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중설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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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첫 번째 데이트 (2)
다음 코스라는 말에 재은의 표정이 다시 굳었다.
“밥이랑 커피가 설마 전부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민재 두 눈이 또 장난기로 가득했다. 재은이 복잡한 표정으로 민재를 빤히 쳐다봤다. 이 사람, 어디까지가 장난이고 어디서부터가 진심인지 정말 모르겠다.
“커피 다 마셨으면 나가자. 다음 코스 가야지.”
민재가 이제는 스스럼없이 재은의 손을 잡아끌었다.
불안하면서도 은근히 설레는 이 기분의 정체는 뭘까? 재은은 자신이 이렇게 이중적인 놈이었나 속으로 반성했다.
민재가 재은을 데려간 것은 아기자기한 팬시용품점이었다. 예쁜 유리그릇, 각종 향초, 아이디어 상품과 푹신한 방석, 수제인형과 피규어, 액세서리, 마트에서는 볼 수 없는 고급 차와 커피 제품 등이 가득한 커다란 상점이었다. 상점에 들어서는 민재의 모습이 신난 개구쟁이 같다. 어디선가 나는 달콤한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이런 거 좋아해요?”
“귀엽잖아. 아기자기하고. 뭐든 마음에 드는 것 골라봐.”
이 왕싸가지가 이런 사람이었나? 오늘 자신을 여러 번 놀라게 하는 민재다.
“고객님이 왜 저에게 물건을 사줘요?”
“이 녀석이! 형이라고 부르라니까. 무조건 세 종류 이상 골라야 해. 따라와.”
민재가 다시 덥석 재은의 손을 잡았다. 제 손을 감싸 쥔 민재의 손이 생각보다 따뜻했다. 자꾸만 민재 손이 의식되는 재은과 달리 민재는 들뜬 탓인지 손을 잡았다는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니면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건가?
“혹시 잘 때 이런 거 필요하지 않아?”
민재가 가리킨 것은 귀여운 캐릭터 잠옷이었다. 키 180이 넘는 남자 둘이 커플 캐릭터 잠옷을 고르는 모습에 여자들이 두 사람을 훔쳐보며 키득거렸다.
“이거 너 하나, 나 하나 어때?”
민재가 카카오 프렌즈 캐릭터인 라이언과 어피치가 디자인된 잠옷을 양손에 한 벌씩 들고 의기양양한 눈초리로 재은을 바라봤다.
그 모습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매장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민재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정적 본인 눈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민재의 눈은 오로지 재은만 바라보고 있었다.
부끄러움은 온전히 재은의 몫이었다. 왠지 매대에 올라가서 ‘우리 커플 아니예욧!’이라고 폭탄선언이라도 해야 할 것만 같다.
“얼른 내려놔요.”
“왜? 마음에 안 들어? 너한테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민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양쪽 잠옷을 가늠하듯 내려다보자, 보다 못한 재은이 얼른 잠옷을 뺏어 다시 걸었다.
“그럼 이건 어때?”
재은이 고개를 돌리니 이번엔 커플 칫솔을 양손에 들고 활짝 웃고 있다.
아, 이 아저씨, 원래 이렇게 유치한 캐릭터였구나. 이래서 사람은 겉만 보고 알 수 없다고 하나 보다.
재은은 매장을 나가고 싶은 마음을 꾹 눌렀다.
두 사람은 옥신각신하더니 결국 세 가지 물건에 합의를 봤다. 푹신한 캐릭터 방석, 아이언맨 미니어처, 그리고 민재가 끝까지 고집을 부린 커플 양치 컵이었다.
캐릭터 방석은 사실 동생 지은이 생각나서 고른 것이다. 안 그래도 하루종일 앉아서 공부하는 녀석에게 푹신한 방석을 하나 사 주고 싶었는데 동네 마트에는 예쁜 방석이 없었다. 그런데 마침 여기서 동생이 좋아하는 캐릭터 방석을 발견한 것이다. 방석 한가운데 동그란 라이언의 얼굴이 커다랗게 디자인되어 있었다.
“너는 앉을 일도 별로 없으면서 방석은 왜…?”
민재가 의아한 눈길로 물었다.
“집에서 쓰려고요. 이건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이기도 하고.”
자기에게 사 주는 건데 동생 준다고 하면 안 될 것 같아 재은이 대충 둘러댔다. 그러자 민재가 커다란 라이언 인형을 골랐다.
“그럼 이건 어때? 나도 이런 커다란 곰 인형 한번 사보고 싶었는데.”
