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중설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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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화 시련 (3)
온 동네를 이 잡듯이 샅샅이 뒤진 지 한 시간여 만에 경찬은 아파트 단지 반대쪽 언덕배기 길 위에 있는 편의점 앞에서 지은을 발견했다.
지은이는 몇 시간을 그렇게 있었던 것인지 플라스틱 의자에 앉은 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찌그러진 콜라 캔만 바라보고 있었다.
한밤중에 온 동네를 쏘다닌 경찬이 이마의 땀을 닦으며 재은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은이 찾았다. 여기 ** 아파트 후문 쪽 언덕 위에 있는 ***편의점 앞이야.”
잠시 후 재은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뺨에는 눈물 자국이 말라붙어 있었다.
“지은아, 지은아!”
재은이 지은이 앞에서 쓰러지듯 쪼그리고 앉으며 지은의 손을 꼭 잡았다.
“내가 잘못했어. 오빠가 잘못했으니 그만 집으로 돌아가자. 내가 모든 걸 다 정리할게. 앞으로는 두 번 다시 그 사람 보지 않을게. 지은아….”
그럴 수 있을까. 내가 민재 형을 다시는 안 보고 살 수 있을까. 지금도 이렇게 보고 싶은데.
재은의 눈가에 물기가 어렸다. 하지만 지금은 결단을 내려야 할 때이다.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재은이 눈물을 참으려고 심호흡을 했다. 편의점 옆 골목길 입구에 서 있는 가로등이 초라한 재은의 어깨 위로 노란 불빛을 비추었다.
****
상무 이사 하민재.
플라스틱 명패 뒤에 앉은 민재는 벌써 한 시간째 휴대폰 문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럴 리 없다. 재은이 나한테 이럴 리가 없다.
하지만 휴대폰에 찍힌 문자는 그런 민재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아무리 봐도 믿을 수 없는 내용을 다시 보여주었다.
- 형, 우리는 암만해도 여기까지인가 봅니다. 전화랑 SNS 모두 차단할 테니 이제 전화나 문자 하지 마세요. 집이나 직장으로는 더더욱 찾아오지 마시고요. 미안해요.
밑도 끝도 없는 이별 통보였다. 처음에는 신종 사기 수법인 줄 알았다. 재은이 이런 장난을 치는 애가 아니니 전화번호가 유출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게 아니라면 재은이 자신에게 이런 문자를 보낼 리 없다.
아무리 봐도 믿을 수 없는 문자를 바라보던 민재가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마른세수를 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엊그제 밤 경찬과 같이 있던 재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민재는 너무 화가 나서 재은을 코앞에 두고 그냥 돌아와 버리고 말았다.
전화를 몇 번이나 걸었었는데…. 문자를 몇 번이나 보냈었는데….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던 녀석이 문자도 되지 않고 전화도 되지 않자 밤 12시에 강남 끝에서 강북 끝까지 미친 듯이 액셀을 밟으며 달려갔다. 혹시라도 재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까 봐.
하지만 그 시각에 경찬과 함께 있는 재은의 모습을 보는 순간, 지독한 배신감이 들었다. 게다가 재은은 손에 버젓이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너무 화가 났었기에 그다음 날 민재는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속으로는 재은이 먼저 연락해주기를 은근히 바랐다. 그리고 자신이 묻기 전에 자초지종을 다 설명해 주기를 원했다. 재은이 정말 자신을 사랑한다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다음 날 재은에게서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한 번 꼬인 실타래는 갈수록 더 꼬이는 법인지, 민재는 재은이 먼저 연락하기 전까지는 연락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재은 때문에 자신이 상처받았다는 사실을 재은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기다렸던 것인데….
그리고 이틀 뒤 재은에게서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이별 통보를 받았다.
“후-.”
또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 녀석이 왜 이런 문자를 보낸 걸까. 머릿속으로 그날 밤에 봤던 재은의 모습을 떠올렸다.
재은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제 와 생각하니 당시 그 녀석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 그날 낮에만 하더라도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같이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그리고 처음으로 모텔이라는 곳에서 사랑을 속삭였다.
교통사고로 입원하고 퇴원한 후 일에 치여서 얼굴만 겨우 보다가 둘 다 큰마음 먹고 내린 결정이었다. 서로 애타게 그리워하면서도 손 한번 제대로 잡을 수 없어 생각다 못해 낸 궁여지책이었다.
그런 곳은 처음이라 좀 민망하긴 했지만 역시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서로의 알몸을 껴안을 수 있어서 좋았다. 그때만 하더라도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마냥 행복해했다.
