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중설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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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화 겉만 보고 판단하지 말기 (2)
학교 수업을 마친 지은이 터벅터벅 교문 쪽으로 걸었다. 친구 몇 명이 함께 걸었지만 지은은 딴생각에 빠져 친구들이 하는 대화에는 전혀 참여하지 않았다.
“우와, 저 사람 누구야? 연예인 같아.”
같이 걷던 애들 중 하나가 교문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디 어디? 정말이네? 키도 크고 완전 존잘.”
“누굴까? 저런 사람이랑 사귀면 좋겠다. 어떤 애 오빠지?”
교문에 서 있는 남자 때문에 학교를 나서던 여학생들이 난리 났다. 키득키득 웃으며 훔쳐보는 애들도 있었고, 아예 대놓고 노골적으로 바라보는 애들도 있었다.
학생들뿐만 아니라 퇴근하던 선생님들도 그 남자를 힐끗거렸다. 여자 선생님들은 얼굴이 상기되어서. 남자 선생님들은 은근한 시기와 질투의 시선으로.
“어머, 저 사람이 뭘 물어보나 보다. 눈치를 보아하니 사람을 찾는 것 같은데?”
“우리도 가보자. 우리가 아는 사람을 찾을 수도 있잖아.”
여학생 세 명이 요즘 유난히 멍한 표정의 지은을 내버려 두고 우르르 교문 앞으로 달려갔다.
“누구 찾으세요?”
오지랖이 넓고 낯을 잘 안 가리는 정경아가 남자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아, 안녕?”
남자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 살인 미소에 정경아는 금세 귀밑까지 빨개졌다.
“너희들 혹시 설지은이라고 아니? 고3이라고 하던데.”
설지은이라는 이름에 여학생 세 명이 모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완전 대박. 설지은요?”
“지은이랑 아는 사이세요?”
“응. 한번 본 적 있지. 사실 알기는 지은이 오빠랑 아는 사이지만.”
“설지은 걔는 대체 무슨 복이야. 걔네 오빠도 아이돌급인데 오빠랑 아는 사람도 완전 연예인급이야.”
소녀들이 쫑알거리는 소리에 남자가 재밌다는 표정을 지었다.
“쟤가 설지은이에요. 지은아, 누가 너 찾아왔어.”
그중 한 명이 뒤에서 터벅터벅 걸어오던 지은에게 소리쳤다. 지은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다가 민재를 발견하고 인상을 찌푸리며 걸음을 멈추었다.
“지은아, 아저씨야.”
민재가 지은에게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지은은 못 볼 사람을 본 것처럼 민재 앞을 그냥 지나쳐 가려 했다.
“지은아, 아저씨랑 얘기 좀 할까?”
“아저씨랑 할 얘기 없는데요.”
“오빠 얘기야. 무작정 화만 내지 말고 한 번만 들어줘.”
“우리 오빠 얘기를 왜 아저씨에게 들어요?”
민재를 노려보는 지은의 말에 날이 서 있었다.
“그건 지은이가 오빠에게 직접 들으려고 하지 않으니까 그렇지. 세상일이란 게 겉만 보고 판단할 수는 없잖아? 아저씨도 그 사실을 최근에야 뼈저리게 깨달았어. 모든 걸 솔직히 얘기할 테니 잠깐만 시간 좀 내줄래? 아직 저녁 전이지? 어디 햄버거집이라도 갈까?”
지은의 친구들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지은아, 그러지 말고 한번 들어드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할 수만 있다면 내가 들어드리고 싶네. 크크크.”
이대로 있다간 친구들 입방아에 오를 것 같다. 게다가 성한이 녀석이 어디에서 튀어나올지도 모르고. 망할 자식.
“좋아요. 대신 7시까진 학원 가야 해요.”
“그래. 내가 학원 앞까지 바래다줄게.”
민재가 차 문을 열어주었다. 그 모습을 본 친구들이 남의 속도 모르고 환호성을 질러댔다.
두 사람은 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햄버거집으로 갔다. 학교와 너무 가까우면 혹시라도 아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으니까.
주문을 하고 자리에 앉은 뒤 민재가 지은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병원에서는 쫑알거리며 곧잘 얘기도 하고 웃기도 하던 녀석이 지금은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다. 제 오빠한테도 이럴 것으로 생각하니 재은이가 얼마나 속상해했을지 눈에 훤했다.
“아직도 화 많이 났어?”
