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사람들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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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비가 온다. 왜 하필 지금일까. 준이는 온몸에 비를 적시면서 뛰는 중이다. 가슴속에 더 이상 남은 숨들이 없어질때까지. 그렇게 정신을 맑게 해놓으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는지 선명해질것 같았다.
효진의 전화기는 꺼져있었다. 그 다음 할수있는 일은 무엇일까. 준이는 안이 훤히 보이는 식당 앞 처마밑에서 비를 피해본다. 많은 사람들 옹기종기 모여서 꺄르르르 웃음을 터트리며 밥을 먹고 있다. 소소한 행복. 평범한 일상을 사는 평범한 사람들. 내가 마음만 먹으면 가질수도 있는것들. 나는 무엇을 그토록 원하는가. 준이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것들을 바라보다가, 식당 창문에 등을 기대고, 현이에게 전화를 건다. 드디어 고해성사의 시간이다.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모두다 까발릴 차례인것이다.
목소리만 들어도, 현이는 이미 술에 취해서 슬픔에 범벅인채로 정신을 놓은것 같았다. 그리고 준이가 힘겹게 입을 떼어본다.
".. 나.. 남자 좋아하는 사람.. "
현이는 아무 말이 없다. 그러자 준이가 말을 잇는다.
".. 나.. 쓰레기같은 놈.."
".. 니 장인어른을 ..."
준이가 뜸을 들이며 뜨겁고 서러운 호흡을 뱉어본다.
".. 니 장인 어른을 좋아하는 쓰레기 같은 사람이..
바로 나..."
현이는 숨소리만 낸다. 준이는 그 숨소리가 너무 묵직하고 거대하게 느껴진다. 그 사람도 나를 좋아하고, 나와 그 사람은 사랑에 빠져 버렸다고 변명같은 소리들은 차마할수가 없다.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형?"
믿기지 않겠지, 영화에서도 소설속에서도 그런일은 일어나지 않을만큼 괴이하니까. 준이는 칼날에 묻은 선명한 핏빛을 한 그것을 마주한채로 자신을 드러냈다.
"... 미안.. 나 같은게 괜히 입양되서..
.. 석이도 저렇게 만들고..
.. 너한테도.. 할말이 없다.. "
"..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현이가 소리를 치자, 그나마 조각조각 맞춰져있던 가슴이 선명하게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모조리 다 부서져 버린다.
".. 어떻게든 돌려 놓을테니까...
.. 넌 걱정말아..."
똑같은 말만 반복해서 하며 소리를 치는 현이의 목소리를 더이상은 들을수가 없어서, 전화를 끊었다. 솟구치는 허망함에 눈물을 닦아낸다. 그러자 준이는 이상하게 웃는다. 이순간에 웃음이라니. 웃은건지, 우는건지 알수가 없었다. 정말 비극과 희극은 한끝차이인걸까.
세차게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효진에게 다시 전화를 건다. 역시나 전화기가 꺼져있다. 급한 마음에 문자를 보내본다. 손이 떨려서 철자법이 자꾸 틀린다. 그와중에 머리를 타고 내려오는 빗물과 눈물이 섞여서 시야가 흐려진다. 준이는 결국 문자를 보내는걸 포기하고 다시 전화를 건다. 역시나 음성메세지로 넘어가고, 삐 소리가 난다.
불안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하지만 속수무책으로 쏟아져 내린다. 벌벌 떨면서 간절한 목소리를 준이는 담는다.
".. 효..진..씨.. 제발.. 나한테 이러지마요...
.. 우리... 그러지 말고.. 만나서.. 만나서 얘기해요..
.. 제발... 우리 현이한테... 그러지마요..."
한참을 혼자서 중얼거리더니, 그대로 거기에 주저 앉는다. 멍한 눈빛으로 옆에 덩그러니 비에 젖어가는 가방을 오래도록 바라본다. 그리고 아까부터 계속 울리는 유부장의 전화를 애써 외면해본다.
