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그가 노리는 그 - 04
작성자 정보
- 작성
 - 작성일
 
본문
「그와 그가 노리는 그」
04.
‘좃됐다.’
커튼이 젖혀지자 창으로 햇볕이 부서지듯 쏟아졌다, 전 날의 폭우는 온데간데없이. 이준이 미간을 찡그리며 눈을 뜨려다가 다시 감았다. ‘그렇게 마시는 게 아니었는데.’ 태석이 얼토당토않게 야료부리며 어차피 게이로 태어난 인생, 숙맥처럼 굴지 말고 한 살이라도 더 어릴 때 자지나 실컷 빨아봐야 나이 들어 후회 안한다는 지극히 경험주의적 연설을 늘어놓는 덕에 저도 모르게 홧병 난 사람처럼 계속 홀짝홀짝 들이킨 것이 화근이었다. 시쳇말로 완전히 필름이 끊겼다. 문제는 우상혁이 충격적인 질문을 한 그 이후가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지금 자신이 누워 있는 곳이 어디인지 모르겠고. 눈을 뜨려다 다시 감아버린 까닭이었다. 커튼이 저 스스로 걷혔을 리 없고, 누군가가 이 공간에 같이 있는 것이었다.
“한이준! 일어나지 이제? 소파에서 자면 목 디스크 와.”
구세주 같은 목소리에 이준이 눈을 벌떡 떴다.
“그럼 그렇지. 아무리 술이 떡이 됐어도 내가 귀소본능은 있지. 미혜야 안녕? 그간 잘 지냈니?” 미혜 목소리에 이준이 일어나 주위를 둘러본다. 다행스럽게도 익숙한 가구며 소품이 눈에 들어온다. 그의 집이다.
“지랄한다. 머리는 안 아파? 속은?” 미혜가 소파로 다가와 이준의 머리에 손을 얹어본다.
“괜찮은데.”
“그럼 밥 좀 먹을래? 밥 해놨는데. 국은 끓고 있구. 해가 중천이다.”
“밥을? 생쌀 씹히는 거 아냐?”
“쌍놈새끼. 해다 바칠 때 곱게 먹어, 엉?” 미혜가 툴툴거리며 이준에게 꿀밤을 먹이고 다시 부엌으로 걸어간다.
“고마워. 근데 네가 왜 이 시간에 여기 있냐?”
“아하?!” 미혜가 밥을 퍼다 이준의 물음에 신난 듯 몸을 홱 돌렸다.
“뭐지 그 반응은? 사람 불안하게?”
“술이 떡이 됐다는 소문이 거짓이 아녔구만?” 미혜가 상냥하게 웃어 보인다. 그녀의 파안에 이준이 겁이 나기 시작했다.
“…소, 소문? 누가 낸 소문인데?”
“우상혁.”
“…우, 뭐?! 누구?”
“귀 먹었냐? 우상혁. 이 망할 놈의 한이준아. 내가 남친 소개시켜 준다고 나오라는 건 잘만 쌩까시더니 고새 밖에 나가 남자를 후렸어? 이 음탕한 것.” 그녀가 말을 마치며 이준에 깜빡 윙크한다. 반면 이준은 그 이름을 듣자마자 죽상이 되었다. 미혜가 우상혁을 어떻게 아는 걸까?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준의 팔로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네가 걔를 어떻게 알아?”
“너 진짜 아무 것도 기억 안나?”
“…뭐, 뭐가. 기억 안나. 왜?”
“너 지난밤에 걔한테 키스 했어. 내 남친이 그거 보더니 너 진공청소기 같다더라. 푸하하하.”
‘좃됐다.’ 술이 떡이 돼 키스라니 그것도 어제 처음 본 남자와. 아니다, 남들에게 보이지만 않았으면 술기운에 둘이서 마음이 맞았었나보다 할 텐데. 그것도 아니다 미혜만 그 꼴을 봤으면 추했어도 덜 민망하기라도 하지, 하필 미혜 남자친구도 다 보는 앞에서…. 이준이 아연실색하며 반쯤 일으켰던 몸을 소파에 다시 파묻었다.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환상 아닌 환상을 바라며. ‘진공청소기 씨'발 푸하하….’ 미혜가 멈추지 않고 저 남자친구가 한 말을 곱씹으며 깔깔 웃어대자 이준은 부엌 쪽으로 쿠션들을 집어던지며 그녀에게 괜한 분풀이를 했다. 미혜 남자친구 마주하기는 다 틀렸지 싶었다.