지은은 아무 말 없이 테이블 위만 바라보았다.
“그래, 그럴 만도 하지. 참, 이 이야기하기 전에 자백부터 먼저 해야겠다. 아저씨가 너에게 거짓말 한 게 있어. 아저씨는 사실 너네 오빠 고등학교 친구가 아니야.”
“알아요.”
지은이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
“알고 있었어? 이런,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아저씨랑 오빠,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부터요. 오빠 친구들 내가 대부분 다 알거든요.”
“그랬구나. 하하하, 내가 괜히 바보짓을 했었구나.”
민재의 멋쩍은 웃음에도 지은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지은아, 이왕 이렇게 된 거 너에게 솔직히 말할 게.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나는 사실 네 오빠를 좋아해.”
모르던 사실은 아니었지만 그걸 직접 들을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았기에 지은이 어깨를 움찔했다.
“그냥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사랑해. 아주 많이. 그건 네 오빠도 마찬가지이고. 좋아하는 연인끼리는 안아도 보고 싶고, 키스나 스킨십도 하고 싶고 그렇잖아. 그런 건 지은이 너도 어린애가 아니니 잘 알 거라고 생각해.”
아직 지은의 표정 변화는 없었다. 하지만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있는 것을 보니 자신의 말을 허투루 듣는 것 같지는 않았다.
“네 오빠에게 먼저 접근한 건 나야. 이거, 네 오빠도 아직 모르는 사실인데, 하하, 사실 내가 첫눈에 반했었거든. 네 오빠한테.”
웃음소리에 지은이 고개를 들고 민재를 바라보았다.
민재는 수줍게 웃고 있었다. 얼굴은 발그레 상기된 채. 재은을 좋아한다는 민재의 진심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웃음이었다. 삼십 대 아저씨가 저렇게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을 수 있다니. 오빠가 민재를 왜 좋아하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내가 사실 작전을 좀 썼어. 비싼 외제차를 수리해달라고 떼를 쓴 다음, 수리가 잘못되었다면서 거액의 변상비를 청구했거든. 1,678만원.”
“네엣?”
그 대목에서 지은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소리를 질렀다.
세상에. 1,678만 원이라니.
오빠가 무슨 수로 그 돈을 갚는단 말이야? 고기 한번 사 먹자고 해도 벌벌 떠는데.
“말도 안 되지. 나도 알아. 그래서 그런 금액을 요구했던 거야. 네 오빠가 변상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고 말이야. 대신 좀 유치하긴 하지만 만나달라고 떼를 썼지. 그게 원래 목적이었으니까.”
“이번 일이 있기 전에도 우리가 헤어질 뻔한 적이 있었거든. 그때 재은이가 정말 나랑 끝낼 결심으로 그 돈을 마련해서 보냈더라고. 나중에야 알게 된 것이지만 재은이가 네 대학등록금을 악착같이 모으고 있었나 봐. 너 대학 가서도 고생 안 시키려고.”
지은이 앞에 놓인 콜라잔을 가만히 응시했다. 오빠 마음은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등록금을 위해 일부러 돈을 모으는지는 몰랐다.
그래서 오빠가 그동안 그토록 짠돌이 흉내를 낸 거구나. 나 때문에….
지은이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리고 이번 일이 벌어지고 나서 네 오빠가 아저씨에게 헤어지자고 일방적으로 통보를 했어. 나는 이유를 몰라 재은이 원망을 많이 했고….”
두 사람 모두 생각이 많은지 잠시 말이 없었다.
“지은이는 대학 들어가서 꼭 하고 싶은 것이 있어?”
“아직 없어요.”
“그렇구나. 하기야 그런 걸 금방 찾을 수는 없지. 그럼 오빠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은 뭔지 아니?”
지은이 두 눈을 껌벅였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말처럼.
“오빠가 하고 싶어 하는 것요?”
“그래. 네 오빠의 꿈 말이야.”
“몰라요.”
오빠도 꿈이 있다는 말이 지은이에게는 무척이나 낯설게 들렸다.
오빠는 제대한 후 늘 악착같이 일만 해왔던 것 같다. 그런 모습만 보다 보니 오빠에게도 꿈이 있으리라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
“네 오빠가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한대. 나도 이번에야 알았어. 그래서 원래 미대를 들어가고 싶어 했대.”
