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리 그늘에서 자라는....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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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의 3층에 위치한 킥복싱 체육관의 문을 열고 나와 계단을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사탕발림 말이겠지만 오늘따라 관장은 나에게 이제 실력이 수준급이라고 치켜세웠다. 마음이 급해져 있던 나는 그의 말을 그대로 믿지는 않았지만 자신감을 높이는데 도움은 되었다. 하지만 냉정함을 잃으면 안되는 일이었다. 단 한 순간 이성을 잃고 계획대로 따라가지 않으면 일이 어떻게 꼬일지 모른다. 인생이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렇게 꼬여 우리를 괴롭히는 것처럼 말이다.

 

1층 라운지에 도착했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

얼마전에 들렀던 이천에 있는 공인중개사 사무소중의 한 사람 이었다.

마땅한 매물을 찾았다고 했다. 내가 백프로 만족할 만한 장소를 고생해서 겨우 찾아냈고 지금 집도 비어있는 상태라고 했다. 집안 곳곳과 집 주변을 모두 사진에 담았다며 통화가 끝나는 대로 보내주겠다고 했다. 주변 풍경도 아름답고 한 겨울에 흰눈이 쌓이면 신천지가 따로 없다면서 목소리에 과장을 떨었다. 그러면서 그림을 그리려면 그 곳보다 더 나은 곳은 찾을 수 없을거라며 가능한 빨리 계약을 할 것을 재촉했다.

그런 그에게 사진부터 보고 싶다고 했다.

 

전화를 끊자마자 그가 보낸 사진들이 도착했다는 신호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그가 말한대로 인가와는 꽤 떨어진 산 밑에 자리를 잡은 첫 집이었다.

집의 크기도 적당해 보였다. 작은 거실을 사이에 두고 큰방 하나 그리고 창고로 쓸 만한 작은 방이 있었고 그 뒤편으로 주방이 있었다. 사람이 살지 않게 된 지 그래도 꽤 된 듯, 집안은 조금 낡아 보였다. 하지만 잠시동안만 사용할 것이었다. 몇개월 정도만 임대를 하면 충분할 일이었다. 직접 가서 본 것이 아니라서 아랫동네와의 거리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필요하다면 시야를 완전히 가리기 위해서 나무판자로 울타리를 세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에게 전화를 걸어 주말에 내려가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그의 기쁨에 찬 만족스러운 웃음 소리가 휴대폰을 통해 들려왔다.

 

주차해 둔 차를 향해서 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였다.

선생님!” 누군가의 목소리에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돌아보는 나의 눈에 헬스장의 그녀가 보였다.

여긴 어떻게.....”

...”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그녀가 몇 걸음 나에게 다가왔다.

그냥... 지나가다가 혹시나 해서 불러본거예요.”

“.......”

제가 저 아래쪽에 있는 마트에 자주 장 보러 오거든요.”

....”

그녀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저 아래쪽이든 저 위쪽이든 이 주변엔 그녀가 장을 볼 큰 마트가 없다. 24시간 편의점에서 장을 볼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이제 가시나봐요?”

... 그럼...” 더 이상 그녀와 대화를 섞기를 원치 않는 마음에 차의 문을 열었다.

같이 저녁 드시고 가세요.”

그녀의 말에 차에 오르기 전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닙니다.”

집에 가셔도 혼자 드셔야 하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말에 놀라 입을 떡 벌리고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굳은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전 그냥 선생님이 너무 좋아서...”

제발....” 여전히 냉정하고 차가운 표정을 유지하면서 말을 이었다.

저 그냥 내버려 두시고 본인 인생 사세요.”

도와드리고 싶어서요.” 나의 불편해 하는 표정이나 말투는 전혀 그녀에게 아무 거리낌이 없는 듯 보였다. 상대방의 감정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듯,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계속해서 꺼냈다.

원하시면 그 카페도 사 드릴수 있어요.”

?” 그녀의 말이 믿기지 않아 내가 잘못들은 듯 싶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수가 없었다.

이천에 있는 카페 구입하시려고 하신 거 아니었나요?”