그런데 재은이 집으로 돌아간 다음, 불과 몇 시간 만에 이 사달이 난 것이다. 엊그제 재은의 집 앞까지 찾아갔을 때, 좀 더 차분하게 알아봤어야 했다. 왜 경찬과 둘이 그러고 있는지 가서 물어봤어야 했다. 이유도 모르면서 화만 내며 그렇게 무작정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다. 재은을 믿었어야 했다. 경찬이 재은을 좋아하는 것은 알지만, 재은은 자신을 사랑한다고 했었다. 그런 재은의 말을 믿었어야 했다.
그런데 바보같이 눈앞의 광경에 질투가 나서 그만 등을 돌리고 말았다. 그 순간 재은이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지는 알려고도 하지 않은 채.
계속 문자를 노려보던 민재가 재킷을 챙기며 일어섰다. 역시 이런 건 얼굴 보며 얘기를 들어봐야겠다. 헤어지겠다는 것은 재은의 생각이고 자신은 그럴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알려야겠다.
****
재은은 오늘 아침,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지은의 아침밥을 차려 주었다. 엊그제 이후 지은은 자신의 눈도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지만 재은은 일부러 더 쾌활한 목소리로 지은이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 엄마 기일인 거 알고 있지? 학교에 얘기하고 오늘만 좀 일찍 와. 아버지 오시면 바로 납골당으로 가게.”
지은은 재은이 차려 주는 밥상은 쳐다보지도 않고 가방을 둘러맸다.
“지은아, 아침밥 안 먹으면 하루종일 기운 빠져서 안 돼. 조금이라도 먹고 가.”
하지만 지은은 벌써 신발을 신고 있었다. 재은의 말이 전혀 들리지 않는 듯이.
재은이 얼른 지갑에서 만 원짜리를 몇 장 꺼냈다.
“그럼 학교 가서 뭐라도 좀 사 먹어. 이거 가져가.”
재은이 돈을 주려고 손을 내밀었지만 지은은 여전히 재은을 투명인간 취급하며 벌써 현관을 나서고 있었다.
“지은아, 이거 가져가라니까?”
재은이 신발을 신고 지은을 따라나섰다. 대문 밖까지 따라 나와서 용돈을 쥐여주려고 했지만 지은은 재은의 손을 탁 하고 쳐 냈다. 그리고는 아무 소리도 못 들었다는 듯이 귀에 이어폰을 꽂더니 그대로 곧장 골목길을 걸어 내려갔다.
재은은 망연자실하여 지은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애교 많고 장난기 많던 동생의 모습이 너무 그리웠다.
****
재은은 아침에 봤던 지은의 모습이 눈에 밟혀 하루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이 녀석, 어제저녁부터 굶어서 배고플 텐데….
자신을 외면하던 싸늘한 지은의 눈빛이 떠오르자 또 가슴이 저려왔다.
지은에게 점심이라도 꼭 챙겨 먹으라는 문자를 하려고 휴대폰을 꺼내던 재은이 순간 움찔했다. 여전히 확인하지 않은 부재중 전화와 문자 표시가 아직도 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두 민재에게서 온 것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의 이별 선언에 민재 형은 가타부타 아무런 대답도 없다.
괜찮을까? 자신의 뜬금없는 이별 선언에 얼마나 놀랐을까.
입장을 바꿔 형이 자신에게 그런 식으로 이별 통보를 한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아마 죽고 싶을 것이다.
미안해 형. 하지만 지은이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어. 제발 이해해 줘.
재은이 마음속으로 민재에게 가만히 속삭였다.
“후-.”
한숨이 절로 입에서 새어 나왔다. 부모님으로부터 결혼 압박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거부하던 형의 단호한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래. 어쩌면 차라리 잘 된 것인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가.
민재 형은 자신에게 너무 과분한 사람이라고.
형은 자신 같은 공업소 기름쟁이가 아니라 더 나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신은 형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어쩌면 고은정과 결혼하는 것이 서로에게 좋을지도 모른다. 세나 그룹 회장의 사위는 사랑이라는 일시적인 감정으로 포기하기에는 얼마나 아까운 자리인가.
형 아버지의 말마따나 고은정과 결혼하면 형 앞에는 탄탄대로가 펼쳐질 것이다. 자신은 형에게 그런 기회를 만들어 줄 수 없다. 아마 자신은 형의 앞길을 열어주기는커녕 가로막기만 할 것이다.
우울한 상념에 빠져 기계적으로 손을 움직이던 재은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설재은!”
민재 형의 목소리였다. 어제 하루 듣지 못했을 뿐인데 벌써 일 년은 지난 듯 사무치게 그리운 목소리였다.
형 생각에 내가 미쳐 가는구나.
처음에는 상념이 만들어낸 환청인 줄 알았다. 하지만 화가 난 듯한 민재의 목소리가 또다시 재은의 귀를 파고들었다. 아까보다 좀 더 분명한 목소리였다.
“설재은! 어디 있냐고!”