“그거 곰 아니거든요? 생긴 건 그래도 걔 사자예요. 그래서 이름도 라이언이라고요.”
“아 그래? 정체성이 애매한 녀석이네. 어쨌든 나는 방석보다 이게 나을 것 같은데?”
하지만 저 큰 인형을 어떻게 집에 가지고 간단 말인가? 무슨 소리를 들으려고?
“난 이게 좋아요.”
재은이 방석을 안으며 말했다.
“난 싫은데….”
민재가 투정을 부렸다.
“예? 뭐든 마음에 드는 것 고르라면서요?”
“네가 그 위에 앉으면 그 녀석 입이 어디로 향할지 생각해봐.”
민재가 방석을 가리키며 재은의 귀에 속삭였다. 순간 재은의 얼굴이 또 빨개졌다. 이 변태 아저씨가 이제는 별생각을 다 하는구나. 재은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민재를 쳐다보았다.
아이언맨 피규어는 사실 민재를 닮아서 골랐다. 가면을 쓰고 있는 모습이 평소 일부러 차갑고 도도한 표정을 짓는 민재와 비슷했다. 가면만 벗으면 언제든지 다시 본모습이 보일 것만 같았다. 하지만 민재는 재은이 단순히 아이언맨 피규어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는지 이것만큼은 별로 태클을 걸지 않았다.
마지막인 커플 양치 컵은 정말 손발이 오글거리는 아이템이었다. 아침마다 양치하면서 자기 생각을 하라나? 내가 왜 아침마다 자기 생각을 해야 해? 아침마다 열 받게….
양치컵은 안된다고 했더니 당장 가서 커플 잠옷을 들고 오려고 하기에 그냥 양치컵으로 합의를 봐야 했다.
계산대에 물건을 내려놓자 계산하는 여자분이 미소를 띠고 자신과 민재 얼굴을 슬금슬금 보는 통에 재은은 얼른 가게 밖으로 먼저 나와버렸다.
날씨는 추운데 이상하게 마음이 따뜻했다. 커플 양치컵이라….
“야, 의리 없게 먼저 나가버리냐?”
민재가 투덜거리며 재은에게 쇼핑백을 건넸다. 이럴 때 보면 은근히 귀여운 구석이 있다.
“고마워요.”
재은이 웃으며 쇼핑백을 받다가 갑자기 시계를 봤다. 벌써 10시 10분 전이었다.
“헉!”
10시면 지은이 학원 끝나고 집에 도착할 시간이었다. 녀석이 오기 전에 가야 하는데.
엄마가 돌아가신 후, 지은이는 수시로 외로움을 탔다. 같이 있을 때는 밝게 웃지만 혼자 있으면 밥도 잘 먹으려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요즘 야간 근무라 이 시각에 집에 없기에 자신이라도 먼저 가서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어야 지은이 안심했다.
“빨리 가요.”
재은이 허둥대자 민재가 이유도 묻지 않고 재빨리 차에 시동을 걸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이 차가 레이싱카잖아. 최대한 빨리 데려다줄게.”
짓궂은 말만 골라서 하던 민재가 모처럼 든든한 소리를 했다.
재은은 이날 람보르**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차가 빠르기도 했지만 워낙 고가의 차라 다른 차들이 알아서 길을 비켜주었다.
게다가 차 사이를 치고 빠지는 민재의 운전실력도 놀라웠다. 물론 옆에 앉은 재은은 안전띠를 하고 손잡이를 잡고도 간이 조마조마해 사색이 되었지만.
“빨리 가는 것은 좋지만 빨리 죽긴 싫어요.”
“염려 마. 죽어도 같이 죽을 테니.”
“그걸 지금 위로라고 하는 거예요? 당장 속도 좀 줄여요!”
“빨리 가야 한다고 했던 건 너였어.”
차 안에서 옥신각신하느라 어떻게 왔는지도 모르겠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재은의 동네였다. 시계가 10시 15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어쨌든 민재 덕에 빨리 온 셈이었다.
“저기서 좀 내려주세요.”
재은이 민재가 준 쇼핑백을 챙겨서 내렸다.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말로만?”
틈만 나면 장난을 치려는 민재의 말투가 이제 슬슬 적응되기 시작했다.
재은이 입꼬리를 잠깐 올리며 간단하게 무시했다.
“저 갑니다.”
재은이 그냥 가려다가 다시 뒤돌아보았다.
“아, 참!”
민재는 뭔가 빠뜨린 게 있나 싶어 의아한 눈빛을 지었다.
