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중설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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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첫 번째 데이트 (1)
서울을 벗어난 차가 강변을 따라 계속 달렸다. 강 건너 도로변을 따라 늘어선 가로등에 노란 불빛이 들어오고 강 위 어스름한 하늘을 배경으로 겨울 철새들이 V자를 그리며 날아갔다. 하지만 지금 재은은 그런 풍광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디로 가는 거죠?”
어느새 차가 외진 길로 들어섰다. 저 멀리 ‘무인텔. 대실 3만 원’이라는 큼지막한 현수막을 단 모텔이 눈에 들어왔다. 지난번에 게이바에서 봤을 때부터 눈치챘어야 하는 건데….
“저, 10시 전에는 들어가야 해요. 빨리 끝내고 보내주세요.”
재은의 체념한 듯한 목소리에 민재가 의아한 눈초리로 재은을 힐끗 쳐다봤다.
“신데렐라도 아니고 통금이 있을 줄은 몰랐군. 그런데 뭘 빨리 끝내?”
이번에는 재은이 민재를 노려보았다. 음흉한 자식아, 그건 네가 더 잘 알겠지.
“뭐…든지요….”
계속 창밖만 보던 재은은 모텔 현수막이 가까워지자 급히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재은이 뭘 걱정하는지 눈치챈 민재가 입가를 씰룩거리며 말했다.
“흠…. 빨리 끝내는 건 위험한데…. 찢어질 위험도 있고, 맛도 안 살고 말이야. 천천히 부드럽게 해야 뒤탈도 없어. 그래도 정 원한다면 뭐, 최대한 빨리하도록 노력해볼게.”
들을수록 점점 더 가관이다. 재은은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진정하려고 무릎 위에 놓인 두 주먹에 힘을 꽉 주었다.
“뭐, 뭐가 찢어지는데요?”
재은이 말을 더듬었다.
“뭐긴 뭐야, 거기지.”
민재가 슬쩍 재은의 무릎 사이를 쳐다봤다.
이 변태 같은 자식! 난 아직 그런 거 한 번도 못 해봤단 말이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하려고 고이고이 아껴두었는데…. 돈이 뭐라고.
재은은 긴장하여 까무러치기 직전이었다.
“그거 할 때 원래는 뭘 껴야 하거든. 끼지 않으면 느낌이 더 좋기는 한데 맨살에 닿으면 좀 위험할 수 있어. 냄새가 밸 수도 있고….”
이제 재은은 혼이 빠져나가 껍데기만 남은 표정으로 민재를 쳐다보았다. 민재는 금방이라도 ‘풉’ 하고 터지려는 웃음을 참느라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빨, 빨리만 끝내주세요.”
재은의 얼굴이 창백하다 못해 새파랗게 질렸다.
이쯤 놀렸으면 그만해야겠지? 재은의 표정을 보던 민재가 씩 웃었다.
“뭘 껴야 하는지 안 물어봐?”
변태 자식아. 그걸 모르는 사람도 있나?
사색이 된 재은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안 물어봐도 말해줄게. 비닐장갑이야.”
“넷?”
재은이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기어이 생각만 하고 있던 말을 내뱉었다.
“변태 자식!”
비닐장갑을 왜 끼는 거지? 손가락으로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흥분한 재은이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당장 차 세워요!”
“지금 차를 어떻게 세워? 뒤따라 오는 차도 있는데.”
민재가 핸들을 틀어 코너를 돌며 말했다. 민재는 재은이 보이는 과격한 반응에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즐거워하고 있었다.
“당장 차 세우라고요!”
재은이 도끼눈을 뜨고 민재를 노려봤다. 차를 세우지 않으면 뛰어내리기라도 할 기세였다. 너무 나갔나? 하지만 나는 사실만 말했을 뿐인데…. 민재의 눈은 계속 웃는 중이었다.
“비닐장갑 끼는 게 뭐 어때서? 간장게장 먹을 때는 다들 끼고 먹는데. 하긴, 안 끼는 사람도 있더라만.”
“예에? 간장게장요?”
드디어 민재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하하하. 변태라니, 도대체 뭘 상상한 거야? 내 생각에 변태는 너 같은데?”
민재가 재은을 곁눈질했다. 재은은 여전히 안 믿기는 표정이다.
“지금 간장게장 먹으러 가는 거예요?”
“그래.”
“왜요?”
밥 먹으러 가는 건 데이트 아닌가? 내가 왜 이 사람과 밥을 먹으러 간단 말인가?
“그런 건 여자친구와 함께 가는 거 아닌가요?”
“내 여자친구는 간장게장 별로 안 좋아해. 게다가 같이 밥 먹는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기막힌 재주가 있거든.”
이제야 상황 파악이 된 재은의 얼굴이 터질 듯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 자식아, 그러면 그렇다고 진작에 얘기를 좀 해주던가!