이윽고, 어둡고 캄캄한 밤이 다가온다. 퀭해진 눈으로 빗물에 번져있는 화려한 네온 싸인들을 바라보다가, 준이는 눈을 감고 그렇게 빗속으로 들어간다. 한참을 걸으며 기도했다. 제발 내안의 이 악행들이 모두다 씻겨져 나갔으면 좋겠다고. 핸드폰은 쉬지 않고 울어댔다. 누군가의 간절한 마음이 울리는것 같아서 준이는 자꾸만 흔들린다. 걸음을 멈추고, 핸드폰을 꺼내는데, 화면에 뜬 글자는, 최사장이었다.
수술이 끝나고, 회복중일때 문자 하나만 딸랑 남기고 떠난 사람. 이미 충분해졌으니 각자 살면 되는거라고, 혼자서 겨우 위안하며 사는데, 왜 하필 가장 약해져 있을때 또 찾아 오는것인지. 원망과 보고싶은 마음이 동시에 혼재한다. 준이는 어느 이름 모르는 상가 처마 밑으로 빠르게 뛰어가면서, 혹시 전화가 끊기면 어떡하나 걱정을 했다.
준이는 몸에서 흘러내리는 빗물을 느끼면서, 흔들리는 마음을 애써 붙잡아 본다. 애절하게 우는 핸드폰 소리를 들으면서, 준이는 결국 핸드폰을 가슴에 품은채로 전화벨 소리를 들으며 한참을 울었다. 이제 누구의 손도 잡아서는 안됐다. 오롯이 홀로 서야만 했다.
동이 틀때까지, 준이는 오직 효진의 연락을 기다리며,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아침이 되자 출근하는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한다. 어디로 다들 바쁘게 가는걸까. 나는 갈데도 없는데. 왜 나만 빼고 다들 바쁠까.
"... 띠리리리"
또 다시 유부장이다. 핸드폰을 끌수도 없었다. 효진과 연락이 닿으려면. 계속해서 유부장이 멀리서 보내는 절박한 마음을 모른척 해야했다.
그때 최사장에게 문자가 왔다.
[ 왜 전화를 안받노? 무슨일 있어? ]
억장이 무너진다. 충분하다고 수없이 스스로에게 이골이 날만큼 각인을 시켰었다. 그런데 어째서 뒤돌아만 서면 다시 더 가지려고 드는지 모를일이었다. 부장님도 사장님도 다 이렇게 끌어들이게 된건, 한낱 미물에 지나지 않는 나의 헛된 욕망 때문이었다.
(.. 탈난데이.. 너무 가질라카믄...)
그때 번뜩, 바닷가 할매가 최사장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할매처럼 오래 살다 보면, 인생의 진리를 깨닫는 날이 올까? 어쩌면 그렇게 혜안이 넓은지, 사람속을 다 꿰뚫고 있는 사람처럼 말을 할까. 한번 스치는 말이었는데, 왜 그 말이 지금 절실하게 마음을 흔드는지 모를일이었다.
준이는 마지막으로 효진에게 전화를 걸고 음성을 남겼다. 꼭 연락 달라고. 지금은 도망가야 할것 같다고. 그러니 꼭 연락을 기다린다고. 안 그러면 죽어버릴꺼라고. 자신이 어디를 향해서 가고 있는지까지 말하고, 기차역으로 향했다.
............
할매는 준이를 반가워 했다. 수술은 잘됐냐고. 이제 사는것이냐고. 최사장의 안부도 물었지만, 준이는 쓴 웃음만 보였다. 그러자 할매도 더이상 묻지 않았다.
할매는 여러개의 먹음직스런 해산물과 반찬들을 내놓았다. 할매와 떠들며 밥을 먹는내내, 지난날 한자리를 차지하고 낚지 한점을 밥에 올려다 주던 최사장이 떠올라서, 준이는 일부러 더 떠들고 크게 웃었다.
밥을 먹고 산책 겸 바닷가를 걸었다. 유부장에게서 수시로 오던 전화가 오랫동안 오지않자, 문득 문득 유부장의 음성 메세지를 듣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안된다. 지금은 마음이 약해질때가 아니다라며 마음을 다 잡았다.
그렇게 핸드폰을 닫으려는데, 소리가 울렸다.
