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중설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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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설레는 사이 (2)



“아, 맞다.”


민재가 갑자기 가방 속을 뒤적이더니 상품권 봉투를 몇 장 꺼냈다.


“패밀리 레스토랑 외식권입니다. 연말이라고 제휴업체에서 갖다 줘서 몇 장 챙겨왔습니다. 다들 간만에 데이트 좀 하시라고요.”


민재가 양 사장, 호식이, 김 양에게 외식 상품권을 하나씩 돌렸다. 


“너도 동생이랑 같이 가.”


재은에게도 하나 내밀었다. 

가만, 내가 동생이 있다고 얘기했던가? 재은이 엉겁결에 외식권을 받아들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어머! 이거 ** 레스토랑이네요? 여기 스테이크 정말 좋아하는데.”


평소에는 무뚝뚝하기만 하던 김 양의 목소리가 간만에 하이톤으로 올라갔다. 양 사장과 호식이도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다.


“성격 까칠한 친구는 오늘 안 보이네요?”


“성격 까칠한 친구? 아, 경찬이요? 그 녀석, 좀 까칠하긴 하지요. 고객님 눈이 역시 정확하십니다. 하하하. 고놈은 오늘 일이 있어서 휴가 썼습니다.”


외식 상품권을 받아서인지 양 사장이 더욱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응대했다. 민재는 경찬이 것까지 챙겨주었다.


“아, 그렇군요. 사장님, 재은이 한 시간만 빌려주세요. 이 친구랑 긴밀히 할 얘기가 좀 있어서요. 딱 한 시간이면 됩니다.”


“아이고, 두 시간도 괜찮습니다. 얼른 데려가십시오.”


외식 상품권을 손에 든 양 사장이 흐뭇한 기색으로 손짓했다. 정작 뜨악한 기색은 재은이 지었다. 하지만 민재의 재촉에 재은은 별수 없이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차에 막 타려는 순간, 양 사장이 민재를 덥석 잡았다.


“고객님.”


“예?”


민재가 의아한 기색으로 쳐다보았다.


“이 녀석 보기보다 마음이 약한 놈입니다. 살살 다루셔야 합니다. 절대로 난폭하게 대하시면 안 됩니다. 부드럽게, 천천히, 순리대로. 아시겠지요?”


양 사장은 지난번에 민재가 들고 왔던 청구서를 떠올리며 걱정이 돼서 한 소리였겠지만, 정작 재은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건 마치… 뭔가를 연상시키는 발언이지 않은가.


“하하하, 염려 마세요. 저도 부드러운 남자랍니다. 저 녀석에게 세게 나갈 생각은 없습니다.”


민재가 재은을 쳐다보며 웃었다. 재은은 여전히 목 뒤가 빨갰다. 부끄럽거나 흥분하면 꼭 저렇게 티를 내는 게 귀여웠다.

두 사람이 차에 올라타 공업소를 빠져나갔다. 


둘만 있는 공간.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괜찮아?”


민재가 다정하게 물었다. 그 목소리에 재은은 또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까는, 고마웠어요.”


재은이 민재 눈은 마주치지 못하고 제 손끝만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따라 손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다.


민재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공업소에 별별 사람들이 다 오지만 그렇게 대놓고 시비를 거는 사람은 없었다. 용 문신이 자신의 이마를 툭툭 밀 때는 정말이지 다리가 후들거렸다. 제발 누가 나 좀 구해주었으면 싶었다. 그런데 거짓말같이 백마 탄 기사가 나타났던 것이다.

 

“그렇게 감동받은 눈빛으로 바라보면 내가 더 무안한데…. 안 되겠다. 갚을 기회를 줄게. 자, 여기.”


민재가 손가락으로 제 뺨을 가리켰다. 반쯤 진심을 담아.


“풉-.”


재은이 웃음을 터뜨렸다. 분위기가 어색하지 않도록 장난스럽게 넘어가 주는 민재가 고마웠다. 그렇다면 좀 맞춰 줘야지.


재은이 자신의 손가락에 뽀뽀를 한 다음 민재의 뺨에 살짝 갖다 댔다. 이른바 손가락 키스.