―
“이 기획안으로 가시죠?”
“이거 될까? 난리 칠 단체들도 있을 것 같은데. 미디어도 좋은 먹이 물었다고 생각할 거고.”
“우리가 노려야할 게 그 지점 아니겠습니까?”
“글쎄다. 노이즈마케팅 이제 좀 유치하지 않나? 뭐, 내용은 신선해. 작품들도 괜찮고. 근데 관객들한테 전하려는 메시지가 뭐냔 말이야. 관장님이 오케이 하시려면 이 기획이 주는 메시지가 선명해야 하는 거 알지?” 정 팀장이 볼펜을 딸깍거리며 이어나갔다.
“…잘 알죠.” 관장님 소리에 상혁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시간 남았으니까 팀원들이랑 더 짜봐. 지금 이 정도로는 부족하지 싶어. 우 프로 네 스스로 먼저 납득 되어야하는 거 알지? 작가랑 컨택 더 하고. 오늘 회의는 이 정도로 하자.”
회의가 끝나자 상혁이 건물 뒤편 주차장 근처의 흡연실로 곧장 향했다. 화창한 날씨에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이마에서 땀이 삐질 흐르는 것 같았다. 세상 일이 계획대로 흘러가는 법이 없듯 적성에 맞지 않아 곧 떠나야지 생각 하며 일하다보니 어느새 재미를 느껴 눌러앉아버렸다. 정 팀장의 진두 아래 나머지 팀원들과 맡았던 지난 기획도 긍정적인 성과를 거두었고 관람객들과 현대 예술의 괴리를 한 층 줄였다는 호평도 잡지에 실리었다. 바빴고 다시 바빠질 때이다. 기획전을 앞 둘 때면 눈코 뜰 새 없이 준비에 매진하고, 커피를 물처럼 마셔대었다. 하지만 업무가 끊었던 담배를 다시 시작하게 한 까닭은 아니었다.
태석이 녀석은 진작 취해서 택시 태워 보냈고, 남은 건 이준이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취했는지. 취해서 비틀거리면서도 정신 놓지 않은 척 옆에서 열심히 걸으려는 모습이 퍽 귀여웠다. 적당한 키에 마르지도 둔하지도 않은 체격, 비에 옷 젖어 제 엉덩이 다 드러내놓고, 바보같이. 비적거리고 싶게 탐스러운 건 스스로 알고 있긴 한 건가.
같이 밤을 보내고 싶었는데, 그러면 다음날 일어나 놀라자빠질 것 같은 그의 성정이 보여 곱게 집에 보내주어야겠다 생각했다. 택시는 불러놨으니 조금만 더 걸어가면 된다고 이준에게 말하니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네, 네. 가요.’ 열심히 대답한다. 그 모습이 귀여워 사춘기 소년이 첫사랑 하듯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런 생각으로 택시를 기다리는데 이준이 대뜸 손목을 잡았다. ‘그런데요.’ 반은 풀린 눈을 끔뻑이며 말을 시작하는 녀석에 상혁의 눈이 커졌다. 이윽고 ‘네, 이준씨.’ 답하자,
‘상혁씨도 나랑 자고나면 나 버릴 거예요?’ 이준이 말하며 배시시 웃는다. 웃고 있는데 웃는 것 같지가 않다. 말간 얼굴 위로 투명한 눈동자가 반짝거린다. 게다가, 상혁씨‘도’?
‘무슨 일을 겪었던 거야, 한이준.’ 담배를 후 뱉으며 상혁이 중얼거렸다.
―
“살아서 뭐 해….”
“뭘 그래. 살아있으니 왕성하다 생각하렴.” 미혜가 달래듯 말하며 이준의 손에 숟가락을 쥐어준다.
“처음 보는 남자였단 말이야.”
“끓는 정욕치고 몸은 안 섞었잖니. 그래도 한이준 박력은 있대?” 위로랍시고 하는 말인가 싶어 이준이 무표정으로 미혜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고는 식탁 위로 밥과 반찬을 놓기 시작했다.
“네 남친도 그 꼴 다 보고… 하….”
“남들이 여자랑 연애하든 남자랑 연애하든 남 일에 별 관심 없는 애야 걘. 맞다, 걔 친구 중에도 게이 한 명 있대. 소개 시켜줘?”
“됐다 그래. 또 무슨 꼴을 겪으려고….”
“애기들 중에 말이 일찍 트이는 애가 있고 나중에 트이는 애가 있거든?”
