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리 그늘에서 자라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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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생일로 한창 떠들썩했던 그날 나의 세상은 어둠으로 변했다.
너와 나,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이들은 모두 저마다의 세상을 가지고 있다.
어느 누군가의 세상은 널찍하고 웅장할테고 또 어떤이의 세상은 장밋빛으로 빛나면서 쵸콜릿의 향으로 가득 차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또 다른 어떤 사람은 겨우 차 한잔만의 크기의 인생에서 담즙의 쓴 맛만을 느끼면서 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의 세상은 밝고 희망으로 가득 차 있는 줄 알았다. 그래서 나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세상이 혹시라도 우연을 가장한 존재에 의해 한순간 종말을 맞이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인생을 살다보면 어느 어두운 골목에서 어떤 혐오스럽고 불쾌한 인간을 예상치 못하게 맞닥뜨릴 수 있다는 가능성은 항상 존재한다. 그리고 그가 품에 숨겨놓고 있는 아주 가느다란 바늘의 뾰족한 끝에 어쩌다가 스치기라도 한다면 우리 중의 누군가의 인생은 끔찍한 종말로 치닫게 된다.
나의 세상이 그랬다.
하지만 그렇게 어두움의 나락으로 떨어지기 전에도, 나의 세상도 사실 그리 큼지막하지는 않았다. 그저 손가락을 펴고 몇 뼘 잴 수 있는 그 정도의 범위였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안에 기쁨을 담았고 그래서 그것에 만족했고 충실했다. 하지만 나의 그 보잘 것 없이 작지만 화려했던 세상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책을 손에 쥐고 있었다.
나의 시선은 펼쳐진 책의 여백과 그 책과 맞닿은 창밖의 파란 하늘 어딘가에서 배회하고 있었다.
등 뒤에서 한참동안 덜그럭거리는 소리와 냉장고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 그리고 낮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다시 잠시후에 모든 소리가 멈췄다.
“저, 이제 가볼게요.”
녀석의 목소리에 몽롱함 속에서 정신이 돌아와 힘들게 몸을 일으켜 녀석을 돌아보았다.
“냉장고가 가득차서 큰 김치통 한 개는 못 넣었어요. 냉장고 안 좀 정리하고 넣어주세요.”
녀석이 슬며시 손을 들어 현관쪽에서는 보이지도 않는 주방을 향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녀석이 가리키는 쪽으로 무심코 한번 시선을 준 후에 다시 녀석을 돌아보았다.
중문을 열고 나가서 녀석이 운동화를 신었다. 그리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지도 않은 채 엉거주춤 고개를 숙여 대충 인사를 했다. 그리고 현관문을 열기 전, 항상 그랬듯이 녀석은 습관적으로 손을 어깨뒤로 올려서 후드 티의 모자를 잡아당겨 덥수룩해진 녀석의 곱슬머리를 덮어버렸다.
“덥지 않냐? 그렇게 모자를 쓰고 다니면... 아직 여름도 다 안지났는데....”
언젠가부터 그렇게 습관처럼 머리를 가려 버리는 것이 마음에 걸려서 계속 잠자코 있다가 오늘은 그냥 지나가는 말투로 녀석에게 말했다.
녀석이 고개를 반쯤 돌리더니 다시 고개를 꾸벅하고는 아무 대꾸 없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닫혀진 문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천천히 베란다로 발을 옮겼다.
맞은편의 아파트 사이로 파란 하늘이 보이고 그 아래로 아이들의 놀이터가 눈에 들어왔다. 미끄럼틀을 타는 쬐끄만 녀석들이 무엇이 그리 신나는지 기쁨의 소리를 질러대면서 뛰어다니고 있었다.
다시 그 앞쪽으로 아파트 지상 주차장의 한쪽에 세워놓은 차를 향해 걸어가는 녀석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쪽빛 후드 티를 입고 모자로 머리를 숨긴 채 두 손을 후드 티의 주머니에 넣고 구부정한 자세로 걷던 녀석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올랐다. 곧 자동차 꽁무니에 빨간 불이 들어오고 후진을 하는 것이 보였다.
“뭘 그렇게 넋놓고 보고 있어. 지한이가 냉장고에 김치통 넣어 놓으라고 했잖아.”
옆에 서 있던 아들 녀석의 마치 채근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녀석의 말을 무시하고 나는 지한이의 자동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렇게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 앞에서 마치 움직이는 물체는 모두 사라진 듯, 시야가 몽롱해 진뒤에서야 몸을 돌렸다.
주방으로 들어가 냉장고의 문을 열었다.
녀석이 정리를 한다고는 했지만 자신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들을 많이 발견했을 것이다. 묻지도 않고 녀석은 그것들을 냉장고의 한쪽에 밀어 쌓아놓았다. 내 자신도 내용물이 무엇인지 기억하지 못하는 용기들을 하나씩 집어들고 모두 밖으로 꺼내 놓았다. 그리고 물티슈로 대충 바닥을 문지른 다음 식탁위에 놓여있던 김치통을 들어서 그 자리에 옮겨놓았다.