“오늘은 이걸로 끝났으니 이제 아홉 번만 더 보면 되죠?”
“뭐야?”
자식, 이 와중에도 계산은 빠르네.
민재 입에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홉 번이 다 끝나기 전에 저 녀석 마음을 확실하게 잡아야 할 텐데….
“잘 가요. 아까처럼 난폭운전하지 말고.”
재은이 밝은 표정으로 민재를 향해 손을 흔들고는 몸을 돌려 종종걸음으로 멀어졌다.
민재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저 녀석, 언제부터인지 자신에게 인상 쓰는 일이 줄었다. 다행이다. 첫인상을 나쁘게 남겨 사실 좀 불안했었다. 녀석이 자신을 안 보려고 할까 봐.
그동안 민재가 했던 말과 행동은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었다.
그렇게 해야 이 녀석을 다시 볼 수 있는 이유가 생기니까.
재은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민재가 시동을 끄고 차에서 내렸다.
이럴 게 아니라 저 녀석이 어떻게 사는지 직접 봐야겠다. 집이 어딘지도 알아둘 겸.
민재는 급히 재은이 사라진 골목길로 달려갔지만 재은을 찾을 수 없었다. 지금 막 들어갔으니 불이 켜진 집일 텐데…. 민재가 이집 저집 기웃거리는데 골목길 전봇대 옆, 정말 오래된 다가구 주택 일 층에서 까르르 웃음소리가 들렸다.
혹시나 해서 다가가 보니 역시 예상했던 대로 재은의 말소리가 드문드문 들렸다. 재은이 무슨 얘기를 하나 궁금해진 민재가 대문을 살짝 밀었다. 여러 세대가 사는 곳이라 그런지 다행히 대문은 열려 있었다. 불이 켜진 집 창문 옆으로 다가가자 도란도란 얘기하는 목소리가 창밖으로 흘러나왔다.
“아버지 집에 계셨네?”
“응. 오늘 박씨 아저씨가 낮에 일이 있다고 근무를 좀 바꾸자고 하셨대.”
“아, 그렇구나. 아버지 식사는?”
“챙겨 드셨어. 그런데 이건 웬 방석이야, 오빠? 꺅! 라이언 방석이네?”
“응. 누가 준 건데, 너 써. 학원에서 하루종일 앉아 있으면 엉덩이 배기잖아.”
“안 그래도 방석 하나 필요했는데 너무 잘 됐다. 그런데 오빠에게 이런 거 주는 사람도 있어?”
“있어. 그런 사람.”
민재는 그제야 재은이 극구 방석을 원하던 이유를 알았다. 녀석, 그렇다면 진작 얘기를 하지. 괜히 방석을 질투했던 속 좁은 자신을 떠올리자 보는 사람도 없는데 얼굴이 화끈거렸다.
“어? 이건 캐릭터 양치컵이네?”
재은이 여동생이 이번에는 커플 양치컵을 발견한 모양이다. 그건 안돼. 네 오빠랑 일부러 맞춘 거랑 말이다. 민재가 속으로 부르짖었다.
“이거 이거, 뭔가 수상한데?”
“으, 응? 뭐가?”
재은의 목소리가 살짝 흔들렸다.
“오빠 요즘 연애해?”
재은 동생의 말에 민재는 흐뭇한 생각이 들었다. 네가 네 오빠보다 눈치가 훨씬 빠르구나.
“아, 아니야. 그런 거….”
“아니긴! 그럼 캐릭터 양치컵을 왜 사? 딱 보니 이거 커플 컵이구만.”
“아, 그거… 그것도 누가 준 거야. 맞다. 사은품으로 받은 거야.”
“흥! 지금 누굴 속이려고. 연애는 내가 오빠보다 한 수 위거든? 아빠! 오빠 연애한대요.”
재은이 동생이 아버지에게 일러바치려고 쪼르르 달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라니까 그러네.”
동생 뒤를 따라가며 극구 부인하는 재은의 목소리가 창밖으로 넘어왔다.
녀석 표정이 어떨지 눈에 선했다. 애써 부인할수록 확신만 더 심어주는 법인데.
불빛이 새어 나오는 재은네 창문을 민재가 가만히 바라보았다. 마음이 따뜻해졌다.
네 오빠 연애하는 거 맞아. 오늘부터 시작했어. 그런데 안타깝게도 네 오빠는 아직 그걸 모른단다. 빨리 눈치채야 할 텐데….
민재가 조용히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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