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중설 26

작성자 정보

  •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본문

제26화 겉만 보고 판단하지 말기 (1)



“어떻게 된 거야?”


이제 막 정신이 들기 시작한 민재에게 누군가 다짜고짜 물었다. 눈을 몇 번 깜박이자 사물이 또렷이 보이기 시작했다. 언제 귀국했는지 고은정이 자신의 앞에 다리를 꼬고 앉아있었다. 


“언제 들어왔냐?”


민재가 담담히 물었다. 말을 할 때마다 가슴이 욱신거렸다.


“어제 새벽에 들어왔어. 아직 시차 적응도 안 돼서 피곤해 죽겠는데 아빠가 민재 씨 다쳤다고 빨리 가보라고 해서 왔어.”


“그랬어?”


“애도 아니고 요즈음 싸움질하고 다녀?”


“무슨 소리야?”


“의사 말로는 갈빗대가 두 대나 금이 갔대.”


“그래? 그래서 숨 쉴 때마다 가슴이 욱신거리는구나. 싸운 것 아니야. 계단에서 굴렀어.”


“뭐? 말도 안 돼. 그걸 누가 믿어?”


“믿기 싫으면 믿지 마. 그것 말고, 혹시 그 새 누가 왔다 가지 않았어?”


“누구? 오빠네 부모님은 이미 왔다 갔어.”


“그래….”


민재의 목소리에 쓸쓸한 기색이 감돌았다. 민재를 가만히 살피던 은정이 비웃듯 물었다.


“설마 그 공업소 녀석, 아직도 민재 씨 주위에서 얼쩡거리는 거 아니지?”


공업소 녀석. 자신을 보면 언제나 부끄러워하던 녀석. 그러면서도 환한 미소로 저를 설레게 하던 녀석…. 그리고 그 녀석이 보낸 무심한 이별 통보가 떠올랐다. 


“아닌 것 같다.”


민재가 재은의 얼굴을 떠올리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


허겁지겁 화산병원 응급실로 달려왔던 재은은 민재가 일반 병실로 옮겼다는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병원까지 얼마나 주먹을 꼭 쥐고 있었는지 손이 잘 펴지지 않았다.


경찬의 주먹이 얼마나 무서운지는 재은도 잘 알았다. 2년 전, 술집에서 건장한 덩치의 남자 두 명과 시비가 붙어 싸운 적이 있었다. 그때, 1 대 2의 싸움이었지만 덩치들은 경찬 형에게 맞아 갈빗대가 부러지고 앞니가 나갔다. 신고받고 출동한 경찰이 오지 않았다면 그 사람들은 정말 그날로 세상 하직할 뻔했다. 그런 경찬 형의 돌주먹이 민재 형에게 꽂혔다고 생각하자 아찔했다. 


병원으로 가는 내내 마음이 급했다. 민재 형이 왔을 때 그렇게 모르는 척하는 게 아니었다. 일방적인 이별 통보를 받고 얼마나 괴로웠으면 공업소에 오자마자 그렇게 큰소리로 자신을 찾았을까. 자신을 애타게 찾던 형을 떠올리자 가슴이 또 울컥했다.


자신은 왜 이럴까. 왜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걸까. 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아프게 하는 걸까. 죄 많은 건 결국 나 자신이다.


빨개진 눈시울을 누가 볼까 봐 재은이 얼른 손가락으로 눈꼬리를 지그시 누르며 눈을 가렸다. 


병원에 도착해서 원무과에 민재의 병실을 물어본 다음, 떨리는 마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뻔뻔스럽게 제 입으로 이별 선언을 한 주제에 형 앞에 다시 나타날 염치는 없었지만, 멀리서나마 형이 괜찮은지 볼 수만 있다면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민재의 병실 앞에 다다랐을 때, 문틈으로 가슴에 붕대를 감은 민재가 고은정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말았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재은의 눈에 두 사람은 정말 잘 어울렸다. 선남선녀란 저 두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닐까.


여기 오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민재의 안부만 확인할 수 있다면 다른 것은 바랄 게 없다고 생각했다. 형이 괜찮은 모습만 확인하면 자신은 얼마든지 기쁜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형과 고은정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따끔거렸다. 수십, 수백 개의 바늘 끝이 심장을 콕콕 찌르는 느낌이 들었다. 온몸의 피가 쭉 빠져나간 듯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제 입으로 형에게 이별 통보를 했으면서 정작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역설적이게도 바로 저 자신이었다. 자꾸만 따끔거리는 가슴을 한 손으로 누르며 재은이 조용히 병실에서 멀어졌다. 