비닐장갑이라는 말에 엉뚱한 상상을 해버린 자신이 너무 창피해서 재은은 이번에야말로 차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혹시 간장게장 못 먹어?”
그럴 리가. 간장게장은 없어서 못 먹는 편이다.
하지만 그냥 밥만 먹으러 왔다고? 그러기에는 아직 뭔가 개운하지가 않다.
“먹어요. 그런데 밥 먹고 나서는… 뭐해요?”
“밥 먹고 나서는 커피나 한잔?”
“커, 커피…”
밥 먹고 커피 마시고. 딱 데이트다. 하지만 민재가 왜 자기랑?
분명히 숨기고 있는 게 있다. 재은이 심각한 표정이 되어 다시 물었다.
“커피 마시고는요?”
민재가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재은을 쳐다보았다.
“커피 마신 뒤 뭘 하고 싶은데?”
“그거야 고객님이 하고 싶은 데로….”
“윽! 형이라고 불러. 정비소 밖으로 나온 지가 언젠데 아직까지 ‘고객님’이야?”
형이라니. 이 왕재수 변태 새끼를 내가 왜 형이라고 부른단 말인가. 절대 안 불러. 그럴 일은 절대 없어.
“그것도 조건에 포함.”
하지만 민재의 한마디에 재은은 순한 양이 되어 금세 고집을 꺾었다. 그래, 까짓거 불러주자. 형 소리 몇 번만 하면 돈이 굳는데 그 짓을 못할까.
“그럼 한번 불러봐.”
민재 입꼬리가 올라갔다.
재은은 ‘형’ 소리가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아 몇 번이나 머뭇거렸다. 손가락만 만지작거리던 재은이 한참 만에 겨우 기어들어가는 소리를 내뱉었다. 민재 얼굴 보기가 창피해서인지 고개는 창밖으로 돌린 채였다.
“혀, 혀, 형….”
“뭐라고? 안 들려.”
뻔한 수작임을 알지만 돈이 원수라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재은이 심호흡을 하더니 좀 더 큰 목소리로 불렀다.
“혀, 형!”
재은의 목 뒤가 또 빨개졌다.
“잘하네. 이제 민재 형, 해봐.”
이건 뭐 돌 지난 아기에게 ‘아빠 해봐’하고 시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까짓거, 한다, 해! 민재 형이 아니라 민재 아빠라고 부르라고 해도 내가 한다.
재은이 이를 악물더니 작심한 듯 불렀다.
“민재 형!”
“응? 재은아, 왜?”
민재가 입가에 아빠 미소를 띠고 대답했다. 민재 입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온 ‘재은아’ 소리에 오늘따라 재은의 목 뒤가 식을 새가 없었다.
이건 대체 무슨 시츄에이션이지? 왠지 손발이 오그라들다 못해 사라질 것만 같다.
구불구불한 도로를 따라 한참을 가던 차가 드디어 멈추었다. ‘간장게장/양념게장 전문점’이라는 커다란 간판이 걸린 오래된 식당이었다. 한적한 도로변에는 그 식당 말고도 흔히 볼 수 있는 식당 몇 개가 길 따라 드문드문 있었다. 저녁 시간이라 그런지 식당 주차장이 제법 붐볐다.
람보르**를 끌고 오기에는 너무나 평범한 식당이었다. 스테이크만 먹게 생겨서 간장게장이라니. 설마 또 나를 놀리는 것은 아니겠지?
“대학교 다닐 때부터 가끔 오던 집이야. 이 집 게장이 정말 맛있어. 뭐해? 얼른 안 들어오고.”
민재가 성큼 앞장서서 안으로 들어가자 연세 지긋한 아주머니가 민재를 알아보고 반갑게 맞아주었다. 대학 때부터 왔다면 십 년도 넘은 건가?
“아휴, 민재 총각, 이게 얼마 만이야? 그동안 왜 통 안 왔어?”
“잘 계셨어요, 이모님? 그러게요. 그동안 계속 시간이 안 나서 못 왔어요.”
민재가 편안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어라? 왕싸가지인 줄로만 알았는데 또 저런 면이 있었네? 도도한 명품남은 어디론지 사라지고 눈앞에는 소탈하고 예의 바른 청년이 서 있었다. 그 모습이 무척 낯설면서도 왠지 잘 어울렸다. 이제야 제 옷을 찾아 입은 것처럼.
민재와 재은이 창가 쪽에 자리를 잡자 곧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노란 알이 가득한 먹음직스런 간장게장과 붉은색 양념이 입맛을 돋우는 양념게장이 한 접시씩 수북이 쌓여 나왔고, 밥은 대접에 성게알과 날치알, 계란 노른자, 김 가루, 통깨, 참기름과 함께 제공되어 비벼 먹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게다가 해물 꽃게 된장찌개와 정갈한 밑반찬들까지.