“갑자기 애기야. 하고 싶은 말이 뭔데.”
“그런 거랑 비슷하다고 그냥 생각하고 말어. 넌 자지 맛을 늦게 튼 거라고.”
“…지랄한다. 그나저나 어제 만난 다른 친구한테는 뭐라고 말해.”
“웃겨. 말할 게 뭐 있어. 키스 좀 한 것 가지고. 바람 폈냐? 우상혁이 걔 남친도 아니구.”
“걔 친구잖아.”
“유난스럽다. 친구의 친구랑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 법적으로 도덕적으로나 걸릴 것도 없는 일인데. 세상에 듣도 보도 못한 별별 일 다 일어난다? 그 정도 일은 아무 것도 아냐.” 가끔 이렇게 별 것 아니라고 말해주는 미혜의 위로는 이준에게 사실 꽤나 마음의 위안이 되었다. 삶에 대해 이상하게도 날카로운 통찰력이 있는 미혜였다.
“그럼 우상혁한테는 뭐라고 말 해?”
“뭐라 말 하고 싶은데.”
“글쎄다. 사과라도 해야 하나?”
“제 삼 자의 시선으로 봤을 때, 걔는 뭐랄까.” 미혜가 약간 뜸을 들이자 이준이 국을 뜨려다 다시 수저를 놓았다.
“먹어, 새꺄. 걔는 뭐랄까? 즐기고 있는 것 같던데. 이렇게 이렇게.” 미혜가 이준의 곁으로 다가와 손을 들어 그의 가슴을 쥐고 만지작거리자 이준이 기겁하며 미혜의 손을 탁탁 쳐냈다.
“야 이 씨, 뭐하자는 거야, 인마.”
“새끼야, 내가 내 한 몸 다 바쳐 재연해주잖아. 이러고 있었대니까, 걔가?” 미혜가 아쉬운 척 연기하며 허공에 두 손을 들어 쥐락펴락 해 보인다. 그 꼴이 가당치도 않아 이준이,
“연기 집어치우고. 그래서?” 불퉁하게 묻는다.
“그래서 내가 다가갔지.”
“그러고?”
“말했지. 아이고, 뉘 신지는 모르나 일단 감사합니다. 아다나 다름없는 이 못난 한이준 놈을 드디어 데려가실 분이 나타나셨….”
“야 이 아무 도움도 안 되는 년아.” 미혜의 말이 가관이라 이준이 참지 못하고 욕을 해대는 것에 미혜가 쿡쿡 웃자 이준이 쏘아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말은 바로 해야지. 나 아다 아니거든?”
“신났다. 딱 한 번 해본 거 가지고. 훈장 달아줘?”
“됐고. 그리고 데려가 주시긴 누가 누굴 데려가?”
“내가 그럼 뭐라고 하냐. 공연음란죄로 경찰서 가자고 할까? 아무튼. 내가 그러니까 우상혁이, 진짜. 와.”
“왜?”
“너랑 그러다가 내 말에 놀라지도 않고 날 보더니 눈웃음을 치더라? 엄청 잘 생겼던데?”
“…걔답네. 변태 같아 우상혁.”
“잘 생기고 몸 좋은 변태가 얼마나 좋은 건지 얼마 전에 동정 뗀 너는 아직 모를 때이긴 하지. 암, 그렇고말고.” 미혜가 이준에게 다가와 강아지 귀여워하듯 ‘우쭈쭈.’ 하며 그의 턱 아래를 긁어대자 이준이 미혜의 손을 뜯어버릴 기세로 물려고 했다.
“승질은. 근데 변태 새끼는 걔한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닌 것 같은데. 너도 못지않았거든 그때.” 미혜가 손으로 진공청소기 흡입관 모양을 되는대로 만들어대며 히죽거리기 시작하자 이준이 놀림에 이골이 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아, 됐고. 그래서.”
“그 거사를 치루더니 너님께서는 피곤하셨는지 그대로 걔 어깨에 얼굴 묻고 잠들어 버리셨고. 걔는 넉살 좋게 ‘안녕하세요?’ 헤실헤실 웃으며 인사하더니 이준이가 비밀번호를 절대 안 가르쳐주고 절대 안 열어준다고 했다고 그러더라고.”
“왜?”
“낸들 아냐. 어제의 너한테 물어봐. 뭔 정신이었냐? 네가 나도 아니고.” 자기객관이 확실한 미혜였다.