“지한이가 요리는 잘해.” 등 뒤에서 아들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려서부터 혼자 살면서 요리집 주방에서 알바를 오래 했거든.... 또, 바리스타 자격증도 있고...”
“걔!” 녀석의 말에 내가 목소리를 높여서 입을 열었다.
“니가 예전에 사 준 옷만 사시사철 입고 있더라. 몇 년전에 네가 사 준 그 후드 티....”
“.......”
“벌써 옷 소매는 닳아서 실밥도 다 보이던데...”
온몸에 힘이 빠져 냉장고 문을 닫지도 않은 채로 나는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몇 년전에 아들놈인 승우와 같이 외출을 한 적이 있었다.
오랜만에 부자가 같이 외출해서 영화도 한 편 같이 보고 나서 저녁을 먹을 식당을 고르면서 길을 걷고 있을 때였다.
녀석이 느닷없이 대로 건너편에 있는 커다란 쇼핑몰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빠. 잠깐 옷 좀 보고 가자.”
쇼핑이라면 질색을 하는 나를 잘 알면서도 마침 파란 신호등이 켜진 횡단보도를 향해 녀석은 나의 팔을 잡고 마구 끌어당겼다.
건물의 이층에 있는 젊은 녀석들만이 자주 가는 전문 의류매장 한가운데에 녀석은 나를 덩그러니 세워놓았다. 그리고 점찍어 놓은 것이라도 있었던 듯 진열대의 한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아무 생각없이 무의식적으로 매장안을 한번 둘러보았다. 요새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밝은 색의 옷들이 나의 시야에 들어왔다.
“이거, 아빠에게 잘 어울리겠다.”
나의 뒤에서 나타난 녀석이 느닷없이 나에게 가당치도 않는 디자인의 후드 티를 나의 가슴위에 대 보였다.
쪽빛 바탕에 뜻을 알 수도 없는 영어 문구가 가슴 부분에 박혀 있었고 그 글 위에 가슴 한가운데에서 양쪽으로 큰 날개가 흰 깃털을 휘날리며 펼쳐져 있었다. 내 나이에는 터무니 없는 디자인의 후드 티였다.
그리고 후드 티라니? 이제 오십 중반에 접어드는 내 나이에는 터무니 없는 옷 같이 느껴졌다. 이런 디자인이 아니더라도 내 주변에 후드 티란 것을 입고 다니는 내 나이 또래의 사람이 있기는 했던가? 전혀 본 적이 없는 듯 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 하다매... 아빠가 그랬잖아?” 녀석이 나의 표정을 읽은 듯, 볼멘 표정으로 궁시렁 거렸다.
그렇게 한사코 마다하는 나를 잡고 녀석은 반강제로 그 옷을 기어이 입혀보고야 말았다.
거울속에 비친 나는 마치 고딩 아들의 옷을 빌려입은 늙은 아버지 같았다. 하지만 그런 나를 보는 아들 녀석은 얼굴 가득 환한 웃음을 지으면서 내가 입고 있는 그 후드 티의 이곳저곳을 훑어보았다.
다른 손님을 상대하던 젊은 여직원이 마침 나에게 다가와 그렇게 어정쩡하게 서 있는 나를 위 아래로 한번 훑어보았다.
“손님. 너무 잘 어울리세요.”
다소 오바스러운 표정과 손짓으로 그녀는 직업 멘트를 날렸다. 그리고 그 말에 덧붙일 말을 떠올리려고 노력하는 듯 했지만 이미 그녀의 얼굴 표정은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배신하고 있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억지로 쥐어짜내는 미소의 이면에 그녀의 고뇌가 느껴져서 그렇게 직업정신이 투철한 그녀를 보면서 정말 어느 정도 입을 만하면 그녀를 위해서 구매를 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는 동안 아들 녀석은 이해하지 못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엉거주춤 옷을 벗고 있는 나를 보면서 히죽거렸다.
나중에 알게되었다.
녀석이 나에게 입혔던 그 후드 티를 녀석의 애인 놈인 지한이가 입고 있다는 것을....
그렇게 나는 아들의 애인이 입을 옷을 먼저 대신 입어 봐야 하는 같은 사이즈의 마네킹과 같은 역할을 한 것이었다.
나중에 시간이 흘러 병원에 입원해 있던 아내에게 그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오늘처럼 파아란 하늘이 올려다 보이던 9월 초의 어느 날이었다.
침대에 누워 야위고 수척해져서 핏기가 가신 얼굴로도 아내는 그런 나의 말에 얼굴 한가득 웃음을 띄었다.
그 잔인하고 가차없는 암이라는 놈이 나와 아들 녀석의 곁에서 그녀를 빼앗아가기 두 달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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