그런데 민재가 갑자기 재은의 손을 잡더니 재은의 입술이 닿았던 부위를 제 입술에 갖다 댔다. 

손끝에 민재의 입술이 느껴지자 재은은 저도 모르게 발가락이 찌릿했다. 얼굴은 발갛게 달아오른 채.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민재의 장난기 어린 까만 눈동자가 재은을 응시했다. 


“아, 아까 정말 재수 없었던 거 알아요? 결국 돈으로 해결한 거잖아요. 역시 첫인상이 맞았어.”


당황한 재은이 얼른 손가락을 빼며 화제를 돌렸다.


“무슨 소리야. 그런 녀석은 없는 척하면 더욱 기고만장해진다고. 내가 세게 나가니까 꼬리 내리는 모습 봤잖아.”


민재가 깔끔한 이탈리아식 레스토랑 앞에 차를 댔다. 재은은 자동차 오일 냄새를 풀풀 날리면서 이런 고급 레스토랑에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재은이 머뭇거리자 한쪽 팔로 재은의 어깨를 감싸며 레스토랑 안으로 이끌었다. 마치 재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이. 


“걱정하지 마. 이 레스토랑에서 네가 제일 예뻐.”


민재의 속삭임에 재은이 또 얼굴이 상기되었다. 


“제발 부탁인데 그런 닭살 돋는 소리 좀 안 하면 안 돼요?”


이번에는 재은이 민재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재은의 숨이 귀에 와 닿는 간지러운 느낌에 민재는 목덜미의 솜털이 다 일어서는 듯했다.

그리고 재은의 체취. 아, 좋다.


“사실인데 뭘 그래?”


귓속말에 재미 붙인 민재가 또 속삭였다.


“창피하다구요!”


민재가 일부러 귓속말을 유도하는지도 모르고 재은이 또 소곤거렸다. 

간지럽고 흥분되는 느낌에 민재는 자꾸만 실실 웃음이 나왔다. 


예약이라도 해 둔 건지 두 사람은 창가 쪽 한적한 자리로 안내받았다.

주문을 하고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민재가 재킷 안쪽 주머니에서 하얀 종이를 꺼내서 내밀었다.


“뭐예요?”


“직접 봐.”


민재의 얼굴에 홍조가 떠올랐다. 저 엉큼한 아저씨가 부끄러워하다니 수상한데? 

재은이 종이를 펼쳐 보았다. 그것은 민재가 손으로 쓴 위시리스트였다. 

재은과 함께하고 싶은 10가지 일들. 


①같이 데이트하기. 

②같이 영화 보기. 

③같이 술 마시고 노래방 가서 지칠 때까지 노래 부르기. 

④같이 목욕탕 가서 등 밀어주기. 

⑤같이 마트에서 장보고 밥해서 서로 먹여주기. 

⑥같이 해안가 트레킹하고 바다에서 수영하기. 

⑦같이 놀이동산 가기. 

⑧같이 스키장 가기. 

⑨같이 자동차레이싱 참가하기. 

⑩같이 2박3일 여행가기(조만간 아자!). 


“헐! 이게 다 뭐예요? 설마 10번 만나는 동안 이걸 다 하겠다는 건 아니죠?”


재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냥 하고 싶은 걸 적어봤어. 10번 만나는 동안이든 나중이든 꼭 한 번씩은 다 해보고 싶다.”


하지만 목욕탕 가서 등 밀어주기, 마트에서 같이 장보고 밥해서 서로 먹여주기라니…. 

게다가 2박3일 여행가기 옆에는 괄호까지 치고 자신의 흑심(!)을 진하게 표시해놨다. 이런 건 보통 속으로만 생각하는 것 아닌가?


위시리스트를 보던 재은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왜 항상 부끄러움은 자신의 몫일까.

그때 웨이터가 음식을 가지고 왔다. 화들짝 놀란 재은이 얼른 종이를 잡아 테이블 밑으로 숨겼다. 혹시라도 봤을까 봐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 진짜. 변태예요? 같이 목욕탕 가서 등 밀어주기? 마트에서 같이 장보고 밥해서 먹여주기? 2박3일 여행? 이런 걸 어떻게 같이 해요?”