효진씨라는 글자를 발견하자, 준이의 눈이 커진다. 급한 마음에 전화기를 모래사장 바닥에 떨군다. 준이는 모래에 파묻힌 핸드폰을 집어들고 겨우 전화를 받는다.
".. 여보세요? 휴우..."
다급한 목소리와 안도의 한숨을 내놓는 효진. 죽을거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나보다.
".. 효진씨.. 어디예요? 만나요 우리!
..만나서 얘기해요.. 제가 그쪽으로 갈게요.."
효진의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파도소리에 준이가 놀라서 주위를 거려본다. 가슴이 답답했던 효진은 바다가 보고 싶었다. 때마침 준이와 효진은 아주 가깝게 있었던 것이었다.
준이는 효진과 전화를 끊고, 바로 석이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 석아.. 지금 부터 내가 하는말 잘 들어..
.. 현이 데리고 이리로 와..
.. 내가 지금 효진씨 만나서 얘기 할꺼니까.."
그리고 석이에게 준이는 한가지를 더 당부한다.
".. 부장님한테는 절대로 내가 있는 곳 말하지마.."
전화를 끊고 준이는 급한마음에 아무것도 챙기지 않고 효진이 있는 곳으로 뛰었다.
..........
석이는 술에 취해서 망가져 있는 현이를 깨워서 차에 실었다. 그리고 속도를 높였다. 전속력으로. 때마침 영우에게 전화가 온다.
".. 현이형 태웠어?"
".. 어.. 가고 있어.."
".. 넌? "
".. 나도..."
영우 역시, 그 사이에 모든걸 다 놓아버린 사람처럼 술에 영혼까지 팔고있는 유부장을 태워서 그곳으로 가고있는 중이었다.
".. 준이형이 절대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 믿어라. 이 남편의 촉을!!"
영우가 자신있게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뒷자석에 쓰러져 있는 유부장을 거울로 들어다 보았다.
".. 지금 안데리고 가면, 부장님 현이형 결혼식때까지 못버티실지도 몰라.. 그럼 누구한테 원망을 들을라고..."
석이는 쉬지도 않고 계속해서 차를 몰았다. 현이는 숙취에서 벗어나는지 몸을 조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통 때문인지 손으로 머리를 짚고 있었다. 얼굴에는 메마른 눈물자국이 군데군데 보였다.
".. 석이냐? 어디야 여기는?"
석이는 쉽게 말을 잇기가 힘들다. 그래서 잠깐 침묵을 지키는데, 현이가 곧바로 달려든다.
".. 너 왜 전화 안받아!!!
.. 지금 무슨 상황이 일어난줄은 알아?"
성난 목소리의 현이의 마음을 석이는 어느정도는 이해하고 있었다.
".. 준이 형이...내 장인어른을 좋아한데!!"
석이는 소리치는 현이를 오히려 내버려두었다. 안좋은것을 품을때는 차라리 실컷 퍼붓는게 오히려 나을때가 있었다. 한참만에 흥분이 잦아진 현이에게 석이가 드디어 입을 연다.
".. 준이형만 좋아하는거 아니야.."
".. 뭔소리야? 뭐? 넌 다 알고 있었어?"
".. 유부장님도 좋아해, 아니 사랑해.. 준이형.."
순간 머리가 노래져서 아무 생각을 못하는건지, 말을 하려다 말고 현이가 어버버거린다.
".. 넌 어떻게 아는건데..
..이게 지금 갑자기 무슨 상황인건데.."
울먹거리는 현이를 보고는 석이도 동시에 울먹거린다.
그러면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준이가 무슨일을 벌이고 있는지, 그곳에 가면 효진을 만날수 있다고도 얘기한다.
".. 부장님은.. 딱 형 결혼식때까지만..
.. 그때까지만이라도 함께 하고 싶데..."
현이는 잠시 정신이 다른데에 가 있는 사람같다. 효진의 이야기를 들었으면 어떤 반응이라도 할텐데, 촛점 잃은 눈빛으로 무수히 쏟아지는 밤하늘의 별을 바라만 봤다. 그러다 현이가 창문을 내린다. 찬바람이 빠르게 들어오고, 현이는 세찬 바람에다가 떨어지는 눈물 방울을 밖으로 흘려 보냈다. 누구를 위한 눈물인지는 알수가 없었다.