이준은 아마 자신의 방어기제가 작동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제일 친했던 친구 녀석과 그렇게 집 문을 열고 들어가 발정 난 동물처럼 이성을 잃은 채 몸을 섞었으니. 다시 그러지 않게 하기 위한 마지막 수단이었던 걸까 술 취한 그 와중에. 이준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참에 정신 차리고 살게 술을 완전히 끊을까 그녀에게 묻자 그녀가 네가 술을 끊는 날 보다 남자랑 지지고 볶고 떡치고 살며 네 집안 대 끊는 날이 더 빨리 올 것이라 이준에게 상냥히 대답해준다. 필요치도 않을 때 정곡을 찔러대는 혜안이 있는 미혜였다.
“이후엔 어떻게 됐어?”
“집 어떻게 하면 들어 갈 수 있냐고 우상혁이 너한테 물어보니까 미혜가 오면 열겠다고 그랬대. 그래서 미혜한테 전화해보라니까 그건 또 신나서 냉큼 했다고 하더라? 넌 그럴 정신이 있으면 문이나 열고 들어가 둘이서 고추를 지지든 볶든 했어야지. 어휴, 그래서 내가 씨'발, 야. 친구야. 남친이 어제 모텔 예약까지 했었거든? 근데 네 새끼가….”
“우상혁한테 전화로 비밀번호 말해줬음 됐잖어.”
“진짜 멍청하네 한이준. 네가 얼마 전에 비밀번호 바꿨잖아!”
“ …아, 그렇네.” 이준이 입을 벌리며 멍하게 미혜를 바라보았다.
“비상 도어락 카드를 내가 갖고 있었으니 망정이지.”
“너네 아버지 거잖아.”
“결국엔 내 거 될 거 아냐.”
“쯧쯧, 말이라고. 불효자년.” 이준이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아빠가 그랬어. 종부세 때문에 조만간 나한테 증여 한다고.”
“그런 거였어? 좋겠네.”
“좋기는. 증여세는 장난인 줄 아냐. 그건 그렇고 아빠가 집 내준 이 종간나새끼는 이 오피스텔을 고추밭으로 만들려고 작정을 하고 이 남자 저 남자 다 끌어들이….”
“아버님 건강하시지? 넌 오늘 저녁 뭐해. 저녁에 밥 사줄까?” 이준이 살랑거리자 미혜가 한탄에 잠긴 주인공마냥 고추밭 어쩌구 거리던 독백을 멈추었다.
“됐어. 오늘 다시 모텔 가기로 했어.”
“친구도 아닌 년.” 이준이 심드렁하게 대답하며 국을 한 수저 입에 밀어 넣었다.
“우웩! 너 내가 말했지 국에다가 진간장 넣지 말라고!” 국물을 반도 못 넘기고 뱉어낸 그가 외쳤다. 미혜는 천연덕스럽게 ‘아-’ 소리만 낼 뿐이었다.
―
이준에 술 먹고 실수한 자신의 장렬한 경험담을 왁자지껄하게 떠들어주던 게이 전담 카운슬러 서미혜가 도통 심란해 보이는 그를 대신해 집안 청소까지 다 하고 가주었다. 이준이 문자로 「사랑해.」 미혜에게 보내자 그녀가 「사랑은 우상혁이랑 해. 오늘은 비상 연락 하지마라.」 하고 하트까지 붙여서 답장해주었다. 이준은 답하지 않는 것으로 그녀의 바람을 이루어주었다. 그 때 다른 문자 메시지가 전송 되었다.
「오늘 하루 잘 보냈어요?」
우상혁이었다. 생긴 것과는 반대로 능청맞고 대담하고 또 평온하기 그지없는 변태, 우상혁. 미혜가 저더러 너도 우상혁 못지않았다고 했지만 이준 자신은 술에 절어있었던 상태였다. 우상혁은 알콜 겨우 몇 방울 털어놓고는 수치심 한 토막 없이 너저분한 말을 태평하게 잘도 말했다. 그 점에서 이준은 자신이 우상혁보다는 덜 뻔뻔하다 생각했다. 사실 그런 생각이 더 뻔뻔한 짓이란 건 잘 알면서도.