형을 위해서라도 이제는 제 결심을 반드시 지켜야 했다. 발소리를 죽이고 걷는 재은의 두 뺨 위로 눈물 한줄기가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


민재는 꼬박 2주를 입원해 있었다. 그리고 매일 같이 기다렸다. 재은이 오기를. 

하지만 그 지독한 녀석은 결국 한 번을 찾아오지 않았다. 


정말 이렇게 나를 잊으려고 하는 거니? 민재가 속으로 재은에게 질문을 던졌다. 


왜 헤어지려고 하는지 이유도 말해주지 않을 셈이야? 정말 나를 잊을 수 있어? 

너는 그게 가능해? 재은아, 대답 좀 해줘.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물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민재 머릿속에 떠오른 재은은 활짝 웃기만 할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입원해 있는 동안 민재도 더 이상 재은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연락을 해봤자 아무런 답도 받지 못할 것이기에. 


퇴원 전날 민재는 어떻게 해야 할지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공업소로 또 찾아가는 것은 너무 어리석은 짓이다. 그런다고 해도 경찬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한 재은을 만날 수는 없을 것이다. 용케 경찬을 피한다고 해도 재은이 자신을 만나 줄 것 같지도 않고.


그러다가 문득 재은의 친구 민아가 생각났다. 예전에 교통사고로 둘이 같이 입원해 있을 때 재은의 친구 민아가 병문안 온 적이 있었다. 그때 둘이 무척 친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재은이 고등학교 동창이라고 했던가? 다소 수다스럽기는 해도 나쁜 이미지는 아니었다. 민재에게도 꽤나 호감이 있는 듯한 눈치였고. 

그러고 보니 그 이전에도 민아를 본 적이 있었다. 바로 은수와 함께 갔었던 **동 게이바에서. 그 바를 찾아가면 어쩌면 민아라는 그 친구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민재의 예감은 적중했다. 퇴원하고 난 다음 민재는 예전의 기억을 되살려 그때 갔었던 바를 다시 찾아갔다. 혹시나 해서 바텐더에게 물어봤더니 뜻밖에 바텐더가 민아를 알고 있었다. 그 바텐더의 도움으로 큰 어려움 없이 민재는 민아를 만날 수 있었다. 


민아는 민재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지은의 남자친구가 두 사람의 사진을 찍어 지은에게 보낸 일, 충격을 받은 지은이 가출하려고 했었던 일, 그리고 그때 이후로 지은이 재은을 피한다는 사실도.


“조심 좀 하지 그러셨어요? 그렇게 사람 많은 시내에서 애정행각을 하다 보면 누군가 볼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으셨어요? 그리고 아무리 몸이 달아도 그렇지 대낮에 모텔을 걸어서 들어가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차가 없는 것도 아니고.”


민아의 지적에 민재는 무안해서 얼굴이 벌게졌다.


“그, 그러게요. 그때는 그저 같이 있고 싶은 마음에 다른 생각을 못 했네요.”


“아무튼 재은이는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이 동생이에요. 그 녀석이 제 동생을 얼마나 아끼는지는 동생한테 하는 거 보셨으면 잘 아실 거예요. 제가 재은이 안 지가 10년이 다 되어 가는데 이날 이때껏 그 녀석이 제 옷 사는데 돈 쓰는 걸 본 적이 없어요. 그렇게 지독하게 모아서 어디에 쓰려고 하는 거니 하고 물었더니 제 동생 대학등록금을 미리 준비해두고 싶대요. 동생이 대학 가서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제가 하고 싶은 것은 뒷전으로 미뤄놓고 말이죠.”


“재은이가 하고 싶은 거라니요?”


“재은이 그림 그리는 거 엄청 좋아해요. 원래는 군대 제대하고 미술학원에 다니면서 그림 공부하려고 했었죠. 늦게라도 미대에 들어가려고. 뭐, 걔네 엄마가 돌아가시면서 그 꿈은 아예 접었지만.”


“미대요?”


“네. 미술학원 다니려고 군대 있을 때 얼마 안 되는 사병 월급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은 악바리가 그 애예요. 그 자식 얼굴 보면 마냥 순한 것 같지만 정말 독한 애라니까요.”


그러고 보니 민재도 재은이 뭘 좋아하는지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착실히 일하는 게 대견하다고만 생각했을 뿐, 재은의 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한 번도 물어보지 못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재은에게 늘 이루지 못한 자신의 꿈에 대해서만 얘기했었다. 영화공부를 하고 싶었노라고. 그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팠다.