재은이 얼굴을 붉히며 항의했다. 

이런 건 연인들끼리나 하는 거라고요! 


“뭐 어때? 남자끼린데.”


남자끼리니까 더 안 되죠! 

재은이 민재를 노려봤다. 자신의 반응을 은근히 즐기는 얄미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한 번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겠다.


“형, 혹시 저 좋아하세요?”


재은의 단도직입적인 말에 민재가 물을 마시다가 사레에 걸리고 말았다. 한참을 콜록거리다가 겨우 진정되자 민재가 신기한 눈빛으로 재은을 바라보았다. 녀석, 이런 말도 할 줄 알았던가. 


“저도 솔직히 말할게요. 저도 사실 형이… 좋아요.”


재은이 민재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수줍게 내뱉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고백이었다. 민재는 그 순간 가슴이 벅차올라 터져 나가는 것만 같았다. 얼른 재은의 손을 덥석 잡았다. 


“정말이야?”


민재가 환호성이라도 지를 듯한 표정을 지었다. 활짝 웃는 얼굴에서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이 넘쳐났다. 하지만 고백을 한 재은은 이상하게 담담했다.


“하지만 저는 임자 있는 사람이랑은 안 만나요. 저 때문에 다른 사람 상처 주기 싫으니까요. 10번 만나드리는 건 차 수리비 대신이에요. 다른 기대는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


이어지는 재은의 말이 민재의 가슴에 생채기를 냈다. 한참 부풀어 오르던 민재의 마음이 바늘 끝에 닿은 풍선처럼 요란한 소리를 내며 터지고 말았다.


“죄송해요.”


재은이 들고 있던 포크를 접시에 조용히 내려놨다. 


****


재은은 좀 일찍 퇴근하려고 옷을 갈아입었다. 어제부터 기분이 이상했다. 가슴속이 턱 막힌 듯 답답하고 숨을 쉬기 어려웠다. 자꾸만 먹먹한 느낌이 들고 일에 집중이 안 되었다.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보다 못한 양 사장이 재은에게 일찍 들어가 쉬라고 했다. 재은도 그래야겠다고 생각했다. 


“움마, 요새 우리 공업소에 외제차가 왜 이리 자주 온대? 이번 참에 아예 업종 전환을 해버리까잉?”


양 사장의 말에 재은이 사무실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민재 차만큼이나 고급스러운 사양의 페라*였다.

운전석 문이 벌컥 열리더니 여자가 내렸다.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맞는다고 하더니 내린 사람은 다름 아닌 고은정이었다.

고은정이 내리자마자 조수석 문이 열렸다. 이번에는 민재였다.


“은정아, 꼭 여기까지 와서 이래야겠어? 그냥 단순 접촉사고였다고.”


고은정은 자신의 팔을 잡는 민재의 손을 뿌리쳤다.


“놔! 접촉사고 좋아하네. 내가 다시는 여기 오기 싫다고 했지? 그런데 번번이 이 코딱지만한 공업소로 온 이유가 대체 뭐야? 왜 사고가 나도 하필 여기야? 저 자식 때문이야?”


은정이 마침 사무실 문을 열고 나오던 재은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재은을 본 민재의 얼굴이 굳었다. 은정은 재은을 보자마자 삿대질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야! 너 도대체 정체가 뭐야? 응? 네가 뭔데 자꾸 내 남자친구를 불러내냐고.”


“은정아, 내가 다 설명할 테니 돌아가자.”


민재가 은정의 팔을 움켜쥐고 차로 끌었지만 은정은 의외로 완강했다.


“이거 놔! 아직 할 말 다 안 끝났으니까.”


재은은 자신에게 길길이 날뛰는 은정에게 할 말이 없었다. 여자친구가 있는 민재에게 설렌 게 사실이었으니까. 민재가 너무 다정해서, 자꾸만 민재에게 의지하고 싶어져서, 마음이 봄볕에 눈 녹듯 풀린 게 사실이었으니까. 이렇게 비난받아도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얼굴이 좀 반반하다 싶더니 지금까지 남자들 홀려서 장사해온 거야? 이 더러운 호모 새끼야.”