「네. 상혁씨는요?」
답장을 기다렸으나 더 이상 그로부터 메시지가 오지 않았다. 사과라도 해야 하나 싶었는데, 사실 미혜 말대로 서로 좋다고 한 키스가 죄도 아니고 사과는 무의미했다. 어제 일 기억하냐고 물어 올 것 같아 마음의 준비도 했는데 그도 기억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짐짓 모른 체 하는 것인지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아니면 답장 하는 투가 너무 딱딱해서 그런가. ‘모르겠다, 알아서 해라.’ 혼잣말 하며 이준은 휴대폰을 내버려두고 욕실에 가 욕조에 물을 받기 시작했다. 몸이 썩 개운하지 않아 푹 오랫동안 물에 담겨있고 싶은 기분이었다. 끔찍한 맛이 나던 미혜표 미역국을 탓하기로 했다.
―
배쓰 밤을 하나 꺼내 물에 풀자 탄산음료에 얼음을 하나 떨어트렸을 때와 같은 소리를 내며 물이 파란 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입욕제가 물에 녹아 다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던 이준은 옷을 벗고 천천히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이채욱이야 그렇다 쳐도 다른 친구 태석의 말에 의하면 우상혁은 자신과 당장이라도 잘 것처럼 굴었다 했는데. 그렇게 관심 보여 놓고서는 문자 하나 툭 보낼 밖이었다. 미혜는 거기에 대고, 문자 하는 걸로 봐서 우상혁은 먹버까지는 안 했으니 혹시나 나중에 자지가 심심해 저가 먼저 연락해오면 못 이기는 척 집에 불러들여 쓸 만한 가치가 있는 자지인지 확인해보라는 망측하면서도 썩 현실적인 답을 내놓았다.
기억도 나지 않는 간밤, 일련의 일로 후회가 밀려온다. 후회라고 하니, 그 날 밤 녀석의 뒷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뒤돌아 누우며 그의 한숨이 낱낱이 날아와 비수가 되어 꽂혔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확연하게 느껴졌던 녀석의 감정.
후회.
자신과의 섹스를 채욱은 후회했다고 이준은 시간이 흐를수록 거듭 확신했다. 너무 좋았느니 뭐는 어쨌느니 떠드는 것도 우스웠을 테지만 아무 말 없이 쥐죽은 듯 가만히 있다가 겨우 몸을 일으켜 하는 게 그저 담배 한 개비를 피는 것이었다, 이채욱은. 뒤돌아 말없이 피던 그의 뒷모습과 비수가 되어 폐부를 뚫는 그의 한숨에 그저 뒤돌아 누어버린 자신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자신과의 섹스를 후회한 친구 녀석이 더 이상 연락 없는 것에 화나지만 납득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비참해진 기분에 이준은 욕조 아래로 자신의 머리까지 푹 담갔다. 이대로 세상과 단절된 욕조 물속에서 한평생을 유영하고 싶어졌다.
―
샤워 가운을 입고 나오니 이준의 휴대폰으로 메시지가 수신 되어있었다.
「뭐해.」
채욱이었다. 타이밍이 기가 막혔다. 막상 그로부터 연락이 오니 반갑거나 궁금한 것을 물어 따지고 싶은 마음보다는 외려 짜증이 성난 파도처럼 밀려왔다. 비참함까지 느끼며 소리 없는 통곡을 질렀건만. 그 동안 그 많은 시간들을 놔두고서 이제 와 연락하면서, 그것도 섹스 후에 그가 느꼈던 감정을 인정하고 친구로 지내길 포기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지금 이 때에? 그러면서 겨우 하는 말이 뭐해? 따듯한 시선으로 보아주자면 퍽 채욱스러운 말이었으나 이준은 친절히 보아주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자신과의 섹스를 후회하는 듯한 그의 모습을 다시 떠올랐다. ‘짜증나는 새끼.’ 정신 나간 새끼냐고 당장 전화 걸어 따따부따 붙이고 싶어 이준은 그의 전화번호를 썼다 지웠다 수차례 반복했지만 시간낭비이다 싶어 집어치웠다.
결국 그의 연락을 스팸문자 대하듯 무시하고 이준은 수건으로 가볍게 머리를 털며 미혜에게 전화를 걸었다. 원나잇한 친구가 이제야 연락 왔다고 전해주자 그녀가 너는 그동안 정말 단 한 번도 연락 안 한 거였냐고 다시 타박했다.
“안했었어. 몰라, 답장 안 할 거야.”
“초록은 동색이라더니. 걔나 너나 똑같다. 똑같으니까 자지도 똑같이 생겼나 확인하려고 잔 거였냐?”
“됐거든? 농담 할 기분 아냐.” 수화기 너머로 이죽거리는 미혜에 이준이 풀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우상혁은 어떻게 되는 건데?”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돼? 걔랑 나랑 뭔 사이라고.”
