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중설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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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너를 좋아해 (3)
민재는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몇 주간 누적된 피로에 회사 자금압박이 주는 스트레스 때문에 이미 몸은 한계치를 벗어난 상황이었다. 아무 데서나 털썩 쓰러지면 금방이라도 24시간 동안 한 번도 깨지 않고 잠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피로에 전 민재의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민재의 건강을 염려한 사람들이 집에 들어가 쉬라고 했지만 민재는 그럴 수 없었다. 어젯밤에 받은 재은의 문자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복잡한 머리를 식히려 밖으로 나가 담배를 피웠다. 빌딩 숲 사이로 보이는 아침 하늘이 눈이 부시도록 시렸다.
“아이고, 상무님 아니십니까? 또 밤을 새운 겁니까?”
정문 경비를 서는 이 씨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인사를 했다.
“아, 예. 또 그렇게 되었습니다.”
민재가 이 씨를 보며 눈인사를 했다.
“아무리 젊으셔도 그렇게 무리하시면 큰일 납니다. 집에 들어가서 좀 쉬십시오.”
건강을 걱정해주는 이 씨의 말이 고마웠다.
“그래야 하는데 일이 저를 놓아주지를 않네요.”
“참, 후배 분이랑과 통화는 하셨습니까?”
이 씨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다시 물었다.
“후배라니요?”
“엊그제 밤에 후배라는 분이 와서 두 시간이 넘게 여기서 상무님을 기다렸어요. 키가 크고 얼굴이 하얀 청년인데 통화가 안 돼서 직접 만나러 왔다더군요.”
민재의 머릿속에 누군가의 얼굴이 퍼뜩 스치고 지나갔다.
“인상착의가 어땠습니까?”
민재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글쎄요. 황토색 외투에 하얀색 목도리를 한, 참 훤칠하게 생긴 청년이었습니다. 엊그제 밤이 좀 추웠습니까? 두툼한 오리털 파카를 입어도 추운 판국인데 얇은 외투 하나만 입고 있는 모습이 영 안 되어 보였어요. 두 시간째 회사 건물만 바라보기에 왜 그러고 있냐고 물었더니 글쎄 상무님을 뵈러 왔다더군요.”
재은이다. 재은이가 분명하다. 엊그제 재은이가 왔다 갔단 말인가. 그런데 왜 자신에게는 말 한마디 없었을까. 그리고 어젯밤에는 왜 그런 문자를 보냈을까?
“얘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민재가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허겁지겁 다시 사무실 안으로 달려 들어가더니 차 키를 가지고 나와서 차에 시동을 걸었다. 이 씨가 민재의 차 꽁무니를 향해 경례를 붙이면서 의아한 눈길을 지었다.
아침 출근 시간이면 주차장으로 변하는 혼잡한 강변도로를 타고 민재는 재은의 공업소로 향했다. 차로 가기에는 최악의 시간대였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두 시간 반이 지나서야 겨우 재은의 공업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민재는 도착하기 무섭게 사무실로 달려가 문을 드르륵 열었다. 오전 시간에는 한가해서 믹스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던 양 사장과 호식이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전 시간에, 그것도 사무실 문을 민재가 직접 열고 나타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재은이는 어디 있습니까?”
민재는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재은부터 찾았다.
“재은이 오늘 휴가입니다만…?”
양 사장이 한 손에 종이컵을 들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민재를 쳐다보았다. 양 사장의 말을 들은 민재가 인사도 없이 문을 닫더니 다시 차 쪽으로 달려갔다.
그 모습을 본 경찬이 급히 민재를 따라나갔다.
“당신 뭐야? 왜 아침부터 남의 공업소에 또 나타난 거야?”
차에 오르는 민재를 경찬이 붙잡았다.
“여기가 당신 놀이터인 줄 알아?”
“재은이가 돈을 갚았어. 그 녀석이 어젯밤에 내게 1,678만원을 송금했다고.”
민재를 붙잡은 경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뭐라고? 너 이 새끼, 그 돈 정말 받을 생각이었던 거야?”
이번에는 민재가 경찬을 노려보았다.
“말 같은 소릴 해. 내가 정말 그 돈을 받으려고 그 녀석에게 청구서를 내밀었던 것 같아? 당신도 알고 있으면서 어떻게 그런 소리가 나와?”
“그럼 왜 그 녀석이 갑자기 당신에게 돈을 보냈냐고. 그 큰돈이 갑자기 어디서 나서.”
“나도 모르겠어. 어젯밤부터 녀석에게 전화도 해보고 문자도 보내봤지만 연락이 안 돼. 그래서 달려왔어. 얼굴 보고 얘길 듣고 싶어서.”