이봐요!” 그녀의 말에 기가 막혀서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어쩌다가,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타인들에게 오해를 살 만한 행동이나 말을 했던가? 내 눈앞에 있는 이 여자 이외에도 이 세상 어떤 여자에게라도 내가 눈꼽만한 여지를 줄 만한 짓을 하기라도 했었나?

더 말 안 할테니까. 거기까지만 해요.”

손을 뻗어 삿대질을 하듯 손가락으로 그녀를 가리켰다.

경찰서에 가서 서로 얼굴 붉히면서 잘잘못 따질 짓 하지 말고 내 눈 앞에 다시는 나타나지 말아요.”

얼굴이 벌개져서 그녀에게 그렇게 내뱉고 몸을 돌려 나는 차에 올랐다.

 

골목을 빠져나와 큰 길에 합류했다. 그리고 이제 어두워진 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차 온몸을 휘감던 흥분이 사라졌다. 그러자 그녀가 한 말이 다시 떠올랐다. ‘이천에 있는 카페라니.. 나의 뒤를 따라왔다는 것이 아닌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스토커라는 말은 나와 상관없는 말이었다. 스토커는 잘 생기거나 매력이 있거나, 여튼 사람들의 관심을 끌만한 무엇인가가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로만 알았다.

 

차를 아파트의 주차장에 세웠다. 그리고 그대로 운전석에 앉아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지나갈 일이 아닌 듯 했다. 휴대폰을 꺼내 스피커에 연결하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느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한수다. 지금 통화 괜찮냐?”

, 그래.” 여전히 느긋한 목소리로 녀석이 대꾸했다.

삼 년 전에 아들놈 때문에 너한테 도움 많이 받고도 정신이 없어서 그때 제대로 인사도 못했다.”

별 소릴 다한다. 친구 사이에.” 녀석이 별일 아니라는 듯 피식 하고 웃었다.

승우가 그렇게 세상을 떠났을 때 법적인 자문을 구하느라 강남에서 잘나간다는 변호사인 녀석에게 매달렸었다. 그 당시에 다른 일을 맡아서 바쁘다면서도 녀석은 불평 한마디 없이 내 옆을 지켜주었었다. 그것도 고등학교 동창회때나 가끔 얼굴 내밀고 아는 척 했던 것이 전부였던 나에게 녀석은 그렇게 살갑게 최선을 다 해주었다.

하나 물어볼게 있는데...”

, 뭔데?”

스토커 접근금지 신청하는 거 복잡하고 오래걸리냐?”

?” 느긋했던 녀석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지면서 생기를 되찾았다.

누가 너 따라다니면서 괴롭혀?”

순간 대답을 하지 않는 나에게 녀석이 다시한번 물었다.

아니면 너가 누구 스토킹하냐?”

 

 

예전에 꽤 오랫동안 거래를 해온 거래업체 사장이 업종을 바꾸어 한남동에 가게를 오픈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다지 내키지는 않았지만 인간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이 그렇게 녹록지 않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는 터였다.

하지만 나에게 유지해야만 하는 인간관계가 아직 남아있는 것일까? 나의 삶의 종말이 거의 다가와 코 앞에 있는데 말이다. 나의 종말은 환희에 찬 무지갯빛 무아지경일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삼 년이 다 되어가도록 나의 몸과 마음을 다져온 노력의 결실을 보는 순간이 되는 것이다.

 

그의 가게에 들러 작은 화환 하나를 전달하고 돌아서서 나왔다.

그리고 차에 올라 다시 이태원로의 큰 길로 나와서 좌회전을 하고 겨우 몇 미터 직진을 하고 있을 때 붉은 신호등이 들어왔다.

길 건너편에 있는 무슨 주류 백화점에 연말이 가까워지면서 샴페인이라도 사려는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것이 보였다.

아무 생각없이 그렇게 멀뚱하게 바라보고 있다가 다시 시선을 앞으로 두었을 때였다.

나의 차 앞의 횡단보도 한 가운데에 서서 젊은 녀석 하나가 정면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승우야!”

녀석의 얼굴을 순간 알아보고 깜짝 놀라 외쳤다.

녀석이 나에게서 고개를 돌려 한남빌딩쪽을 향해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다른 생각 할 겨를도 없이 차에서 뛰어 내려 녀석을 따라 횡단보도 위를 달렸다.