“요것 봐라. 앙큼한 구석이 있는 줄은 알았지만 용감하네?”
“뭐가.”
“우상혁도 그 새끼처럼 너 먹버 할 수 있었는데 왜 안 했겠냐?”
“…?”
“앙큼한 짓은 이곳저곳 잘만 하고 다니더니 핵심을 모르네. 어떡하지 너를? 걔가 그렇게 자지를 껄떡거렸는데도 널 집에 고이 들여보내고 지는 왜 지 집으로 돌아갔겠냐?”
“네가 있으니까 그냥 갔겠지.” 이준의 대답에 미혜가 한숨을 쉬었다.
“잘 들어 친구야. 우상혁은 널 보면서 네 자지 상상도 하지만 다른 상상도 하는 거란다. 데이트 같은 거.”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미혜의 말에 이준이 복잡한 표정이 되었다.
“…됐어. 걔두 한 번 연락와서 답장했는데 그 이후로 아무 말 없거든.”
“나 원. 너네는 왜 죄다 하나같이 다 똑같니? 그럼 이제야 연락 왔다는 원나잇 그 새끼랑은 앞으로 어떻게 할 건데? 정말 연락 안할 거야? 일은 저질러 놓을 대로 저지르면서 해결을 왜 안 해? 답답해 죽겠어 진짜!” 미혜가 원점으로 돌아와 수화기 너머로 악을 질러 대자 이준이 예상 했다는 듯 수화기를 귀에서 멀리 떨어트려놓는다. 저 성질 머리를 남친 앞에서 보여줘 늘 차이는 것이 분명하다고 이준은 생각했다.
“몰라. 지도 느껴보라고 해. 먹버 당한 심정.”
“연락 한 거 보니까 그래도 버린 건 아닌 것 같구만.”
“낸들 알어. 걔나 우상혁이나 거기서 거기일지.”
“자지가 간질거려서 연락했나? 아님 기왕 이렇게 된 거 절친 겸 섹파로 지내든가. 서로가 남친 생기길 기원해주면서 빨고 싸고 빨고 싸고.” 미혜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우상혁 흉내 내듯 저질스러운 말을 주절대자 이준은 말에 반은 자지 얘기이고 반은 욕인 너한테 내가 미쳤다고 전활 걸었다며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고 휴대폰을 침대 위로 집어던졌다.
복잡하고도 오묘한 상황이었다. 두 달은 족히 넘어 겨우 뭐하냐고 연락하는 원나잇한 절친 새끼가 그의 왼편에 서 있고, 오른편으로는 만난 지 오 분 도 안 돼 비에 젖어 비친 팬티 색을 운운하며 술 취해 자신의 가슴을 애무하며 키스를 받아 준 친구의 친구가 있었다. 둘 다 자기한테 뭘 원하는지도 더 이상 감이 오지 않았다.
역으로 생각해보면 ‘별 것’ 아닌 사이로 치부 할 수도 있었다. 하나는 취기에 몸 한 번 섞은 사이였고 하나는 또 한 번의 취기에 몸을 ‘반’만 섞은 사이였다. 미혜나 태석이 말처럼 몸 한 번 섞는다고 닳아 없어지는 것도 아닌데. 이 나이에 보통 그러고 살지 않나, 굳이 마음 주지 않아도 캐주얼하게 만나 섹스하고 밥도 먹고 노래방도 가고 영화도 보고. 싫증나면 더는 안 보고. 하물며 때로는 그런 것도 다 싫고 쾌락 본위로 몸만 섞고 싶기도 하고. 그렇게 자기위안적인 정념에 싹을 틔워 물주며 꽃으로 피워냈다만 유쾌한 기억들로 포장되지 않는 그와 그, 채욱과 상혁 사이에서 이준은 자신이 폐기물이 된 기분이 들었다.
―
며칠이 지나고 상혁으로부터 짤막한 답이 왔다.
「바빴습니다.」
「피곤하시겠어요. 쉬세요.」
이준이 그에 답장하고 휴대폰을 닫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 샷 하나 추가해서.’ 커피를 마시며 이준은 까페 창밖으로 오고 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다들 행복해보였다.
―
---
스펙타클하고 빠른 전개의 글이 아니라 집중하기 힘드시겠지만 그럼에도 읽어주시고, 추천도 눌러주시고 게다가 코멘트도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읽어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적잖은 위안이 되었습니다.
-마테오
관련자료
- 
			이전
 - 
			다음
 
								




