데요.."
분명 좋아해도 남을 상황이었다. 영우는 누가 돈을 냈는지 그게 궁금하던차에, 준이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 돈 많은 사람들은 돈 걱정을 안하지..
근데 난 평생 돈 걱정만해.. 자식들 보다..
한참 어린 사람한테 돈 부탁이나 하고..
이런것도 아버지라고..
차라리 최사장 같이 돈 많은 집에 갔으면..
이런 병에 걸리지도 않았으려나.."
준이 아버지는 최사장이 냈다고 믿고있었다. 그러면서 물밀듯이 밀려오는 삭막함에 허덕이는것 같았다. 부러웠을까? 돈 많은 최사장이. 아님, 그런 최사장을 무척이나 따르는 준이한테 섭섭했을까.
영우는 울컥거렸다. 준이를 걱정하는 최사장과
유부장에게서는 볼수 없던, 아버님의 그 미묘한 표정이 안쓰러워 미칠것 같았다.
어쩌면 준이 아버지는 준이보다, 수술비가 더 걱정이었을지도 모른다. 가끔 돈은 사람을 차별했다. 있는 자에게는 여유를 선사했고, 없는 사람에게는 궁지에 몰아넣고 걱정거리들을 늘려주었다.
..........
퇴원시간에 맞춰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준이는 제발 그러지들 말라고 했지만, 이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준이는 효진을 발견하고는, 피곤하다고 퇴원할때까지 일부러 자겠다고 눈만 부치고 있었다. 잠시 모두들 자리를 비운사이, 효진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근데 효진은 아까부터 입을 삐죽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동생은 그렇다 쳐도, 아빠는 엄마와 결혼까지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자식뻘 되는 남자한테 할수 있는 소리인가.
주위가 조용해지자, 그제서야 준이가 눈을 뜨는데 효진과 딱 눈을 마주쳤다. 그러자 준이가 생글생글 웃는다. 하지만 효진은 숨겨진 미소의 의미를 알리가 없었다. 마냥 달갑지가 않아서, 애써 쓴 웃음을 짓고 있을때 문이 열렸다.
유부장이었다. 효진이 있다는건 전혀 예상을 못했던건지, 한없이 환했던 얼굴이 금새 어둡게 바뀌었다. 괜히 효진에게 먼저 가서 몇마디 말을 건넨뒤, 바로 준이를 살피러 갔다.
".. 오셨어요?"
그제서야 참아있던 환한 미소를 터트리며, 두 손가락으로 V 만들어서 흔든다. 그 바람에 전염이라도 되었는지 준이도 소리없이 웃었다.
어느새 가족들이 모두 모였다. 그런데 좀 실랑이가 이어진다. 퇴원하는 준이를 유부장이 데리고 가겠다는것이었다.
".. 바깥사돈, 안사돈은 일하시잖아요..
.. 저는 마침 쌓아놨던 휴가를 냈습니다.."
효진은 기가차서 헛웃음이 터트렸고, 영우는 감동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몰래 엄지척을 하면서 석이를 바라봤다. 석이는 눈을 부라리고 있는 중이었다.
".. 완전 개멋있어..."
".. 조용히 해라..."
둘이 안들리게 속닥였다. 준이는 무슨 소리인지는 안들리지만, 둘의 모습이 좋아보여서 미소가 났다.
준이 부모님은 결사코 사양했지만, 휴가까지 썼다는 말에, 어찌나 눈빛이 번뜩이는지, 거절할수 없는 눈빛으로 애원하는 유부장의 손을 들어 주었다. 대신에 반찬이나 음식을 싸서 자주 가겠다고 덧붙혔다.
유부장은 준이를 집으로 데리고 오면서, 간혹 준이와 눈을 마주치면서, 룰루랄라 콧노래까지 흥얼거린다. 분위기에 휩쓸려서 따라 나섰지만, 마냥 웃을수는 없던 준이도 그런 모습을 보자, 자꾸 마음이 설레인다. 그래도 마음을 다잡아 보고자 노력한다.
"...딱 부장님 휴가 끝나시는 날까지만요..