“아! 몰랐어요. 오빠에게도 그런 꿈이 있다는 사실을…. 맞아요. 어릴 때 오빠가 그림을 곧잘 그려주곤 했어요. 저도 오빠 그림을 무척 좋아했었는데 언젠가부터 그리지 않기에 이상하게 생각했었어요.”
“재은이는 제대할 당시 미대 입시를 보려고 미술학원에 등록하려고 했었대. 그런데 제대하고 나서 그 꿈을 접은 거야.”
“나 때문에…?”
지은이 충격받은 표정으로 민재를 바라보았다. 민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 대학 졸업할 때까지는 자신의 꿈은 포기하려고 했었던 거지.”
“왜, 왜요? 오빠도 오빠 인생이 있는데….”
“그래. 하지만 재은이는 자신의 행복보다는 지은의 너의 행복, 그리고 가족들의 행복이 항상 먼저였던 것 같아.”
머릿속에 항상 지치고 고독해 보이던 오빠의 모습이 떠올랐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늘 피로에 전 표정이었다.
그러던 오빠가 언젠가부터 표정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잘 웃고, 자신의 농담에도 잘 맞춰 주고, 하루종일 일을 하고 돌아와서도 힘든 줄 모르고.
아마 그때쯤 오빠가 민재 아저씨를 만났던 것 같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오빠에게 활기가 넘쳤던 이유가.
그리고 지난 한 달간 아침마다 일부러 쾌활한 목소리로 자신에게 말을 걸지만 거울에 비치는 오빠의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본인은 모르겠지만 오빠가 내뱉는 한숨 소리도 여러 번 들었다. 허공에 시선을 둔 채 멍하니 넋이 나간 모습도 몇 번이나 봤었다.
“지은이도 오빠가 행복해지길 원하지 않아?”
민재가 가만히 물었다. 어느새 지은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 있었다.
지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가 자신을 얼마나 챙기는지 지은도 잘 알았다.
친구들은 그런 오빠를 둔 자신을 부러워했고, 자신은 내심 의기양양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동안 오빠의 희생을 너무 당연하게 여기고 살았던 것만 같다.
갑자기 눈물이 툭 터졌다.
왜 그렇게 바보같이 살아, 오빠….
지은이 손등으로 눈물을 닦자 민재가 티슈를 건네주었다. 지은이 빨개진 두 눈을 티슈로 누르고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 후, 심호흡을 내쉬었다.
“저도 아저씨에게 물어볼 것 있어요.”
지은의 눈빛이 바뀌었다. 눈은 여전히 빨갰지만 눈빛만큼은 예전의 그 당찬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뭔데?”
“아저씨, 우리 오빠 평생 행복하게 해줄 자신 있어요?”
“으, 응?”
이번에는 민재가 당황했다. 지은이가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지는 몰랐다.
“그거야 당연하지.”
“우리 오빠 두고 절대로 다른 남자한테 눈길 돌리면 안 돼요.”
그제야 민재의 입가에 피식 미소가 올랐다.
이 녀석, 보기보다 훨씬 당찬걸? 완전 여장군감이네.
“그래. 내가 약속할게.”
“우리 오빠 보기보단 마음이 약한 편이에요. 우리 오빠 울리면 내가 가만히 안 있을 거예요. 저 진심이니까 지금 긴장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시누이가 원래 무서운 것 아시죠?”
이 꼬맹이가 뭐라는 거야. 민재는 그만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시누이라니. 그럼 내가 신부가 되는 건가? 재은이가 신랑이고? 뭔가 바뀐 것 같은데?”
그 말에 이번에는 지은이 얼굴이 빨개졌다.
“그런 얘기 자세하게 하려고 하지 말아요. 누가 신랑이고 신부인지 저는 관심 없어요. 저한테는 제일 중요한 사람은 우리 오빠니까요.”
“그래. 알겠다. 아저씨가 꼭 약속할게.”
민재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자 지은이 냉큼 제 손가락을 걸었다.
“약속하신 거예요. 이제부터 아저씨와 오빠 사이, 제가 응원할게요. 두 사람 모두 예쁜 사랑 하셔야 해요. 꼭이요.”
그제야 지은이 화사하게 웃었다. 눈가에 눈물이 마르지도 않은 채 웃는 지은의 모습이 딱 그 나이대의 소녀같이 귀여웠다.
남매라서 그런지 웃는 모습을 보니 재은의 모습이 얼핏 보이는 것도 같았다.
재은아, 나 해냈어. 이제 도망가지 마.
민재가 마음속으로 재은에게 가만히 말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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