갑자기 경찬이 멈칫하며 민재를 바라보았다.
“가만. 그러고 보니 어제 재은이가 이달 치 월급을 가불받았던 것 같아.”
“뭐라고?”
“김 양이 시큰둥하게 하는 소리를 내가 분명히 들었어. 연초라 돈 나올 때도 없는데 벌써부터 가불이냐고. 나는 재은이 아버지 약값이나 동생 학원비로 목돈이 필요하나보다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 당신에게 보내려고 했던 거군.”
경찬이 민재의 팔을 단단히 부여잡고 민재를 노려봤다.
“당신, 도대체 무슨 짓을 벌인 거야?”
“놔. 이럴 시간 없어. 재은이를 만나서 직접 들어야겠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했는지.”
민재는 경찬의 팔을 밀치고 차에 올랐다. 가불까지 받아서 자신에게 보낼 줄이야.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바보 같은 자식.”
애꿎은 핸들 위로 민재의 손이 떨어져 내렸다.
출근 시간이 지났는데도 정체는 지루하게 이어졌다. 다시 꼬박 한 시간이 걸려서야 민재는 재은의 집 앞에 도착했다. 재은네가 사는 다가구 주택 대문은 지난번처럼 열려 있었다.
“재은아. 설재은!”
재은이 사는 집의 현관문을 두드렸다.
“민재 형이야, 문 좀 열어줘.”
몇 번을 두드렸지만 집안에 사람이 없는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한참 동안 문을 두드리던 민재가 대문 앞 계단에 털썩 주저앉았다. 손가락이 습관처럼 담배를 찾았다. 재은을 만나면서 끊으려고 했던 담배가 요 몇 주간 오히려 더 늘었다.
띠리리리리.
민재의 휴대폰이 울렸다. 회사 장 과장이었다.
- 상무님. 됐습니다. 결제대금 막혔던 게 오늘 아침에 드디어 모두 풀렸습니다. 거래처에서 속속 입금이 되고 있습니다. 세나 쪽에서 드디어 고집을 접은 것 같습니다.
고생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건지 장 과장의 목소리가 밝았다.
세나 쪽에서 갑자기 왜…. 전화를 받던 민재가 벌떡 일어섰다. 설마…!
“이것도 역시 고은정이 한 짓이었어.”
화가 난 민재가 그대로 차에 올랐다. 가서 은정이에게 따지고 싶었다. 도대체 재은이에게 무슨 소릴 한 걸까. 뭐라고 했기에 그 녀석이 이토록 자신을 피하는 걸까.
민재가 앞을 막아서는 차를 향해 경적을 마구 울렸다. 마음 같아서는 앞을 막아서는 차를 모두 받아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무슨 말을 했든 좋은 소리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난번 은정에게 ‘호모 새끼’라는 말을 듣고 고개를 떨구던 재은의 모습이 떠올랐다. 언제까지나 이렇게 끌려갈 수는 없다. 어차피 민재도 고은정이 좋아서 만나는 것은 아니었다. 부모님 생각에, 회사 생각에, 제 한 몸 희생하자는 생각으로 그동안 온갖 수모를 다 참으며 은정을 만나왔다. 애정이라고는 전혀 없으면서 오로지 결혼을 목적으로.
하지만 재은이 은정에게 상처를 받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머릿속에서 뜨거운 것이 솟구쳐 올랐다. 이번에는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오늘따라 유난히 신호등도 자주 걸렸다. 그럴 때마다 민재는 초조한 듯 손가락으로 핸들을 두드렸다.
엊그제 밤에 회사 앞을 서성거렸을 재은의 모습이 떠올랐다. 낡은 카멜색 외투를 입고, 목에는 자신이 준 하얀 머플러를 두르고, 얼어붙은 발을 동동거리며 자신을 기다렸을 재은을 생각하니 가슴이 서걱거렸다. 녀석, 얼마나 추웠을까. 아무리 바빴어도 녀석에게 더 자주 전화했어야 했는데…. 역시 자신은 여러모로 너무 부족한 사람이다.
고은정의 집 앞에 도착한 민재가 급하게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세요?”
“어머님, 저 민재입니다.”
“아니, 자네가 이 시각에 어쩐 일인가? 잠깐만 기다리게.”
고은정의 어머니가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잠시 후, 거대한 정문이 열렸다. 민재는 은정이 자신에게 사준 슈퍼카를 타고 정문 안으로 들어섰다. 현관문이 열리더니 집 안에서 민재가 마주치고 싶지 않은 또 다른 얼굴이 나타났다. 은수였다.
“어쩐 일이야, 이 시각에?”
“네 누나 있어?”