푸짐한 상차림을 본 재은이 아이처럼 탄성을 내질렀다.
“우와!”
“어때? 10년째 올 만하지?”
그때 주인아주머니가 문제의 그 투명 비닐장갑을 두 개 갖다 주었다. 장갑을 본 재은의 표정이 살짝 얼었다.
“이제 용도를 알겠지? 엉뚱한데 쓰지 말고.”
민재가 보란 듯이 비닐장갑을 끼며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재은도 비닐장갑을 끼며 민재를 노려보았다. 아우, 저질!
민재의 장난이 분하기는 했지만 그 집에서 먹은 게장은 그동안 재은이 살면서 먹어본 음식 중에 단연 최고였다. 하루 일을 마치고 마침 한참 출출하던 터였다. 게가 밥도둑이라고 하더니 밥이 어떻게 목구멍으로 넘어갔는지도 몰랐다.
민재는 허겁지겁 먹는 재은의 모습을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며 게살을 발라주기도 하고 물티슈를 건네주기도 했다. 유난히 자상한 모습이었지만 재은은 먹는데 정신이 팔려 민재의 태도가 바뀐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아, 정말 잘 먹었어요.”
재은이 배를 두드리며 만족스럽게 말했다.
“잘 먹여야 나중에 힘을 쓰지.”
민재가 또 악동 같은 표정을 지었다. 장난일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재은은 불안한 생각을 완전히 지울 수 없었다. 손해배상 청구 대신 만나주기로 한 약속이다. 민재가 바보도 아닌데 이렇게 밥만 먹여주고 끝낼까? 뭘 요구할지는 모르지만 세상에 공짜란 없는 법이다.
재은이 고민에 빠진 걸 아는지 모르는지 민재는 즐거운 표정으로 차에 올랐다.
“밥을 먹었으니 이제 차를 마시러 가볼까?”
민재가 이번에 재은을 데려간 곳은 재은도 어릴 때 한번 와본 적이 있던 프로방스 마을이었다. 평소에도 유럽식 건물 모양과 화려한 조명으로 야경이 아름다운 곳이지만, 지금은 이틀 뒤로 다가온 크리스마스 때문에 마을 전체가 축제 분위기였다.
마을 안에 있는 나무마다 알록달록 반짝이는 꼬마전구가 장식되어 있었고, 특히 입구 쪽은 천장에 형형색색의 별 모양 조형물이 설치되어 동화의 세계로 들어가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우와!”
재은의 입에서 또 감탄이 터졌다. 이런 곳으로 오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팍팍하기만 하던 재은의 삶에 오늘은 제대로 계 탄 날이었다.
쌀쌀한 밤공기에 몸을 움츠리면서도 재은은 설레는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주위는 온통 연인들이었다. 털모자와 털목도리를 두른 채 팔짱을 끼거나 손을 잡고 걷는 연인들의 표정에서 행복감이 묻어났다. 자신에게 저런 행복은 절대 찾아오지 않겠지만 그냥 이렇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재은이 한참 동안 가만히 서서 주위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어서 가요.”
재은이 걸음을 옮기려는데 갑자기 민재가 재은의 몸을 돌려세우더니 목에 자신의 목도리를 둘러주었다.
“밤공기가 차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민재의 행동에 재은은 그만 멍해지고 말았다. 가슴 속에서 무엇인가가 똑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재은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이제 형 동생 사이니 이런 것쯤은 괜찮겠지?”
민재가 재은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첫날 보았던 오만한 눈이 아니라 선량하고 따뜻한 느낌이 드는 눈이었다.
재은이 말을 하려고 입술을 달싹였으나 민재가 먼저 재은의 손을 잡아끌며 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이제 커피 마시러 가자.”
영하의 날씨 때문인지 민재의 입에서 하얀 김이 모락모락 나왔다. 그 모양이 꼭 솜사탕 같다고 재은은 생각했다.
재은은 환하게 불을 밝힌 카페에 앉아 창문 밖으로 겨울밤 풍경을 바라보았다. 아늑한 실내 분위기와 향긋한 커피 향 때문에 정말 데이트라도 하는 것만 같다. 목에 두른 목도리에서 민재 체취가 났다. 심장이 잠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오늘 코스 어때? 만족해?”
커피를 마시던 민재가 짓궂은 표정으로 물었다.
“간장게장을 먹고 프로방스 마을로 올지는 몰랐어요.”
민재의 장난기 어린 태도에 긴장이 많이 풀렸는지 재은도 미소를 지었다.
“그게 바로 나만의 차별성이지. 다들 크리스마스에는 파스타나 스테이크를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크리스마스에는 간장게장이 제격이라고 생각해.”
크리스마스와 간장게장.
왠지 안 어울리는 단어의 조합에 재은의 입에서 ‘풉’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다음번 코스도 준비되어 있는데. 어때? 생각 있어?”
민재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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