.. 그때까지만 신세 좀 질게요.."
준이는 차를 타자마자, 차가운척 말을 뱉었다.
".. 그래.. 알았어..."
씨알도 안먹히는게 틀림없어 보인다. 유부장은 미소를 지은채로 준이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어느새, 아파트에 도착을 한다. 유부장은 차를 주차를 하고는, 금새 뛰어가서 준이가 앉은 차문을 열어 주며 말한다.
".. 사모님.. 서방님이 모시겠습니다.."
순간 울컥거렸다. 왜 서방님이라는 소리가 그렇게 슬프게 들리는지 모를일이다. 그럼에도 손을 내미는 유부장의 손을 잡지 않고, 혼자의 힘으로 준이는 차에서 내렸다.
유부장은 개의치 않고, 준이를 안방으로 안내했다. 화려한 꽃들은 말로 할것도 없고, 환하게 바뀐 커튼과 침구류들은 얼핏 봐서는 신혼부부 침실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 여기서 쉬어.."
".. 그럼 부장님은요?"
".. 나도 여기서 있어야지.."
유부장은 아무렇지 않게 바지를 내리며 말했다. 준이는 유부장의 속옷이 보이자, 얼른 고개를 돌렸다.
".. 너 자는동안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내가 항상 옆에서 지켜야지...."
준이가 그 말을 듣고는 조심히 고개를 돌리는데, 유부장이 팬티만 입고 웃고 있었다. 민망함에 눈길을 어디둬야 할지 찾고 있는데, 유부장이 똑바로 보면서 입을 연다.
".. 원래 나 집에 있을때 편하게 있는데..
.. 왜? 불편해?"
3개월 전만 해도 온 몸을 다 가리려고 안간힘을 쓰던 사람과 같은 사람인가 싶다.
".. 아니.. 그렇다라기보다..."
"... 왜? 너야 좋지 않아? 맘껏보고..
.. 몰래 내거만 봤다면서.."
유부장이 웃으며 말한다.
"...어떻게? 다시 입어? 입으라면 입고.."
이제 겨우 1시간이나 지났을까. 부장님을 향해 쌓아놨던 철옹성의 장벽들이 자꾸만 무너진다. 손 쓸 틈도 없이. 준이는 속없이 웃으면서 능청을 떠는 유부장에게 묻는다.
".. 그렇게 좋으세요? "
".. 몰라 물어? "
안되는데, 자꾸 가슴이 두근거린다.
".. 저 때문에요?"
".. 아니.."
예상밖의 답변을 내어 놓은채로 유부장이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주방으로 간다. 준이는 다행이다 싶은건지, 아니면, 조금 서운한건지 애매한 표정이다.
유부장의 룰루랄라는 주방에서도 계속되었다. 이미 충분히 분에 넘치고도 남을 만큼이었다. 미역국이 적당히 끓자 간을 보더니, 식탁에 앉아있는 준이에게 돌아보며 말했다
".. 다 됐다.."
갓지은 잡곡밥과 뜨끈한 미역국과 반찬들을 준이앞에 내어 놓았다. 12첩 반상이 이런것일까. 유부장은 틈틈히 모든걸 다 계획하고, 몸에 좋다는 반찬들 위주로 사놓았다.
".. 먹어봐.. 이게 기력 회복하는데 좋데.."
유부장이 낚지 한 조각을 준이의 밥위에 올려 놓는다.그리고 준이가 한숟갈을 뜨는걸 보고서는 말을 잇는다.
"..너는 앞으로 걱정말고, 그냥 다 나한테 맡겨..
.. 전적으로.. 내가 다 알아서 할테니까.."
준이가 밥과 양념이 맛있게 된 낚지를 씹다 말고 고개를 올려다 본다. 그러자 유부장이 미역국을 먹으며 환하게 웃는다.
".. 왜 기분이 좋은지 알려줘?"
멀뚱히 바라보는 준이에게로 그 이유가 쏟아진다.
".. 지원군이 생겼어..."
"... 네?"
".. 영우 말이야.. 애가 참 괜찮은 구석이 있어.."