가시 돋친 민재의 말에 은수가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집에 없는데? 무슨 일 있구나?”
“네 누나 오면 이 차, 이제 필요 없다고 전해줘. 키는 안에 있다. 그리고,”
“앞으로는 내 일에 관심 끄라고 해. 나도 이제는 참지 않을 테니.”
민재가 할 말만 던지고 뒤돌아섰다.
“왜, 누나랑 헤어지게?”
웃음기 띤 은수의 목소리가 민재 뒤를 따라왔다.
“크크크. 잘 생각했어. 형이 말한 그대로 누나에게 전할게.”
은수의 웃음소리가 끈적하게 등 뒤에 달라붙었다.
민재는 뒤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정문 밖으로 나갔다.
이 집 사람들과 더 이상 마주치고 싶지 않다….
****
재은은 집 밖에서 민재 소리가 나자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민재 형이 우리 집을 어떻게 아는 거지? 다행히 아버지는 이번 주부터 주간 근무라 집에 안 계셨다. 지은이는 보충수업 들으러 학교 간 지 오래였고.
문을 두드리며 자신을 부르는 민재의 목소리를 들으며 재은은 덮고 있던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러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문을 열고 뛰쳐나갈 것만 같았다.
제발 가, 형. 이제는 형이 없는 시간에 익숙해져야 해. 그러니 제발 나를 찾지 말고 그냥 가줘. 난 지금도 너무 힘들어.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어서인지 숨이 막혔다. 눈을 질끈 감고 민재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도 한편으로는 문밖에 민재가 있다는 사실에 안심이 되었다. 지난번 영화관에서처럼 다시 한번 민재 형 품에 안기고 싶었다. 나 힘들다고 형 품속에서 칭얼거리고 싶었다.
후-.
어느새 문을 두드리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차에 시동 거는 소리가 나더니 그 소리마저 멀어지고 문밖에는 다시 여느 때와 다름없는 고요함이 찾아 왔다. 아울러 민재가 없다는 쓸쓸함도 함께.
그제야 재은은 현관문 밖으로 나갔다. 민재가 서 있었을 자리를 우두커니 쳐다보다가 민재 손이 닿았을 현관문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엊그제 봤던 민재의 초췌한 뒷모습이 떠올랐다.
재은은 얼른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이럴 게 아니라 민아와 만나서 수다라도 떨어야겠다. 혼자 있으니 자꾸만 민재 생각이 나서 견딜 수가 없다. 자꾸만 숨이 막힌다.
****
새벽 두 시. 인적이 끊어진 골목길을 재은이 털레털레 걸었다. 민아와 만나서 간만에 맥주를 한잔했지만 사람이 많건 적건, 주위가 시끄럽건 조용하건 간에 머릿속에서 민재 생각은 떠나지 않았다. 제가 먼저 만나자고 민아를 불러 내놓고 내내 아무 말도 없이 있다가 다시 돌아오는 길이었다.
가슴에서 심장이 빠져 버린 것만 같았다. 구멍 난 가슴을 찬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어두운 골목길을 혼자 걷다 보니 지난번에 지하철역에서 민재를 우연히 만났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도 지금처럼 어두운 길이었다. 아니, 그때는 도로에 차가 있었으니 지금보다는 덜 어두웠나 보다. 누군가 쫓아오는 줄 알고 얼마나 정신없이 뛰었던지. 그러다가 민재를 만나 깜짝 놀라면서도 얼마나 기뻤던지.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나쁜 자식. 기왕 찾아 왔으면 좀 더 기다릴 것이지. 나는 회사 앞에서 2시간을 넘게 있었건만 자기는 고작 20여 분 만에 사라지다니.
괜히 민재에게 서운한 감정이 들었다. 그리고 연이어 드는 그리움.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민재가 보고 싶어서 가슴이 또 먹먹했다.
“내가 아주 미쳐 가는구나.”
재은이 울다가 웃으며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전봇대 불빛에 집 앞 시멘트 계단 위에 누군가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누구지? 홈리스인가? 앉아도 하필이면 우리 집 대문 앞에 앉아있담.
텅 빈 골목길을 울리는 재은의 발걸음 소리를 들었는지 웅크리고 있던 사람이 고개를 들었다. 재은이 걸음을 멈췄다. 호흡이 가빠졌다. 그 사람이 재은이 있는 쪽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집 대문 앞은 전봇대 불빛 때문에 환하지만 재은이 있는 곳은 칠흑 같은 어둠에 덮여 있었다.
3초쯤 발걸음을 멈춘 재은이 갑자기 몸을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 기색을 눈치채고 앉아있던 사람이 벌떡 일어서더니 재은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재은이 자신도 모르게 뛰기 시작했다. 도망치면서도 이렇게 달아나는 자신의 두 다리가 야속하기만 했다.