.......
한편, 준이는 효진을 발견하고서 백사장을 뛰고 있었다. 신발에 흙이 다 들어가도록 힘차게 효진 앞에 섰다. 헉헉대는 숨을 겨우 고르는데, 효진이 아련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준이가 무릎에서 손을 떼고 상체를 일으키는데, 효진이 순간 준이를 안았다. 놀란 준이는 눈을 크게 뜨는데, 땀 한방울이 그 속으로 들어갔다.
".. 안아 주고 싶었어요.. 게이들 만나면..
.. 고생한다고.. 참 어렵게들 산다고.. "
효진은 그동안 밀렸던 숙제와도 같은 염원을 풀었다. 그 포옹은 사실 성진이에대한 미안함과도 같은 것이었다. 용서해달라는 어떤 효진만의 의식같은것이었다.
속이 뻥 뚫린 효진이 앞장서자, 준이가 옆에서 같이 백사장을 걷는다. 파도소리가 잔잔하게 어둠속에서 부서진다. 비슷한 시기에 부모에게 버려져서, 각각 남자와 여자로 태어나서 서로 다른 가정에서 자란 두명의 입양아들은, 비록 이런 잔인한 운명을 만났음에도, 분명 서로 통하는게 있는것 같았다.
".. 기억나세요? 우리 처음 만난날?"
효진이 먼저 물꼬를 튼다. 그러자 아파트 문 사이로, 하얀 피부의 손만 빼꼼히 내밀던 그때가 떠올라서 웃는다. 그땐 정말 몰랐었다. 이런 인연이 될줄은. 준이는 마음이 편해져서인지, 속마음을 그냥 털어 놓는다.
" 사는게 왜 이렇게 힘들까요? "
담백한 물음이었지만, 어쩐지 남모를 슬픔이 묻어있었다.
"..그러게요... 휴우...."
효진도 그 물음에 백번 공감하는것일까. 한숨섞인 동의속에 그동안의 한이 여실히 드러나는 듯했다.
".. 아둥바둥 사는데, 내가 지금 뭘하고 있는건지..
그럴때 없어요? "
"..왜요? 매일매일이죠..."
"..우리 이렇게 잘 맞았던가요? "
준이가 효진을 바라보며 묻자, 둘은 기다렸다는듯 눈을 마주치고 웃었다. 그리고 효진이 공감을 하면서 말을 한다.
"..남들은 행복해보이고, 다 잘나가 보이는데..
.. 나만 동 떨어져서..
..이렇게 사는것도 인생으로 쳐주는가 싶어서..
.. 가끔 .. 쪽팔리고, 가끔.. 억울해요.."
그러자 준이가 말을 잇는다.
"..현이가 대기업에 들어갔을때, 정말 기뻤어요..
..진심으로.. 근데.. 제가 잘 안풀리기 시작하니까..
..갑자기 내 인생은 너무나 초라해 보이는거 있죠..
..질투도 나고.. 한심한 인생이죠.."
효진이 준이를 보며 미소를 지으면서 맞장구를 친다.
".. 내 인생은? 나는? 성공을 못한 나는?
다 잃어버린 나는? 만만치 않게 열심히 살아온 나는? "
그리고 효진이 나직하게 묻는다. 자신의 마음을 대변하듯이.
" 억울하세요? "
"..네... 뭐... 가끔은 ...속이 좁죠...하하하..."
..그냥 다 항상 부러워했던거 같아요..
.. 난 항상 가질수 없으니까.."
"..저도요...뭘 그렇게 의심하고...
사랑을 자꾸 확인하려했는지..."
효진이 그렇게 말을 하고,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준이를 바라본다.
".. 좀 풀린다.... 진짜..
...이렇게까지 솔직해본거 정말 오랜만이네요..."
".. 저도요..."
준이는 효진과 눈을 맞추고, 진짜로 전하고 싶은 마음을 전한다.
"...제발 저희 때문에 현이 포기하지마세요..
...현이 괜찮은 놈이예요..."
"...알아요.. 알죠...