준이가 고개를 들어서 유부장을 보았다.
".. 영우가 내편 해주겠데..
...석이씨는 아직 뭐 좀 그렇지만.."
".. 무슨 말씀이세요? 그게?"
잘 못들은건 아닌지, 다시 한번 물었다. 순간 준이의 표정이 얼어 붙어있다. 유부장도 그걸 보고는 아차 싶은지 쉽게 말을 못 잇는다.
".. 저기...그러니까.."
".. 제가 게이인거.. 영우가 안다고요? 석이도요?"
우물쭈물대는 모습에 식은땀이 흐르는지, 이마에 옅은 땀을 연신해서 닦아낸다.
"... 내일은 장어를 구워 먹을까?"
화제를 돌리는건 어느 나라 사람이건 다 똑같은 최선책인것 같다.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그렇게 물어봤지만, 한번 뱉은 말은 주워 담을수 없는 법이다.
".. 어떻게 알았데요?"
한참을 뜸을 들이다, 유부장이 결국 실토한다.
".. 봤나봐..모텔에서 ..
..너랑, 그 인간이랑, 나랑 있는거.."
준이가 고개를 푹 숙인다.
".. 모텔 생활 한것도 알아요?"
준이가 젓가락을 내려놓고, 두통이 온 사람처럼 손으로 머리를 짚는다. 그러자 유부장이 준이에게 다가간다. 무릎을 꿇고, 두손을 살포시 준이의 허벅지에 올려 놓으며 말한다.
".. 언젠가는 알게 될 일이었어.. 안 그래? "
".. 그래도!!"
그 한마디에, 준이의 애달픈 진실이 파르르 떨린다.
아저씨를 좋아하는 사람.
결국에는 성공하지 못한 사람.
끝없이 거짓으로 위장하고 부인하면서,
마음속은 다 텅빈 사람.
이 모든게 지꾸만 모래알처럼 손에서 빠져 나간다. 조금 늦추려, 아무리 들키지 않으려 노력해도, 진실은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할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되돌리고 싶은 순간들이 머리속을 떠다닌다. 하지만 시간은 냉정하게 제 갈길을 간다.
석이를 어떤 낯으로 봐야할까. 현이는 알았으려나.
엄마는. 아버지는. 추한 민낯의 모습은 어디까지 뻗쳐 나갈까.
감추려고 감춰지는게 인생이라면. 거짓의 삶은 언젠가는 비명을 지른다는걸 준이는 짐작도 못할것이다. 추한 민낯의 모습이라 할지라도, 언젠가는 받아 들여야 한다.
서글프지만, 그게 진실이고 현실이니까.
준이의 고개가 저절로 숙여진다. 유부장은 숙이고 있던 준이의 얼굴을 두손으로 가볍게 붙잡으면서 시선을 맞춘다.
".. 이준이.. "
빨려들어갈것 같았다. 그때 부장님의 눈이 꼭 그랬다. 그 모든 허전함과 공허함을 너끈히 이겨낸 눈빛으로, 아련하게 괜찮다고 말해주는것 같았다.
유부장이 조용히 준이에게 입을 맞춘다. 준이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는다. 입술의 촉감이 눈물나게 위로가 되어 흩어져있던 마음의 조각들을 맞춘다. 그래서 준이가 미소를 짓는다. 유부장 때문에.
".. 근데 너 언제까지 존댓말 할꺼야?"
유부장이 준이의 코를 맞대고 지긋이 묻는다.
".. 네?"
".. 그 인간..흠.. 그 사람한테는 반말 잘하더만..."
".. 반말.. 해드려요?"
".. 응 "
꼬마애처럼 순수하게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흔드는 모습에 심장이 녹아 버릴것 같다. 안되는데. 안되는데. 수십번 다짐을 해봐도 왜 아무런 소용이 없는가.
"...근데 부장님 머리 염색하셨어요?"
유부장이 인상을 찡그린다. 존댓말은 그만 하라는듯. 그러자 준이가 다시 물었다.
".. 부장님.. 염색 하셨어?"
".. 어.. 했지.. 한살이라도 젊어 보여야 되잖아..