“재은아, 기다려!”
민재가 달려왔다. 금방이라도 잡힐 것만 같았다. 안 되는데. 이렇게 만나서는 안 되는데. 애써 마음을 다잡았는데. 이제 와서 다시 약해지면 안 되는데.
“재은아, 제발.”
민재의 애타는 목소리에 재은은 그 자리에 우뚝 서버리고 말았다. 떨어지려는 두 다리를 심장이 옭아맸다.
“재은아.”
민재가 뒤에서 재은을 그대로 껴안았다. 그리고는 재은의 목덜미에 머리를 묻었다. 민재의 팔이 재은의 가슴을 으스러지게 껴안았다.
“제발 도망치지 마.”
“돌아가세요.”
재은의 입에서 단호한 말이 튀어나왔다. 할 수만 있다면 민재의 얼굴을 보지 않는 게 낫다. 민재의 얼굴을 보면 기껏 다잡은 마음이 결국 무너져버릴 테니까.
“너 왜 이래? 이러는 거 은정이 때문이지? 은정이가 무슨 말을 했기에 이러는 거야?”
“저는 형이랑 더 하고 싶은 말이 없어요. 돌아가세요. 돈도 다 드렸잖아요.”
민재가 재은을 억지로 돌려세웠다. 재은이 민재의 시선을 피했다. 민재의 두 눈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너 정말 왜 이러는 거야? 그동안 연락 못 해서 미안해. 회사 일 때문에 너무 정신이 없었어. 내가 그래서는 안 됐는데….”
“아니요. 연락 안 한 건 잘하신 거예요. 어차피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요.”
시선을 회피하던 재은이 민재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오늘 밤처럼 차가운 눈빛이었다.
“나 은정이에게 차 돌려주고 왔어. 이제 은정이에게 휘둘리지 않으려고. 그리고 은정이 정리할 거야. 나는 너 하나만 있으면 돼. 재은아, 그러니 제발…!”
자신을 바라보는 민재의 두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밖에서 얼마나 있었던 건지 코끝과 양 볼도 얼어서 눈만큼이나 빨갰다.
민재의 말에 재은의 가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민재를 바라다보던 재은의 말간 눈가가 촉촉해졌다. 사실은 나도 그런데. 나도 형만 있으면 되는데….
자꾸만 제멋대로 튀어나오려는 말을 억누르려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래서는 안 돼. 자신의 감정대로 했다가 형이 또 다치면 어떡해.
파르르 떠는 재은을 민재가 두 팔로 껴안았다.
“힘들게 해서 미안해. 지난번에 네가 내게 물었었지? 너를 좋아하냐고.”
“…….”
“그 답 지금 할게. 널 좋아해. 처음 봤던 순간부터….”
민재의 고백을 듣는 순간 재은의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나도, 나도 정말, 형 좋아해요.
하지만 지금 와서 이런 고백이 다 무슨 소용일까. 이제는 서로 남남이 되어야 하는 사인데. 지금 와서 이런 말을 하면 어쩌자는 건지. 이렇게 가슴을 뒤흔들어 놓으면 어떡해야 하는 건지.
재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아서 얼른 등을 돌렸다.
“제발 가세요. 나는 이제 형에게 아무런 느낌이 없어요. 형의 그 유치한 감정놀이에 응하고 싶지도 않고요.”
가슴 속에서 얼음폭포가 쏟아지는 것만 같았다. 가슴이 시려서 죽을 것만 같다.
그때 민재가 재은을 다시 돌려세우더니 그대로 입을 맞춰왔다. 민재의 약간 메마른 입술이 재은의 부드러운 입술을 무람없이 뒤덮더니 민재의 혀가 그대로 재은의 입속으로 침입해왔다. 두 팔로는 재은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꽉 끌어안은 채.
민재의 까슬한 수염 자국에 얼굴이 쓸렸다. 박하 향이 감도는 민재의 숨이 그대로 재은의 입속으로 넘어왔다. 젖달라고 보채는 아이처럼 민재의 혀가 재은의 입술을 거세게 빨아들였다. 민재의 타액이 재은의 목구멍으로 꿀꺽꿀꺽 넘어왔다. 민재의 애 닳은 입맞춤에 재은의 마음이 속절없이 녹아내렸다.
재은의 입술에 한참 동안 제 입술을 비벼대던 민재가 입을 떼고 재은의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재은아, 사는 게 참 쉽지 않지만, 우리 같이 힘내자. 그리고 보란 듯이 이겨내자.”
민재가 두 팔로 재은을 꼭 껴안았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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