누가 저같은것을 좋아하겠어요? "
" 왜 그러세요.. 아름다우신데..."
".. 못되 쳐먹어가지고..."
효진의 눈망울이 서글프게 빛이난다.
".. 전 평생을 다시 태어나고 싶다...
.. 다시 태어나고 싶다..
.. 나도 나를 낳아준 부모와 함께 살고싶다..
.. 이놈의 열등감, 죽어야 사라지겠죠?"
속풀이 하듯이, 속마음을 모두 다 얘기하는 효진에게 준이가 진심을 더 담아서 얘기한다.
"..효진씨는 이제 아무 걱정마세요..
.. 제가 아는 동생은 말은 툭툭 내뱉어도..
..섬세하고 착해서..상대방을 배려 할줄 알거든요..
.. 그러니까, 그 놈 절대 놓치지 마세요..."
고개를 끄덕이는 효진은 현이가 머릿속에 떠오르는지, 미소를 짓는다. 처음 구평대교에서 무턱대고 목숨을 살려준일. 전 남편에게 맞고있을때 뛰어와서 지켜준일. 그러다 심각한 표정으로 묻는다.
".. 준이씨는요? "
준이는 아무렇지 않은척, 두손을 뻗어서 앞뒤로 박수를치면서 말한다.
".. 전 평생을 이렇게 살아서, 괜찮아요..
..이미 충분히 받을만큼 받았어요.."
하지만 효진은 뭔가 마음에 걸렸던걸까.
"..저희 아빠 좋아하세요? "
그렇게 대뜸 물었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져서 무슨말도 할수가 없었다.
유부장의 딸에게 자신의 속마음이 들켰다는게 어떤면에서는 수치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저는요... 처음봤어요..우리 아빠 눈빛..
..그렇게 생글생글하고 빛나는 눈동자는.."
효진은 유부장이 준이를 바라보던 눈빛을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신기하지 않아요? 그런 사람을 만날수 있다는게? "
"..효진씨도 만났잖아요...
.그러니까.. 제발..부장님 때문에 포기하지마세요..
...장담하건데, 이대로 물러나시면,
.. 부장님.. 또 예전으로 돌아가실거예요..."
그렇게 미소를 짓더니, 예전의 유부장의 모습을 떠올렸는지 어느새 효진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 그러니까.. 현이 놓치지 마요..
.. 얼마나 힘들게 만난 사랑인데..."
준이는 흐느끼는 효진의 팔뚝을 잡고 눈을 마주치며 말한다.
".. 효진씨는 이미 충분히 훌륭한 딸이에요..
.. 아니, 재수씨..."
바닷바람은 시원했다. 끙끙 앓고 있던 아픈 이 하나가 저절로 빠지는 느낌이었다. 기분좋은 바람을 맞으며 해변가를 거닐때쯤, 멀리서 현이와 석이가 걸어오고 있었다.
준이는 미리 현이를 발견하고, 한 손을 내밀며 효진의 시선을 이끈다. 현이는 효진을 향해 뛰어 오고 있는 중이었다. 어느새 눈물을 글썽이는 효진을 향해 준이가 힘차게 말한다.
".. 효진씨.. 뛰세요..."
그러자 효진도 현이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둘은 중간쯤에서 만났다. 간절한 뜀박질 끝에, 평생의 사랑 효진을 현이가 껴안는다. 둘은 서로 미안하다며 부둥켜 안고 운다. 그리고 한참을 이야기 한다. 멀리서 보아도 잘 풀리고 있음이 확실해 보였다.
그때 때마침, 영우와 유부장이 도착했다. 유부장은 저 멀리서도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효진은 유부장을 알아보고, 단숨에 뛰어갔다.
효진이 유부장을 그윽하게 쳐다보며 흐릿한 한마디를 숨소리와 함께 뱉는다.
".. 우리.. 아빠..."
유부장도 가물거리는 눈빛으로 그녀의 말에 화답한다.
".. 우리.. 딸..."
서로의 진심이 한마디의 말로 맞닿는 순간이었다. 곧이어, 효진이 몸을 비켜서 준이가 있는곳을 향해 한손을 뻗는다. 준이가 효진에게 그랬던것처럼.