.. 우리 각시랑 같이 다닐려면.."
왜 현이는 효진을 만났을까. 마음같아선 모두 다 버리고 부장님과 도망가고 싶었다. 하지만 가족이었다. 그래도 자꾸만 파도처럼 몰아부치는 이 감정은 뭐라고 딱 꼬집어서 말할수가 없을만큼, 위태롭게 경계 선상에 흔들리고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라도 하겠다는 준이를 굳이 말겼다. 그 대신 산책을 데리고 나갔다. 자꾸 움직이고 운동을 해줘야 회복이 빠르다고 했다. 그런데 유부장이 아까부터 어물쩡 거린다.
준이의 손끝에 자꾸만 유부장의 손끝이 부딪힌다. 그 바람에 준이가 자꾸 생긋 미소가 지어져서 옆을 쳐다본다. 그때 유부장이 준이의 손을 덥썩 잡는다. 따뜻한 손길이 온몸에 전율을 하면서 멀리멀리 빠르게 퍼진다.
하지만 곧 주위사람들이 신경쓰이는지, 당황한 기색으로 손을 빼려는데, 유부장은 놓아줄 생각이 없어보인다. 오히려 더 꾹 잡는다. 그리고 나긋한 음성이 준이의 귀에 내려 앉는다.
".. 각시... 괜찮아...
..남이 보면 어때... 우리만 좋으면 됐지.."
하는수 없다며 준이도 손 놓는걸 포기하고 유부장의 손바닥 세포를 느껴본다. 따뜻한 온기가 그대로 전해진다.
"...있잖아.. 영우랑 석이씨랑.. 같이 한번 만날까?"
유부장은 아까 일이 맘에 걸린지, 말을 먼저 꺼낸다.
그러자, 준이는 그대로 걸음을 멈췄다.
".. 왜? 싫어?
..일단 석이씨랑 먼저 얘기해보고, 만날까?"
게이라는것을 깨닫고는 일생이 늘 힘들었다. 고작 3개월밖에, 아니 그보다 더 짧은 시간인데, 이사람은 어쩜 모든게 이리도 쉬울까 싶다.
".. 영우는 왜 영우라고 부르고..
석이는 왜 석이씨라고 해요?"
숨도 안쉬고 유부장이 답한다.
".. 그야.. 처남이 될태니까.."
그 말을 듣자, 왜 자꾸 마음이 먹먹해지는지 모르겠다.
그날 준이는 저녁에 유부장 옆에서 곤히 잤다. 아무 걱정도 없이. 유부장도 잠드는 준이를 한참 보다가 잠을 청했다.
............
아침햇살이 그들의 침실로 비출때쯤, 유부장이 먼저 일어난다. 자신이 마실 커피와 준이가 마실 한약을 데피고는, 가볍게 아침 식사 준비를 한다.
준비가 끝나자, 침실로 가서 잠들어 있는 준이에게 입을 맞춘다. 그래도 일어나지 않자 한번 더 입을 맞춘다.
그러자 준이가 눈을 비비며 실눈을 뜨는데, 유부장이 가까이 얼굴을 붙이고 있다. 문득 백합같은 진한 향기가 준이를 압도한다. 이렇게나 좋은데. 준이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 이쁘네.. 우리 각시.."
유부장이 더 얼굴을 가까이 붙인다. 마치 준이의 마음을 읽고 있다는 사람처럼. 준이의 온몸의 신경세포가 다얼어 붙는다. 간곡하게 겨우 숨만 내쉰다.
".. 와 하고싶나? "
갑작스레 경상도 사투리를 섞는 유부장의 눈빛이 사뭇 진지해보인다. 준이는 알수없는 표정을 한다.
".. 함.. 하까? "
아무말도 못하고 꼼짝 못하는 준이에게 확신에 차서 유부장이 다시 말을 던진다.
" .. 와 내가 몬할거 같나?"
유부장과 준이가 동시에 눈을 감고 서로의 향기를 맡으면서 서로의 몸을 가까이 댄다.
그때 현관에서 벨이 울렸다.
".. 띵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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