 

그러고 보니 재은과 자신은 닮았다.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따로 있었지만 현실적인 상황 때문에 포기해야 했었다는 점에서 상당히 비슷하다. 하지만 자신보다 재은이 겪은 상황이 훨씬 더 힘들었을 것이다.


자신은 미국에서 유학할 때 부모님이 보내주시는 돈으로 여유 있게 생활하며 실제로 영화공부를 하기도 했었다. 비슷한 꿈을 꾸는 사람들과 밤새도록 어울리며 영화에 대한 부푼 열정을 아낌없이 토해내기도 했었다.


하지만 재은은 그런 호사를 누리지 못했다. 그림을 그리려는 꿈만 꾸었을 뿐 미술학원은 결국 다니지도 못했다. 사병 월급을 모아 학원비를 대려고 했다니 녀석의 열의에 비하면 자신의 열정은 반딧불처럼 사소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마저 건강이 나빠지면서 재은은 덜컥 한 집안의 가장이 되어야 했다. 동생에 대한 지독한 책임감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었다.

그런 동생이 상처를 받았으니, 재은으로서는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재은의 동네로 찾아갔던 그 날, 동네 버스 정류소 벤치에 힘없이 앉아있던 재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서였구나.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었던 이유가. 

경찬이 재은의 등을 어루만지던 이유가. 

그런데 자신은 그것도 모르고 질투심에 눈이 멀었으니….


동생 때문에 헤어질 생각을 하며 혼자서 얼마나 힘들어했을까. 

그 생각을 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당장 달려가서 재은을 꼭 안아주고 싶었다. 

민재는 민아에게 고맙다고 인사하며 서둘러 일어섰다. 이제 뭘 해야 할지 떠올라서였다.


“민아 씨 오늘 너무 고마웠어요. 재은이랑 문제가 잘 해결되면 민아 씨에게 꼭 제가 밥 한번 살게요.”


“밥 안 사도 돼요. 우리 재은이만 잘 붙잡아주세요. 형이랑 만나면서 세상 다 가진 것처럼 좋아했었어요. 그 녀석도 행복해질 권리가 있잖아요. 고생도 할 만큼 했고요. 동생 위하는 것도 좋지만 저는 재은이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그럼 더 바랄 게 없어요.”


민아의 마음이 너무 고마웠다.


“꼭 그렇게 될 겁니다. 제가 꼭 그렇게 만들겠습니다.”


민재가 다짐하듯 힘주어 말했다.



바의 구석진 자리에 누군가 아까부터 민재와 민아를 쳐다보고 있었다.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볼까 봐 두렵기라도 한 듯 어두운 실내에서도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민재가 바를 빠져나가자 그 사람이 민아에게 접근하며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 사람의 얼굴을 본 민아가 두 눈이 휘둥그레지자 그 사람이 씩 웃었다.


“방금 그 사람과 무슨 이야기를 하셨죠?”


“제 친구 얘기를 좀 했어요.”


“아, 그 설재은인가 하는 친구?”


고은수의 입에서 재은의 이름이 나오자 민아의 눈이 다시 커졌다. 

고은수가 재은이를 어떻게 알지? 재은이가 이렇게 유명인사였던가?


“참, 우리 어디선가 본 적이 있지 않나요? 묘하게 낯이 익네요?”


“아, 아마 *** 방송사 스튜디오에서 봤을 거예요. 제가 가끔 거기 단역 출연을 하거든요.”


“그래요? 이야, 이거 인연이네요. 우리 앞으로 친하게 지내요.”


인기스타 고은수의 입에서 먼저 ‘친하게 지내자’는 소리가 나오자 신민아는 이게 꿈인지 생신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 그래 주시면 제가 감사하죠.”


“에이, 나이도 비슷한 것 같은데 무슨 존댓말이에요. 우리 그냥 말 편하게 해요. 어때?”


고은수의 파격적인 제안에 민아는 그만 딸꾹질을 하고 말았다. 


“좋, 좋아…. 딸꾹.”


놀라서 딸꾹질을 하는 민아를 바라보면 고은수가 씩 웃었다. 모자챙에 가린 은수의 눈빛이 잘 보이지 않았다.


*****






관련자료

댓글 1

<span class="sv_wrap"> <a href="https://ivancity.com/bbs/profile.php?mb_id=konan66" data-toggle="dropdown" title="GTman 자기소개" target="_blank" rel="nofollow" onclick="return false;"> GTman</a> <ul class="sv dropdown-menu" role="menu"> <li><a hre님의 댓글

  • <spa…
  • 작성일
ㅜㅜ 이번엔 또 고은수의 차례인가?
우리 민재와 재은이가 사랑할 시간이 없네 ㅋㅋ
알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