! 정신 나갔어?” 누군가 뒤에서 악을 쓰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 이어 빵빵거리는 경적소리와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로 인해 겪게 될 그들의 불편함을 가슴 한편에 느끼고 있었지만 그것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나의 모든 신경은 나의 앞에서 부지런히 걷고 있는 승우에게 가 있었다.

뛰어가서 녀석의 팔을 붙잡고 싶지만 그러면 녀석이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릴까 두려웠다.

그렇게 녀석의 뒤에 바짝 붙어서 부지런히 걸음을 옮겨 골목을 돌았다.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이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누구인지 확인도 하지 않고 나는 옆의 단추를 눌러 휴대폰을 꺼버렸다.

 

녀석은 뒤를 따르는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지치지도 않는 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부지런히 이 골목에서 저 골목으로 경사진 언덕을 올랐다.

그렇게 한참을 걷던 녀석이 마침내 어떤 상점 앞에서 발을 멈췄다. 그리고 마치 내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이 잠시 쇼윈도우 안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녀석이 상점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녀석의 등 뒤로 닫히는 문을 손을 뻗어 잡고 녀석의 뒤를 바짝 따라 붙었다.

 

중고 소품과 빈티지 제품을 파는 그 가게안에서 녀석은 성큼성큼 발을 옮겼다.

한쪽 구석에 있는 소품과 악세사리가 진열되어 있는 쇼케이스 앞에서 녀석이 발을 멈추고 무엇인가를 내려다 보았다. 나도 발을 옮겨 녀석의 옆에 서서 녀석이 내려다 보고 있는 것에 시선을 옮겼다.

이거, 아빠에게 잘 어울리겠다.”

녀석이 진열대의 유리장 안에 있는 것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녀석의 손가락을 따라 그 작은 물건에 시선을 주었다. 검은색 빌로드 천으로 감싸져 있는 사각형의 상자를 눈여겨 보다가 한순간 고개를 돌렸다.

옆에 서 있던 승우가 보이지 않았다.

깜짝 놀라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녀석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부지런히 상점의 밖으로 뛰어 나와 골목의 양쪽 편을 돌아보았다. 녀석과 비슷한 사람은 눈에 띄지 않았다. 한숨이 터져 나왔다. 답답한 마음에 양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고 벽에 등을 대고 쪼그리고 앉았다. 좌절감과 녀석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 차 올라 움직이지 못하고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저기, 이것 좀.....”

직원을 불러 손가락으로 아들 녀석이 가리켰던 것을 꺼내달라 부탁했다.

그가 손톱만큼 작은 키를 가지고 와서 유리문을 열고 그것을 꺼냈다. 그리고 내가 잘 볼수있도록 유리장 위에 올려놓았다.

그냥 포장해 주세요.” 그것의 내용물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나는 그것을 집어들고 그에게 내밀었다.

 

손님, 이것 정말 잘 고르신거예요.” 그가 화려한 디자인의 포장지로 포장을 하면서 직업정신에서 나오는 밝은 목소리로 묻지도 않는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이 상품, 전 주인이 삼 년 가깝게 포장한 비닐도 뜯지도 않고 깨끗하게 보관만 하셨대요. 그러다가 파시겠다고 오늘 아침 가게로 가져오셔서 좀 전에 진열장에 넣어 놓은 거예요.” 부지런히 손을 놀리면서 그가 그렇게 부산하게 말을 이었다.

고급스럽고 또 실용적이기도 해서 젊은 사람들한테 인기가 많아요. 없어서 못 파는 상품 이거든요. 정말 잘 구매하시는거예요.” 고급스러워 보이는 작은 백에 포장된 물건을 담아 건네면서 그렇게 그는 호들갑을 떨었다.

 

상점에서 나와서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을 꺼내서 전원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켜지기가 무섭게 전화가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서현경찰서 교통과 이종훈 경윕니다.” 뻣뻣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차를 도로 한가운데에 세워놓고 사라지시면 도대체 어떻게 합니까?” 답답하다는 말투로 그가 화를 냈다.

차는 견인조치 해놨고요.”

죄송한데 어디에...”

선생님! 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가 다시 악을 썼다.

차가 문제가 아니고 먼저 서현경찰서로 지금 당장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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