더러운 호모 새끼. 

은정의 말이 비수가 되어 재은의 가슴에 박혔다. 재은이 죄라도 지은 양 고개를 푹 숙였다. 땅만 바라보던 재은의 어깨가 조금씩 들썩였다. 작업복을 꽉 움켜쥔 손이 파르르 떨렸다.


호모 새끼. 

자각을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은 천지 차이다. 

재은은 사춘기가 지나고 자신이 남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항상 자신을 감추어 왔다. 누구에게도 드러낼 수 없었다. 설령 아버지나 동생에게도. 


혹시라도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면 받게 될 따가운 시선과 손가락질이 두려워 늘 전전긍긍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본의 아니게 자신 때문에 상처받게 될까 봐 두렵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항상 숨기고, 감추고, 아닌 척 연기하고, 그렇게 아등바등 버텨왔는데….


그런데 다정한 민재의 모습에 그만 잠시 방심했었나 보다. 끝까지 연기해야 한다는 것을 잊었나 보다.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은 행복을 탐냈었나 보다. 그래서 오늘 이렇게 비참한 기분이 드나 보다.


“고은정!”


민재가 참지 못하고 은정의 팔을 부러뜨릴 듯 움켜쥐었다. 은정을 노려보는 민재의 두 눈이 적의로 타올랐다. 


“놔! 내가 이러라고 너한테 차 사준 줄 알아? 저딴 놈이나 만나고 다니라고?”


“일단 차에 타. 여기서 나가서 얘기하자.”


민재가 은정을 끌고 억지로 차에 태우려 하자 은정이 민재의 손을 탁 쳐냈다.


“놓으라고. 안 그래도 이 역겨운 곳에 더 있고 싶은 생각도 없으니까.”


고은정이 제 발로 걸어가 차에 탔다. 그리고는 창문을 내리며 민재를 올려다봤다.


“하민재. 착각하지 마. 그동안 내가 오냐 오냐 떠받들어 주니까 정신이 나간 것 같은데, 너는 나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야. 네가 잘 보여야 할 사람은 저 호모 새끼가 아니라 바로 나라고! 이번 일, 반드시 뼈저리게 후회하게 해주겠어.”


제 할 말만 끝낸 고은정이 그대로 창문을 올리더니 차를 몰고 나가버렸다. 민재가 우두커니 멀어지는 은정의 차를 바라보았다. 어제와 달리 민재의 어깨가 초라해 보였다.


“괜, 괜찮아요?”


재은이 민재에게 물었다. 그 소리에 정신이 든 민재가 뒤돌아서서 재은을 바라보았다. 

정작 위로를 받아야 할 사람은 재은인데. 저 녀석은 그렇게 상처를 받고도 오히려 제 걱정을 해주고 있었다.

사무실 안에서는 양 사장, 호식이, 김 양이 모두 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 유리문에 달라붙어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민재가 양 사장 등을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소란 피워서 죄송합니다.”


그때 경찬이 밖으로 나왔다. 


“재은아, 너 빨리 퇴근해. 당신, 책임지고 재은이 집에 좀 데려다줘. 당신 때문에 이 사달이 났으니까.”


경찬이 중간에 서서 두 사람에게 향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민재에게 차 키를 넘겼다. 


“밖에 있는 검은색 소나타가 내 차야. 당신 차만큼 좋은 차는 아니지만 타고 가.”


경찬의 속뜻을 알아챈 민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좀 빌릴게.”


민재가 우두커니 서 있는 재은의 손을 잡고 경찬의 차에 올랐다. 

경찬이 그 모습을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았다. 


*****

 


부족한 글인데도 재밌게 봐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추천도 해주시고 댓글도 달아주시니 힘이 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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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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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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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발퀴즈 이벤트를 하려고 했는데 시기상조인것 같네요. 그건 소설 끝무렵에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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