민재가 온 것이다. 재은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가슴이 파르르 떨렸다.
“이 자식,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와?”
민재를 본 경찬이 사무실에서 득달같이 달려 나와 민재의 멱살을 잡았다.
“놔! 난 너랑 할 말 없어.”
자신의 멱살을 잡은 경찬을 노려보던 민재가 다시 재은을 찾았다.
“재은아. 설재은. 어디 있어? 재은아!”
상처 입은 짐승 같은 애처로운 민재의 소리가 재은의 가슴을 할퀴어 생채기를 냈다. 재은은 꼼짝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민재의 얼굴이 보고 싶었지만 또 동시에 민재가 제발 이대로 그냥 가버렸으면 싶기도 했다.
“너 이 자식. 따라와.”
경찬이 민재를 잡아끌었다.
“놔! 놔란 말이야.”
민재가 발버둥을 쳤다.
자신의 턱밑에도 닿지 않는 경찬이었지만, 손아귀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경찬은 이전에도 민재와 다투었던 공업소 옆 골목길로 민재를 질질 끌고 가더니 길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내가 분명히 경고했지? 한 번만 더 내 눈에 띄면 죽여버리겠다고 말이야.”
시멘트 바닥에 쓸렸는지 민재의 이마에 생채기가 생겼다.
민재가 경찬을 노려보았다.
“너랑은 할 얘기가 없다니까!”
“이 새끼가 뜨거운 맛을 봐야 정신 차리지.”
전직 격투기 선수의 주먹이 민재의 턱 중앙을 가격했다. 주먹을 정통으로 맞은 민재가 휘청거리며 쓰러졌다.
“이 새끼야. 네 녀석 때문에 재은이가 지금 얼마나 힘든 줄 알아?”
경찬의 돌주먹이 이번에는 민재의 명치를 파고들었다.
“헉!”
그 순간 숨이 턱 막힌 민재의 얼굴이 노래졌다. 하지만 경찬은 주먹질을 그치지 않았다.
“어디서 엄살이야. 일어나, 새끼야. 오늘 확실히 조져주마. 두 번 다시 재은이 옆에 얼씬할 생각도 못 하게 말이야.”
한 번. 두 번. 세 번. 경찬의 주먹이 계속해서 민재에게 내리꽂혔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던 민재의 입에서 기어이 피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경찬은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그동안 민재 때문에 받았던 분노가 경찬의 주먹에 실려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민재가 피를 쏟으며 길바닥에 쓰러졌다.
****
경찬이 민재를 끌고 가기 무섭게 재은은 공업소를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어느새 자신이 사는 동네에 도달했건만 귓가에는 여전히 자신을 부르던 민재의 애절한 목소리가 맴돌았다.
잊어야 한다. 잊기로 한 사람이다.
재은이 이를 악물었지만 누군가 발목을 붙잡고 있는 듯 도무지 집으로 발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민재 형은 괜찮을까? 경찬이 형이 너무 심하게 대하진 않았을까?
불안해진 재은이 결국 호식에게 전화를 걸었다. 민재 소식이 궁금해서.
“야, 너 그 새끼한테 돈 떼였냐? 경찬이 얼마나 화가 났던지 그 새끼를 아주 패대기쳐놨어. 경찬이 화난 모습 여러 번 봤지만 오늘처럼 화난 것은 처음 봤다. 한참을 안 오기에 가 봤더니 외제차 새끼가 의식을 잃었는데도 경찬이 계속 때리고 있는 거야. 살인이라도 하는 줄 알았어.”
호식의 말에 재은은 놀라서 숨을 들이켰다.
“모르긴 몰라도 늑골 몇 대는 부러졌을 거다. 외제차 새끼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서 구급차에 실려 갔으니까.”
“네? 구급차요?”
재은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피를 토하는 민재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머릿속이 아뜩해졌다.
“어, 어디로 실려 갔는데요?”
“글쎄? 근처에 있는 병원 응급실로 갔으니 화산병원으로 갔을라나?”
전화를 끊은 재은이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화산병원으로 가는 택시를 타고 있었다.
별일 없어야 하는데…. 아무 일도 없겠지? 민재 형, 제발….
문득 오늘이 어머니 기일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아침에 지은이에게 제 입으로 어머니 기일이니까 빨리 오라고 얘기했었다. 하지만 지금 재은은 도저히 민재를 내버려 두고 갈 수가 없었다.
엄마, 미안해. 나는 역시 불효자인가 봐. 엄마보다 형이 더 걱정되는 걸 보니.
재은의 눈에서 눈물이 글썽였다.
엄마. 제발 형을 지켜줘. 나는 이제 민재 형 없으면… 못 살 것 같아.
엄마가 없어도 이렇게 잘 버텨온 엄마 아들이, 형이 없으면 죽을 것만 같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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