유부장은 서서히 조금씩, 느리게 걸었다. 어떤 마음으로 걷는건지, 얼굴은 울그락 불그락하다가도, 주체할수 없는 감정이 치민것처럼 금방이라도 울것만 같았다.
준이는 멀리서 다가오는 유부장을 못 알아 보는건지, 여기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건지 눈을 부비고 있다. 점점 유부장이 다가오자, 준이는 그제서야 유부장임을 확신하고 서서히 뒷걸음질을 치는데, 유부장이 그 모습을 보고는 뛰기 시작했다. 그러자 준이가 등을 돌리고, 반대쪽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발은 백사장의 모래에 쿡쿡 사정없이 박힌다. 도망가고 쫓아가는 두 사람의 구슬픈 마음은 알바가 아니라는듯, 냉정한 모래가 자꾸 발목을 붙잡는다. 힘겨운 두 사람의 숨소리가 어두워진 바닷가의 파도소리와 함께 서글프게 울린다. 준이는 오직 사력을 다해서 도망가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현이가 운다. 도망가는 준이를 보면서. 또 숨도 안쉬고 중년의 몸으로 힘겹게 따라잡고 있는 유부장을 보면서. 현이는 어깨까지 들썩이며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평범한 가족인줄, 아니 평범한 사람인줄 알았다. 내 주위에 모든 사람들이. 좋아했던 형은 평범하지가 않았고, 자랑까지는 아니었어도, 많이 아꼈던 동생도 그렇지가 않았다. 그렇다면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인, 나만 평범한것일까? 왜 자꾸 쫓고 도망가는 두사람의 애절함이 마음을 뒤흔드는지 모를일이었다. 그리고 왜 자꾸 평범한 보통의 아름다운 사랑처럼 느껴지는지도 알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꾸 눈물이 났다.
평범한건 도대체 무엇일까?
눈물을 흘리는 현이를 효진이 어느새 손을 꼭 잡아준다.효진의 웃는 모습이 무언가를 말해주는거 같았다. 어쩌면 평범한건, 평범하지 않건, 그런건 아무 의미도 없는거라고.
영우는 석이의 어깨를 감싸준다. 석이는 그윽하게 영우를 바라보며 흘리는 눈물을 닦아낸다. 그렇게 두 커플들은 아련하고 애석하게 둘을 바라보았다.
준이는 도망치다가, 결국 쿡 박힌 발을 모래에서 발을 빼지 못하고 자빠진다. 그 바람에 유부장이 준이를 드디어 따라 잡는다. 그리고 몸을 날려서 준이를 도망가지 못하게 두 발을 붙잡는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한참을 숨을 고른다.
"... 준아.. 시간 없다.. 제발..."
준이가 훌쩍이는 유부장을 바라본다. 그리고 자신의 두 발목을 꽉 붙들고 있는 그의 손도 본다.
".. 준아.. 제발..."
준이는 미친듯이 소리를 친다. 지금의 이 순간을 믿을수 없는 사람처럼 광기를 내뿜는다. 그러자 유부장이 일어나서 난리를 치는 준이를 안아준다.
".. 괜찮아.. 괜찮아..."
준이는 유부장의 품에서 벗어나가려는듯 끝까지 몸부림 친다. 하지만 유부장은 그럴수록 더욱 꼬옥 안아준다. 무수히 쌓여있는 그의 한과 광기와 서글픔들을 따듯하게 보듬어 준다.
얼마 후 진정이 된 준이가 숨을 고르게 쉬기 시작하자, 유부장이 느리게 일어서더니, 풀썩 두 무릎을 꿇는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세우고, 주머니에서 반지를 꺼낸다. 반지는 바닷가의 달빛에 흥건하게 적셔져있었다.
유부장은 고개를 숙이며 반지를 준이에게 바친다. 준이는 금방이라도 울것처럼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다.
꿈같은 시간들. 살랑살랑 간질이는 바닷바람과 냄새. 그리고 갈대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는 준이의 마음. 준이와 함께 도망가고 싶은 유부장의 마음. 그 모든것들이 그렇게 버무려 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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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잘 읽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건필하시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